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
#1. ‘지글지글’ 끓는 김치찌개와 ‘칙칙칙칙’ 익어가는 삼겹살 한 점. 밥 한 공기 가득 담아 앞에 놓고, 상추 쌈도 푸짐하게 얹었다. 뭔가 허전하다. 그렇다. 요놈 없으면 서운하지. ‘똘똘똘똘’ 소주 한 잔을 가득 채워 따른다. 크게 쌈 하나 싸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다가 두 손가락으로 곱게 잡아 소주를 톡 털어 넣는다. 마저 씹고 나서 찌개 국물 한 숟갈. 누구도 부럽지 않다. 세상사가 버거워도, 울분을 토할 벗이 없어도 지금 이 순간은 괜찮다.
#2. ‘일하다가 배고픕니다, 소주 마십니다. 외롭습니다, 소주 마십니다. 힘듭니다, 소주 마십니다. 일이 남았는데 잠 쏟아집니다, 소주 마십니다. 다칩니다, 소주로 씻어내고 소주 마십니다. 선장이 지랄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선장 저도 마십니다. 동료와 시비 붙습니다, 소주 마시면서 화해합니다, 그러다 다시 싸우고 또 소주 마십니다. 여자 생각 간절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잘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안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항구로 돌아옵니다, 소주 마십니다.’ -한창훈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사람들이 소주를 마시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기분이 좋거나, 나쁘거나. 아니면 그냥. 어떤 이유든 소주는 사람을 달랜다. 가격도 싸다. 많이 안 마셔도 금방 취한다. 소주가 서민의 술이 된 이유는 꽤 명확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한 해 동안 마시는 총 주류 소비량의 40%는 소주다. 비중은 맥주가 더 크지만 한 번에 마시는 양이 소주보다 많다는 걸 고려하면 서민의 진짜 친구는 소주라고 봐야 한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한 명이 한 해 동안 약 60병의 소주를 마신다.
사실 소주가 우리네 삶과 밀착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원래 우리 조상들이 주로 먹던 술은 탁주(濁酒)와 청주(淸酒) 두 가지였다. 천년 가까이 이어진 탁주(濁酒)와 청주(淸酒)와 대결엔 승자가 없었다. 부(富)와 빈(貧)이 있었을 뿐이다. 누룩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 탁주는 서민의 술이었다. 곡식이 귀하던 시절, 멥쌀(또는 찹쌀) 한두 되면 탁주 한 동이가 금방 만들어졌다. 한 대접 크게 들이키면 취기가 돌고, 포만감까지 덤으로 얻었다. 그 덕에 뙤약볕 밑 벼 베기도 거뜬했다. 지방마다, 집집마다 맛을 내는 방법이 달라 ‘김가네 술이 최고요, 박가네 술은 덜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왕이나 귀족은 멥쌀로 만든 청주를 마시고, 백성들은 이렇게 좋은 술은 못 마시고 맛이 짙고 빛깔이 짙은 술을 마신다’(고려도경). 청주는 귀했다. ‘술독 한 항아리에서 얻는 맑은 술은 고작 너댓 병’(동국이상국집)에 불과했다. 술독 위에 맑게 뜨는 액체만 건져낸 것이니 당연했다. 왕이나 양반이 변변찮게 백성이 먹는 술을 마실 수 있나. 예나 지금이나 귀하게 걸러낸 술은 가진 자의 몫이었다. 지방마다 정성껏 만든 청주를 한양의 임금께 진상했으니 요즘 전통주라고 불리는 술의 출발점이다.
이런 양강구도를 흔들 술 제조법이 고려 말에 등장했으니, 한반도에 진출한 몽골이 전수한 소주(燒酒)였다. 소주는 글자(燒)에서 알 수 있듯 끓여서 만드는 술이다. 증류해 이슬처럼 받는다 해서 노주(露酒), 색깔이 없다 해서 백주(白酒)로도 불렸다. 몽골의 침략 당시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안동에서 만들어낸 소주가 바로 지금도 유명한 ‘안동소주’다. 지금도 이런 증류식 소주를 팔지만 대개는 비싸다. 우리가 흔히 먹는 소주는 희석식 소주다. 쌀이나 보리, 고구마 등으로 당밀을 만들고, 이를 연속식 증류기에 넣어 나온 에탄올(주정)에 물을 타 만든다. 여기에 각종 첨가물(감미료)을 섞어 맛을 내고 주정과 물의 비율로 도수를 조절한다.
희석식 소주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965년. 정부가 식량 부족을 이유로 양곡을 원료로 한 증류식 소주 생산을 금지한 때다. 서울은 ‘진로’ 대구는 ‘참’ 광주엔 ‘보해’와 같은 지역별 소주 브랜드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도 이맘때쯤이다. 그러다 25도 소주가 출시된 1974년부터 수퍼에서 간단히 사다 먹는 술로 빠르게 대중화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전히 탁주(약주 포함)의 비중이 78.9%에 달했지만, 1980년대 들어 탁주 소비량은 급격히 줄고, 소주는 대중주로 자리를 잡았다. 불과 40년 만에 서민과 가장 가까운 술이 된 셈이다.
[소주 전쟁 1라운드] ‘자도주 보호’ 업고 지역별 영토 다툼
소주의 대중화가 시작된 1970년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소주 업계에선 치열한 영토 다툼이 전개됐다. 그 중심엔 ‘자도주의무구매’란 특이한 보호 규정이 있었다. 1976년 정부는 일부 업체의 시장 독점을 방지하고, 지방 소주 업체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자도주 보호 규정을 신설했다. 시도별로 1개의 업체만 소주를 생산하고, 생산량의 50%를 해당 시도에서 소비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규정 때문에 1970년 254개에 달했던 희석식 소주 제조 업체는 10년 뒤 11개로 크게 줄었다. 대신 살아남은 기업에겐 확실한 먹거리가 보장됐다. 수도권에선 진로가 이름을 날렸고, 부산은 대선, 경남은 무학, 전남은 보해가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이 규정은 1989년 한 차례 40%로 완화됐다가 1992년 완전히 폐지됐다. 그러나 3년 뒤 다시 부활했고, 1996년 헌법재판소가 ‘자도주를 50% 이상 구입하도록 한 주 세법은 자유경쟁원칙에 위배된다’며 위헌 결정을 내린 뒤에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도주 보호법 폐지를 계기로 1위 진로는 본격적으로 전국 진출에 나섰다. 1960년대까지 삼학과 치열한 선두다툼을 했던 진로는 삼학의 도산 이후 독보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95년 당시 진로의 시장점유율은 49%에 달했지만 그중 75%는 진로의 텃밭인 서울과 수도권에서 거둔 것이었다. 진로로서는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지방 소주 업체를 공략하는 게 필수 과제였다. 반대로 지역 소주 업체들은 든든한 안방을 바탕으로 수도권 진출에 나섰다.
치열한 점유율 전쟁이 예상됐지만 승부는 예상외로 쉽게 끝났다. 진로는 전국 확장에 성공한 반면 지방 업체들은 수도권 공습에 실패했다. 2000년대 초 진로가 부산·경남·전남·제주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1위로 올라섰지만 수도권에서 진로의 아성을 무너뜨린 소주 업체는 없었다. 강원도 자도주였던 경월이 1994년 출시한 그린소주로 수도권 점유율 30%선에 올라선 게 거의 유일한 성과였다.공습에 실패했다. 2000년대 초 진로가 부산·경남·전남·제주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1위로 올라섰지만 수도권에서 진로의 아성을 무너뜨린 소주 업체는 없었다. 강원도 자도주였던 경월이 1994년 출시한 그린소주로 수도권 점유율 30%선에 올라선 게 거의 유일한 성과였다.
1993년 두산에 인수된 경월은 이후 롯데주류로 주인이 바뀌었다. 롯데주류가 2006년 내놓은 ‘처음처럼’은 지금도 진로 ‘참이슬’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전국구 소주다. 소주의 맛 경쟁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다. 대부분의 제조사가 ‘우리 소주는 다르다’는 콘셉트를 내세워 앞다퉈 신제품을 내놨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전후로 수출용 또는 관광업소용 소주가 출시됐고, 1989년 진로가 종이팩 소주를 발매하는 등 용기와 병 디자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소주 전쟁 2라운드] ‘반격의 서막’ 치열한 저도주 경쟁
순조롭게 영역을 넓히게 된 진로가 패권을 장악하는 듯했지만 변수가 생겼다. 소주 시장에 저도주 열풍이 분 것. 1990년 중반 시작돼 2000년대 본격화된 저도주 경쟁은 진로의 주력 제품 ‘참이슬’의 최대 라이벌인 ‘처음처럼’이 등장하는 배경이 됐고, 다른 군소 주류 업체에게도 반격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소주 시장의 저도주 바람은 1980년대부터 감지됐다. 1985년 대선주조가 20도의 ‘순한 선’으로 저도주화를 시도한 적은 있지만 큰 반향은 일으키지 못했고, 25도가 일반적인 소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보해양조와 무학이 1992년과 1993년 알코올 도수를 파격적으로 낮춘 ‘보해 라이트’(15도), ‘무학 화이트’(15도)를 각각 출시하면서 시장의 반응을 살폈다.
1994년에는 두산경월이 ‘그린(Green)’을 선보였다. 그린은 엄밀한 의미에서 저도주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주류 업체에 긴장감을 줬다는 점에서 저도주 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제품은 당시 투명했던 기존 소주병의 색깔을 녹색으로 바꾸고 ‘대관령 청정수’를 사용해 ‘부드러운 술’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거친 향과 쓴 맛이라는 소주의 이미지에서 탈피한 것이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출시 7개월 만에 1억병이 팔려나갔다. 두산경월이 진로의 아성인 수도권 시장을 넘보기 시작한 것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린의 성장은 시장의 절대강자 진로를 움직이게 했다. 진로는 저도주의 등장에도 처음엔 다소 느슨하게 방어를 했다. 그러나 두산경월이 자사의 수도권 점유율까지 넘보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도수를 21도로 낮춘 ‘나이스’를 출시해 대항마로 내세웠다. 소주 원래의 맛을 좋아하는 기존 고객을 지키면서도 순한 술인 나이스로 두산경월의 공세를 막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중소 업체의 저도주 공세는 계속됐다. 1996년 대선주조가 부산 지역 소비자를 겨냥해 내놓은 ‘시원’이 성공을 거뒀고, 무학과 금복주·하이트주조도 차례로 ‘NEW화이트’, ‘참소주 스페셜’(이상 23도), ‘보배 20도’(20도)를 출시하며 본격적인 시장 공략에 나서, 잃었던 자도 시장의 일부분을 찾기도 했다.
저도주 경쟁 지켜보던 진로의 역습 ‘참이슬’
당시의 저도주 바람은 ‘웰빙 열풍’과 관련이 깊다. 경제 성장으로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마시고 취하는 독한 술에서, 즐길 수 있는 순한 술을 찾기 시작한 것. 다만, 엄밀히 말하면 순한 술 경쟁이라기보다 ‘좋은 술’ 경쟁이라고 보는 게 맞다. 실제로 당시 보해양조의 ‘김삿갓’과 ‘곰바우’, 금복주의 ‘독도’, 두산경월의 ‘청산리 벽계수’와 ‘청색시대’, 진로의 ‘참나무통 맑은 소주’ 등 이른바 프리미엄 소주가 연이어 출시됐다. 각종 기능성 첨가물을 포함시키고 첨단 여과공법을 적용한 소주가 등장했다. 프리미엄 소주의 식당 가격은 4000원으로 일반 소주(2000원)보다 비쌌지만 경기가 호황인 덕에 꽤 잘 팔렸다. 당시의 웰빙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 주류 업체 입장에서도 자도주 보호 규정이 사라져 무한경쟁이 시작된 상황에서 경쟁사와의 차별화를 위해 저도주, 프리미엄 소주의 개발이 절실했다.
그러나 프리미엄 소주의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7년 말 들이닥친 외환위기 때문이다. 이때 저도주 경쟁도 잠시 멈췄다. 주류 업체가 순한 소주, 프리미엄 소주 등 신제품을 공격적으로 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경기 호황이란 배경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소비가 급격히 위축되자 주류 업체도 주력 제품에 집중하는 ‘원 브랜드’ 전략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때까지도 25도 이하 소주는 주력 제품이 아니었다. 각 업체의 핵심 브랜드는 25도로 유지한 채 저도주 상품을 별도로 만들어 팔았다. 업체 입장에선 순한 술을 원하는 ‘일부’ 소비자를 위한 생산한 제품이었던 것이다. 이를 위한 마케팅 비용도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중소 주류 업체의 실험적인 저도주는 마케팅과 유통 측면에서 대형 업체에 비해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1998년 그동안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진로는 저도주 경쟁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듯이 새 브랜드 ‘참이슬’을 선보였다. 도수를 23도로 내린 저도주를 주력 제품으로 내세운 것이다. 출시한 이후 맹렬한 기세로 판촉전을 벌였다. 판매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국내 소주 사상 최단 기간, 최다 판매량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했다. 25도 이하 소주는 1997년 말 전체 소주시장의 17.8%에 머물렀으나 참이슬이 출시된 1998년 말에는 34.7%, 그 이듬해에는 과반을 넘어섰다. 그만큼 참이슬의 영향이 컸다. 덕분에 주춤했던 진로의 전국 시장점유율이 다시 절반을 넘어선 51.4%(2001년)에 이르렀다.
이는 진로의 성공이기도 했지만 다른 주류 업체에게도 ‘순한 술이 잘 팔린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더구나 값이 비싼 프리미엄 제품은 내리막이지만 웰빙 트렌드는 여전했다. 또 외환위기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었고, 마케팅 차원에서 여심(女心) 공략도 중요해졌다.
이 틈을 저도주가 채워갔다. 지방 소주 업체들은 경쟁적으로 저도주를 주력 제품으로 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진로는 맞불 작전으로 시장을 지켰다. 경쟁 업체가 22도 소주를 출시하면 참이슬도 리뉴얼을 통해 22도로 낮추는 식이다. 이로 인해 소주의 저도주화는 계속돼 참이슬은 2001년 2월 22도로, 2004년 2월에는 21도로 낮아졌다. 각 주류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순한 술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였지만 결국 참이슬을 무너뜨리진 못했다. 그렇게 2000년대 초반 진로의 독주 체제가 이어졌다.
16도 이하 참이슬·처음처럼 나올 수도
2006년 복병이 등장했다. 두산주류에서 출시한 ‘처음처럼’이다. 과거 저도주 경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경월그린의 후손 격이다. 처음처럼은 세계 최초로 알칼리 환원수를 쓰고 알코올 도수를 20도 이하로 낮췄다는 점을 강조하며 독한 술을 저어하는 여심을 파고들었다. 참이슬도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처음처럼 출시 이튿날 바로 20.1도짜리 제품을 내놔 맞대응했다. 그러나 처음처럼의 공세는 예상보다 날카로웠다. 가격정책을 병행한 때문이다.
당시 두산은 처음처럼의 공장 출고가를 730원으로 고지했다. 종래 21도였을 때 유지됐던 800원에서 무려 70원(8.75%)이 낮아진 수준이다. 영업이익의 희생을 감수한 전략이었다. 반면 참이슬 기존 21도 제품과 같은 800원을 유지했다. 이를 통해 처음처럼은 출시 당시 전국 5.2%, 수도권 7%였던 시장 점유율을 2006년 말 전국 13.7%, 수도권 22.1%로 크게 끌어올렸다.
처음처럼의 기세에 놀란 하이트진로는 같은 해 9월 19.8도짜리 ‘참이슬 후레쉬’를 출시했다. 업계에서 마지노선이라 여겨지던 20도 벽을 깬 것이다. 참이슬 후레쉬는 날카로운 처음처럼의 예봉을 꺾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미 처음처럼이 진로의 철옹성에 균열을 낸 후였다. 언제부턴가 식당에서 “소주 한 병 주세요”라고 하면 “어떤 걸로 드릴까요?”하고 되묻게 된 것이 균열의 단적인 증거다.
이후 처음처럼과 참이슬은 장군멍군 식으로 알코올 도수를 낮추고 있다. 20도로 출시된 처음처럼은 2007년 19.5도, 2012년 19도, 2014년 2월 18도로 낮춘 데 이어 지난해 11월부터 17.5도로 생산하고 있다. 참이슬 후레쉬 역시 2007년 8월 19.5도, 2012년 19도, 2014년 2월 18.5도로 낮춘 뒤 지난해 11월 17.8도로 맞췄다. 한 주류 업계 관계자는 “지방에서 16도 대인 ‘좋은데이’와 같은 소주가 잘 팔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이슬과 처음처럼도 16도 이하로 내려갈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전망했다.
[소주 전쟁 3라운드] ‘反진로’ 지방 소주의 역습
1990년부터 2000년대 중반은 저도주 경쟁으로 많은 소주 업체의 주인이 바뀐 시기기도 했다. 진로는 2005년 하이트에 인수된 뒤 하이트진로가 됐다. 두산경월은 1998년 두산주류로 사명을 바꿨다가 2009년 롯데에 인수되면서 롯데주류로 탈바꿈했다. 2000년대 초반 하이트진로의 남하를 막지 못한 지방 소주의 면면도 많이 변했다. 대전의 선양은 2013년 더 맥키스컴퍼니가 됐다. 충북의 대양은 백학, 하이트소주를 거쳐 2004년부터 충북소주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전북의 자도주인 보배는 1997년 조선맥주(현 하이트진로)에 인수된 이듬해 하이트주조로 바뀌었다가 2010년 보배라는 사명을 다시 내걸었지만 2013년 11월 하이트진로에 완전 합병되면서 사라졌다.
2000년대 초반 하이트진로의 공세를 견뎌낸 것은 주로 거리가 먼 남도 지방의 소주다. 대구·경북의 참소주(금복주), 광주·전남의 잎새주(보해), 부산의 C1(대선주조), 울산·경남의 좋은데이(무학), 제주의 한라산(한라산) 정도다. 이들은 2006년 이후 수도권에서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의 경쟁이 지속되는 동안 지방을 장악하기 위한 소규모 전투를 벌이거나 틈새를 노려 수도권 진출을 시도했다. 부산 상권을 놓고 벌인 대선과 무학의 경쟁이 대표적인 지방 전투다. 당초 대선주조의 텃밭이던 부산 소주시장에 경남의 무학이 2006년 저도주 ‘좋은데이’를 내놓으면서 도전장을 던졌다. 롯데주류도 그룹의 기반이 부산이라는 점과 프로야구 구단 롯데 자이언츠(포수 강민호가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를 내세우며 치열한 판촉전을 벌렸다. 일부에서는 시음용 소주의 무료 제공이나 주류 도매상을 통한 1+1 이벤트, 소주에 현금을 붙여주는 프로모션까지 등장했다.
결판은 2008년에 났다. 대선의 주요 주주가 사모펀드에 회사를 팔자 ‘공적 자금을 받아 회생한 기업이 부산을 등졌다’는 논란이 크게 일었고, 무학이 이 틈을 파고들어 대선을 앞지르는데 성공했다. 부산을 접수한 무학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수도권 공략을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펴고 있다. 무학뿐 아니라 지방 입지가 비교적 탄탄한 금복주·보해 등도 수도권을 잡기 위해 적극적인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금복주는 광고를 통해 전국 대형마트에서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전국구 소주’라는 이미지를 강조해 수도권 진출에 속도를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보해는 저도주 ‘아홉시반’을 출시했다. 기존 ‘잎새주’로는 지역을 공략하고 아홉시반은 전국구 제품으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이처럼 지방 소주 업체가 수도권 진출을 시도하는 이유는 전체 소주 중 40% 이상을 소비하는 수도권에서 승부를 내지 못하면 한 단계 도약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주류 업계에서는 지방 소주 업체의 서울 공략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수도권 유통망을 뚫으려면 막대한 영업비용이 필요한데, 실패할 경우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데이가 수도권에서 선전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완벽한 ‘3강 구도’로 보긴 어렵다.
희석식 소주 생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5년이 소주 대중화의 출발점이다. 이후 25도 소주가 출시된 1974년부터 빠르게 서민의 삶을 파고 들었다.
#1. ‘지글지글’ 끓는 김치찌개와 ‘칙칙칙칙’ 익어가는 삼겹살 한 점. 밥 한 공기 가득 담아 앞에 놓고, 상추 쌈도 푸짐하게 얹었다. 뭔가 허전하다. 그렇다. 요놈 없으면 서운하지. ‘똘똘똘똘’ 소주 한 잔을 가득 채워 따른다. 크게 쌈 하나 싸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다가 두 손가락으로 곱게 잡아 소주를 톡 털어 넣는다. 마저 씹고 나서 찌개 국물 한 숟갈. 누구도 부럽지 않다. 세상사가 버거워도, 울분을 토할 벗이 없어도 지금 이 순간은 괜찮다.
#2. ‘일하다가 배고픕니다, 소주 마십니다. 외롭습니다, 소주 마십니다. 힘듭니다, 소주 마십니다. 일이 남았는데 잠 쏟아집니다, 소주 마십니다. 다칩니다, 소주로 씻어내고 소주 마십니다. 선장이 지랄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선장 저도 마십니다. 동료와 시비 붙습니다, 소주 마시면서 화해합니다, 그러다 다시 싸우고 또 소주 마십니다. 여자 생각 간절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잘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안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항구로 돌아옵니다, 소주 마십니다.’ -한창훈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사람들이 소주를 마시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기분이 좋거나, 나쁘거나. 아니면 그냥. 어떤 이유든 소주는 사람을 달랜다. 가격도 싸다. 많이 안 마셔도 금방 취한다. 소주가 서민의 술이 된 이유는 꽤 명확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한 해 동안 마시는 총 주류 소비량의 40%는 소주다. 비중은 맥주가 더 크지만 한 번에 마시는 양이 소주보다 많다는 걸 고려하면 서민의 진짜 친구는 소주라고 봐야 한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한 명이 한 해 동안 약 60병의 소주를 마신다.
사실 소주가 우리네 삶과 밀착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원래 우리 조상들이 주로 먹던 술은 탁주(濁酒)와 청주(淸酒) 두 가지였다. 천년 가까이 이어진 탁주(濁酒)와 청주(淸酒)와 대결엔 승자가 없었다. 부(富)와 빈(貧)이 있었을 뿐이다. 누룩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 탁주는 서민의 술이었다. 곡식이 귀하던 시절, 멥쌀(또는 찹쌀) 한두 되면 탁주 한 동이가 금방 만들어졌다. 한 대접 크게 들이키면 취기가 돌고, 포만감까지 덤으로 얻었다. 그 덕에 뙤약볕 밑 벼 베기도 거뜬했다. 지방마다, 집집마다 맛을 내는 방법이 달라 ‘김가네 술이 최고요, 박가네 술은 덜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왕이나 귀족은 멥쌀로 만든 청주를 마시고, 백성들은 이렇게 좋은 술은 못 마시고 맛이 짙고 빛깔이 짙은 술을 마신다’(고려도경). 청주는 귀했다. ‘술독 한 항아리에서 얻는 맑은 술은 고작 너댓 병’(동국이상국집)에 불과했다. 술독 위에 맑게 뜨는 액체만 건져낸 것이니 당연했다. 왕이나 양반이 변변찮게 백성이 먹는 술을 마실 수 있나. 예나 지금이나 귀하게 걸러낸 술은 가진 자의 몫이었다. 지방마다 정성껏 만든 청주를 한양의 임금께 진상했으니 요즘 전통주라고 불리는 술의 출발점이다.
이런 양강구도를 흔들 술 제조법이 고려 말에 등장했으니, 한반도에 진출한 몽골이 전수한 소주(燒酒)였다. 소주는 글자(燒)에서 알 수 있듯 끓여서 만드는 술이다. 증류해 이슬처럼 받는다 해서 노주(露酒), 색깔이 없다 해서 백주(白酒)로도 불렸다. 몽골의 침략 당시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안동에서 만들어낸 소주가 바로 지금도 유명한 ‘안동소주’다. 지금도 이런 증류식 소주를 팔지만 대개는 비싸다. 우리가 흔히 먹는 소주는 희석식 소주다. 쌀이나 보리, 고구마 등으로 당밀을 만들고, 이를 연속식 증류기에 넣어 나온 에탄올(주정)에 물을 타 만든다. 여기에 각종 첨가물(감미료)을 섞어 맛을 내고 주정과 물의 비율로 도수를 조절한다.
희석식 소주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965년. 정부가 식량 부족을 이유로 양곡을 원료로 한 증류식 소주 생산을 금지한 때다. 서울은 ‘진로’ 대구는 ‘참’ 광주엔 ‘보해’와 같은 지역별 소주 브랜드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도 이맘때쯤이다. 그러다 25도 소주가 출시된 1974년부터 수퍼에서 간단히 사다 먹는 술로 빠르게 대중화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전히 탁주(약주 포함)의 비중이 78.9%에 달했지만, 1980년대 들어 탁주 소비량은 급격히 줄고, 소주는 대중주로 자리를 잡았다. 불과 40년 만에 서민과 가장 가까운 술이 된 셈이다.
[소주 전쟁 1라운드] ‘자도주 보호’ 업고 지역별 영토 다툼
소주의 대중화가 시작된 1970년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소주 업계에선 치열한 영토 다툼이 전개됐다. 그 중심엔 ‘자도주의무구매’란 특이한 보호 규정이 있었다. 1976년 정부는 일부 업체의 시장 독점을 방지하고, 지방 소주 업체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자도주 보호 규정을 신설했다. 시도별로 1개의 업체만 소주를 생산하고, 생산량의 50%를 해당 시도에서 소비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규정 때문에 1970년 254개에 달했던 희석식 소주 제조 업체는 10년 뒤 11개로 크게 줄었다. 대신 살아남은 기업에겐 확실한 먹거리가 보장됐다. 수도권에선 진로가 이름을 날렸고, 부산은 대선, 경남은 무학, 전남은 보해가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이 규정은 1989년 한 차례 40%로 완화됐다가 1992년 완전히 폐지됐다. 그러나 3년 뒤 다시 부활했고, 1996년 헌법재판소가 ‘자도주를 50% 이상 구입하도록 한 주 세법은 자유경쟁원칙에 위배된다’며 위헌 결정을 내린 뒤에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도주 보호법 폐지를 계기로 1위 진로는 본격적으로 전국 진출에 나섰다. 1960년대까지 삼학과 치열한 선두다툼을 했던 진로는 삼학의 도산 이후 독보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95년 당시 진로의 시장점유율은 49%에 달했지만 그중 75%는 진로의 텃밭인 서울과 수도권에서 거둔 것이었다. 진로로서는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지방 소주 업체를 공략하는 게 필수 과제였다. 반대로 지역 소주 업체들은 든든한 안방을 바탕으로 수도권 진출에 나섰다.
치열한 점유율 전쟁이 예상됐지만 승부는 예상외로 쉽게 끝났다. 진로는 전국 확장에 성공한 반면 지방 업체들은 수도권 공습에 실패했다. 2000년대 초 진로가 부산·경남·전남·제주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1위로 올라섰지만 수도권에서 진로의 아성을 무너뜨린 소주 업체는 없었다. 강원도 자도주였던 경월이 1994년 출시한 그린소주로 수도권 점유율 30%선에 올라선 게 거의 유일한 성과였다.공습에 실패했다. 2000년대 초 진로가 부산·경남·전남·제주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1위로 올라섰지만 수도권에서 진로의 아성을 무너뜨린 소주 업체는 없었다. 강원도 자도주였던 경월이 1994년 출시한 그린소주로 수도권 점유율 30%선에 올라선 게 거의 유일한 성과였다.
1993년 두산에 인수된 경월은 이후 롯데주류로 주인이 바뀌었다. 롯데주류가 2006년 내놓은 ‘처음처럼’은 지금도 진로 ‘참이슬’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전국구 소주다. 소주의 맛 경쟁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다. 대부분의 제조사가 ‘우리 소주는 다르다’는 콘셉트를 내세워 앞다퉈 신제품을 내놨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전후로 수출용 또는 관광업소용 소주가 출시됐고, 1989년 진로가 종이팩 소주를 발매하는 등 용기와 병 디자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소주 전쟁 2라운드] ‘반격의 서막’ 치열한 저도주 경쟁
순조롭게 영역을 넓히게 된 진로가 패권을 장악하는 듯했지만 변수가 생겼다. 소주 시장에 저도주 열풍이 분 것. 1990년 중반 시작돼 2000년대 본격화된 저도주 경쟁은 진로의 주력 제품 ‘참이슬’의 최대 라이벌인 ‘처음처럼’이 등장하는 배경이 됐고, 다른 군소 주류 업체에게도 반격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소주 시장의 저도주 바람은 1980년대부터 감지됐다. 1985년 대선주조가 20도의 ‘순한 선’으로 저도주화를 시도한 적은 있지만 큰 반향은 일으키지 못했고, 25도가 일반적인 소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보해양조와 무학이 1992년과 1993년 알코올 도수를 파격적으로 낮춘 ‘보해 라이트’(15도), ‘무학 화이트’(15도)를 각각 출시하면서 시장의 반응을 살폈다.
1994년에는 두산경월이 ‘그린(Green)’을 선보였다. 그린은 엄밀한 의미에서 저도주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주류 업체에 긴장감을 줬다는 점에서 저도주 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제품은 당시 투명했던 기존 소주병의 색깔을 녹색으로 바꾸고 ‘대관령 청정수’를 사용해 ‘부드러운 술’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거친 향과 쓴 맛이라는 소주의 이미지에서 탈피한 것이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출시 7개월 만에 1억병이 팔려나갔다. 두산경월이 진로의 아성인 수도권 시장을 넘보기 시작한 것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린의 성장은 시장의 절대강자 진로를 움직이게 했다. 진로는 저도주의 등장에도 처음엔 다소 느슨하게 방어를 했다. 그러나 두산경월이 자사의 수도권 점유율까지 넘보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도수를 21도로 낮춘 ‘나이스’를 출시해 대항마로 내세웠다. 소주 원래의 맛을 좋아하는 기존 고객을 지키면서도 순한 술인 나이스로 두산경월의 공세를 막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중소 업체의 저도주 공세는 계속됐다. 1996년 대선주조가 부산 지역 소비자를 겨냥해 내놓은 ‘시원’이 성공을 거뒀고, 무학과 금복주·하이트주조도 차례로 ‘NEW화이트’, ‘참소주 스페셜’(이상 23도), ‘보배 20도’(20도)를 출시하며 본격적인 시장 공략에 나서, 잃었던 자도 시장의 일부분을 찾기도 했다.
저도주 경쟁 지켜보던 진로의 역습 ‘참이슬’
당시의 저도주 바람은 ‘웰빙 열풍’과 관련이 깊다. 경제 성장으로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마시고 취하는 독한 술에서, 즐길 수 있는 순한 술을 찾기 시작한 것. 다만, 엄밀히 말하면 순한 술 경쟁이라기보다 ‘좋은 술’ 경쟁이라고 보는 게 맞다. 실제로 당시 보해양조의 ‘김삿갓’과 ‘곰바우’, 금복주의 ‘독도’, 두산경월의 ‘청산리 벽계수’와 ‘청색시대’, 진로의 ‘참나무통 맑은 소주’ 등 이른바 프리미엄 소주가 연이어 출시됐다. 각종 기능성 첨가물을 포함시키고 첨단 여과공법을 적용한 소주가 등장했다. 프리미엄 소주의 식당 가격은 4000원으로 일반 소주(2000원)보다 비쌌지만 경기가 호황인 덕에 꽤 잘 팔렸다. 당시의 웰빙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 주류 업체 입장에서도 자도주 보호 규정이 사라져 무한경쟁이 시작된 상황에서 경쟁사와의 차별화를 위해 저도주, 프리미엄 소주의 개발이 절실했다.
그러나 프리미엄 소주의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7년 말 들이닥친 외환위기 때문이다. 이때 저도주 경쟁도 잠시 멈췄다. 주류 업체가 순한 소주, 프리미엄 소주 등 신제품을 공격적으로 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경기 호황이란 배경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소비가 급격히 위축되자 주류 업체도 주력 제품에 집중하는 ‘원 브랜드’ 전략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때까지도 25도 이하 소주는 주력 제품이 아니었다. 각 업체의 핵심 브랜드는 25도로 유지한 채 저도주 상품을 별도로 만들어 팔았다. 업체 입장에선 순한 술을 원하는 ‘일부’ 소비자를 위한 생산한 제품이었던 것이다. 이를 위한 마케팅 비용도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중소 주류 업체의 실험적인 저도주는 마케팅과 유통 측면에서 대형 업체에 비해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1998년 그동안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진로는 저도주 경쟁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듯이 새 브랜드 ‘참이슬’을 선보였다. 도수를 23도로 내린 저도주를 주력 제품으로 내세운 것이다. 출시한 이후 맹렬한 기세로 판촉전을 벌였다. 판매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국내 소주 사상 최단 기간, 최다 판매량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했다. 25도 이하 소주는 1997년 말 전체 소주시장의 17.8%에 머물렀으나 참이슬이 출시된 1998년 말에는 34.7%, 그 이듬해에는 과반을 넘어섰다. 그만큼 참이슬의 영향이 컸다. 덕분에 주춤했던 진로의 전국 시장점유율이 다시 절반을 넘어선 51.4%(2001년)에 이르렀다.
이는 진로의 성공이기도 했지만 다른 주류 업체에게도 ‘순한 술이 잘 팔린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더구나 값이 비싼 프리미엄 제품은 내리막이지만 웰빙 트렌드는 여전했다. 또 외환위기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었고, 마케팅 차원에서 여심(女心) 공략도 중요해졌다.
이 틈을 저도주가 채워갔다. 지방 소주 업체들은 경쟁적으로 저도주를 주력 제품으로 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진로는 맞불 작전으로 시장을 지켰다. 경쟁 업체가 22도 소주를 출시하면 참이슬도 리뉴얼을 통해 22도로 낮추는 식이다. 이로 인해 소주의 저도주화는 계속돼 참이슬은 2001년 2월 22도로, 2004년 2월에는 21도로 낮아졌다. 각 주류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순한 술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였지만 결국 참이슬을 무너뜨리진 못했다. 그렇게 2000년대 초반 진로의 독주 체제가 이어졌다.
16도 이하 참이슬·처음처럼 나올 수도
2006년 복병이 등장했다. 두산주류에서 출시한 ‘처음처럼’이다. 과거 저도주 경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경월그린의 후손 격이다. 처음처럼은 세계 최초로 알칼리 환원수를 쓰고 알코올 도수를 20도 이하로 낮췄다는 점을 강조하며 독한 술을 저어하는 여심을 파고들었다. 참이슬도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처음처럼 출시 이튿날 바로 20.1도짜리 제품을 내놔 맞대응했다. 그러나 처음처럼의 공세는 예상보다 날카로웠다. 가격정책을 병행한 때문이다.
당시 두산은 처음처럼의 공장 출고가를 730원으로 고지했다. 종래 21도였을 때 유지됐던 800원에서 무려 70원(8.75%)이 낮아진 수준이다. 영업이익의 희생을 감수한 전략이었다. 반면 참이슬 기존 21도 제품과 같은 800원을 유지했다. 이를 통해 처음처럼은 출시 당시 전국 5.2%, 수도권 7%였던 시장 점유율을 2006년 말 전국 13.7%, 수도권 22.1%로 크게 끌어올렸다.
처음처럼의 기세에 놀란 하이트진로는 같은 해 9월 19.8도짜리 ‘참이슬 후레쉬’를 출시했다. 업계에서 마지노선이라 여겨지던 20도 벽을 깬 것이다. 참이슬 후레쉬는 날카로운 처음처럼의 예봉을 꺾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미 처음처럼이 진로의 철옹성에 균열을 낸 후였다. 언제부턴가 식당에서 “소주 한 병 주세요”라고 하면 “어떤 걸로 드릴까요?”하고 되묻게 된 것이 균열의 단적인 증거다.
이후 처음처럼과 참이슬은 장군멍군 식으로 알코올 도수를 낮추고 있다. 20도로 출시된 처음처럼은 2007년 19.5도, 2012년 19도, 2014년 2월 18도로 낮춘 데 이어 지난해 11월부터 17.5도로 생산하고 있다. 참이슬 후레쉬 역시 2007년 8월 19.5도, 2012년 19도, 2014년 2월 18.5도로 낮춘 뒤 지난해 11월 17.8도로 맞췄다. 한 주류 업계 관계자는 “지방에서 16도 대인 ‘좋은데이’와 같은 소주가 잘 팔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이슬과 처음처럼도 16도 이하로 내려갈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전망했다.
[소주 전쟁 3라운드] ‘反진로’ 지방 소주의 역습
1990년부터 2000년대 중반은 저도주 경쟁으로 많은 소주 업체의 주인이 바뀐 시기기도 했다. 진로는 2005년 하이트에 인수된 뒤 하이트진로가 됐다. 두산경월은 1998년 두산주류로 사명을 바꿨다가 2009년 롯데에 인수되면서 롯데주류로 탈바꿈했다. 2000년대 초반 하이트진로의 남하를 막지 못한 지방 소주의 면면도 많이 변했다. 대전의 선양은 2013년 더 맥키스컴퍼니가 됐다. 충북의 대양은 백학, 하이트소주를 거쳐 2004년부터 충북소주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전북의 자도주인 보배는 1997년 조선맥주(현 하이트진로)에 인수된 이듬해 하이트주조로 바뀌었다가 2010년 보배라는 사명을 다시 내걸었지만 2013년 11월 하이트진로에 완전 합병되면서 사라졌다.
2000년대 초반 하이트진로의 공세를 견뎌낸 것은 주로 거리가 먼 남도 지방의 소주다. 대구·경북의 참소주(금복주), 광주·전남의 잎새주(보해), 부산의 C1(대선주조), 울산·경남의 좋은데이(무학), 제주의 한라산(한라산) 정도다. 이들은 2006년 이후 수도권에서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의 경쟁이 지속되는 동안 지방을 장악하기 위한 소규모 전투를 벌이거나 틈새를 노려 수도권 진출을 시도했다. 부산 상권을 놓고 벌인 대선과 무학의 경쟁이 대표적인 지방 전투다. 당초 대선주조의 텃밭이던 부산 소주시장에 경남의 무학이 2006년 저도주 ‘좋은데이’를 내놓으면서 도전장을 던졌다. 롯데주류도 그룹의 기반이 부산이라는 점과 프로야구 구단 롯데 자이언츠(포수 강민호가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를 내세우며 치열한 판촉전을 벌렸다. 일부에서는 시음용 소주의 무료 제공이나 주류 도매상을 통한 1+1 이벤트, 소주에 현금을 붙여주는 프로모션까지 등장했다.
결판은 2008년에 났다. 대선의 주요 주주가 사모펀드에 회사를 팔자 ‘공적 자금을 받아 회생한 기업이 부산을 등졌다’는 논란이 크게 일었고, 무학이 이 틈을 파고들어 대선을 앞지르는데 성공했다. 부산을 접수한 무학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수도권 공략을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펴고 있다. 무학뿐 아니라 지방 입지가 비교적 탄탄한 금복주·보해 등도 수도권을 잡기 위해 적극적인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금복주는 광고를 통해 전국 대형마트에서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전국구 소주’라는 이미지를 강조해 수도권 진출에 속도를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보해는 저도주 ‘아홉시반’을 출시했다. 기존 ‘잎새주’로는 지역을 공략하고 아홉시반은 전국구 제품으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이처럼 지방 소주 업체가 수도권 진출을 시도하는 이유는 전체 소주 중 40% 이상을 소비하는 수도권에서 승부를 내지 못하면 한 단계 도약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주류 업계에서는 지방 소주 업체의 서울 공략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수도권 유통망을 뚫으려면 막대한 영업비용이 필요한데, 실패할 경우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데이가 수도권에서 선전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완벽한 ‘3강 구도’로 보긴 어렵다.
첫댓글 내용이 너무 많아 읽기 쉽지 않아.겨울엔 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