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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마을의 유래 |
(대강면사무소 전경)
(대강우체국 전경) |
월 산 (月 山)
월산과 금탄마을을 합하여 법정리로 월탄리라 한다. 1960년대에 행정리가 월산리와 금탄리로 분리되었다. 1995년 1월1일자로 도농 통합시 발족으로 ‘남원시 대강면 월산리’가 되었다.
1570년경(선조4년)에 허씨 문중의 한 분이 살 곳을 찾아다니다 옥출산(생사 앞)을 넘어오니 한줄기 달빛이 무지개처럼 뻗어 유난히도 밝게 비치는 곳을 보았다고 한다. 이 곳을 찾아가 보니, 산 좋고 물이 좋아 마을을 이룰만한 명당자리였다.
그 후 산에 비친 달빛이 인연이 되었다하여 마을 이름을 월산(月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후 영천이씨와 문화유씨가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월산의 옛 이름은 산당골이라고도 했다. 옛날 어느 선비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관운이 없어 번번이 낙방하니, 뜻을 잃고 이곳 월산에 찾아왔다. 후손들에게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고개 마루터에 신당이라는 서당을 짓고 학문을 펼쳤다하여 신당골로 불렸다고 한다.
금 탄 (金 灘)
월산과 금탄을 합하여 법정리로 월탄리라 한다. 1960년대에 행정리를 나누면서 월산리와 금탄리가 분리되었고, 1995년 1월1일 도농 통합시 발족과 함께 '남원시 대강면 금탄리'라 하고 있다.
1580년경 양천許씨가 먼저 터를 잡았다고 한다. 월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이 곳은 산허리를 휘감고 돌아가는 섬진강변인데, 석양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는 여울이 있는 곳이라 하여 금탄이라 하였다.
월산의 허씨들 중 일부가 이곳으로 와 마을을 이루었는데, 1592년 임진왜란으로 멸족하였고, 그 후 남원梁씨 · 흥덕張씨 등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마을 뒤로는 순창의 책여산으로 가는 계곡인데, 마치 말이 구유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한때 구마동(廐馬洞)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옛날 마을 앞의 섬진강에서 사금(沙金)이 나온다고 하여 금탄(金灘)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라고도 전한다. 과거에는 한자어 그대로 쇠여울이라고도 불렸다.(金/쇠금, 灘/여울 탄)
남원시와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이 곳에는 옛날부터 1980년대 이전까지 섬진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있었다.(금탄나루)
1992년에 대강면과 풍산면의 이니셜 문자를 차용한 '대풍교'의 개설로 육로가 열려 나루터가 없어졌고, 차량과 사람의 통행이 매우 편리해졌다. 대풍교 아래는 강바람이 시원하여 인근지역 주민들이 여름철 휴양지로 도 즐겨찾고 있다.
광 암 (廣 岩)
‘남원부 서면 생조벌방 생암리’로 이어왔으나, 1914년 ‘남원군 대강면 생암리 광암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직동, 광동, 제암, 생사 4개 동네를 합하여 법정리인 ‘생암리’라 하였는데, 1960년대에 직동, 광동, 제암을 합하여 행정리인 ‘광암리’라 하였다.
1995년 1월1일 도농통합시 발족과 함께 ‘남원시 대강면 광암리’가 되었다. 1824년 남원尹씨가 선산을 관리하고자 지금의 직동에 정착한 이래 그 후손들이 계속 거주해왔다고 한다. 1829년(순조) 흥덕張씨가 광동에 은거하였고, 1826년에는 경주金씨가 제암에다 터를 잡았다고 한다.
‘직동’은 윤씨들이 후손들을 위해 사욕을 버리고 정직하고 모범적인 처세를 하며 살자는 뜻으로 ‘정직(正直)’의 ‘곧을 직(直)’자를 넣어 지은 것이라 한다.
‘광동’은 마을 터가 양지바른 산밑이긴 하나 터가 좁은지라 이곳에 살면서 개척정신으로 시야가 넓어야 하겠다는 뜻으로 ‘넓을 광(廣)’자를 넣어 廣洞이라 지었다 한다.
‘제암(濟岩)’은 옛날 마을의 서북쪽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가 마을의 재앙을 제거해 준다는 설에 따라 동네의 한 여인이 바위를 치마로 감싸다가 마을 앞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따라서 바위가 이 마을로 건너왔다는 뜻으로 ‘건널 제(濟)자’를 넣어 지었다고 한다. 주변의 산세가 좋아 묘지가 많아 위토도 많은데 매년 묘사를 자주 차리다보니 오래도록 가난을 면치 못하였다고 한다.
1979년 섬진강 가에 광암양수장이 들어섰으며, 1990년경에 마을 주변 야산을 개발하였고, 1995년에는 경지정리를 하였다. 1996년 마을회관을 지었고, 1998년 마을창고를 지어 활용하고 있다.
1989년 생암보건지소가 문을 열어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관리해오고 있다. 1958년부터 1998년 2월까지 광덕초등학교가 금탄, 광암, 생사, 신기, 가덕, 방산지역의 초등교육에 기여하다가 폐교되었다. 이곳에 노인복지시설인 광덕요양원이 2004년 3월에 문을 열었다.
생 사 (生 沙)
옛날에는 직동 · 광동 · 제암 · 생사 4개 마을이 합하여 생암리라 하였는데, 1960년대에 직동 · 광동 · 제암마을을 합해서 광암리, 생사마을은 생사리라 하였다. 1995년 1월1일 도농 통합시 발족으로 “남원시 대강면 생사리”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흥덕장씨 일부가 피난처로 이 곳을 찾았다고 한다. 그 후 풍수지리설을 따라 길지(吉地)를 찾아 나섰던 양씨(梁氏)들이 이곳에 정착함으로써 마을로 발전하게 되었다.
마을 앞 섬진강의 홍수때에는 드넓은 백사장이 새로 생겨나곤 했기 때문에 ‘날 생(生)’자에 ‘모래 사(沙)’자를 써 ‘생사(生沙)’라 하였다고 한다.
신 기 (新 基)
신기와 가덕을 합하여 법정리로 '신덕리'라 한다. 1960년대에 행정리가 신기리와 가덕리로 나뉘었다.
1380년 남원 황산에서 이성계 장군이 왜구들을 무찌르자 왜구들이 도망하며 많은 사람들을 잡아갔는데, 그 중 함양 여씨 하나가 도중에 탈출하여 이 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경주 정씨, 안동 권씨 등이 이주해 들어와 정착하였다.
원래 섬진강 물이 흐르던 곳으로 큰물이 지고 나면 새로운 자리에서 배를 띄우게 된다고 하여 ‘새로울 신(新)’자와 ‘배 선(船)’자를 쓴 신선리(新船里)로 불렸다고 한다. 후에 새로운 터에 마을을 이루었다하여 ‘새로울 新’자와 ‘터 基’자를 쓴 ‘신기’가 되었다.
가 덕 (加 德)
신기와 가덕이 합하여 법정리로 ‘신덕리’라 한다. 1960년대 행정리가 신기리와 가덕리로 분리되었다. 1995년 1월1일 도농복합시 발족으로 ‘남원시 대강면 가덕리’가 되었다.
1380년경 김해金씨가 처음 정착하였고, 남원梁씨와 흥덕張씨가 이주해 왔다.
원래 '더덕정'이라 하였는데, 이 마을이 잉어꼬리에 해당하는 명당으로서 북쪽은 산이 가로 있고 앞으로는 섬진강 맑은 물이 흘러 덕이 깃들인 곳이라 하여 붙였다고 한다. 덕(德)을 더한다는 뜻으로 ‘더할 가(加)’자를 써서 ‘가덕’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터가 잉어가 풀숲에 숨어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잉어가 넓은 물에 나가야 활발히 살 수 있듯이 마을 주민은 객지로 나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데. 실제로도 이 마을에서 타지로 나간 사람 대부분 성공을 하였다고 한다.
방 산 (芳 山)
1660년경 광산金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고 하며, 1710년경 밀양朴씨와 문화柳씨가 이주하여 왔다고 한다. 당초 ‘방뫼(매)’로 불렀으며 이를 ‘꽃 방(芳)’자와 ‘뫼 산(山)’자를 써서 ‘방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터가 바구니(속칭 소쿠리)처럼 생겼다하여 바구니 터로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이 마을은 비가 오면 마을내의 집집에서 흘려보내는 빗물이 마을 앞 하수구로 모두 모여 흐르는 특징이 있다. 때문에 이 마을은 예로부터 화합 단결이 잘 되었다고 하며, 마을 안의 모든 소식도 금방 알려져 서로 흉허물없이 잘 지낸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몇 년 전 과거 불운했던 인공시절, 당시 부역자에게 고통 받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제사를 모시려고 고향에 왔던 그 후손이 제사를 지내고 난 후, 울적해진 심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흉기를 들고 그 부역자를 찾아갔고, 불행하게도 기나긴 악연의 고리를 끊는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어쨌든 살인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나 그 동안 불우한 시대상황 속에서 고통 받고 살았던 그 부역자나 양민 후손의 흉리가 어떠했을까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산 촌 (山 村)
‘남원부 견소곡방(見所谷坊)’의 ‘풍산리(楓山里)’에서 1914년 ‘남원군 대강면 풍산리’로 바뀌었고. 1960년대 법정리가 3개 행정리인 산촌(山村), 곡촌(谷村), 양촌(陽村)으로 나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 뒤에는 풍악산(楓岳山) 줄기가 내려오다 우뚝 솟아 있는데, 제일 높은 ‘삼망봉’이 423m이다. 다시 그 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뻗어내려 청룡 백호를 이루고 있다.
풍수설에 조선시대 8대 명당의 하나인 “홍곡단풍(鴻谷 · 風)”이 있다 하는데, 바로 산촌마을 뒷산에 있는 조선조 명재상 황희의 조부인 황균비(黃均庇)의 묘를 말한다.
황희의 부친은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잡아준 홍곡단풍(鴻谷 · 風) 명당에 이 묘를 쓴 후 당시의 서울인 개경으로 이사를 하여 황희(黃喜) 정승을 낳았다고 한다.
문덕봉과 책여산이 바라보이는 마을 주변 경치가 좋아 ‘산수몰(마을)’이라 부르다가 ‘산촌’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서기 1530년경(中宗朝)에 장수황씨가 처음 정착하였고, 약 120년후인 1650년경에는 연안김씨(延安金氏)가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조선 정조12년(1788년)에 창건한 풍계서원(楓溪書院)이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데 당초 덕과면 사율리에 있었던 서원을 1788년 이곳으로 옮겨지었다.
곡 촌 (谷 村)
‘남원부 견소곡방(見所谷坊)’의 ‘풍산리(楓山里)’에서 1914년 ‘남원군 대강면 풍산리’로 바뀌었고. 1960년대 법정리가 3개 행정리인 산촌(山村), 곡촌(谷村), 양촌(陽村)으로 나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 뒤로 풍악산(楓岳山) 줄기인 삼망봉(삼바래기)이 받치고 있고, 마을 앞은 망태봉이 가로막고 있다. 좌측 능선을 넘으면 산촌이, 우측 능선을 넘어서면 순창군 동계면 외령리가 있다. 이처럼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골짜기 곡(谷)’자를 쓴 ‘곡촌’이라 하였다. 우리말로는 ‘골몰’이라고 한다.
1621년(光海君 13년) 진주(晋州) 강(姜)씨가 처음 들어와 마을을 이루어 살았었다고 한다. 1657년 밀양박씨 중조(中祖) 박세중(朴世重)의 며느리인 진주하씨가 ‘전남 구례군 산동면 대평리 대기촌’에서 이주해 들어온 뒤 진주강씨는 모두 장수군으로 이주함으로써 밀양박씨가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양 촌 (陽 村)
‘남원부 견소곡방(見所谷坊)’의 ‘풍산리(楓山里)’에서 1914년 ‘남원군 대강면 풍산리’로 바뀌었고. 1960년대 법정리가 3개 행정리인 산촌(山村), 곡촌(谷村), 양촌(陽村)으로 나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풍악산(楓岳山) 줄기의 끝자락에 있으며 뒤로는 망태봉(해발 290m), 남측으로는 비홍치와 문덕봉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로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양촌(陽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1671년(현종 12년)에 파평윤씨가 정착한 후 1730년대에는 장수황씨가 이웃 산촌마을에서 이주하여 왔다. 1770년(영조 46년)경에는 경주정씨가 들어와 정착하였다.
1830년경 광주이씨의 이문봉이라 하는 선비가 살았었는데 문장이 뛰어나고 서예가 능하여 많은 제자를 두었다고 한다. 1850년경에는 이 마을의 황참봉이 글을 잘하여 근방에서 글 잘하는 마을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마을 앞에서 훤히 바라보이는 고리봉(해발706m)이 火山이어서 마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한다고 하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마을에 거렛대(솟대) 3기와 입석 2개소를 세웠는데 거렛대(솟대)는 최근까지 남아있었으나 1990년대 초에 없어졌다.
1960년대에는 40여 세대가 살았었으나 지금은 20호가 넘지 않는 작은 마을로 변해버렸다. 1928년에는 대강면 최초로 누에고치 공판장이 있었고, 1970년대 새마을사업을 할 때에는 남원군 최초의 취락구조 개선마을이 되기도 하였다.
수 촌 (水 村)
남원부 견소곡방(見所谷坊) 수홍리(水鴻里)라 하다가 1914년 남원군 대강면 수홍리로 변경되었다. 1960년대에 법정리가 행정리로 되면서 수홍리가 수촌 · 도곡리가 되었다. ‘수홍리(水鴻里)’는 수촌과 비홍치에서 따온 이름이다. 1995. 1. 1 도농통합시 발족으로 ‘남원시 대강면 수촌리’로 되었다.
1420년경(世宗初)에 경주김씨 10세대가 할미성의 보호를 받으며 정착했다고 한다. 그 후 경주이씨, 함양오씨, 청주한씨가 들어옴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 경주이씨는 충청도와 순창군 적성면 서림에서 이주해 왔는데, 이씨와 오씨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을 넘어 산 끝이 보이는 문덕봉은 불을 일으키는 화산(火山)이어서 마을에 매년 불이 일어나므로 물로 견제하고자 마을 이름을 물수(水)자를 넣어 水村 또는 ‘물것’이라 하였다 한다.
하천이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마을 앞의 개울물은 남에서 북쪽으로 흐른다. 따라서 물이 거슬러 내려간다 하여 ‘물거슬’, ‘물것’이라 불렀다는 설도 전해진다.
마을 앞 도로(국도13호선) 가에는 경주이씨 3세효열비(三世孝烈碑)가 있다. 경주이씨는 시조모 연안김씨, 시모 장수황씨, 손부 함양오씨 3대에 걸쳐 시부모 및 남편에 효성이 지극한 효부 열녀였다. 남편이 병에 들어 몸이 몹시 쇠약해졌으나 워낙 집안이 빈곤하여 고기를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의 허벅지 살을 떼어 남편에게 끓여드렸다. 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 남편을 간호하는 등 그 정성이 지극하였는데 그 얼을 기리기 위하여 효열비를 세웠다고 한다.
1971년부터 1985년에는 마을 앞 도로 가에 풍산 · 수홍 · 옥택 · 평촌 · 입암리 지역의 행정을 담당했던 ‘수홍출장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홍출장소는 소재지를 잇는 지방도730호선 개설에 따라 1985년 7월1일 폐지(남원군조례 제849호)되었다.
1940년경에 수촌 소류지를 막아 이용해오다 1982년에 확장하였고, 1995년 준설작업 및 확장을 하였다. 또 1995년에 경지정리사업을 하였다.
1997년도에는 '범죄없는 마을'로 지정되기도 했다.
도 곡 (道 谷)
남원부 견소곡방(見所谷坊) 수홍리(水鴻里)라 하였다가 1914년 남원군 대강면 수홍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60년대 초에 법정리인 수홍리가 행정리인 ‘수촌’ 과 ‘도곡’으로 되었다. 1995. 1. 1 도농 통합시 발족과 함께 ‘남원시 대강면 도곡리’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1876년경 광산김씨가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이주해 왔다고 한다. 그 후 경주이씨가 들어와 지금의 마을을 이루었다.
도곡은 비홍치(飛鴻峙)로 가는 국도24호선(남원~순창) 바로 밑 마을이다. 옛날부터 비홍치 쪽으로 나 있는 길을 「고도길」이라 불렀는데 마을 이름도 고도곡(古道谷)이 되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도곡’으로 개칭하였으며 지금도 주민들은 ‘고도실’이라는 이름을 많이 부르고 있다. 자연부락으로 멀리 떨어져 나뉘어 있는 ‘비홍치’ 와 함께 한마을을 이루고 있다.
1965년에 풍산 · 수홍리를 학구로 문창초등학교가 개교하여 한때 학생수가 300명을 웃돌기도 했다. 1991년에 학생수의 감소로 문덕초등학교(옥택리)와 통합 폐교되었다.
옥 전 (玉 田)
조선시대까지는 남원부(南原府) 서면(西面) 견소곡방(見所谷坊) 옥전촌(玉田村)으로 ‘웃밭’ ‘옥전’이라 하였다. 1914년에 남원군 대강면 옥택리로 되었다. 1960년대에 法定里인 옥택리가 행정리인 옥전리 · 택촌리로 나뉘었고, 1995. 1. 1 도농통합시 발족으로 ‘남원시 대강면 옥전리’가 되었다.
성주(星州)이씨 문열공 이조년(李兆年)의 9세손인 이홍인(李弘仁)이 1580년경(성종11년) 경북 성주로부터 이주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의 주산이 목성(木性)이고 이씨(李氏)는 화성(火性)이므로 목생화(木生火)의 이치에 따라 이씨가 번성하는 터라 하며, 400여년동안 성주이씨 중심의 마을로 이어왔다고 한다.
인근 농경지의 토질이 비옥하므로 ‘옥전(玉田)’이라 하였다고도 하나, 풍수지리설의 형을 따라 부른 것이 정설이다. 이 마을의 주산을 옥수봉(玉首峰)이라 한 것도 구슬을 꿰어 이어놓은 것 같은 산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 마을의 특징은 주변 산 형국의 짜임새라 할 수 있는데, 동서남북 사방이 금목수화토 오행의 정확한 물형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다만 마을 앞의 개울이 막힘이 없이 곧바로 흘러 마을에 재물 축적이 안되고 흘러내린다 하여 약 400여년전에 옥전리와 평촌리 사이에 수구막이를 설치함으로써 직선으로 흐르던 개울을 곡선으로 흐르도록 변형시켰다고 한다. 지금도 개울 양쪽에 돌무덤이 남아 있다.
택 촌 (宅 村)
1914년 남원군 대강면 옥택리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60년대에 법정리인 옥택리가 행정리인 옥전리 · 택촌리로 나뉘었다. 1995. 1. 1 도농 통합시 발족으로 ‘남원시 대강면 택촌리’가 되었다.
마을 앞산(문덕봉)이 불을 상징하는 화산(火山)이로 생겨나 마을에 불이 나기 쉽다하여 ‘못 澤’자를 쓴 택촌(澤村), ‘댁몰’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방화정과 돌무덤을 쌓아 화재를 방비하였는데, 지금도 물은 없으나 움푹 파인 우물(防火井)과 돌무덤 자취가 남아있다.
현재는 택(澤)자와 음이 같고 쓰기 쉬운 ‘집 宅’자를 써 택촌(宅村)이라 부르고 있다.
고려 개국공신인 평산신씨 신숭겸(申崇謙)의 20대 후손인 신맹일(申孟一)이 1680년(숙종 6년)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에서 처음 이곳에 이주해 왔다. 2년후인 1682년 강화(江華)노씨 노중연이 임실군 성수면에서 이주해 온 뒤 지금까지 신씨와 노씨 두 집안의 후손들이 주축을 이루어 살고 있다.
논 면적이 협소하여 밭농사를 위주로 살다보니 대부분 매우 가난하여 「녹두밭 웃머리」란 별명도 붙었다. 그러나 1970년대 새마을사업을 시작으로 전 주민들이 근검절약하고 소득증대에 힘써 지금은 모두 다 부자인 마을로 탈바꿈하였다.
이 마을 북쪽 에미재 중간의 문덕초등학교는 1959년 옥택 · 평촌 · 입암리를 학구로 개교했으나, 학생수의 감소로 1995년에 대강초등학교에 통합 폐교되었다.
마을 입구에는 3개의 입석이 있었는데 오래 전부터 마을의 안녕과 행복를 기원하여 세웠다고 한다.
평 촌 (坪 村)
조선시대까지는 견소곡방(見所谷坊)이라 하여 속칭 ‘견바실’ 또는 ‘점바실’로 불러오다 1914년 대강면 평촌리가 되었다. 1995. 1. 1 도농통합시 발족과 함께 ‘남원시 대강면 평촌리’로 되었다.
중종(中宗)원년(1506년) 천안全氏 중시조인 나주목사 전인손(全仁孫)이 갑자사화(1504년)로 인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에서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지금의 마을보다 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질마재 들에서 정착했으나 1650년경 지금의 위치로 다시 이주하였다. 그 후 경주최씨, 밀양박씨, 경주정씨, 금성나씨 등이 들어왔다고 한다. 본 마을인「큰몰」과, 500m 떨어진 곳의 덕동(德洞, 새터)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에 ‘견바실’로 부른 것은 견소곡(見所谷)의 새김말로 유래했으며, ‘점바실’은 덕동(새터)에 점(店)이 있다하여 불렸다고 한다. 후에 다시 마을 앞뜰이 넓어 평촌(坪村)이라 부르게 됐다. 새터 뒤에는 옛 도요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마을에 있는 충효문과 효열문이 있다. 충효문은 경주정씨 중시조 정원세가 조부의 사망으로 3년동안 시묘를 하던 중에 영조(英祖)의 국상을 맞자 다시 시묘살이 5년을 더하자, 정조(正祖)가 이를 높이 치하하여 충효공(忠孝公)이란 시호를 내리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입 암 (立 岩)
‘남원부 서면 초랑방 입암리’ 였다가 1914년 남원군 대강면 입암리가 되었다. ‘선바우(立岩)’라고도 하며, 법정리나 행정리 모두 ‘입암리’이다. 1590년경 함양오씨가 남원시 노암동에서 대강면으로 이주하여 강석 · 옥전마을로 전전하며 살 곳을 찾다가 책여산 줄기인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 마을의 시작이었다. 1630년경 전주이씨(李命楠)가 곡성군 고달면 수월촌에서 한양으로 이사를 가던 중 이 마을에 도착하여 눌러 살게되었다. 그 후 경주김씨와 경주최씨 등도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선바위’ ‘입암’이라 불리게 된 것은 마을에서 0.8km 떨어진 88고속도로 아래의 야산에 옛날부터 커다란 자연석 바위(높이 2.4m, 폭 36cm, 넓이 147cm)가 서 있기 때문이라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3바위(3개 바위마을 : 금지 입암 · 대강 입암 · 순창 책암)은 용한 피난처로 알려져 왔다고 한다. 옛날부터 각종 난리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에 숨어 있다가 난이 평정되면 돌아갔다고 한다.
1987년 1월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본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순창군 유등면 책암리 인근 지역의 몇 세대가 순창군에 편입되었다.
1984년 88고속도로가 마을 바로 앞을 동서로 지나면서 성벽처럼 가로막게 되어 주민생활에 큰 불편을 초래하게 되었다.
송 내 (松 內)
자연부락인 송내 · 상대치 · 하대치 3개 마을이 합하여 법정리인 ‘송대리’라 하였다. 1960년대에 행정리로 분리되면서 송내리가 되었다. 1380년경(고려말)에 는 지금의 마을에서 1.5km 떨어진 방터(房基)에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1750년경에 이 곳이 폐허가 되자 장수황씨 8세대가 현 위치에 터를 잡은 후 방씨, 소씨 등이 이주하여 왔다.
당초에는 마을 뒤에 금지면 서매리로 넘어가는 그럭재(기러기재, 雁峙)가 있어 이 곳에서 기러기가 쉬어 간다고 하여 서안리라 하였다. 그 후 마을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이자 ‘솔안’으로 바뀌었고, ‘솔 松’자와 ‘안 內’자를 써 송내(松內)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주변의 산줄기가 북에서 남으로, 또 동에서 서로 내려와 병목형상을 이룬다. 마을의 물(水, 재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다는 수구막 역할의 돌탑 2개소가 있었다. 그러나, 1942년 마을 입구에 송강제를 막으면서 멸실되었다. 마을 아래에 ‘원수평들’이란 지명이 있는데, 옛날부터 이름난 한해 상습지로서 ‘물이 원수’라는 뜻으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대 치 (帶 峙)
자연부락인 송내 · 상대치 · 하대치 3개 마을이 합하여 법정리인 ‘송대리’라 하였다. 1960년대에 하대치와 상대치를 행정리인 대치리로 통합하였다.
1340년경에는 하대치에서 북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었으나, 그 마을에서 매우 좋지 않은 일이 생겨 폐하게 되었고 현재의 하대치 마을로 옮겼다고 한다.
하대치에는 경주鄭씨가, 상대치에는 밀양朴씨가 터를 잡았다. 그 뒤로 장수黃씨, 전주李씨 등이 살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마을 이름을 당초 '띠재'로 불렀는데, 마을을 둘러싼 사방에 산과 고개가 띠를 둘렀다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후 '두재'로도 불렸으며, 띠 帶자와 고개 峙자를 써서 帶峙里라 하게 되었다.
강 석 (江 石)
자연부락인 ‘강석’과 ‘새터’를 합하여 행정리 및 법정리로도 ‘강석리’라 한다. 1590년경 임진왜란때 난을 피하기 위해 고창군 흥덕면에서 흥덕張씨가 이주하여 왔고, 1594년경에는 양천許씨와 경주金씨, 광산金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은 초목이 무성하고 방처럼 온화한 지형으로 조선시대에는 초랑방에 속하였다. 1900년경 어느 용한 스님이 마을이 번성하려면 강석골로 불러야한다고 하여 강석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14년 3개방이 대강면으로 통합될 때에 강석리로 바뀌었다.
옛날에는 그럭재를 넘어 남원으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6.25전쟁 당시(수복 직후인 1950년 11월)에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으로 주민들이 많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사 촌 (沙 村)
사촌리와 석촌리를 합하여 법정리인 사석리라 하였다. 1981년 7월1일 사촌리를 사촌1구 · 2구로 분리하여 3개의 행정리가 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 마을이 들어선 시기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마을 주위에서 석기시대의 유물과 돌도끼 등이 출토되었고, 남방식 지석묘가 산재해 있으며, 빗살무늬 토기 도요지와 고 고분 등이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 주변의 산세가 수려하고, 섬진강 물이 흐르며, 광활한 평야지가 있어, 선사시대 농경사회의 시작과 함께 취락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1330년경 나주林씨와 양천許씨, 진주蘇씨 등이 들어왔고, 그 후 형주奇씨, 순흥安씨 등이 들어왔다고 한다. 남원부의 서쪽에 있는 호수마을이라 하여 西沙湖라 하였고, ‘사랑리’ ‘사랭이’로도 불렸다. 3개방(초랑방, 견소곡방, 생조벌방)이 대강면으로 통합되면서 사석리 사촌마을로 불렀고 대강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스님이 삿갓을 쓰고(삿갓봉), 목탁을 놓고(목탁봉), 바랑(바랑봉)을 놓은 자세에서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는데, 남원에서 가장 터가 좋은 5大 名里(①일언, ②지당, ③대실, ④사석, ⑤호곡)중 네 번째로 알려져 왔다. 삿갓봉 부근에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상이 있고, 마을 내에는 남방식 지석묘가 있다.
1914년 면사무소와 대강지서가 신축되었고, 대강초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1960년 대강보건지소, 1961년 대강우체국, 1970년 대강농협이 연이어 들어섰고, 새마을운동과 함께 마을회관 건립 및 안길, 농로 등이 개설되었다.
1994년 마을 앞 소류지인 촌전제를 매립하여 마을회관을 새로 지었고, 회관 광장을 포장하였다. 2002년 소재지 정비로 가로 환경을 개선하였고, 2003년 전천후 게이트볼장과 쌈지공원(지석묘, 남원문화원)이 조성되었다.
석 촌 (石 村)
사촌1구, 사촌2구. 석촌 3개 마을을 합하여 사석리라 한다. 1630년경 김해김(金)씨가 정착한 뒤, 서씨, 최씨 등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대강면의 명산인 고리봉(708.9m) 산줄기 아래 물이 좋은 터전으로, 돌과 모래가 많다하여 ‘독사리’(石村)로도 부르고 있다.
고리봉 아래 약수암 계곡의 맑은 물이 마을로 흘러내리는데, 수질이 좋고 피부병에도 효험이 있다하여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물에 목욕 또는 머리를 감으려고 모여들기도 하였다 한다.
마을 가운데의 하천은 1970년대에 일찍 정비되었다. 2003년에는 석촌삼거리를 확장 개선하였고, 낙차보들이 파손되어 2004년에 새로 정비하였다.
면 진입로인 지방도 730호선이 금지면에서 들어와 맨 처음 통과하는 데, 2001년 10월에는 이곳 석촌 마을부터 수홍리까지의 지방도 구간이 국도 13호선으로 승격되었다.
1990년 모정을 건립하였고, 1995년 마을회관을 신축하였으며, 1996년 농기계 보관창고 2동을 세웠다. 2003년에는 마을 중심부에 노인회관을 새로 지었다.
1993년 춘향골농협 대강지점(당시 대강농협)이 새청사를 지어 이전하였다. 바로 옆에 농협주유소가 있다.
방 동 (芳 洞)
방동리는 방골(芳洞)과 닥밭골(楮洞)을 함께 부른 이름이다.
1420년경에 남원晉씨 정착조인 진호노(晉虎老)가 문덕봉 아래 시전동( · 田洞, 송내리)에 은둔하면서 지역의 산세를 살피다가 방골이 좋은 땅(吉地)임을 발견하여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로 삼게 되었다.
저동도 같은 시기에 남양房씨의 정착조인 방덕준(房德駿)이 만고 불변의 피난지이자 후손들의 좋은 세거지로 여겨 처음 정착하였다고 한다. 방덕준은 진씨 가문에 장가를 들었기에 진호노와도 우의가 돈독하였으며 다 같이 학문이 높고 주역과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마을의 서쪽에 꽃을 상징하는 꽃봉(花峯)이 있고, 남쪽에는 매화꽃을 상징하는 매산산등(梅山山登)이 있으며, 마을 주변의 산세가 마치 피어나는 연꽃처럼 보인다 하여 '꽃다운 마을'이라는 뜻으로 '꽃다울 芳'자와 '골 洞'자를 쓴 방동(방골)이라 한 것이다.
방골 · 꽃봉 · 매산등에 꽃이 피고 마을의 큰 샘에서는 꿀물이 넘쳐흐르니, 벌과 나비가 기뻐서 어지러이 춤춘다 하여 분무골(紛舞洞)이라는 지명도 생겨났다. 이렇듯이 마을의 모양이 온통 꽃을 상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옛날부터 지켜 내려온 마을의 '집앞방죽'에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붉은 연꽃을 가득 피우고 있다.
'닥밭골'은 한지(韓紙)를 만드는 재료가 되는 닥나무(楮木)밭이 많았다하여 ‘닥나무 楮'자와 '밭 田'자 '골 洞'자를 써서 한자로 ’저전동(楮田洞, 닥밭골)‘이라 하였다. 그 후 전(田)자를 뺀 ’저동(楮洞)‘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원부 서면 생조벌방 1리 방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1914년 남원군 대강면 방동리로 개칭하였고, 1981년 7월1일부터는 행정리를 편동과 양동으로 분리하였다. 1995년 1월1일 도농복합시 출범으로 ‘남원시 대강면 방동리’가 되었다.
옛날 방동마을 출신 중에는 과거에 급제한 인재들이 많았다. 1444년(세종 26년)에 방덕준(房德駿), 1480년(성종 11년)에는 진부석(晉扶碩, 호 石溪)과 방필경(房必敬)이 소과(생진과)에 급제하였고, 1860년(철종 11년) 진창복(晉昌復)은 대과(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를 지냈다고 한다.
출처 펌글 |
帶江面 全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