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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기행 (중랑구)
서울 사랑 매거진 / 글 윤재석(언론인)
먼저 필자와 중랑구 명칭의 연원인 중랑천과의 인연부터 얘기부터 해야겠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으니까
1950년대 말이었을 거다. 한 이 맘 때 쯤(?)이다.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염천지절(炎天之節). 동네 형을 따라
동대문에서 전차를 탔다. 알고 보니 동네 어른들이 중랑천에서 천렵을 하는데, 필자를 데리고 나선 거였다.
어릴 적 중랑천은 천렵의 천국이었다.
어릴 적 중랑천은 천렵 천국
청량리역에서 내려 한참을 걸었다.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때 중랑교 가던 버스 노선이 있었는데, 그 형은 왜 전차를 타서 사서 고생을 했느냐는 거다. 버스비보다 전차비가 쌌을 수도 있다. 아무튼 한참을 걸어 중랑천에 당도했다.
어른 무릎을 찰랑거릴 정도로 수량이 풍부한 중랑천 이곳저곳에선 반두 등으로 천렵을 하는 행락객들의 고기 모는 소리가 요란했다. “서울시내에 이토록 시원한 별천지가 다 있네”하는 생각을 하면서 동네 어른 일행이 앉아서 술추렴하고
있는 천변 백사장으로 다가갔다.
안주는 의외로 개고기였다. 그러고 보니 저만치에 개를 도살한 흔적이 처절하게 널려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른들은 개고기를 안주로 막소주를 콸콸 들이부어 벌써부터 얼큰해져 되도 않는 가요를 부르느라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있었다. 개중에는 “아니, 고기 잡는 사람 어디 갔나?” 하면서 부진한 천렵 성과를 비웃기도 했다. “성질 급하기는. 우물에 가서 숭늉 달래겠구만” 하면서 반두질을 하던 일행의 맞장구.
그러다 갑자기 누군가 “야, 드디어 잡았다” 하는 건 아닌가! 물살을 휘휘 저으며 가보니 어린에 팔뚝만한 메기였다.
메기와 그동안 잡은 잡어들을 한꺼번에 넣고 민물고기 매운탕을 끓여 대령하니 개고기 싫어하는 술꾼들에겐 고대하던
최상급 안주렷다. 그날 필자는 그 술판의 최연소 참가자로 민물고기 매운탕과 보신탕을 섭렵하는 광영을 안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 두 메뉴의 마니아가 되었으니 중랑천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진한 인연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대문명의 흔적 남아있는 곳
사설이 길어졌다. 이제 본격적인 중랑구 탐방에 들어간다. 중랑구는 망우산~용마산을 동쪽, 중랑천을 서쪽, 광진구 중곡동을 남쪽, 북부간선도로를 북쪽 경계로 둔 심장 모양의 자치구다. 본시 동대문구에 속했으나 대통령령 제12367호('87.12.31 공포)로 동대문구에서 분리, 88년 1월 1일 신설구로 독립했다. 인구 42만 4천명, 넓이 18.53㎢ 중 57.4%에
달하는 10.63㎢가 주거지역일 정도로 전형적인 주거타운이다. 당연히 자연녹지가 많다. 구내에 자리한 용마산, 망우산, 봉화산 등이 너른 녹지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덕분이다. 경기 및 강원 북부에서 들어오는 관문으로 서울 동북부의 교통 요충지이기도 하다. 중랑구의 북쪽 경계선을 지나가는 북부간선도로와 중랑천변 둔치를 지나는 동부간선도로 역시 서울 시내와 경기도를 잇는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랑구는 고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흔적이 다양하게 남아 있는 지역이다.
특히 상봉동 봉수대(아차산 봉수대)에서 면목동에 이르는 지역에는 60년대 까지만 해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는 중랑구 일대가 후기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의 성읍국가 지역이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다.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이 삼국 간 한강유역 확보의 교두보 역할로 중시되기도 했다. 아차산을 지나 한양 도성의 외사산인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 봉화산 등 한양의 동쪽 능선이 바로 그곳이다. 용마산 일대에 산재한 보루 중 망우산 1보루, 용마산5·6·7보루가 삼국 시대 치열했던 각축의 흔적이다.
이 지역을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초 983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양주목이 되었다. 조선시대인 1663년(조선 현종 4년)에 허목의 한성목장지도 중 진헌마정색도를 보면 불암산을 배경으로 남으로는 한강을, 북으로는 아차산을, 서로는 중랑천·청계천 일부·신촌을 경계로 하고 있고, 동으로는 그 경계가 명확치 않으나 지금의 광진구와 중랑구를 포함하고 있어 중랑 일대가 한성목장지대임을 알 수 있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중랑 지역은 녹지공간이 많다고 했다. 그것은 예부터 농업 생산경쟁력이 앞서 있었음을 말한다. 실제로 봉화산 일원엔 지금도 구의 북동쪽 구릉지에는 사슴이나 젖소를 기르는 목장이 적지 않다. 경지율도 13.8%로 서울에서 높은 편이다. 오래전 사라진 명물로 먹골배(또는 묵골배)를 들 수 있다. 30년대 봉화산 기슭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는 먹골배는 품종 이름이 아니고, 묵동의 옛 이름인 먹골에서 따온 것으로 이 지역의 토양이 모래가 많아 유달리 달고 맛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먹골배가 유명해지자, 묵동에서 신내동, 중화동 일대까지 배밭이 확장됐으나, 이 지역이
도시화되면서 지금은 태릉과 구리시 쪽으로 재배지가 옮겨졌다.
70년대엔 묵골 배밭서 미팅도
197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은 이른바 ‘배밭 미팅’이란 걸 했다. 남녀가 배밭에 모여 하는 미팅인데, 요즘 미팅보다 상당히 낭만적이었다. 남녀가 평상에 둘러앉아 짝을 정하는 거야 여느 미팅과 다를 바 없는데, 그 다음 순서는 여성이 파트너에게 배를 깎아 주는 거다. 배를 얌전히 잘 깎으면 살림 솜씨가 좋을 거라는 칭찬을 받기도 하면서 쌍방 간 분위기가 좋아지는가 하면, 파트너에게 잘 보이려고 과도를 빼앗는 남학생도 있었다.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수건돌리기 같은 치졸한 놀이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먹골배밭이 형성된 연원을 왕방연에 둔 속설도 있다. 조선시대 단종의 귀양길 호송을 맡았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관직을 그만 두고 봉화산 아래 중랑천 가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호송 당시 목 말라하는 단종에게 물 한 모금도 주지 말라는 엄명을 지켜야 했던 자신을 원망하고 속죄하는 마음에서 필묵과 벗하면서 배나무를 키우기 시작했다 한다. 평생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았던 왕방연은 임종 시 자기를 영월 가는 길에 묻고 주변에는 배나무를 많이 심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그 후 왕방연이 심었던 배나무가 사방으로 번식하게 되면서 신내동 일대가 배밭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중랑구를 남쪽에서부터 탐방한다. 가장 일반적인 접근 방법으로 서울도시철도 7호선 용마산역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한다. 출구를 나와 일단은 지척에 있는 용마산폭포공원을 향한다. 공원을 나와 주위를 돌아보니 예전 70~80년대를 연상시키는 소박한 주택들이 도열해 있다. 골목 사이로 난 계단들이 비탈진 기옥들을 향해 올라가고, 일부 가옥 지붕엔 옥상정원도 있다. 그러고 중랑구는 자치구 중 이른바 개발의 광풍이 덜 휩쓸고 간 지역으로 이런 유의 주거 구조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용마산 정상서 중랑을 조망하다
용마폭포공원. 아시아에서 가장 큰 인공폭포라는 이 공원은 예전 채석장으로 쓰였던 용마산 자락을 다단계폭포로 개발한 것이다. 산의 일부인지라 철철이 피는 기화요초(琪花瑤草)와 각종 수목의 다양한 품새가 볼만하다. 이제 본격적인 산행에 들어간다. 해발 348m의 용마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폭포공원 쪽에서 접근하기엔 좀 가파르다. 약간은 바튼 숨을 쉬면서 올라간다. 중간에 용마산 7보루를 거쳐 30분 쯤 올라가니 용마산 정상이 보인다.
용마산은 한양도성의 외사산(外四山) 중 좌 청룡에 해당된다. 우 백호는 덕양산, 남 주작은 관악산, 북 현무는 북한산이다. 용마산 정상에 서서 중랑구 일대를 조망한다. 서쪽은 중랑천과 동부간선도로로 경계가 되고 남쪽은 어린이대공원,
세종대, 건국대 등 등 광진구내 시설들로 중랑구와 구분이 된다. 정상엔 1910년 6월에 설치한 오석으로 된 삼각점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근데 이게 이상하다 한 면에 ‘건설부’ ‘서울특별시’ 해놓고 다른 면엔 ‘1910. 6’이라고 써놨다. 한일합방 된 해에 건설부와 서울시가 있었다는 말(?). 차라리 그보다는 ‘348M’이 조악하게 쓰인 자연석을 밟아 보는 게 더 의미있는 일이겠다.
시름 덜어놓는 망우리 묘지
잠시 쉬었으니 이제 북쪽을 향해 종주를 해야지. 헬기장 세 곳을 지나, 용마제일약수터에서 잠시 목을 축이이고, 계속 앞으로! 한 시간 쯤 가니 즐비한 무덤들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망우리묘지공원. 망우동과 구리시 교문동 사이 망우산 일대 83만㎡의 공간에 조성된 묘지공원이다.
1933년 5월 27일부터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시작, 73년 3월에 2만 8500여 기의 분묘가 가득 찼다. 이장과 납골을 장려한 결과 2005년 9월 기준으로 1만 7041기의 묘가 남아 있다. 한용운, 장덕수, 오세창, 서동일 등 독립운동가들과 방정환,
이중섭, 박인환 등 문인 예술가가 잠들어 있고 안창호 선생의 묘도 이장되기 전에는 이곳에 있었다.
그런데 장덕수와 한용운 선생 묘소 사이에서 눈길을 끄는 이의 묘소를 본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역.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제헌의원과 초대 농립부장관을 지내며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박사에게 차점으로 패했을 정도로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그러나 이른바 진보당 사건의 수괴로 1958년 사형당한 풍운의 정치인. 5.2km의 산책로 곳곳에 놓인 독립운동가 15분의 연보비를 돌아보다가 또다시 ‘조봉암’이라는 이름에 눈길이 간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가 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
하고서는 안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나(어록에서).”
망우리묘지는 필자 개인적으로 추억이 깃든 곳이다. 중학교 학창 시절 매년 5월, 하루 전교생이 이곳에 와서 송충이잡기를 했기 때문이다. 60년대 중반 송충이잡기가 거국적인 행사여서 전국 곳곳에서 깡통 들고 들녘으로 나섰던 그 시절의 이야기다.이젠 을씨년스럽고 썰렁한 묘지라기보다는 안온하고 싱그러운 공원이라는 느낌을 갖고 내려오는데, 정작 용마랜드라는 곳에 다다라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되어야 했다.
구청에서 붙인 경고문을 보니 사업자가 예정된 사업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아 사용권이 박탈된 상태라고 한다. 마치 영화 ‘빅’에 나오는 폐쇄된 놀이터 그 자체다. 마침 중랑구에 변변한 위락시설도 없는데, 이 시설을 어떻게 라도 살려야 하는 것 아닌지? 2010년 지방성서거 구청장 후보도 공약을 했다는데, 그 공약은 언제 지켜질지? 면적만 무려 16만㎡란다.
상봉역 근처서 수구레탕 한 그릇
이제 중랑구에서 가장 인파가 붐비는 곳으로 갈 차례다. 상봉시외버스터미널. 대규모 시외버스터미널로는 서울에서 유일한 곳이다. 이 터미널은 동대문구 마장동에 있던 시외버스 터미널과 도심에 있던 자질구레한 시외버스정류장을 통폐합해 주로 경기 및 강원 북부를 커버하는 시외버스들의 발착지로 세워졌다.
배가 출출해진다. 기다리던 장밋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7호선 상봉역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4번 출구 근처에 있는 개성집이라는 허름한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쾨쾨한 냄새가 진동한다. 소머리? 간천엽? 아니다. 이집에선 수구레를 먹어야 한다. 수구레는 소고기 가죽과 살 사이에 있는 부위로 콜라겐 덩어리. 예전엔 선지와 함께 빈한한 사람들의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그런데 요즘엔 콜레스테롤이 없는 미용식이라고 소문이 나서 여자들도 좋아한다나 어쩐다나. 수구레탕(1인분 7천원) 시켜서 소주 한잔하면 천하에 부러울 것 없다.
이제 어느 정도기운을 차렸으니 마지막으로 중랑천엘 가봐야지. 우중이라선지 강태공들이 많이 나와 있다. 대신 둔치에 잘 정비된 각종 체력단련 시설은 비만 맞고 있다. 한 노태공(老太公)에게 다가가 조황(釣況)을 묻는다. 아무 말없이 망 속에 들어 있는 고기를 보여주는데, 잉어 한 수,붕어 두 수, 기타 잡어 몇 마리 등. 의정부 등지의 피혁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독성 폐수 때문에 한동안 죽은 강이었던 중랑천. 낚시한 민물고기를 먹을 수 잇느냐 없느냐는 별개로 하더라도 이처럼 풍부한 어종을 낚을 수 있다는 것 하나로 중랑천은 구민들의 보배 아닐까.
개발의 광풍으로부터 비껴있고 녹지비율이 높은 것은 중랑구민에게 행복한 요소이지만, 의료복지 면에서 덜 갖춰진 점은 행복지수를 깎아먹는 요인이었다. 지난해 3월 서울 의료원이 이전해 와 명실상부한 종합병원을 유치하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서울의료원 이전으로 공공의료 메카로 뜬다
서울시의 대표적 공공병원인 서울의료원은 강남구 삼성동에서 중랑구 신내동으로 이전하면서 건물을 친환경적으로 짓고, 623병상 확충, PET-CT 등 첨단의료장비 도입 등을 통해 최적의 진료환경을 구축했다. 또 심혈관 센터, 뇌혈관 센터, 아토피·천식센터 등 특성화된 8개의 전문 진료센터를 통해 진료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였고 상대적으로 의료접근이 취약한 어린이와 여성을 위한 소아정신건강발달클리닉, 미래맘가임클리닉 등을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다인병실 최대 확보, 적정수가 책정으로 시민의 의료비 부담을 최소화하는 혁신적인 방침으로 환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데 주력하고 있다.
중랑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이한 병원이 있으니 이름하여 녹색병원이다. 면목동에 있는 이 병원은 4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으로 민간 병원이면서도 공익적인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 공익법인이다. 아울러 일반 환자를 진료하는 종합병원임에도, 병원 내에 직업병 환자를 위한 진료소가 있어 직업병 연구와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이 병원의 원류가 개발연대 그 악명 높았던 구리시 원진레이온 산재사건을 다룬 의료진들이 만든 병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90년대 이후론 이주노동자의 진료까지 아우르고 있다. 이 병원의 원장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장 출신인
양길승 씨다.
新서울기행...그후 이야기
저자도 복원 승인
5월호 ‘성동구’에 소개된 사라진 섬 저자도(楮子島)의 복원을 최근 서울시가 승인했다. 이에 따라 저자도가 조만간 서울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서울시의 저자도 복원 승인은 성동구 금호·옥수동 주민들의 다년간에 걸친 노력 덕분이다. 1970년 초까지만 해도 두무개 근처에 존재했던 저자도는 조선시대 기라성 같은 시인묵객들이 극찬할 정도로 한강의 절경이었다. 그러나 압구정도 현대아프트 건설과정에서 저자도의 모래를 몽땅 퍼가는 바람에 섬 자체가 없어졌다. 서울시는 사라진 옛섬 저자도를 복원하기 위해 지난 5월 학술용역을 시작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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