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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모 땃싸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 붓다싸(3번)
1. 붓다와 담마, 붓다의 제자들을 향한 예경(禮敬)
2. 불자가 지켜야할 다섯 가지 덕목(佛子五戒)
3. 경전 독송 - 무아경(無我經)
4. 회향발원문(경전을 읽은 공덕을 널리 돌리는 글)
5. 법문(法門) : 우란분재일(盂蘭盆齋日), 승려로서 하지 말아야할 것들
한국불교에서는 오늘은 ‘백중(百中)’이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도가(道家)와 농경문화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럼 언제부터 우리 한국불교에서는
5대 명절로 자리 잡았는지 그 유래를 찾아보았는데 정확한 유래는 못찾았구요, 다만,
근거를 삼은 것은 「우란분경」 , 또는 「목련경」인데...,
부처님 제자 가운데 목갈라나(목련)스님은 신통제일이라고 할 정도로 신통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런 스님의 어머니의 삶과 행위(업)가 안 좋았고 돌아가신 것 또한 안 좋게 돌아가셨으니 분명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여긴 목련스님은 붓다의 법을 얻음과 함께 신통력으로 그 어머니가 있는 곳을
살피고 지옥에 있는 어머니를 구하겠다는 내용이다보니, 한국불교는 우란분재일을 온통
목련스님의 효행을 강조하고 어머니와 함께 구제되었다는 지옥중생들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국의 모든 사암(寺庵) 거의가 효(孝)사상만을 강조하고 돌아가신 이들을 위한 천도재
(薦度齋)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란분재일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니 거의 모든 곳에서 목련스님의 효행과
천도재만을 강조하고 있더군요. 사실 불교는 ‘울람바나(ullambana’)를 음역한 것이 ‘우란분’이고
의역은 도현(倒懸), 이는 ‘거꾸로 매달림’인데 거꾸로 매달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재계(齋戒)죠. '목욕재계하다'하는 말 있지요? 곧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일이지요.
그러므로 오늘을 백중이라고 하기보다는 우란분재일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다고 봅니다.
우란분, 이 상태가 얼마나 지옥의 고통이겠어요. 그런데 이 지옥고(地獄苦)는 죽은 이들만 받는다고
생각하다보니까 불자들이 진짜로 해야 할 것을 놓치고 간다는 겁니다.
지옥중생을 마치 우리 사람이 죽으면 업에 따라 가는 어떤 알 수 없는 세상으로 강조하다보니까
거의 모든 사암들이 천도재를 지내는 날로 여기고 있으며 그게 아니면 또 한편에서는
‘승가(僧伽)에 공양 올리는 날이다.’라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왜냐면 목련스님이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오백 대의 수레에 네 가지 공양물을 싣고 가 승가 오백 대중에게 공양을 베푼 공덕으로
어머니는 물론 어머니와 함께 있던 지옥중생이 구제되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요.
= 제 생각이긴 한데요, 어떻게 보면..., 좋은 구실을 삼아서 천도재를 하고 공양을 올리는 것이고,
삐딱하게 말하면 일 년에 몇 번 행사로 잡아가지고 공양물을 올리게끔 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게요..., 어찌되었든 제가 본 미얀마불교는 이와 같은 우란분재일은 없지만 가사공양 올리는 날은
있습니다. 미얀마는 일 년에 두 세달만 빼고는 모든 달마다 불교와 관련 있는 행사가 있는데 그 또한
그 나라만의 문화겠지요? 그 나라의 문화는 그렇다치고 우리나라의 우란분재일은 두 가지 정도로
간추릴 수 있는데, 하나는 죽은 조상을 위한 천도재, 또 하나는 승가에 공양을 올리는 것으로 초점이
맞추어져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란분재일은, 지난해에도 말했듯이 ‘지옥고에서 벗어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지옥고를 받고 있는 대상은 누군가, 그걸 죽은 이들에게서 찾지 말고 나에게서 찾고 내 가족,
내 이웃..., 살아있는 이들에게서 찾고, 그와 같은 이들이 지옥고에서 벗어나게끔 하는 길이 조금 전
읽었던 「무아경」의 이치라는 겁니다.
「무아경」에서 말하는 길은 우리가 오취온(五聚蘊), 오염된 생각과 기억, 앎, 느낌, 그리고 물질은
‘나’가 아니라는 이치를 알아야지만 집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탐진치(오취온)가
한 것은 물론이고 남이 한 것까지 집착을 하려고 합니다.
= 「무아경」의 ‘내 몸도 내가 아니고 앎, 기억과 생각, 앎, 느낌도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나’만 빼면 아무 문제가 될 게 없는데 우리는 이 ‘나’라는 것을 고집해서 문제가
생기는 구나 싶습니다. ‘내 어머니’ ‘내 남편’ ‘내 자식’ ‘내 자식’ ‘내 물건’...., 이러다보니...,
그러니까 잘 구분해야 돼요.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오취온의 나’예요. 그럼 오취온은 무엇인가,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나온 이야기인데, 예전에 TV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는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산골소녀’의 이야기가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나왔는데 누군가 그 프로그램을 보고
말하길, ‘그건 순수한 게 아니다, 진짜 순수하다는 건 세상에서 세상물정을 다 보고 느끼고 알고 난 뒤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순수다.’라고 하였다기에 제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무지에서 오는, 그냥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곳에서만 본 세상, 그 틀 안에서 때묻지 않은 것은
그냥 단순한 오온(五蘊)인 상태와 다름없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과 마음 상태와 같은 겁니다.
갓난아기들은 때가 묻지 않았잖아요.
그 상태에서 ‘나’라는 틀이 생기면서 낄레사(貪嗔癡)가 들어오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 탐진치가 나를
휘두르고 지배를 해버립니다. 그때 탐진치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다스리고
떨쳐낼 수 있을 때가 바로 불자들이 추구하는 순수입니다. 그럼 다시 오온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아닙니다. 오취온이 아닌 상태가 된 겁니다. ‘오불취온’이 되는 것이지요.
이 오불취온이 되기 위해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자면 「무아경」에서
말하는 것은 ‘오취온의 나’는 없어야지만 ‘오불취온의 나’는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하고 바른 기운을 써야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무지한 상태에서 착하고 좋은 것은 문제가 따르고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알고 행하는 것과 모르고 행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고(苦)가 뭔지도 모르고 왜 고가 오는지 조차도 모르는, 그저 순박하다는 건 좋게 말하면 순박함이고
안 좋게 말하면 멍청함입니다. 지혜로운 이는 이것을 잘 가릴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취온의 나로 살 것인가, 오불취온의 나로 살 것인가를 잘 가려야 하구요,
이런 것을 일러주는 것이 바로 승려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승려조차도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
그저 오래세월동안 대대로 대물려 내려온 대로 익혀온 대로 살면서 아무런 의심 없이 생각 없이 따르고
있는 것 또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스승께서 일러주신 말씀 가운데, 〈승려로서 하지 말아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없는 것을 있다고 가르치지 말라.’는 겁니다.
이는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불명확한 뭔가를 가지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 추측해서 하는 말...,
= 이를 테면, 보시를 많이 하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말..., ^ ^
보시..., 두루뭉술하게 말하면 안 되고 정확하게 말해야겠지요.
'좋은 씨앗을 심으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맞지만 좋은 것을 심을 때도 바름이라는 잣대를 재야된다'
라고 해야 하는데 두루뭉술하게 보시를 많이 하면 구족이 승천(九族昇天)한다는 말은 안 해야 겠지요.
둘째, 붓다께서 금지한 일 곧 ‘생산 활동과 경제 활동을 하지 말라.’ 겁니다.
그러니까 농사도 지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 스님이 드시려고 하는 것도 안 돼요?
예, 남방불교에서는 철저하게 탁발에 의지를 하는데요, 사실 탁발문화는 우리나라 실정에는
안 맞기는 합니다.
= 이해가 좀 안 가는 데요, 탁발을 의지해 사는 것보다는 몸소 농사를 져서 사는 게 낫지 않나요?
그러려면 농부로 살아야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건 승려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
승려는 승려로서의 본분이 있고 도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나는 물론 만나는 인연마다
고에서 벗어나는 일을 일러주는 일을 끊임없이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몸을 지탱할 수 있는
밥을 빌어먹어야 하는 겁니다.
= 아, 그러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데 농사를 짓다보면
거기에 시간을 뺏기게 되니까 하지 말라는 거군요?
예, 그렇지요, 농사도 그렇고 경제 활동, 다시 말해 돈 버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너지를 다른 곳에 쏟으면 그만큼 승려로서 해야 할 본분과 도리가 줄어든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법을 전하는 일에만 힘써야 하고, 그러려면 자신부터 고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고,
벗어난 만큼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초전법륜 뒤에 야사와 그의 친구들까지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을 때 전법선언을 합니다.
아는 만큼 전하라고, 법을 굴리라고. 그렇게한 까닭은 한 사람이라도 더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뜻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승려는 생산 활동이나 경제 활동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 그리고 농사를 짓다보면 본의 아니게 살생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겠네요...
그렇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면으로 보면 욕심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한 되를 거두었다면 다음에는 두 되를 거두려는 욕심... 어쨌든 다른 곳에 에너지를 쏟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또한 손바닥만 텃밭이 있지만 이것에 집중하여 매달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라도 더 열리게 하려고 시간을 일부러 쓰는가, 안 쓰는가를 늘 챙기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남들이 보면 정말 풀밭이잖아요. 제게 우선순위는 담마이기에.
사실 힘을 안 쏟으려는 가운데에서 하고 있는 셈이고,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무얼 하는 김에
이것도 하는 식이지 이걸 하기 위해 먼저 기운을 쏟지 않으려고 합니다.
(요즘은 식당을 하는 승려도 있고, 반찬장사를 하는 승려도 있지요.)
= 그러니까 휴식시간 정도에서 움직이지 전문으로 하지 말라는 뜻...?
암튼, 법을 전하는 일 말고는 다른 곳에 힘을 쏟지 말라는 겁니다.
셋째, ‘술을 팔거나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승려들은 팔거나 만드는 일은 없는데..., 아, 약술이라고 해서 만들어 팔기도 하긴 하네요...
어떤 경우인가하면, 신도들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급자족하겠다는 뜻에서 이렇게 사는 승려들이
있습니다. 그네들은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걸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요.
그러니까 법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도들에게 경제력을 의지하지 않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겁니다. 산에서 약초를 채취하여 술을 담그거나 약을 만들어 신도들에게 주기도 하고
돈을 받고 팔기도 하는 겁니다.
= 그걸 꼭 나쁘다고 보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요?
지금 말하고 있는 게 승려로서 해야할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약초나 약술을 파는 일은 아픈 몸을 고치는 의사들이 하는 일이지 아픈 마음 고치는 법을 전하는
승려가 할 일은 아니라고.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이지요.
넷째, ‘잡스러운 신을 부리거나 섬기는 일을 하지 말라.’
부리는 일까지는 모르겠지만 신을 섬기는 일은 하고 있지요.
절에서 산신기도를 한다거나 용왕기도니 신중기도니...,(또한 무속신앙을 가지는 일)
다섯 째, ‘없는 존재를 만들어서 받드는 일을 하지 말라.’
없는 존재를 만들어서 받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 산신, 아미타부처님?
우리나라불교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는 바로, 없는 존재를 만들어 신앙으로 몰아가는 일입니다.
아미타불도 마찬가지지만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입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이 보살들은 힌두교의 신들이라고 했잖아요?
힌두교 신들을 불교로 끌어들여 보살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매달리도록 하였다는 것.
실존하지 않았던 존재들을 가지고 관음신앙, 지장신앙, 문수신앙, 미타신앙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사캬족의 성자 사캬무니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에는 관심도 없고,
아니 아예 골방에 처박아 두고 관세음을 찾는 것이 불교인 줄 알고, 지장보살을 찾는 것이 불교인 줄
안다는 게 오늘날 불교 현실입니다.
승려는 이것이 불교가 아님을 일러주는 일을 해야 하고 그런 신앙을 가지지 않도록 바로잡아
주어야하는데도 열심히 찾으라고 오히려 더 부추기고 있는 겁니다. 실존했던 붓다는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실존하지 않은 관음 지장보살을 열심히 찾게 하고 있는 겁니다.
힌두교 신들을 데려다가 보살로 둔갑시켜서 열심히 섬기고 찾도록 만들고 있는데 이런 일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섯 째, ‘점을 치거나 길흉화복을 말하는 일을 하지 말라.’
이것도 아주 많이들 하고 있지요? 사주학에 명리학이니 역학이니...,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된 겁니다.
이렇듯 점보고 길흉화복을 말하는 건 삶의 가치관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평생을 헤매는 발길이
되도록 하는 일이지요.
일곱 째, ‘가축을 기르거나 사고파는 일을 하지 말라.’
= 절에 가면 개를 기르는 곳이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절에서 뭔 개를 기르는가 싶어서.
언젠가 TV에서는 목탁치는 소도 나오고 또 예불시간에는 함께 예불을 드린다는 개도 있고...,
없는 존재를 만들어서 섬기도록 하는 일입니다.
있는 그대로로 보는 게 아니라 거기에 마치 전생에 승려였다는 둥, 뭐가 환생했다는 둥 하는 식으로
없는 존재를 받들도록 하는 일이지요. 우리나라불교의 경우 절에서 고양이를 키우게 된 유래 가운데
'세조와 고양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조가 상원사를 갔는데 고양이가 나타나 옷자락을 물고 늘어짐을
이상히 여겨 법당을 살펴보니 단(檀)밑에서 세조를 해하려던 자객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조의 목숨을 구한 고양이라며 고양이 앞으로 밭을 하사하기도 했지요. 오대산 들머리의 땅
모두가 묘전(猫田, 고양이의 밭)이었다고 합니다. 세조는 익히 알다시피 자신의 조카를 죽음으로
몰아넣고는 지옥의 삶을 살았지요. 등창으로 괴로움을 겪으며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았는데..., 그런 세조를 구한 고양이의 일 때문에 절집에서 고양이는
키워도 된다라는 본보기가 된 겁니다. 암튼 지금은 도둑으로부터 절지키라고 키우기도 한다하고
버려진 개라서 키우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는데...,
= 버려진 동물을 키우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요?
직접 기르지는 말고 누가 키울 수 있게 연결시켜주는 선 까지만 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파는 게 아니니까. 그게 아니고 직접 키우게 되면 착이 생기고 착(着)이 생기면 꼼짝도 못하는 것이지요.
= 법정스님이 난(蘭)을 키우다가 집착돼 있음을 아시고 다른 이에게 줬다는 데 그런 일과 마찬가지...,
어쨌든 이 사항들은 승려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겁니다.
승려의 본분은 오로지 법을 전하는 데에 있다는 것.
다른 어떤 것도 하지 말고 오직 법을 전하는 일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알고 가실 것은, ‘백중’이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우란분재일’이라고 쓰자는 것과,
‘승려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곱 가지’는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이면서 우리가 더불어 우란분재를 하자는
뜻에서 한 말이기도 합니다.
일곱 가지 가운데서도 힌두신이 보살로 둔갑해서는 진리를 가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일이
곧 불자로서의 의무인 것 같습니다. 어제는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열심히만 하면 참불자, 신심있는 불자라고 보더군요, 그래서 저는 구분을 지어서
보도록 말을 했습니다. 티벳불교의 불자인지, 아니면 일본불교의 불자인지, 남방불고의 불자인지,
한국불교의 불자인지..., 한국불교는 중국을 거쳐 들어오다보니 이미 힌두사상이 묻어 있는 상태에서
도가사상까지 곁들여지다보니 변질될 대로 된 것이구요. 거기다가 우리나라 선교사상까지 들어있지요.
어쨌든 한 마디로 말하라면 중국승려들이 깨달은 불교라는 것입니다.
티벳불교는 인도에서 넘어갈 때 은밀하게 전해야한다는 식이 굳어져 밀교(密敎)가 되었고 거기에다
관음신앙까지 덧입혀졌고 전생(前生)에 환생(還生)까지 말하는 그들만의 불교이고,
일본불교는..., 아까 술을 만들거나 팔지 말라고 했는데 일본에는 승려들이 차린 술집에서 술을 팔기도
하고, 결혼도 하고, 집에서 출퇴근하는..., 세속 사람들의 직업처럼 되어있으니 말할 것도 없고,
남방불교는 붓다고사 스님의 불교고...., 그러니까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을 알고자하고 전하고자 하는 것과는 십만 팔천리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고 보면 됩니다.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 연기(十二 緣起)를 배우고 익히고 행하는...,좀 복잡하지요?
비록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 행하는 이들이 많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이 가르침대로 사는 분들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불자(佛子)로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둘레의 분들께도
바른 가르침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는 만큼요.
= 우리도 아직 모르는데요...
= 입에서 나와야 하는데 머리에서는 알겠어도 말이 안 떨어져서요...
정성스럽게 전하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하면 거기에 맞는 인연과 기회가 생길 겁니다.
중요한 건 목이 마르지 않은데 물마시라고 하면 귀찮듯이 목마름이 없는 이에게는 전하지 않으면 돼요.
전하려는 마음가짐으로 내가 얻은 행복 자유, 평화로움을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는 마음,
곧 나눔보살이 되어야겠다는 마음 에너지가 있으면 거기에 맞는 목마름의 인연이 생긴다는 사실.
그리고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됩니다.
또한 내 말을 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방의 말을 많이 들어주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정성스럽게 들어주다보면 내 마음도 보이고 상대방이 이해가 되고,
또 그의 마음이 보이거든요. 그러다보면 품어주게 됩니다.
그러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마음을 내 보세요.
저 또한 승려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지키도록 노력하면서 본분을 다하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드릴테니 우리 도우(道友)님들도 나누어 주겠다는 마음가짐을 하는 2014년 우란분재일이길
바랍니다. _()_
이어서 '명상(瞑想)'을 하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왜 와있는가!’ ‘지난 삶이 어땠는가!’로 지난 삶을 돌아보시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로 다짐을 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천도하실 영가(靈駕)님 없으시죠? 있으세요? 다 하셨죠? 지난해에.
= 예, 없습니다.
= 제 자신을 천도해야합니다.
명상에 들겠습니다. 그리고 난 뒤 ‘유서 쓰기’를 할 겁니다.
진솔하게 사실로 죽음을 앞두었다 생각하고 남길 말을 쓰시기를요.
편안하게 허리 펴시고, 몸을 이완시켜주시고, 심호흡하시고..., 눈을 감습니다.
‘명 상’
‘유서(遺書) 쓰기’를 한 뒤 ‘마침 예경’으로 2014년 우란분재일을 마칩니다.
2014. 8. 10. 산방 법회 때, 맑았다 흐리더니 저녁 때는 비나리시는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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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초전 법륜경 편집이 잘못돼서 오늘 하지 못하고 무아경을 읽엇습니다
무아경에서 붓다께서 말슴 하시는 다섯무더기는 오취온을 가리킨다 오취온은 무엇인가? 팔정도를 벗어난 짖이다 했습니다
영가전에를 읽으면서 극락이 어디인가 탐진치가 사라진곳이 바로 극락이다
붓다의 눈으로 보면 사바가 극락이고 중생의눈으로 보면 극락이 사바다 하는 내용을 힘주워 읽엇습니다
그 안에서 그걸 듣고 이해한 분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 글은 다음 일요일에 분명히 쓰겠습니다 갑사합니다
그러셨군요. 예, 맞습니다. 이해하는 분들이 있지요.
그리고 대상에 따라 방식을 달리할 필요도 있는 것 같구요...^ ^;;
암튼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_()_
@쉼 터 감사합니다
죽으면 소원 성취 인데요
얼른 죽게 빌어 주세요 ^^
(),,,,,,
...! _()_
저는 인연은 기회가 되면 생기기도 하지만 때로는 적극적으로 만들기도 해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을 빨리 누군가에게 전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목도 마르지 않는 이에게 자꾸 물을 권했으니...
오늘도 공부 잘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 바랍니다 _()_
그냥,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렇더라구요...^ ^
목마르지 않은데 자꾸 권하니까 부담스러워하고 불편해 하는 것 같고 그러다가 멀어지고...,
그래서요.... 위에 함께 하신 도우님들은 2~3년차 되신 분들이고 제가 하는 말귀를 알아 듣는데도
아직 당신들의 목마름만 해결하려고 해서 나누어 주라고 부탁드렸지요. ^ ^
쉼터님 쓰신 글 잘 보았슴니다^ㅇ^ 맞는 것도 있고 맞지 않는 것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