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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무리 - 영사운드
1967년 5인조 록그룹 ‘실버 코인스’ 를 결성, 이후 1970년에 팀이름을 영사운드로 변경했고 멤버 교체도 있었는데 리드기타 안치행, 보컬 유영춘, 키보드 장현종, 장대현과 드럼 박동수가 들어 왔다.
라틴 계열의 조용한 음악을 추구했던 영사운드의 대표곡 ‘달무리’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던 동양 방송의 음악프로 ‘신가요 박람회’ 입상곡이었다. 응모를 통해 당선된 작사가 김주명의 가사에 작곡가 세 명이 경합해서 입상곡을 결정했던 독특한 프로그램이었다.
일년 포시즌에서 사회를 본 박광희 동양방송 PD의 소개로 참여한 안치행이 최초로 작곡한 곡이 바로 ‘달무리’ 이다. 멤버들은 모두 독특한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리더 안치행은 무대뽀 성격 때문에 ‘돌팔이’, 올갠 장성현은 대학생같아 보인다고 ‘학삐리’, 리드 싱어 유영춘은 나이보다 늙어 보여 ‘애늙은이’, 베이스 김희조는 태권도 유단자라‘검은 띠’, 풀룻 왕준기는 성을 따 ‘왕퉁소’라 불렸다.
다운타운에서는 제법 인기 그룹이었지만 폭넓은 대중의 인기를 얻은 것은 킹박과 작업한 75년 5월 영사운드 1집부터였다. 이 음반은 76년과 10년이 지난 84년에도 재발매가 된 빅히트 앨범. 하지만 2집 발표 후인 75년 9월 멤버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안치행과 박동수 김희조는 그대로 남고 유영춘, 장성현, 왕준기는 ‘여섯마당’이란 팀을 결성해 독립했다.
이후 안치행이 500만원을 투자해 1976년 신중현의 ‘더멘’과 ‘검은 나비’를 거친 김기표, 이태현과 함께 '안타 프로덕션' 을 창립하면서 팀이 해체된다 안치행이 창립한 안타프로덕션은 78년부터 소속가수인 인순이의 희자매가 중창부문상을 수상하고 최헌은 MBC,TBC 양 방송의 가수왕을 윤수일은 신인가수상, 안치행도‘사랑만은 안겠어요'로 MBC 최고 인기 작곡상을 수상하는 등 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다.
안치행이 이끌었던 영사운드는 이전의 많은 그룹사운드가 번안곡을 위주로 음악활동을 했다면 영사운드는 <등불>과 <달무리> 같은 자작곡위주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사운드로 사랑을 받았다. 그들의 히트곡 등불은 더블 스트링 주법을 적절히 이용하고 젊은 남자들의 하모니가 어우러진 신선하고 독창적 음악이다.
1972년 구성지고 경쾌한 노래들로 젊은 영혼들을 사로 잡았던 6인조 록 그룹 영사운드가 등장했다. 대표곡인 ‘등불’과 ‘달무리’는 30여년의 세월에도 생명력을 잃지않는 한국 록의 불멸의 히트 넘버로 자리 잡고 있다. 외국곡 연주가 주류를 이뤘던당시, 영사운드는 록 발라드 계열의 창작곡을 위주로 활동을 했던 중요 그룹이다.
리더는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조용필, 윤수일, 최헌, 주현미, 문희옥,박남정 등 한국 대중 가요사에 걸출했던 스타들을 키워낸 음반제작자 겸 작곡가인 안치행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 전남 진도 옆의 작은섬인 가사도에서 소장을 했던부친 안보만 씨와 모친 장말진 씨의 3남 1녀 중 3남으로 1942년 1월 30일 태어났다.6살 때 목포로 나와 가사도의 기억은 없다.
이후 초등학교 3학년때 익산으로 이사를 해 이리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해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공부에 취미를 잃었던그는 30살이 넘는 학생들이 즐비했던 이리 남성야간중학에 1회로 들어 갔다. 정학중이던 이리농고2학년 때 황해악극단이 단원 실습생을 모집을 하자 집에서 운영했던제과점에서 돈을 훔쳐 악극단을 따라 가출을 했다.
여수, 부산을 돌아 다니다 돈만 뺏기고 집으로 돌아 왔다. 어느 날 동네 아이들이딱지 놀이를 하며 기타통에 딱지를 넣는 것을 보고 기타를 빵과 바꿨다. 지나가는 사람이 연주해 준 ‘타양살이’에 마음을 빼앗기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 때부터 기타책을 구해 독학으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또 이리 원광대 관현악단에서 클라리넷을 불던 친구에게 악보 보는 법을 배웠다. 이후 7개월간 기타를 배위에 올려놓고 잘 정도로 연습을 하자 “기타를 잘 친다”고 소문이 났다. 그래서 방 하나를얻어 악기점에서 기타를 빌려다 기타 학원을 차렸다.
책 가방을 들고 다닌 적이 없던 문제아였던 그는 5년만에 학교를 졸업했다. 돼지를몰고 제과점 앞을 지나가는 담임 선생님과 “대학을 안 갈 거니 오전 수업만 하기”로 합의 했던 것. 그는 이 때부터 타고난 사업적 수완을 발휘했다. 전북 이리, 군산을 비롯해 각 읍면에서 노래 자랑 대회를 개최하며 다녔다. 대회에 참가하는 가수들에게 참가비로 5백환을 받고 입상을 하면 기타 한대를 주는 식이었다. 추석때는 읍대항 노래 자랑 대회를 열어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학비를 모아 김제에 천막극장을 차린 뒤 영화 ‘홀쭉이와 뚱뚱이’의 필름을 걸어 봤지만 쫄딱 망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기타를 정식으로 배워 보자는 생각으로 66년에 상경해 찾아갔던 곳은 을지로에 있던 이인성음악학원. 이인성은 60년대의 최고 기타리스트. 처음에는 그를 받아 주지 않으려 했지만 테스트 후 ‘서영춘과 그 일행’이 활약하던 악극단 20세기컨츄리쇼 출연을 주선해 주었다. 악극단 기타리스트가 되어 태평, 노벨극장에서 공연을 했지만 스타 뒤에 가려져 기타만 치는 현실이 싫어 그만 두고 고교생 최헌, 펄씨스터즈 자매가 노래를 배우고 있던 이인성학원의 조교가 되었다.
당시는 비틀즈 열풍 시대. 별명이 조로였던 친구가 록 그룹 결성을 제안해 베이스기타 오덕기와 함께 3인조를 결성했다. 남산 팔각정 근처에 방을 얻어 녹음기로 팝송을따며 2달간 레퍼토리 연습을 했다. 보컬인 조로가 그만두자 드러머와 보컬 유영춘올갠 장현종 3명을 추가해 5인조 록그룹 ‘실버 코인스’를 결성해 미 8군 쇼 업체화양과 9만원에 계약을 했다. 67년의 일이다.
오디션 결과는 최고등급인 더블A. 미8군 인기가수 김계자를 합류시키고 무용수를 영입해 패키지 쇼 팀을 구성해 전국의 미군 기지를 돌았다. 45분짜리 쇼단을 구성했던당시 안치행은 기타 솔로 패키지쇼에서 터키행진곡을 연주해 미군들에게 “웨스 몽고메리 스타일의 재즈 기타리스트”로 불릴만큼 인기를 모았다.
67년 12월 30일 동두천 공연 후 귀경길에 사고가 났다. 술을 마셨던 미군 운전수가눈길에 세 번 충돌을 해 안치행은 이마를 14바늘을 꿰맸고 조수 1명이 죽는 대형 사고였다. 5년 정도 미 8군 무대에서 활동을 하다 1970년 일반 무대인 조선호텔 옥상에생긴 나이트클럽에 출연이 성사되었다. 팀이름도 영사운드로 변경했고 멤버 교체도있었다. 리드기타 안치행, 보컬 유영춘, 키보드 장현종, 올갠 장성현에 탈퇴한 베이스 오덕기 대신 장대현과 드럼 박동수가 들어 왔다.
라틴 계열의 조용한 음악을 추구했던 영사운드의 대표곡 ‘달무리’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던 동양 방송의 음악프로‘신가요 박람회’ 입상곡이었다. 응모를 통해 당선된 작사가 김주명의 가사에 작곡가 세 명이 경합해서 입상곡을 결정했던 독특한 프로그램이었다. 71년 포시즌에서 사회를 본 박광희 동양방송 PD의 소개로 참여한 안치행이 최초로 작곡한 곡은 ‘달무리’, 두 번째 ‘고향의 벗’, 세 번째가 ‘등불’이었다.
72년 명동장의 연예상무 이종범과 인연을 맺고 명동 오비스 낳箚?소공동의 생음악살롱 포시즌 양쪽에서 활동을 했다. 젊은층에게 인기가 높아지자 1972년 오아시스에서 데뷔음반‘히트 퍼레이드’를 발표했다. 이어서 73년에는 '장미리'와 '영사운드'의 슬플릿 음반을 성음사에서 발매했다. 이후 영사운드는 동양방송의 프로그램 ‘오라 오라 오라’의 전속 밴드가 되었다. 73년부터 74년까지 방영되었던 그 프로는 쇼연출의 귀재였던 조용호 PD가 제작·연출을 맡아 젊은층의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프로그램. MC는 포크가수 서유석과 양희은이었다.
70년대 가요의 히트 제조기 불경음반은 또다른 음악실험
[추억의 LP여행] <영사운드> 안치행
1974년 영사운드는 플루트 주자 왕준기의 가세로 6인조로 거듭났다. 멤버들은 모두 독특한 별명을 지니고 있었다. 리더 안치행은 무대뽀 성격 때문에‘돌팔이’, 올갠 장성현은 대학생같아 보인다고‘학삐리’, 리드 싱어 유영춘은 나이보다 늙어 보여 ‘애늙은이’, 베이스 김희조는 태권도 유단자라‘검은 띠’, 풀룻 왕준기는 성을 따‘왕퉁소’라 불렸다. 다운타운에서는 제법 인기 그룹이었지만 폭넓은 대중의 인기를 얻은 것은 킹박과 작업한 75년 5월 영사운드 1집부터였다. 이 음반은 76년과 10년이 지난 84년에도 재발매가 된 빅히트 앨범. 하지만 2집 발표 후인 75년 9월 멤버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안치행과 박동수 김희조는 그대로 남고 유영춘, 장성현, 왕준기는‘여섯마당’이란 팀을 결성해 독립했다. 당시는 대마초파동 후 공윤의 곡심사 강화로 음반 발표가 힘겨웠던 가요계의 침체기였다. 67년 창단 이래 돈독한 우애를 다져 왔던 팀의 양분 소식에 록 그룹계는 체질 개선 바람에 휩싸였다.
이미 ‘정성조와 메신저스’는 교체를 했고 ‘검은 나비’, ‘조갑출과 25시’ 등도 멤버 교체의 진통을 겪었다. 70년부터 조선호텔 캘럭시, 라이온스와 오비스케빈, 포시즌스를 주무대로 삼았던 ‘영사운드’는 활동을 중단했다. 안치행은 음악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꿈꿨다.
팀 해체 후 안치행은 퍼시픽호텔의 무겐나이트클럽에서 활동했다. 어느날 보사부직원인 후배가 대마초사건에 연루되어 퍼시픽호텔에 숨어있던 이태현을 잡으러 왔다. 그때 제작자인 킹박이 찾아 와 이태현에게 월급 6만원중 3만원을 집어 던지듯 주었다.
음악 친구의 자존심 상하는 모습을 보자 오기가 발동한 안치행은 500만원을 투자해 1976년 신중현의‘더멘’과‘검은 나비’를 거친 김기표, 이태현과 함께 안타프로덕션을 창립했다. 그룹 출신 음악인이 창립한 최초의 프로덕션 탄생이었다. 하지만 곡을 부탁한 작곡가 안길웅이 몇 달을 허송세월하자 직접 ‘오동잎’등을 작곡했다.
최헌과 호랑나비 음반은 제작자로 변신한 그의 첫 작품이었다. 76년 기존 멤버가 아닌 리드 싱어 서정호, 드럼 박훈, 올갠 이정웅, 리드 기타 유현상, 베이스 기타 신병하, 여성 보컬 윤시내의 6인조가 영사운드의 그룹명을 이어받았다. 생음악 살롱 포시즌이 주무대였던 이들은 그룹 포시즌으로 개명을 해 음반을 발표했다.
킹박과 함께 제작한 조용필, 영사운드 스필릿 음반은 훗날 국민 가수로 등극할 조용필의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안치행의 오기가 없었다면 이 음반은 세상 빛을 보지 못할 뻔 했다. 어느날 조용필의 매니저였던 축구 선수 이회택이 찾아와 음반 제작을 부탁했다. 킹박에게 제작을 의뢰했지만 그는 트레이드인 털 하나를 뜯으며“너무 일본놈 스타일이라 안 된다”고 했다. 사실 킹박은 연주자였던 안치행이 제작자가 된 사실이 못마땅했던 것. 하지만 이회택과 약속을 했기에 음반제작을 강행했다.
당시는 일본 조총련 동포들의 고국 방문이 핫 이슈였던 시절. 타이틀 곡‘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 가사를 시류에 맞게 수정하고 영사운드의 노래를 넣어 2가지 재킷으로 음반을 제작했다. 홍보도 못했던 이 앨범은 부산을 시작으로 100만장이 넘게 팔리는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자신감을 얻은 안치행은 77년 장충체육관에서 입장료 490원의 그룹사운드 경연 대회를 열었다. 대마초에 연루된 조용필의 마지막 무대였다. 다음은 록 그룹 골든 그레입스의 음반. 멤버들은 공전의 히트곡이 될 트로트풍의‘사랑만은 않겠어요’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안치행은 멤버들의 반대에도 리드기타겸 보컬이 된 윤수일을 앞세워‘윤수일과 솜사탕’으로 그룹명을 바꿔 빅히트를 터트렸다.
78년은 안타프로덕션 소속 가수들의 천하. 인순이의 희자매가 중창부문상을 수상하고 최헌은 MBC,TBC 양 방송의 가수왕을 윤수일은 신인가수상, 안치행도‘사랑만은 안겠어요'로 MBC 최고 인기 작곡상을 수상했다. 79년 공연중 가슴이 그대로 노출되어 화제가 되었던 대한극장의 김추자 컴백 리사이틀도 그의 작품이었다. 최헌, 조용필, 윤수일 트로이카외에도 서유석의 ‘구름 나그네’, 김 트리오의 ‘연안 부두’, 주현미의 ‘울면서 후회하네’, 윤민호의 ‘연상의 여인’, 박남정의 ‘아! 바람이여’, 나훈아의 ‘영동 부르스’, 희자매의 ‘실버들’, 문희옥의 ‘사투리 메들리’ 등은 안타 제조기 안치행의 작품이었다.
안타프로덕션은 이름처럼 연속 안타를 쳐, 75년부터 80년대 내내 대중 가요계를 주도하는 제작자로 군림했다. 79년 안치행의 주선으로 유영춘이 리더가 되어 유영준과 영사운드가 재결성되어 79년, 80년 2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최근에도 김상희의 '데킬라 부르스', 최헌의 '돈아 돈아', 윤희상의 '포옹' 등을 작곡한 그는 1998년부터 상호를 사운드코리아로 변경해 운영하고 있다.
2004년에는 신보 ‘심경’을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 반야심경등 불교 경전을 드럼, 기타에 목탁 소리를 뒤섞어 빠른 비트의 경쾌한 힙합음악으로 직접 노래도 불렀던 것.“이제 음반 제작보다는 불교 음악을 젊은 이들에게 알리는 일에 매진하렵니다.” 500여곡을 작곡한 그는 “창작은 마음을 파는 것”이라며 “불교 음악은 궁중 음악 스타일이라 일반대중에게는 먹히지 않지만, 세월이 지나면 합창도 할 수 있게 심경을 편곡해 놓았다”며 향후 음악 탐구의 방향을 슬쩍 들려준다. 최초의 힙합 불경 음반에 대해 젊은 신도는 환영을, 그러나 일부 스님들은 비난을 하는 등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그의 신보는 전혀 새로운 시도였다.
[안치행] 그를 통하면 트로트도 달랐다
영사운드 리더로 활약한 최고의 ‘기타 솔리스트’… ‘히트곡 제조기’로서 제작자로 성공적 변신
조용필, 최헌, 윤수일. 2003년 언론에 회자된 왕년의 톱가수 세명이다. 하지만 각 인물이 이름을 올린 방식은 사뭇 달랐다. 조용필은 수만명을 앞에 두고 음악인생 35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공연을 하고 신보도 발표하면서 건재를 과시했다. 최헌은 최근 오랜만에 신보(新譜)를 발표하고 연예 프로그램에도 모습을 비추고 있다. 윤수일의 소식은 심난했는데, 지난해 연말 다단계 불법판매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뉴스에 이어 올해 초 보석으로 석방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렇듯 2003년 현재 중·장년에 접어든 세 가수의 삶은 다르지만, ‘4반세기 전’ 세명의 지위는 막상막하·용호상박이었다. 세명은 ‘1977년의 신데렐라’들이었다.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 최헌이 부른 <오동잎>, 윤수일이 부른 <사랑만은 않겠어요> 세곡의 제목만 언급해도 당시 이들의 위세를 실감할 수 있다(단, 음반이 처음 발표된 시점은 상이하다).
조용필, 최헌, 윤수일 그리고 안치행.
이 곡들은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의 한파가 몰아친 뒤 김 빠진 맥주 같던 대중음악계에 ‘흥겨움’을 다시 가져온 곡들이다. 이른바 ‘트로트 고고’라고 불리던 음악에 저항감을 느낀 사람이라도, 막상 저 음악을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지금 언급한 가수 세명과 노래 세곡 모두 오늘의 주인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안치행(1942~)이라는 인물이다. 안치행은 <오동잎>과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직접 작곡했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편곡을 맡아 ‘1977년의 대박’에 모두 관여한 셈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 세곡이 수록된 음반은 모두 ‘안치행 편곡집’이었다. 작곡가로서 그의 ‘안타’ 행진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최헌의 <앵두> <세월>, 윤수일의 <갈대> <유랑자>, 서유석의 <구름 나그네>, 김 트리오의 <연안 부두>…. 1980년대 이후에도 그의 히트곡은 계속되었다. 주현미의 <울면서 후회하네>, 윤민호의 <연상의 여인>, 박남정의 <아! 바람이여>, 나훈아의 <영동 부르스>, 희자매(인순이)의 <실버들>, 문희옥의 <천방지축> 등등.
안치행은 이 음반들에 음악적으로뿐만 아니라 사업적으로도 관여했다. 그가 설립한 안타프로덕션을 통해 그는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한국의 음반산업계를 주름잡은 비즈니스맨이 되었다. 그의 음반 제작 사업은 1998년경 사운드코리아로 이름을 바꾼 뒤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앞서 열거한 곡들의 리스트에서 작곡가 안치행의 스타일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뽕짝’이나 ‘트로트’라는 말에는 비하의 뜻이 담겼으므로 그 단어를 피한다면, ‘성인 취향의 대중가요’라고 할 만한 스타일이다. 물론 편곡이나 연주에는 록음악, 그때 말로 그룹사운드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이 곡들이 성인층을 대상으로 ‘히트’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감각적 기타 사운드로 독창적 음악 선보여
하지만 그의 이력을 훑어보면 안치행이 ‘유명 그룹사운드의 기타 연주자’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가 이끌었던 영사운드는 1972∼75년에 명동과 소공동의 ‘생음악 살롱’인 포시즌스와 오비스 캐빈을 중심으로 연주하면서 소리소문 없이 젊은층의 사랑을 받은 그룹이었다. 영사운드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요란한 굉음이 한풀 꺾인 직후 차분하면서도 건전한 ‘젊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 영사운드 <히트 퍼레이드: 달무리/파도의 추억>(오아시스,OL-1200,1972). 영사운드 <vol.2 소녀="" 머리="" 긴="" 마음="" 허전한="">(킹/유니버어살, KLS-114,1975). 최헌 <세월/오동잎>(안타/힛트,LA-001,1975/1976). 조용필/영사운드 <안치행 편곡집: 너무 짧아요/긴 머리 소녀>(킹/서라벌,SLK-1009,1976). 영사운드 <등불/달무리>(킹,KR-0117,1984).</vol.2>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영사운드의 전신이 1967∼71년에 실버코인스(Silver Coins)라는 이름으로 미8군 무대에서 ‘패키지 쇼’를 하던 존재라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미8군 쇼의 기획을 담당하던 회사 중 하나인 화양(和陽)의 연습실에서 안치행의 연주를 지켜본 사람은 안치행을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 스타일의 재즈 기타리스트”라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몇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음악을 제대로 하려는 젊은이들이 모여들던 ‘이인성 음악학원’에서 조교를 하던 안치행의 모습을 본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안치행과 최헌이 운명적으로 만난 것도 이곳이었다(이인성은 당대 최고의 ‘기타 솔리스트’였고, 1980년대에는 전자음악가로 변신하였다).
영사운드는 독특한 존재였다. 당시 그룹사운드 대부분이 팝송을 원곡 그대로 연주하거나 번안곡으로 만족하던 무렵, 창작곡 그것도 자작곡을 많이 연주했기 때문이다. 안치행이 만들고 영사운드가 연주한 <등불>과 <달무리>는 ‘그룹사운드 히트곡’의 표본 같은 곡이었다. 이 곡들은 작곡도 작곡이려니와 복선(더블 스트링) 주법을 적절히 이용한 안치행의 감각적인 기타 사운드와 젊은 남자들의 하모니가 어우러진 신선하고 독창적 음악이었다. 안치행이 그룹사운드계의 인물로서는 이례적으로 가사도(전라남도 진도 옆의 조그만 섬) 출신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음악적 ‘전향’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달무리>의 경우 동양방송의 <신가요 박람회>라는 프로그램에서 입상했다는 흥미로운 이력도 따라 다닌다. 응모를 통해 당선된 작사(작사가는 김주명)에 작곡가 세명이 경합해서 1위를 결정하는 식이었는데, 당시 새로운 가요를 보급하기 위한 방송국의 행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이게 연이 되어 영사운드는 동양방송의 프로그램 <오라 오라 오라>의 전속 밴드를 맡았다. 1973~74년에 방영된 <오라 오라 오라>는 ‘쇼 연출의 귀재’라는 평을 들었던 조용호 PD가 제작·연출을 맡고 파릇파릇한 시절의 서유석과 양희은이 MC를 보던 프로그램으로, 당시 도회적 감성의 젊은이들에게 ‘컬트’의 대상이었다.
안치행이 연주인에서 제작자로 인생의 궤도를 수정한 것은 1975년께 영사운드의 두 번째 음반을 발표한 다음이다(영사운드는 그 뒤 보컬 유영춘을 주축으로 활동을 계속한다). ‘히식스’ ‘신중현과 더멘’ ‘검은나비’를 거치면서 이합집산하던 최헌, 김기표, 이태현과 더불어 시작한 사업이 안타프로덕션이다. 그룹사운드 출신의 음악인이 전문 프로덕션을 차린 것은 아마도 이게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안타는 이름대로 ‘히트’를 계속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작곡 스타일이 변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KBS 가요무대에 출연한 영사운드,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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