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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인간은 원숭이도, 암초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프롤로그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판단의 근거가 되는 객관적인 평가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생애에 대하여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일생을 사로잡는 꿈.
유년시절
그러나 낮이 되면 새로운 위험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나 자신과 불화를 느끼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누가 나의 내부에서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누구의 정신이 이런 체험을 고안해냈을까?
얼마나 빼어난 통찰이 여기에 작용한 것일까?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학창시절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신이 관념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
나는 그 재능이 근본적으로 나 자산의 기분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해 나의 상상력이 발휘되는 대상만을 그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신비로운 세계에 몰두 할 수 있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자연의 본질 속으로 숨어들면서 모든 인간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 자신이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고풍스러운 녹색 마차 한 대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갔다.
저것이다! 저 마차는 분명히 ‘나의’ 시대에서 온 것이다. 그 마차는 마치 내가 직접 타고 다녔던 것과 똑같은 조율이다.
나는 두 시대에 살고 있고 서로 다른 두 개의 인격이라는 것이었다.
누가 나로 하여금 나 자신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어떤 것을 생각하도록 강요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도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하나님의 의지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전에는 복종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이야말로 이런 절망적인 문제를 일으킨 장본이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분명히 하나님도 내가 용기를 내기를 바라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실행한다면, 하나님은 나에게 은총과 계시를 내려주실 것이다.’
저주를 예상했는데 그 대신 은총이 나에게 임하고 그와 동시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이 임했다.
나는 행복감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울었다. 내가 하나님의 가차 없는 준엄함에 쓰러져 복종하자 하나님의 지혜와 선이 나에게 드러났다. 마치 내가 계시를 체험한 것과도 같았다. 내가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것이 나에게 분명해졌다.
내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나는 체험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로.
아버지는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깊은 신앙심을 내세워 그 의지에 대항했다.
아버지는 살아서 직접 임하시는 하나님, 성서와 교회를 넘어서 전능하고 자유로운 하나님ㄴ, 당신의 자유를 인간이 누리도록 촉구하고, 당신의 요청을 무조건 실현하기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견해와 신념들을 버리도록 강요할 수도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인간의 용기를 시험할 때 하나님은 비록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 하나님은 용기에 대한 그런 시험에서 악한 어떤 것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도록 당신의 전능함으로 이미 보살피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한다면 그는 바른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종교적 전통으로는 내가 거부하고 싶은 것도 나에게 요구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은총을 가져다준 것은 복종이었다.
그 체험 이후 나는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하나님에게 맡겨졌다는 것과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무의미한 일에 나 자신을 넘겨주는 셈이 된다.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돌은 불확실한 것도 없고 자기를 알려서 전하려는 욕구도 없다. 돌은 영원하며 수 천년동안 살아 있다.’ 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 이에 반해 나 자신은 단지 지나가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급히 타올랐다가 꺼지는 불꽃처럼 가능한 온갖 종류의 감정에 불살라지고 있을뿐이다’ 나는 내 감정들의 집합이었으며 내 안의 다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할 돌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한다면 모든 것은 최상으로 바뀔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생각했다. ‘ 아니다, 사람은 체험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알아야 한다’
나는 모든 경쟁을 싫어했다.
그 후 나는 학급에서 2등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훨씬 마음을 편하게 했다.
나는 언제나 양심의 가책을 지니고 있었고 실제적인 잘못과 잠재적인 잘못 그 둘을 다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이 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하나는 부모의 아들로서 학교를 다니고 다른 많은 아이들보다 그렇게 썩 영리하거나 주의 깊지도,
또 다른 하나는 다 자란 어른으로 정말 늙고 의심이 많아 사람을 믿지 않고 인간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 대신 그는 자연과는 친밀하게 지냈다. 대지, 태양, 달, 기후, 살아있는 피조물, 그중에서도 특히 밤과 꿈, 그리고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직접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과 가까웠다.
세계 옆에는 또 다른 영역이 있었다.
그 영역은 사원과 같아서 그 속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변화되었다.
나의 전 생애에 걸친 제 1의 인격과 제 2의 인격 간의 대립.
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제2의 인격, 즉 ‘내적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제 2의 인격은 내 생애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내부에서 나에게로 다가오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길을 열어주려고 노력했다. 제 2의 인격은 전형적인 형상인데도 대개 의식이 가진 이해력으로는 사람이 제 2의 인격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비밀을 아는 자라면 하나님의 비밀을 감히 공공연하게 드러낸다거나,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을 진부하고 감상적인 표현으로 더럽히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체험을 통해, 은총은 오직 하나님의 의지를 철저히 실현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매일매일 탐색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제1의 인격이 내게 너무 자주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종교적인 계율들이 심지어 하나님의 의지를 대신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나님의 의지는 깜짝 놀랄 만하며 전혀 예기치 않은 것일 수 있는데, 그 계율들은 하나님의 의지를 이해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목적을 위해 있는 듯했다.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세계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토록 추악하게 자신의 교회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나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한 자는 누구인가?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답을 나 자신의 고유한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단독자이며 하나님만이 이와 같은 무서운 일을 나에게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부터 나는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내 생애에서 그것을 실현해야만 될 것처럼 여겨졌다.
내가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는 것을 내가 행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확신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결정적인 일에서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되었다.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곳’에 있을 때면 언제나 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었다. 나는 수백 년의 세울 속에 있었으며, 그때 답을 준자는 이미 항상 있었고 지금도 항상 있는 존재였다. 그 다른 인물과의 대화는 나의 가장 심오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피 흘리는 전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도의 황홀경이었다.
나는 혼자서 나 자신의 생각들에 빠졌다. 그러는 것이 나는 가장 좋았다. 나는 혼자서 놀았고 혼자 돌아다니며 공상하면서 나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품고 있었다.
‘자연의 마음(인간 본성에서 솟아나는 것으로, 본성 고유의 지혜를 의미하며 사물을 거침없이 말하는 특징이 있다.)
‘진정한 인식’은 본능에서 비롯되거나 타인과의 신비로운 교제에 기인한다. 그것은 비개인적인 관조행위를 통해 보는 ‘배후의 눈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이야기는 내가 지어낸 것인데요!’
정말 놀랍게도 내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의 인생사를 낱낱이 이야기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 순간에, 내가 했던 이야기중 한마디도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전혀 알수 없는 어떤 일을 갑자기 알게 되는 일이 내 생애에서 자주 일어났다. 그 인식은 마치 나 자신의 착상인 것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말할수 없는 것을 나에게는 모두 이야기했음이 틀림없다. 어머니는 너무 일찍 나를 믿을 만한 친구로 만들어 놓고 자신의 여러 가지 고민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알려진 아버지의 친구에게 의논해 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가 외출했다고 말했다.
그가 집에 없었다고 하는 것은 특별히 신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는 나는 어머니가 말하는 모든 것을 둘로 나누기로 결심했다. 나는 어머니를 한정된 범위에서만 신뢰하게 되었고, 그러자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 이제는 어머니에게 쉽게 이야기 할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어머니의 제2의 인격이 튀어나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요점에 맞게’ 정확했으므로 정말이지 나는 무서워 떨었다.
삼위일체에 관한 구절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게 되는 순간을 간절히 기다렸다.
성찬식이 뭔가 이미 계획되고 인습에 맞는 격식에 따라 행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예수가 죽은지 이제 1860년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한마디 말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가리켜 ‘기독교’라고 불렀으나
내가 하나님을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이에 대해 예수가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했다. 예수는 하나님이 좋은 아버지인 것처럼 그의 사랑과 자비를 가르친 후, 겟세마네와 십자가에서 회의에 빠졌다. 그도 역시 그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했다. 그것을 나도 이해할수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종교가 아니었고 거기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는 내가 더 이상 가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나에게는 그곳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있는 곳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를,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데 필요한 저 회의와 신성모독에 빠지도록 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할수 있지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비인간적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인간적이 아니다. 그는 인간적인 것j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위대한 존재다. 하나님은 자비로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예수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나의 종교관은 붕괴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나는 더 이상 일반적인 신앙을 가질수 없게 되었다. 나는 말로 표현할수 없는 어떤 것, 즉 누구하고도 나누어가질수 없는 ‘나의비밀’과 관련을 맺을 뿐이었다.
자연은 창조주의 의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과 관련하여 악마를 고소해봤자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악마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실재였으며 파괴하는 불이요, 형언할수 없는 은총이었다.
성찬식의 실패?
하나님은 그 자리에 없었다. 원, 세상에!
나는 교회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와 다른 모든 사람의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들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교회로부터 굴러떨어졌다. 그것이 나를 슬픔으로 가득차게 했고,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줄곧 마음을 어둡게 했다.
악의기원
비더만의 {기독교의교리}
나는 그로부터
종교란 ‘인간이 하나님과 자립적인 관계를 맺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비더만의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장에서, 하나님은 ‘인간 자아와 유사하게 상상될수 있는 인격’으로서, 그리고 또한 ‘세계를 포괄하면서 세계를 전적으로 초월하는 고유의 자아’로서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우주의 자아였다.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성격 내지는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은 이 문제에 달렸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어떤 시간에, 나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자신과 남들을 속이려 하지 않으며,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의 현실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머니의 제2의 인격이 갑자기 밑도끝도 없이 ‘너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한번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내기 위해 ’ 틀어박혀 앉아 있는 ‘철학자들’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의 증명 이하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악마도 원래는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그의 오만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다고 가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악이 이미 자만심이라는 악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악의 기원은 ‘설명되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악과 그 기원에 관한 항목은 둘 다 시원하게 밝혀주는 것이 없었다.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독서는 재미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편안하게 기분전환이 되도록 해주었다.
왜 다른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왜 학식있는 책들 가운데 여기에 관한 것은 없단 말인가?
나는 이제 낙인이 찍혔고 나를 ‘특이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수도 있었던 모든 길이 막혀버린 것을 느꼈다.
나는 제 1의 인격과 제 2읜 인격 사이의 차이점을 잘 보지 못하고 , 제 2의 인격의 세계를 나 자신의 개인적 세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 자신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거기 있다는 의미심장한 느낌이 늘 있었다.
내 마음 깊은 곳을 암시하는 모든 것은 나에게 고통이 되었다.
내가 지금 현실로 인식해가고 있는 것들은 시골에서 나와 더불어 성장해온 세계상과는 다른 사물의 질서에 속한다는 인상이 더욱 강해졌다.
비밀스러운 의미들로 채워진 지정된 신의 세계였다.
사람들도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질서 있는 우주 속에, 신의 세계 안에, 온갖 것이 태어나고 온갖 것이 죽어 있는 영원 속에 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내가 동물들을 좋아했던 것은 그것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혼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처럼 기쁨, 슬픔, 사랑과 미움,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불안과 신뢰를 경험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인간들을 신의 세계로부터 멀어지고 벗어나게 하여 동물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타락으로 이끌 가능성이 그 요소들에 있음을 발견했다.
식물계는 무슨일이 있어도 한 장소에 묶여 있었다.
식물들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도 없고 이탈하지도 않으면서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생각까지지 표현했다.
숲은 사람들이 생명의 심오한 의미와 그 경이로운 작용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죽는 것과 살아 있는 것 그 양쪽에 다 신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미 말한바와 같이 나 자신의 감정과 예감을 눈에 보일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었다.
즉, 제1의 인격이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동안 제 2의 인격에서 일어났고 또한 수세기에 걸친‘노인’의 영역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자기들이 받아들이지도 않고 진정으로 알고 있지도 않은 것을 논리의 곡예로써 억지로 꾸미려 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사실은 체험이 문제인 것이다!
코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는 있지만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나의 탐구가 가져다준 큰 소득은 쇼펜하우어였다.
어쩐지 가장 좋은 것만을 기초로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 할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철학자가 나왔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견해에 대해 거리낌을 갖지 않았다. 나는 그 견해가 사실에 의해 증명된 판단이라고 여겼다.
지성이란 무엇이던가?
지성은 인간 마음의 기능으로, 마치 한 아이가 태양의 눈이 멀기를 기대하면서 태양을 향해 들고 있는 지극히 작은 거울 한 조각과도 같다.
칸트의 관계
순수이성비판, 칸트의 인식론
그 인식론은 어쩌면 쇼펜하우어의 ‘염세적’인 세계상보다 더욱 큰 깨달음을 나에게 주었다.
내가 사람들이 알 리가 없는 것들에 관해 자주 발언하거나 넌지시 의견을 말하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와같은 충격적인 확인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신의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
‘신’은 나에게는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자연과학 vs 신의 세계
사실에 기초를 둔 진리들을 추구하는 자연과학에 강한 흠미
자연과학에서는 역사적 초기단계를 지닌 구체적인 사실
종교학에서는 철학이 포함되어 있는 영적인 문제가 그러했다.
자연과학에서는 의미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었고 종교학에서는 경험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참아내는 법을 배우야만 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참아내는 법을 배워야만 해
나는 산꼭대기에 서게 되었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세계다. 나의 세계, 고유한 세계요, 그 비밀이다. 이곳에는 선생도, 학교도, 해답 없는 문제도 없다. 사람들이 질문을 하지 않고도 있는 곳이다. 어ᄄᅠᇂ게 사람이 성자와 함께 살수 있단 말인가?
성자는 은둔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은둔처는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성스러운 은둔자로서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 대신 나 자신만의 개인 예배처를 갖게 될 것이다. 나도 모르게 ‘운명적인’ 이상한 감정.
그 당시에는 생각들의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편으로는 쇼펜하우어와 기독교가 서로 맞지 않았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제 1의 인격이 제 2의 인격이 주는 부담과 우울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침울해하고 있는 쪽은 제 2의 인격이 아니라, 제 2의 인격을 상기할 때의 제 1의 인격이었다.
대극의 추돌로부터 내 생애 처음으로 체계적인 환상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무렵.
식물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오직 성장하여 꽃을 피우는데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숨겨진 비밀스러운 의미, 일종의 신의 뜻이었다.
아름다운 시간
나는 궁핍한 시설을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시절에는 하찮은 물건까지도 아끼는 법을 배우게 된다.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제 2철학, 즉 자연과학
제 1철학(인문과학) 과 제 2철학
제 1의 인격과 제 2의 인격이 결정을 앞두고 갈등하고 있을 때 나는 두 개의 꿈을 꾸었다.
첫 번째 꿈은 나는 자연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사물들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 꿈.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제 1의 인격의 눈으로 바라본 나라는 인간은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보통수준의 재능을 갖춘 청년
제 2의 인격은 제 1의 인격을 까다롭게 배은망덕한 도덕적 과제, 종결되어야 할 일종의 숙제로 여겼다.
제 2의 인격은 도저히 정의를 내릴수 없는 특성
투철한 생명력으로, 태어나고 살고 죽고, 하나이면서 온갖 것이요 인간성의 전체상이었다.
<파우스트>는 내가 좋아하는 <요한복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나를 놀라게 하면서도 용기를 북돋아준, 잊을 수 없는 꿈을 꾸었다.
거대한 검은 형체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 자신의 그림자 였다. 나는 또한 그 작은 등불이 나의 의식이라는 것과 그것이 내가 지닌 유일한 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 심오한 계시와도 같았다.
나는 제 1의 인격이 빛을 운반하는 자이며, 제 2의 인격은 그림자처럼 제 1의 인격을 따라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인간은 자기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게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더 크다.
나의 개인적인 용어로 ‘제 2의 인격<Nr.2)
2천년 전부터 내적인간을 의식의 표층으로 끌어올려 그 인격의 특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진지하게 노력해왔다.
‘밖으로 나가지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모든 경험중에서 가장 명백하 ㄴ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아버지가 갖지 않았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 할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적어도 인식론에 관하여, 이러한 종류의 인식은 사람들이 증명할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와 마찬가지로 이런 인식들 역시 증명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도 나에게 명백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시절
아버지는 누군가와 말다툼을 해야만 했으며 가족과 자기자신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왜 그는 그런 싸움을 모든 피조물의 비밀스러운 창조자이며 세계의 고통에 대해 실제로 책임이 있는 단 한분인 하나님과 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나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잠깐 볼수 있도록 허락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신앙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교회와 그 신학적 사고방식
그것들은 아버지가 하나님에게 직접 도달 할수 있는 모든 길을 막아버리고는 의리없이 아버지를 버리고 말았다.
신앙의 가장 큰 죄는 경험을 앞지르는 것.
나는 아버지의 인생이 대학 졸업과 함께 결정적으로 정지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홀연히 깨달았다.
제 2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너를 위해서 지금 돌아가셨구나’ 그말은 나에게 이런 의미로 들렸다. ‘ 두 사람은 서로 이해하지 못했고 아버지는 너에게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꿈속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아버지가 그토록 ‘실재’처럼 보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체험으로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사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도록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나에게 성령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하나님을 적절히 설명해주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성령의 활동은 송고할 뿐만 아니라 야훼의 행위처럼 기묘하고 미심쩍기까지 한 성실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적절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그 정원이란 자연과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음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있을 수 없었다.
심령술의 기원에 관한 보고서
어느 시대나 세계 어느곳이나 이와같은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보고되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손에 넣을 수 있는 심령술 문헌들은 모조리 독파했다.
나는 한편으로 그들이 유령이나 책상 이도 ㅇ같은 일들은 있을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거짓이 라고 확신있게 주장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한 성격을 띤 것 같은 그들의 방어에 대해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불같은 흥미를 불러 일으킨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질없는 것이며, 심지어 불안을 자아내는 원인이 되기까지 했다.
날씨나 지진을 미리 알아차리는 동물들, 어떤 사람의 죽음을 일러주는 꿈, 임종시에 멈춰버린 시계, 결정적인 순간에 부서지는 컵
지금은 내가 그러한 일들에 관해 들은 유일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도시의 세계는 학문적인 지식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는 한정되어 있다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괴테의 파우스트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아주 강렬한 체험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였다.
니체는 인생후반, 그리니까 중년을 넘기고서야 제 2의 인격을 비로소 발견했으나, 거기에 반해 나는 제 2의 인격을 이미 소년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순진한 사람은 동료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그서이 그들에게 얼마나 모욕이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따지고 보면 기묘한 우연들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2의 인격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그래, 뭔가 뜻이 있을거야’
왜 어떻게 해서 식탁이 갈라지고 칼이 파열된 것일까?
나는 인간의 영혼에 관해 어떤 객관적인 것을 경험했다.
정신병은 ‘인격의 병’
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고도 하지 않고 따라올수도 없는 옆길로 들었다는 것을 분명히 다 시한번 깨달았다.
정신의학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병든 정신과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의사의 정신간의 대화이며, 병든 인격과 치료자 인격간의 대결이다. 그런데 치료자 인격이라는 것도 병든 인격과 마찬가지로 원래 주관적인 것이다.
나는 망상관념이나 환각이 정신병의 특이한 증상일 뿐아니라 일종의 인간적인 의미도 지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정상적인 것의 병적인 변형들은 내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정신에 관해 보다 깊은 인식에 이를 수 있는, 그토록 바라던 가능성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수 있다!
문제는 신화의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 불과한 세계, 즉 자연과학의 세계상으로 향한 길을 찾을수도 없고 , 지혜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언어의 지적인 즉흥연주로 만족할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환자들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의 중심주제로 삼은 것은 ‘무엇이 정신병자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우울증’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채 입원한 젊은 부인에 관한 것이다.
한자에게 연상검사를 시행했다.
더 나아가 그녀의 꿈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기어코 그녀의 과거를 드러내게 되었다.
-연상은 어떤 대상에 대한 유사성과 인접성을 근거로 한 사물의 심성을 다른 사물에 투영해 새로운 심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만일 어떤 원칙에 의해 연결이 된다면 하나의 생각이 의식 안에 있는 다른 생각을 쫒아간다는 것이다. 이 연상에 원칙을 크게 3가지 인데 바로 유사성, 접근성, 대조성이다.
또한, 생각들과 행동간의 연상의 개념은 행동주의 사고에 빠른 자극을 주게 되어 있다. 이 연상주의자의 사고의 핵심 생각들이 인지 특히 의식에서 일어난다.
나는 무의식으로부터 이른바 직접 정보를 얻었다. 이러한 정보를 통해 어둡고 비극적인 사연이 드러났다.
치료법은 어떠했는가?
심리학에는 명백한 진리가 거의 없다.
정신의학 사례 중 많은 경우 환자가 말하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대개 그것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
내가 보이게는 개인적인 사연을 조사한 다음 비로소 진정한 치료가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환자의 비밀이며 바로 거기서 좌절하고 만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치료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
의사는 증상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꿰뚫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의식적인 재료의 탐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는 연상검사가 길을 열어줄수도 있다. 또한 꿈의 해석을 통해서나 오랫동안 끈기있게 인간적으로 접축함으로써 그 일이 가능할수도 있다.
20여년 전에 질투심에서 살인을 범했다는 내용.
살인범은 이미 자기 자신에게 유죄선고를 내린 셈이다.
누가 죄를 범하고 잡히면 그는 재판을 받고 형을 받게된다.
누가 도덕적 지각없이 몰래 죄를 짓고 발각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 모든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때로는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그 죄를 ‘알고있는’것처럼 보인다.
임상적 진단은 어떤 방향설정을 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환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점은 환자‘사연’의 문제다. 그것이 인간적인 배경과 인간적인 고통을 드러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의사의 치료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다른 한가지 사례가 이런 점을 나에게 아주 분명히 보여주었다.
음식을 먹지 않을 때는 손과 팔을 규칙적으로 기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정신의학의 주요과제는 병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식하는 것,
그 환자가 죽자 그녀의 오빠가 자기 누이동생이 한 구두수선공을 사랑했는데 그는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다. 그때 누이동생은 ‘돌아버렸다’ 그 구두 수선공과 같은 동작은 ‘연인과의 동일시’를 가리키는 것
조발성치매의 심리적인 기원에 관해 처음으로 어렴풋이 느낄수 있었다. 그후로 나는 모든 주의를 ‘정신병에서 의미있는 관련성들ㅇ르 찾는데 돌리게 되었다.
우리의 성경읽기가 치료효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꿈의분석
모든 환자에게 각각 다른 언어가 필요한 법이다.
의사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다룰 줄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화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수 있다.
의사가 체면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다.
여성들은 그런일에 대단한 재능이 있다. 여성들은 대개 뛰어난 직관과 정확한 비판력을 지니고 있으며, 남자의 비밀스러운 의향을 간파할줄 알고 , 경우데 따라서는 남자의 아니마가 꾸미는 음모까지 꿰뚫어 볼 줄도 안다. 여자들은 남자가 보지 못하는 측면을 본다.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모든 질투의 핵심은 사랑의 결여에 있다.
누군가 방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
내 이마와 뒷머리가 어떤 물체에 맞은 듯한 무지근한 통증 때문에 내가 눈을 떳다는 사실
그 환자가 자살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동시성현상.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수 있다.
사람들은 단지 예배 같은 것을 드리는 경우에는 성령에 관해 아는 듯이 잘 맣하지만, 성령현상은 결코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프로이트가 자신의 성이론
성이론이 그에게는 개인적으로나 철학적인 의미에서나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
교리, 즉 논의할 필요도 없는 신앙고백은 오직 의심을 단번에 눌러버리려고 할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
과학적 판단과는 더 이상 아무런관계가 없으며 개인적인 권력충동과 관계.
우리의 우정에 결정적으로 금이가게 하는 충격
나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니체의 권력원리의 우상화를 보상하는 정신사의 교묘한 책략이라는 것
운명의 손에 넘겨져 꼼짝할수 없게 된 니체는 ‘초인’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성한 힘의 체험은 사람을 고양시키기도하고 동시에 추락시키기도한다.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리비도: 내적성욕, 성적충동,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의 기초개념
성은 내 심리학에서 정신 전체의 본질적인(유일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표현으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성은 지하세계의 영의 표현으로서 아주 중요하다. 그 영은 ‘신의 또 다른얼굴’ 즉 신의 이미지의 어두운 면이다.
프로이드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마도 신경증 환자를 진지하게 다루고 그들의 독특한 개인적인 심리를 파고 들어간데 있을 것이다.
내안의 아니마
아니마: 생기, 영혼
내가 할수 있는 일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환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다.
“이토록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두보자” 그리하여 나 자신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충동에 맡겨버렸다.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는 그 만큼, 다시 말해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그 만큼 내적인 안정이 생겼다.
환상을 기록하는 동안 나는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것은 확실히 과학하고는 아무상관이 없다. 그럼 이것은 무엇인가?” 이때 내 안에 어떤 소리가 있었다. ‘ 이것은 예술이에요“나는 그 소리가 한부인에것 유래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녀는 재능있는 정신병 환자로 나에 대해 심한 전이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내부에서 하나의 살아있는 형상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 내용을 구별하는 일이다. 무의식 내용은 이를테면 격리를 시켜야한다.
무의식이 그 힘을 의식에 행사하게 된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나는 아니마아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 나는 무의식 내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나는 내면의 이미지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죽은자를 향한 일곱가지 설법
나에게 현실이란 과학적인 이해를 의미했다. 무의식이 내게 가져다준 통찰을 통해 나는 구체적인 결론을 내려야 했다.
언어가 삶을 대처하려고 시도한다면 언어뿐 아니라 삶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 무의식의 전제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것이다.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그런 비현실성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 세상이 아닌 이세계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나의 좌우명은 ‘도전에 맞서 싸우라!’였다.
나의 가족과 직업은 다행스럽게도 늘 현실감을 잃지 않게 했으며, 내가 정산인으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증해 주었다.
일요일 오후 5시경 현관문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아무도 없었다. 온 집안이 많은 유령무리로 가득차 있었다.
초심리(심령술)적인 현상이 일어날 만한 감정상태와 관계
나는 영혼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기도 했다.
나의 학문은 나를 혼돈상태에서 건져낼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며 수단이었다.
나는 될수 있는한 이미지와 그 내용을 일일이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정리하고 무엇보다 삶속에서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사람들이 대개 소홀이 하는 일이다.
이미지들이 그대로 떠오르도록 하면서 거기에 대해 무척 놀라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고 만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고심하지 않는다., 거기서 윤리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은 더구나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인식을 윤리적 의미로 바라보지 않는 자는 권력원리에 빠지게 된다.
무의식의 이미지는 인간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준다. 그것에 대한 몰이해와 윤리적 의무의 결핍으로 많은 개인이 전체성을 상실하고 분열적 성실로 변해 고통을 당하게 된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진 학문적인 추렛의 길로 나아갈것인가, 나의 내적 인격 즉, ‘보다 높은 이성’의 길을 좇아 무의식과 직면하는 실험, 그 흥미있는 나의 과제를 서서히 밀고 나갈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알았다.
우리가 내적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나는 정신적 발달의 목표가 ‘자기’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나는 인생 후바기가 시작되면서 무의식과의 대면을 시도했다.
나의 가설이 역사 속에서 어디에 나타나는가?
분석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자연과학에 속한다.
심리학은 역사나 문헌에서 찾은 유례에 많이 힘입어야한다.
개신교나 유대교의 영역에서는 아버지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배적이다. 이에 반해 연금술철학에서는 여성원리가 두드러져 남성의 그것과 동등한 역할을 했다. 연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상징의 하나는 물질의 변환이 완성되는 그릇이었다.
그꿈을 꾼 후에 나는 세계사와 종교사, 철학사에 관한 수많은 책을 살펴보았지만 나의 꿈을 설명해줄수 잇는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한참 지난 후에야 나는 그 꿈이 연금술과 관계있음을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이제 나는 연금술을 처음부터 전부 연구해야 될 운명에 처했구나!
분석심리학이 연금술과 기묘하게 일치.
환상탐구에 몰두하면서 나는 무의식이 변환하기도하고 변환을 야기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연금술을 배우서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의식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각 개인의 경우 그 과정을 꿈이나 환상에서 읽어 낼수 있다.
나는 <아이온>에서 그리스도의 문제를 다시 다루었다. 그리스도 형상을 심리학과 대면하도록 했다. 나는 그리스도를 온갖 외부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난 형상으로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 표현된 종교적 내용이 수세기에 걸쳐 어떻게 발달했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그리스도가 어떻게 점성학으로 예언될수 있었는지, 그리스도가 그가 살던 시대의 정신에 비추어서는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그리고 2천년 기독교 문명의 발전 속에서는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제시하는 것도 내게는 중요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세계의 통치자인 ‘신성한 아우구스투수’에서 대립하여 서 있었다. 이러한 생각이 원래는 유대인의 메시아 문제에 불과하던 것을 세계의 관심사로 만들어버렸다.
인간 예수 이외의 그 누구도 그와 같은 메시지의 소유자가 될수 없었다.
아버지는 현실에서는 그리스도의 동물 상징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 대신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 제시되고 예고된 고통을 죽을 때까지 문자 그대로 체험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결과라고는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의사의 조언을 받아야 할 사적인 괴로움이라고만 여겼을 뿐, 일반적인 기독교인의 고통으로는 보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 갈라디아서2:20
그는 종교와 관련된 문제라면 어떤 것도 생각해보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믿음만으로 만족하려 했으나 신앙은 그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다. 지성의 희생은 흔히 이런 식으로 보답을 받았다.
신들이 동물 형상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신들이 초인간적 영영뿐 아니라 인간 이하의 삶의 영역까지 미친다는 것을 나타낸다. 동물들은 말하자면 신들의 그림자이며 그 성질 자체가 밝은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작은 물고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자신이 물고기임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영혼의 치유가 필요한 무의식적인 본성을 지닌 심령들이다.
또한 물고기실험실은 교회의 영혼구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상처입은 자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듯이 치료자는 자신을 치유한다.
특기할 일은 꿈에서 결정적인 활동이 죽은 자에 의해 죽은 자에게 행해진다는 사실이다. 즉, 의식 너머의 세계, 무의식에서 그런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 당시는 내 과제의 본질적 측면을 알지 못했고 꿈도 만족스럽게 해석해 낼수 없었다. 나는 단지 그 뜻을 직감으로 느낄수 있을 뿐이었고 <욥에의 회답>을 쓸수 있을 때까지는 여전히 엄청난 내적 저항을 이겨내야만 했다.
욥은 말하자면 그리스도도 예표다. 그리스도와 욥은 고통의 관념으로 서로 연결된다.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하나님의 종이며 욥 역시 그러했다. 그리스도의 경우 이 세상의 죄악이 고통의 원인이며 , 기독교인의 고통은 거기에 대한 일반적인 응답이다.
어쩔수 없이 “이 죄악은 누구의 책임인가?”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궁극적으로 그 책임은 이 세상과 죄를 창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숙명적 고뇌를 스스로 짊어져야 했던 하나님에게 있다.
욥은 하나님이 어느정도는 하나님 자신에 반해서 그의 편이 되어 주기를 기대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비극적 모순성이 드러난다. 이것이 <욥에의 회답>의 중심주제인 셈이다.
나는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은 것을 말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특히 연구 초기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식세계에 대한 보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말해야만 했던 것이 말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더 많이 훌륭하게 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아, 내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중세와 고대, 원시시대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우리는 발전의 분류로 휘말려들어가 거친 폭력으로 미래를 향해 밀려가고 있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의 뿌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죽은자들과 소통하는 곳
여기 돌이 있네, 보잘 것 없는 것
값도 아주싸고.......
바보들로부터 무시당할수록
현자들로부터는 더욱 사랑 받는다네
무지한 자들로부터 경멸당하고 배척되는 연금술사의 돌을 묘사하는 글
동시성현상
카르마
내 생에 작업의 대부분이 대극문제에 대한 탐구, 특히 그들의 연금술 연구에 바쳐진 사실을 고려.
부모나 조부모, 그리고 더 먼 조상들이 완성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놓은 일들과 문제들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아주 강하게 느낀다.
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넘겨진 비개인적인 카르마(: 불교용어 업보)가 가족에게 존재한다는 생각.
그 죄를 속죄하거나 그것의 재발을 막아야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여겨졌다.
나는 미래가 장기적인 전망으로 미리 무의식적으로 준비되며, 그리하여 투시력을 가진 사람은 훨씬 이전부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아맞힌다는 사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가장 깊이 움직인 것은 선과 악, 정신과 물질, 빛과 어둠의 대극문제였다.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천사가 역시 야곱을 몰랐기 때문에 그를 죽이고자 했던 것.
사실은 천사가 내 속에 살고 있었다. 천사는 오직 ‘천사의’ 진실만을 이해할 뿐 인간의 진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천사가 나의 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결국 내가 그를 주관하게 된다. 꿈의 두 번째 부분에서 나는 성채의 주인이 되고 천사는 내 발밑에 앉아 나의 생각을 배워 알아야만 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림자: 자아의 뒷면에 해당하는 층으로,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요소들이 모여있음
위험이 있는 곳에 또한 구원이 싹튼다.
그‘구원’은 경고해주는 꿈의 도움으로 무의식작용을 의식화 할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비평의 수단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대상의 외부에 관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를 밖에서 볼 기회를 한번도 갖지 않은 다면 어떻게 우리나라의 특성을 인식할수 있겠는가? 밖에서 본 다는 것은 다른 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는 말이다.
우리 기독교 신앙도 그밖의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행위나 그 행위의 특수한 형식이 하나님에게 영향을 미칠수 있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 예를 들면 예배의식이나 기도, 혹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도덕적 행위를 통하여 그렇게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신의 압도적인 작용에 충분히 응답할수 있으며 반대로 신에게조차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 개인을 형이상학적 요소를 지닌 위엄에 까지 이르도록 고양하는 자부심이 아닐수 없다. 비록 무의식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과우리’라는 이러한 동등한 관계.
조물주의 손에서 나온 것은 모두 좋다 – 루소
연금술에서 자연이 불완전하게 둔 것을 예술이 완전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흑인들은 대부분 뛰어난 성격감정가임이 증명되었다.
상대방의 말씨, 몸짓, 걸음걸이를 기가 막히게 흉내내면서 이런 방식으로 상대방이되어 보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다른 사람의 감정의 특성을 꿰뚫고 있는데 놀랐다.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나는 소위 ‘성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모두 피했다. 내가 그들을 피한 것은 나 자신의 고유한 진리로 만족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도달할수 있는 것 이외의 다른 것들은 받아들여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오직 나 자신으로 살아야하고 나의 내면이 말하는 것이거나 본성이 내게 가져다주는 것으로 살아야한다.
내가 인도에서 주로 몰두한 것은 악의 심리학적 성장에 관한 물음이었다.
기독교인은 선을 추구하면서도 악에 빠진다. 이에 반하여 인도인들은 선과 악의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거나 명상이나 요가로써 이러한 상태에 이르려고 한다.
인도인의 목적은 도덕적인 완전성이 아니라 니르드반드바 상태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며 거기에 걸맞게 또한 명상을 통해서 형상이 없는 공의 상태에 이르려고 한다. 이에 반해 나는 자연과 정신의 이미지에 대한 생생한 관찰을 고수하고 싶다.
나는 인간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지도 않으며 나로부터도 자연으로부터도 그러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내게는 형언할수 없는 경이이기 때문이다. 자연, 영혼, 그리고 인생은 나에게 활짝 피어난 신성처럼 여겨진다.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나에게 존재의 최고의 미는 오직 그것이 존재한다는데 있지, 그것이 원래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하는데 있지 않다.
나에게 해방이란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배의 힘으로 되돌아 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뜻에서 그러하다.
둘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부처는 이를테면 이성적 통찰로써 , 그리스도는 숙명적인 희생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기독교에서는 도 많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더 많이 깨닫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부처가 보다 완전한 인간이다. 부처는 역사적 인격체이므로 사람들에게 좀더 쉽게 이해될수 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간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이므로 파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사실 그리스도 자신도 스스로를 파악할수 없었다. 내부로부터 자신에게 부과된 일인것처럼 자신이 희생당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이다. 그의 희생은 하나의 숙명으로 그에게 닥쳤다. 부처는 통찰에 따라 행동했다. 부처는 자신의 삼을 살다가 나이들어 죽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한 기간이 무척 짧은 것으로 여겨진다.
후기불교에서도 기독교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즉 부처도 이를테면 모방의 대상인 ‘자기’와 같은 형상이 된 것이다. 원래는 각 사람이 니다나(인연)의 사슬에서 벗어나면 각자, 즉 부처가 될수 있다고 부처 자신도 밝혔는데 말이다.
기독교에서도 사정이 비슷하다. 그리스도는 모든 기독교인 안에 완전한 인격체로 살아 있는 모범상이다. 그러나 역사적 발전은 ‘그리스도 모방’으로 이어져, 개인이 전체성에 으리그 위해 자기 고유의 숙명적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간 길을 본받아 따라가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부처 자산의 이념은 약화되었다. ‘그리스도 모방’이 기독교 이념의 발전을 치명적으로 가로막은 것처럼. 그통찰로 인해 브라마(범천)의 신들을 능가하듯이 그리스도도 유대인들에게 ‘당신들은 신이다’요한복음10:34라고 외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인도가 나의 과제가 아니고 단지 나로 하여금 목표에 근접하도록 하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부처는 니르바나(열반)에 있으므로 그에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은 실재
두 사람이 동시에 똑같은 것을 볼수 있는지
아니마(라틴어:영혼)는 무의식의 인격화로 역사와 선사에 깊이 물들어 있다.
무의식 내용의 통합이 내 인격 완성에 본질적으로 기여했다.
사람들이 이미 있던 무의식 내용을 의식에 통합할 때 무슨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말로 표현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단지 경함할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논의할 필요가 없는 주관적인 사건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정한 양식과 방식으로 나 자신을 나타내게 된다. 이것 역시 의심할수 없는 사실이다. 생기기 쉬운 인상과 견해의 볼일치를 제거할수 있는 법정은 우리가 아는한 그 어디에도 없다. 통합으로써 변화가 일어났는지, 어떤 종류의 변화인지는 주관적 확신에 속하는 문제다.
라벤나 침례당에서의 체험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후로 나는 내적인 것이 외ㅏ적인 것처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상들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 내 이전에 있었고 왜 내가 존재하게 되었으며 내 인생이 어디로 계속 흘러갈 것인지 알게 될 것이었다.
사후의 삶에 관하여
나는 깊은 충격을 받고 잠에서 깨어나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그사람이 나를 명상하고 있었구나 그가 하나의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나다. 그가 깨어난다면 내가 더 이상 존재할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심령심리학은 사후에 계속되는 삶에 대해 과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증명을 하고 있다. 나의 가설은 무의식이 이를테면 꿈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는 암시의 도움으로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내우 좁은 한계에 매여 있도록하며, 오직 이미 알고 있는범위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당시 막내였던 아드리안이 보트창고에서 물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무의식이 역시 나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이런 체험들을 하면 우리는 무의식의 가능성과 능력에 대해 일종의 존경심을 갖게 된다.
정신의 일부는 공간과 시간의 법칙에 지배받지 않는다.
의식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공간도 시간도 없는 절대적인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무의식의 형상들도 ‘정보를 잘 받지 못한다’ 그래서 ‘앎’에 이르기 위해서는 의식과 접촉이나 인간을 필요로 한다.
꿈속에서 나는 지난세기의 고귀한 혼령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죽은자를 향한 일곱가지 설법>
죽은자의 혼령들도 그들이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알고 있던 것만 ‘알고’그 외에는 모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앎에 참여하기 위해 인생속으로 밀고들어오려고 애쓴다.
죽은 자들은 전지하나 모든 지식을 임의로 활용할수 없고 단지 육체에 갇힌 살아있는 사람들의 혼으로 흘러들어가는 일만 가능하다.
신화는 피할수도 면할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죽은자의 유언>
시공간의 상대성 때문에 무의식은 지각ㅁ나을 처리하는 의식에 비해 더 나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무의식적 존재가 참다운 것이며 우리의 의식세계는 일종의 환각이거나 일정한 목적을 위해 세워진 하나의 가상적 현실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 속에 있는 동안만 현실로 여겨지는 꿈과 같은 것이다.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지윋르 때문에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 재능이나 ‘나의’ 미모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삼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인간이 가치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자신이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 될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환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서 경험한다. 내가 나르 ㄹ개인적인 결합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한다는 말이다.
우리시대 모든 강조점을 이생의 인간에 두어왔다. 이로써 인간과 그의 세계의 신들림이 초래되었다. 독재들이 출현하고 그들이 온갖 재앙을 가져오게 된 원인은,
영리하기 그지없는 지성인들의 근시안으로 인해 인간에게서 내세적인 것이 박탈된데 있다.
만년의 사상
신화는 델피의 신탁이나 꿈처럼 이중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할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된다.
또한 욥이 아미 파악했듯이, 본능이 우리를 긴급히 도아주고 신이 신에 맞서 우리를 지지해주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기독교의 도그마(독단적신념, 학설, 맹목적신봉)속에서 신성의 변화과정, 즉 ‘다른측명’에서의 역사적 변형이 예견되고 있다.
창조신화에서 처음으로 시사된 하늘에서의 분열
뱀의 모습을 한, 창조주의 적이 출현하여 창조주에게 불순종하도로 꾀는 내용.
두 번째 시사는 천사의 추락, 천사들은 특이한 종류의 무리다. 그들은 바로 그들 자체일 뿐 다른 것이 될수 없다. 다시 말해 영혼이 없는 존재로서 그들 주인의 생각과 직관 외에 다른 것은 나타낼수 없다.
추락한 천사들은 ‘에녹서’에 보고되고 있다.
세 번째 결정적인 단계는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자기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그 행위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는 의식의 오만.
악은 결정적인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와 함꼐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방향설정, 즉 일종의 메타오이아(헬라어 회개)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결코 악에 더 이상 빠져들어서는 안되며 선에도 빠져들면 안된다. 이른바 사람들이 빠져버린 선은 도덕적인 성실을 잃게 된다.
우리는 선악의 대극에 더 이상 이끌려서는 안된다.
악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선을 행할수 있으며 어떤 파렴치한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는지 냉철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전자를 사실로 여기거나 후자를 착각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두 가지 다 가능성으로 진실이다.
진실은 우리가 악의 상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악의 상상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화는 생동하지 않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으면 신화는 죽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잘못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은 신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런 방면의 온갖 시도를 억압한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신체적인 삶은 이 세상에 속하지만 보이지 않는 내적 인간은, 기독교 구원역사의 신화 내용이 그러하듯이, 통합원형인 영원한 아버지에게서 나오고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과학은 정신의 실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만 정신을 수단으로 사용해야만 인식할수 있을 뿐이다.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신에 대한 기독교인의 일반적인 관념은, 전지전능하고 한없이 자비로운 아버지요 세상의 창조주다. 그 신이 인간이 되려고 한다면 당연히 철저한 케노시스(비움)를 필요로 한다.
교리적으로 모색한 나머지 예수를 일반적인 인간조재에서 벗어나 특성으로 치장하게 된다. 예수에게는 무엇보다도 ‘마쿨라페카티(원죄의오점)가 빠지게 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는 적어도 신인이거나 반신이다.
신화는 결국 유일신교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빛이 어둠속에서 생겨나며 창조주가 그의 창조를 의식하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인간은 성찰하는 정신 덕분에 동물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되며 그는 인간본성의 특히 의식의 발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그의 정신을 통하여 증명한다.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도 신화를 만들어 낼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꿈의 일종의 예지 혹은 원견(멀리까지 내다본다)을 의미한다.
욥이 이미 파악했듯이, 본능이 우리를 긴급히 도와주고 신이 신에 맞서 우리를 지지해주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남들과 뒤섞이지 않도록 개인을 보호하는 데는 지키고자 하거나 지켜야 하는 비밀을 소유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자기 자신의 발로 서는 것이 개인의 고유한 과제임을 여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정신과의사(마음의 의사)로서 어떻게 하면 나의 환자들로 하여금 건강한 바탕을 다시금 찾을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나의 최우선 관심사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많은 지식이 요구된다!
다른 분야의 지식을 내 분야에 유용하게끔 만들고자 시도할 뿐이다. 지식의 응용가 결과에 관해 보고하는 일은 나의 의무다.
x광선이 물리학적 발견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의학에서 응용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숨겨진 채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예컨대 내가 역사적이거나 신학적인 통찰을 정신요법분야에 응용한다면, 물론 그것은 다른 목적을 가진 전문분야에 한정된 채 남아 있을 때하고는 다른 조명을 받으며 드러날 것이고 다른 결론으로 이끌어질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한 바울의 조건문이 모든 인식중에서 최초의 인식이며 신성 그자체의 진수인것처럼 여겨진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그리고 ”모근 것을 견딘다“<고린도전서13:7
사랑이라는 말을 따옴표 속에 넣은 것은 그 말이 단지 열망, 선호, 총애, 소원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개체보다 우월한 전체, 하나인 것, 나눌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암시.
사랑은 그의 빛이며 그의 어둠이며 그 끝을 예측 할수 없다.
선택의 자유를 증언.
회고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ㅇ느 ㄱ성르 가져다 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나 자신이 달라졌더람녀 아마도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되었다.
비밀로 가득찬 세계
나는 강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 또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결론도 끌어 낼수 없거나 자신의 결론을 믿을 수도 없다.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 될 때 생기는 법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우리가 비밀을 가지고 알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예감을 지니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인생을 어떤 비개인적인 신성한 힘으로 가득 채운다.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