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란 원래 운명적인 것이고 우연히 만난 것이어야 하고 한 눈에 반해야 하고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의미로 보면 내게 있어 자이언트 코즈웨이는 첫사랑은 분명 아니다. 재미 삼아 이유를 따져 보자. 언젠가 우연히 한 번 본 사진이 계속 그리고 아주 오래 동안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우연’은 분명 맞다. 언제 어디서 처음 보았는지를 전혀 기억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는 ‘한 눈에 반해’ 계속 오래 동안 마음에 남아 있었으니 ‘운명’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남았는가?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만 남았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연이 이루어 졌다. 평생 마음 속에 간직하고 그리워하면서 만나지 말았어야 첫사랑이라고 두고 두고 그리워할 터인데 결국 만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정말 다행스럽게도 오랫동안 마음 속에 두고 그렸는데 막상 만나보니 실망스럽지 않았다. 눈 앞에 펼쳐진 경치를 보고 정말 오래 동안 보고 싶었을 만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일랜드 북쪽 영국령 북아일랜드 북쪽 해변가에 펼쳐진 자이언트 코즈웨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거인의 뚝길Giant Causeway’이라는 4만여 개의 정육각형의 돌기둥은 분명 장관이다. 한 번 보면 결코 잊혀지지 않는 풍경이다. 우리 말로는 주상절리柱狀節理라고 한다. ‘기둥모양柱狀’으로 ‘갈라진 틈節理’을 일러 하는 말이다. 비록 제주도 해변가에도 있고 무등산 정상은 물론 세계 여기저기에도 있으나 북아일랜드의 자이언트 코즈웨이와는 비교가 안 된다. 그래서인지 이런 북해 바닷가 구석까지 연간 2백만명이 찾아온다. 물론 필자도 그 중 하나였지만……
이미지 목록 로프 브리지 주변 경치. | 자이안트 코즈웨이 표지석. |
여기를 첫 번째로 올 때는 더블린에서 262km의 길을 단숨에 3시간 달려서 왔었다. 이보다 훨씬 남쪽 아일랜드 공화국 수도 더블린을 온 김에 정말 큰 용기를 냈었다. 왕복 6시간의 운전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두 번째는 차로 1시간인 96km 거리인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에서 갔다. 그래서인지 훨씬 여유가 있었다.
도착 시간이 이미 해가 지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였던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는 시간상으로도 한결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바닷가 언덕 길을 걸어 내려 가기로 했다. 1파운드만 주면 바로 데려다 주는 버스가 있었지만 30분은 족히 걸리는 길을 천천히 걸어 가기로 했다. 최소한 6천 만년 전에 신이 만든 자연 최고의 걸작품을 만나러 가는데 편하게 버스를 타고 앉아 간다는 것은 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닌가? 선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정말 절묘하게 굽은 절벽 아래 바다에 비치는 석양도 아름다웠지만 길옆에 핀 고운 들꽃도 그에 못지 않았다. 평소의 내 지론처럼 천천히 가는 여행일수록 더 많은 것을 본다는 진리는 분명 맞는 말이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면 그냥 옆으로 스치는 힐끗 본 경치와 눈 앞으로 맹렬하게 달려들던 아스팔트 바닥만 기억에 남을 뿐이다. 그보다는 기차여행이 낫고 기차여행 보다는 버스여행이 더 낫다.
버스보다는 자전거 그리고는 최종적으로 걸어서 가는 여행이 가장 많은 것을 본다. 가까이서 보아야 깊게 볼 수 있고 그래야 참된 것을 느끼게 된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넓은 곳에서 보는 많은 것과 걸어 가면서 적은 범위 내에서 본 많은 것과는 분명 엄청난 차이는 ‘많은 것’이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과 하늘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그리고 머리가 맑아지는 듯 상쾌한 바다 내음을 걸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맛 볼 수 있을 것인가?
이미지 목록 로프 브리지 주변의 들꽃과 낮에 나온 반달과 소들. | 자이안트 코즈웨이. |
이런 호사를 어찌 걸어가지 않고 느낄 수 있었겠는가? 이런 호사는 인근의 다음 행선지였던 ‘로프 브리지Rope Bridge라고 보통 불리는 ‘케릭 어 레데 브리지Carrick-A-Rede bridge를 가기 위해 주차장에서 걸어 30분의 길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언덕을 넘으면 순간 눈 앞에 멀리서 펼쳐진 자이언트 코즈웨이는 한 눈에 봐서 비명이 나오는 그런 장관이 아니. 눈 앞에 두고 천천히 가서 가까이서 봐야지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모습이다. 벌집 모양의 정육각형이 바닷가에 펼쳐지고 차곡차곡 쌓여 있는 모습은 정말 가까이서 봐야지 비로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루 다 셀 수도 없는 기둥들이 땅에 가지런히 꽂혀 있어 모자이크로 포장된 듯한 돌 바닥으로부터 높낮이가 다른 돌들이 차곡차곡 쌓인 곳은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책장 같기도 하다.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이루어졌는지를 궁금해 하다 보면 자연의 신비에 대한 경이를 지나 조물주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것 하나도 다 이유가 있어서 행하고 만든다는 신이 왜 이런 것들을 여기에다 만들어 놓았는지도 궁금하다. 정말 전설처럼 바다 양쪽에 살던 거인들이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 것인가? 아니면 아주 오래 전 바다 건너 편 여인을 먼발치에서 보고 사랑에 빠진 거인이 그녀에게 가까이 가고 또 그녀를 이리로 데려 오기 위한 일념으로 만든 것이라는 로맨틱한 전설이 맞는 것인가?
자이언트 코즈웨이가 왜 이렇게 생겼는지에 대한 설명을 용암이 폭발해서 냉각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과학적인 설명은 구차하고 구질구질 하다. 그렇다면 왜 다른 곳의 용암들은 이렇게 식지 않았는가? 구조물이 가장 강하게 존재하려면 육각형이어야만 해서 자연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말은 또 너무 무책임하다. 그런 논리가 근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런 역학적인 논리는 벌집을 보면 알 수 있다. 벌집은 아주 정확하게 정육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부의 압력을 최대한도로 견디면서 부서지지 않기 위해서는 육각형이 최고라는 뜻이다. 이를 본 따서 만든 건축에 쓰이는 판넬과 자동차 외곽 철판 대신에 쓰이는 판 등의 강한 인공 물질들을 벌집 즉 ‘허니콤honeycomb’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육각형보다는 칠각형이 혹은 팔각형이 더 튼튼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은 과학에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쉽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신비하나 보통 주위에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 쉽게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들 중의 하나가 카메라 삼각대이다. 다리가 4개 혹은 5개가 더 견고하게 힘을 버틸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각대는 한 쪽에서 힘을 주고 밀면 옆으로 쉽게 넘어진다.
그러나 삼각대는 한 쪽에서 밀어도 다른 쪽에서 버티기 때문에 잘 넘어지지 않는다. 옛날부터 가마솥의 다리는 세 개이다. 삼정三鼎이란 말이 가만히 보면 많아 쓰이는데 그 뜻이 가마솥의 다리 세 개를 이른 말이다. 예로부터 다리 세 개가 가장 튼튼하다 하여 잘 쓰이는 단어이다, 이런 저런 말을 늘어 놓아도 결국 거인은 자신이 타고 건너 가야 할 뚝 길을 가장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 기둥을 육각형으로 만들었다고 결론을 짓자!
바닷가에 깔린 코즈웨이만을 보고 갈 수도 있으나 제대로 코즈웨이를 보려면 뒤의 언덕 길을 걸어야 한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뿐만 아니라 제대로 노출된 기둥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작은 뚝길little causeway이고, 그 다음이 중간 뚝길middle causeway 그리고 제일 나중에 나오는 것이 큰 뚝길grand causeway이다.
기둥의 길이와 육각형의 면적으로 가르는 구분이다. 현무암으로 만들어져 화강암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단단하다. 그래서인지 6000만 년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들이쳐대는 파도에 깎여 비록 반질반질하게 닳았을 지 언정 오늘도 코즈웨이는 이렇게 굳건히 버티고 있다.
자이언트 코즈웨이에는 부쉬밀Bushmill이란 동네가 있다. 부쉬밀이란 단어를 듣고 ‘아!’ 라는 반응을 보이면 대단한 위스키 팬이거나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면세점에서 위스키 코너를 많이 기웃거린 사람일 것이다. 부쉬밀이란 동네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쉬밀 위스키 공장이 있는데 무려. 400년 전에 세워진 공장이다.
2008년에 그 400주년을 기념해 만든 ‘부쉬밀 1608’ 상표는 특히 유명하다. 보통 위스키라고 하면 스코틀랜드 위스키인 스카치로 많이들 알고 있어 영국 스코틀랜드가 원조인 줄 알지만 사실은 아일랜드가 위스키의 원조이다. 아이리쉬 위스키는 위스키라는 단어를 whiskey라고 쓰고 스코틀랜드는 whisky라고 쓴다. 세상이 뭐라고 해도 자신들이 원조이고 그래서 원래 단어인 e가 들어 간 whiskey를 쓴다.
미국이 이를 따르고 스코틀랜드, 캐나다, 일본이 e가 안 들어 간 whisky라고 쓴다. 진리라고 거창하게 말 할 일은 아니지만 보통 알려진 사실들은 틀린 것이 참 많다. 예를 들면 유명한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잉그릿트 버그만과 헤어질 때 입었던 트렌치코트는 우리가 보통 알듯이 버버리가 아니고 아쿠아스쿠툼 제품이다. 같은 영국 상표이지만 둘은 운명적인 라이벌이다.
국제적으로는 버버리가 더 알려져서 트렌치 코트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사실 게버딘 트렌치 코트를 제일 먼저 만든 것은 아쿠아스쿠툼이다. 1853년 크리미아 전쟁 당시 워낙 나쁜 날씨에 야전군인들이 고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쿠아스쿠툼이 개발한 모델이다. 얘기가 옆으로 너무 오래 빗나갔다. 자이언트 코즈웨이로 가게 되면 부쉬밀을 지나가게 되니 시간을 내서 한 번 들려 보면 좋다.
케릭 어 레데 로프 브리지Carrick-A-Rede rope bridge의 진짜 매력
또 자이안트 코즈웨이를 들리면 반드시 라고 할 만큼 가 보아야 할 곳이 가까운 곳에 있다. 13km 거리에 있는 앞에서 얘기한 ‘케릭 어 레데 로프 브리지Carrick-A-Rede rope bridge이다. 밧줄로 만들어진 다리야 별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리가 놓여진 섬들의 모습이 정말 그림엽서이다. 크고 작은 섬 4개가 초승달 모양으로 가지런히 바다로 들어 가는 듯이 있는 모습에는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섬들을 밧줄로 다리를 만들어 연결해 건너 다니게 해 놓았다. 여기도 주차장에서 2km의 길을 30분은 걸어야 장관을 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는데 그 길이 만만치 않다. 오르막 내리막은 물론 그렇게 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특히 시간이 넉넉지 않다면 권할 길은 아니다. 길이 험해서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으면 쾌적한 산책이 될 정도이다.
그러나 주위가 너무 훌륭해서 거리보다는 시간이 훨씬 더 걸려서 하는 말이다. 주변 경치의 유혹에 발길이 자꾸 멈추기 때문이다. 가는 길의 왼쪽은 바다이다. 멀리 보이는 건너편 경치도 볼만 하지만 절벽 아래와 바로 앞에 펼쳐 지는 경치가 절경이다. 우아하게 생긴 섬도 섬이지만 영국 바닷가에서 잘 보기 힘든 하얀 모래 바닥이 유난히 맑은 바닷물에 다 비친다.
거기다가 절벽 위에 피어 있는 갈대와 해당화가 다시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갈대와 해당화를 앞에 두고 뒤의 섬을 넣은 구도의 사진은 정말 그림 엽서 같다. 그렇다고 오른쪽 경치가 밀리는 것도 아니다. 산등성이에 핀 노란색의 들꽃들은 발길을 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완전히 잘 짜인 카펫을 보는 듯하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언덕 위 하늘에는 늦은 오후에 너무 일찍 나들이를 나온 하얀 초승달이 하늘에 걸려 있어 더욱 운치를 살려줬다.
살다 보면 가끔은 이런 여유를 가지고 이렇게 아름답고 경이로운 자연을 맛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바빠 제대로 못 누리고 사는지 모르겠다. 기가 막힌 경치를 두고도 사진 찍고 휙 둘려 보고 차를 타고 가버리는 것은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니 하는 말이 ‘남는 것은 사진 뿐’ 이라는 말이다. 눈으로 둘러만 보고 마음에 머리에 가슴에 안 담았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느낌이 가슴에 마음에 머리에 안 와 닿은 탓이다. 이제 하나를 보더라도 이렇게 천천히 생각하면서 즐기는 버릇을 비록 늦었지만 갖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