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보잘것없는’ 존재란 없다. 드넓은 갈대밭은 곡식 한 톨 생산하지 못해도 으뜸가는 ‘자산’으로 인정받고, 수많은 철새들은 때가 되면 떠나도 가장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는다. 시커먼 갯벌은 무수한 생명체를 길러 내는 ‘둥지’로 존중된다. 순천에선 아무것도 하찮지 않다. 모든 것이 괜찮고 또 괜찮다.
만날 것들은 죄다 이 땅에서 만난다. 바다와 강물이, 산과 들녘이, 갯벌과 갈대밭이, 이곳에서 만나 서로를 반긴다. ‘스스로 그러한 것들’에겐 순천이 최고의 ‘카페’다. 머물 것들은 모두 이 땅에서 머문다. 무리 지은 갈대들이 이곳에서 한 해를 살고, 희귀한 철새들이 이곳에서 한 철을 쉬며, 진귀한 갯것들이 이곳에서 한 생을 잇는다. ‘살아 숨 쉬는 것들’에겐 순천이 최상의 ‘호텔’이다.
하늘이 내린 생태 낙원, 순천만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자리한 순천만은 광활한 갯벌과 드넓은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대한민국 대표 생태 관광지다. 우리나라 서남해안 갯벌은 세계 5대 연안습지 가운데 하나. 그중에서도 순천만은 2006년 1월 연안습지 최초로 람사르협약에 등록됐다. 5.4km²에 이르는 갈대밭은 새들의 낙원이다.
넓은 갈대 군락은 새들에게 은신처와 먹이를 제공하고 주변의 논 역시 새들의 먹이 채식지가 되어 주고 있다. 사진 제공. 순천시청
흑두루미, 재두루미, 검은머리물떼새, 황새, 저어새, 노랑부리저어새 같은 희귀 조류를 비롯해 220여 종의 크고 작은 새들이 이곳에 깃든다. 그 외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여기에 머문다. 칠게, 방게, 짱뚱어, 꼬막 같은 저서동물과 칠면초, 나문재, 함초, 해홍식물 같은 염생식물이 21.6km²의 갯벌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사이 좋게 산다.
순천만은 생태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키 큰 갈대숲 사이로 나무 바닥 산책로가 다리처럼 연결돼 있어 3m 높이의 갈대를 눈높이로 바라보며 걸을 수 있다. 느릿느릿 그 길을 걷다 보면 갈대의 흔들림이 마음을 움직인다. 바람이 불어오면 그 결을 따라 움직이고, 햇살이 내려앉으면 그 빛을 따라 반짝인다. 혼자서는 결코 아름다움을 뽐내지 않으며 빈손이면서 아무것도 쥐려 하지 않는, 쓸데없는 자존심도 세우지 않고 괜한 과시욕이나 과한 소유욕도 갖지 않는 갈대들이 여행자의 마음을 한없이 낮아지게 한다. 갈대를 흔드는 바람과 수면을 박차 오르는 새들은 ‘소리’도 풍경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눈을 감고 귀를 열어도 감동은 조금도 줄지 않는다.
람사르협약에 등록된 한국 최대의 갈대 군락지 순천만. 해안선 길이는 39.8km에 이르고 갯벌 면적은 22.6km²(800만 평)에 이른다. 갈대숲의 해돋이와 해넘이 광경은 일대 장관을 이룬다.
햇살의 기운에 따라 금빛으로 은빛으로 잿빛으로 변하던 갈대밭은 해질녘에 이르러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다. 용산전망대에서 한눈에 바라보는 갈대밭과 해넘이와 노을은 그 어떤 화가도 ‘흉내밖에’ 낼 수 없는 한 폭의 그림. 때마침 물때가 맞아 밋밋하던 갯벌이 S자형 물길까지 드러내면 자연이 최고의 예술품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순천만은 1960년대 최고의 감성 소설 <무진기행>의 무대가 된 곳이다. 김승옥의 문장이 어디에 ‘빚지고’ 있는지 어렵잖게 알아낸 셈이다.
여태 그대로인 곳들
순천만이 ‘스스로 그러한 것들’의 보고(寶庫)라면 낙안읍성은 ‘대대로 그대로인 것들’의 보고다. 성곽, 초가, 동헌, 객사, 향교 등이 조선시대의 모습 그대로 보존된 이곳은 성곽과 마을이 사적(제302호)으로 동시에 지정된 최초의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읍성 안엔 여태 사람들이 산다.
옛 모습 그대로의 초가집에서 옛날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여느 민속마을보다 더 정겹다. 새 볏단으로 초가지붕을 잇는 할아버지가, 처마 밑에 곶감이며 시래기를 매다는 할머니가,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불을 지피는 아주머니가, 문화재만큼이나 귀한 자신들의 ‘삶’을 날것 그대로 보여 준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 계획 도시로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마을 전체가 오랜 민속 자료들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는 민속 박물관이다.
타인의 삶을 바라볼 땐 ‘구경’이나 ‘관광’이 아닌, ‘이해’와 ‘소통’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을을 한눈에 보려면 4m 높이의 성벽에 오르면 된다. 동글동글한 초가지붕들이 양반마을에선 보기 힘든 따뜻함과 질박함을 한 아름 선사한다.
조계산에도 ‘여태 그대로인 곳들’이 있다. 천년을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켜 온 호남의 두 사찰, 선암사와 송광사가 그곳이다. 두 사찰은 한 길로 연결돼 있다.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이어지는 굴목이재 오솔길은 이름하여 ‘한국 불교의 산티아고 길’. 총 길이가 7.8km로 경사가 완만해 걷기에 좋다.
선암사 승선교.(보물 제400호) 봄철 못지않게 운치 있는 선암사 단풍숲길은 사색을 즐기기에 손색이 없다.
먼저 선암사로 간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을 통해 우리 산사의 미학적 특질을 잘 보여 주는 ‘깊은 산속 깊은 절’이라 극찬한 곳이다. 선암사의 아름다움은 절 밖부터 시작된다. 자연석을 무지개처럼 이어 놓은 승선교(보물 제400호). 다리가 만들어 낸 반원 안으로 저 너머 강선루가 보인다. 그 어떤 사진틀로도 강선루를 이토록 아름답게 ‘가둘’ 수는 없을 것이다.
절 안의 최고 작품은 해우소다. 빼어난 건축미와 엄청난 ‘깊이’를 자랑하는 이곳은 화장실로는 유일하게 문화재(지방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지정됐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 가라 / 선암사 해우소 가서 실컷 울어라’ 정호승의 시 ‘선암사’ 때문일까. 뱃속보다는 ‘마음속’ 노폐물을 배설하고 싶어진다. 선암사엔 800년이 넘은 야생 차밭과 600년이 넘은 홍매화가 있다. 아직 겨울도 채 오지 않았는데, 홍매화가 꽃비 되어 흩날리는 새봄이 주책없이 벌써 그립다.
송광사는 한국의 삼보사찰 가운데 승보사찰로서 유서 깊은 절이다. 희귀 불교 문화재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불교 박물관인 ‘성보박물관’이 있다.
또 하나의 고찰 송광사는 통도사, 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승보사찰이다. 지눌, 혜심, 만항 같은 16국사를 비롯해 근래의 효봉, 법정 스님까지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했다. 송광사 최고의 아름다움은 임경당과 우화각이다. 절 앞으로 흐르는 조계산 계곡물을 작은 둑으로 막아, 두 곳은 마치 연못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에서 떨어진 이파리들은 고스란히 물위에 내려앉아, 물에 비친 나무와 다시 하나가 된다. 헤어지고도 쉬이 이별하지 못하는 나무와 잎이 순천만의 갈대처럼 여행자의 마음을 흔든다.
순천만자연생태공원 생태의 낙원 순천만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갈대숲 사이로 나무 바닥 산책로가 마련돼 있어, 갈대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공원 입구에 있는 자연생태관에서 갈대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용산전망대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한 시간 거리. 생태체험선을 타거나 갈대열차를 타면 걸을 때와는 또 다른 순천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문의: 061-749-4007, www.suncheonbay.go.kr
황금빛 갈대와 갯벌이 어우러진 대한민국 생태 관광 1번지, 순천
a. 주암호 도립공원 조계산 자락과 모후산 자락 아래 굽이굽이 펼쳐진, 아름답고 여유로운 드라이브 코스로 풍광이 빼어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b. 송광사 한국의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승보(僧寶)사찰로서 유서 깊은 절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불교 박물관인 ‘성보박물관’이 있다. c. 선암사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종합 수도 도량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고혹적인 선암매가 사색의 운치를 더해 주고 가을의 단풍숲길은 사색을 즐기기에 손색이 없다. d. 고인돌공원 전국 최초의 선사시대 문화 유적인 고인돌군을 비롯해 구석기 집터, 신석기 및 청동기 움집 6동과 선돌 등을 모아서 주암호수변에 조성한 구석기 테마 문화공원이다. e. 낙안읍성 조선시대 성, 동헌, 객사, 초가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어 성과 마을 전체가 국내 최초로 사적 제302호로 지정된 문화 관광 명소다. f. 화포해변 해돋이는 순천만 전망대라 불리는 화포가 제일이다. 여수 앞바다까지 탁 트인 전경이 보이며, 매년 해넘이와 해돋이 행사를 하는 곳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g. 와온해변 여수 방면 863번 지방도를 타고 해안도로를 지나면 시원한 갯바람과 함께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가족과 함께 해안을 따라 달리는 부담 없는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이다. h. 순천왜성 이곳은 정유재란 당시 2개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조•명수륙연합군과 왜군의 최대 격전이 펼쳐졌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