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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꽃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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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공부 스크랩 운보 김기창 화백의 생애와 작품세계!!
노정희 추천 0 조회 34 14.10.17 09: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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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 화백의 생애와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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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은 1913년 서울 운니동에서 당시 총독부 토지관리국 직원이던 아버지 김승환과 어머니 한윤명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여덟 살(승동보통학교 2학년)에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을 상실한 후 언어 장애의 증세가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의 소개로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에게 동양화를 배워 1931년 조선미술대전에 출품하여 1940년까지 6회 입선, 특선 3회를 기록했다.
24살 때인 조선미술전람회(줄여서 ‘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운보는 연4회 특선 경력으로 27살에 선전 추천작가가 되었는데, 이후로 광복 전까지 주로 일제의 내선일체 사상을 정당화하는 친일 활동이 이어졌다. 1942년에서 1944년까지 일제 말 친일 미술전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 1943년 8월 6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조선식산은행의 사보《회심(會心)》지에 실린 그림과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경성일보사가 1944년 3월부터 7개월간 서울에서 연 ‘결전’ 미술전람회에 출품된〈적진육박〉이 친일 작품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1940년 10월 조선남화연맹전, 1943년 1월 애국백인일수전람회를 통해 일제의 기금 모집에 협력하였다.
1943년에 아내 우향 박래현과 처음 만나서 3년간의 필담연애 끝에 1946년 결혼하였다.[2]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교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했다. 1960년 국전 초대작가가 되어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타이베이(台北)와 홍콩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 출품했고 이어 도쿄(東京)·마닐라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도 출품했다. 1962년 수도여자사범대학(훗날 세종대학교)으로 교직을 옮겼고 문화자유전에 출품했다. 1963년에 5월문예상 미술본상을 수상했고,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한국 대표로 출품했다. 1964년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도미(渡美), 1969년에 재차 도미하여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졌다.[3] 홍익대학교세종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하였고,[4] 1984년에는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하였다.[5]
작품세계
그의 화풍은 자유롭고 활달한 필력으로 힘차고 동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여, 고시적인 풍속화에서부터, 형태의 대담한 왜곡을 거쳐 극단적인 추상에 이르기까지 구상, 추상의 전 영역을 망라하는 폭넓은 작가적 역량을 구사했다.
또한 복음서예수 전승(傳承)을 한국적으로 해석, 예수를 한복을 입은 한국인으로 묘사한 동양화를 그렸는데 이는 예수를 한국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기독교를 토착화하기 위한 신학적인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는 로마 제국, 헤롯 왕실, 예루살렘 성전의 착취를 받는 가난한 농촌공동체요,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곳',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불릴만큼 무시와 소외를 받는 지역인 갈릴리에서 변변치 않은 직업인 목수로 살아간 민중이었는데[6], 김기창 화백의 그림에서는 양반의 옷을 입고 있는 모순이 있다. 대표작으로〈세종대왕 초상〉,〈군마도〉,〈청산도〉,〈소와 여인〉등이 있다.
그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해 그린〈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완전군장의 총후병사〉등은 1943년8월 6일자《매일신보》에 실렸다.

그림 - 김기창 화백이 그린 예수님의 일생(한국적으로 표현한)


* 수 태 *


* 예수의 탄생 *


*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 *


* 제자들을 만남 *


* 오천명을 먹임 *


* 물 위를 걷다 *


*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


* 예수의 발을 씻음 *


* 최후의 만찬 *


*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



* 재판을 받다 *


* 십자가를 지시고 *


* 십자가에 못 박히심 *


* 시체를 옮기는 제자들 *


* 부 활 *


* 승 천 *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기독교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했다. 1960년 국전 초대작가가 되어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타이베이(台北)와 홍콩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 출품했고 이어 도쿄(東京)·마닐라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도 출품했다.
1962년 수도여자사범대학(훗날 세종대학교)으로 교직을 옮겼고 문화자유전에 출품했다. 1963년에 5월문예상 미술본상을 수상했고,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한국 대표로 출품했다.
1964년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도미(渡美), 1969년에 재차 도미하여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졌다.[3] 홍익대학교세종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하였고,[4]1984년에는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하였다.[5]


밤새(부엉이) /1972, 종이에 수묵채색, 99 x 182 cm


전복도(戰服圖) /1934, 비단에 채색, 71.5 x 57.5 cm


아악의 리듬 /1967, 비단에 수묵채색, 86 x 98 cm


춘정(春庭)/ 1976, 비단에 채색, 64 x 62 cm


닭 /1977, 비단에 채색, 61 x 69 cm


귀로 /1993, 비단에 수묵채색, 130 x 160.5 cm


부엉이 /1976, 비단에 수묵채색, 120 x 83 cm


초저녁 /1974, 종이에 수묵담채, 128 x 131 cm


청산도 /1967, 비단에 수묵채색, 85 x 100.5 cm


백운도(白雲圖) /1978, 비단에 수묵담채, 82 x 105 cm


수묵 청산도 /1976, 비단에 수묵담채, 53 x 61 cm


탈춤 /1961, 종이에 수묵채색, 48.5 x 35 cm


바라춤 /1961, 종이에 수묵채색, 47.6 x 40.8 cm


청자(靑磁)의 이미지 /1960~1964, 종이에 채색, 165.5 x 111.5 cm


연(蓮)II, 유자, 학과 매병, 연꽃과 고양이 /1958~1959,
종이에 수묵담채, 66 x 70 cm (4폭)


군해(群蟹- 게떼) /1966, 종이에 수묵담채, 174 x 462 cm


보리타작 /1956, 종이에 수묵채색, 84 x 267 cm


정청(靜廳) / 1934 종이에 채색 193 x 130 cm


동자(童子) / 1932 비단에 채색 56 x 32.5 cm


흥락도(興樂圖) / 1957 종이에 수묵채색 221 x 168 cm


복덕방 / 1953~1955 종이에 수묵담채 75 x 96 cm


가을(엽귀-?) / 1935 비단에 채색 170.5 x 109 cm


군상(群像) / 1959 종이에 수묵담채 136 x 69 cm (4폭)


군작(群雀-참새 떼) / 1959 종이에 수묵채색 142 x 319 cm


호박꽃 / 1959 종이에 수묵담채 57.5 x 35 cm


금붕어 / 1960년대 비단에 수묵채색 57.5 x 52 cm


고양이와 나비 / 1964 종이에 수묵채색 98.5 x 50.3 cm


청산도 / 1970 비단에 수묵채색 82 x 101 cm


청록산수 / 1976 비단에 수묵채색 84 x 101 cm


청산농경(靑山農景) / 1970년대 비단에 수묵채 69 x 138 cm


군마도/ 1986, 비단에 수묵채색, 177 x 278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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