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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주일학교 운동(Sunday school,主日學校)
14세 미만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실재적인 한국주일학교의 효시는 1907년, 서울 연동교회(게일선교사)에서 조직한 “연동소아회”(小兒會)로 1914년, 921명이 참석할 정도로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소아회 교사들은 부모전도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전도하였고 이러한 성장에 자극을 받은 평양 장대현교회, 남산현교회, 선천북교회, 전주서문교회들이 소아회(주일학교)를 설립하는 등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 교육사업은 유년주일학교, 하기아동성경학교, 아동성경구락부 3대사업으로 추진되었습니다.
1893년, 감리교는 유아에서 장년층에 이르는 “주일학교연합회”를 조직하고 “히버 존스”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습니다. 주일학교(Sunday school)는 초창기 한국인들의 문맹률이 높고 소학교와 한문서당에서와 마찬가지로 연령별 구별없이 아동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함께 공부를 하였습니다. 주일학교는 유아에서부터 장년층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가 한꺼번에 성경교육을 받는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언어습득능력과 세대별 교육은 1910년 이후에 점차로 진행되었습니다. 첫해 5개의 주일학교는 1895년, 정동1개, 이화1개, 상동1개, 동대문1개, 제물포교회1개 등 6개로 발전했고, 1897년, 15개, 1898년, 28개로 성장하였습니다. 주일학교 학생수는 1893년, 133명에서 1896년, 512명, 1898년, 1,402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900년에 시작한 남감리교는 서울과 송도에 각1개씩 2개로 시작하여 1905년, 34개, 1918년, 138개, 1930년, 359개로 성장하였습니다. 주일학교 학생수도 1900년, 80명에서 1905년, 1,770명, 1918년, 5,911명, 1930년, 13,303명으로 급성장하였습니다.
감리교 “평양남산현교회”는 1896년 “노블”선교사 부부가 부임하여 한국 최초로 개인별 수준에 맞추어진 “등급별 주일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유년주일학교”는 미국교회 교재 “만국통일공과”를 번역 사용하였고, 매주 금요일 “교사교육회”를 하였으며, 1903년, 175명의 주일학교가 매주 평균 50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1907년 서울 연동교회가 “연동소아회”를 조직하여 세대별 주일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1911년, 평양남산현교회는 연동소아회보다 더욱더 세분화된 6단계의 부서를 계획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국 최초로 100명의 영유아를 위한 “영아부”(현,유치부)를 조직하였으며, 1912년, 500명으로 성장함으로서 한국의 대표적인 주일학교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1910년, 평양남산현교회 주일학교는 “영아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청년부, 장년부”로 세분화 되어 운영함으로서 현대적인 주일학교의 기본틀을 제공하였습니다.
1905년, “선교사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즉 장감연합공회를 조직하면서 “통일공과”가 주일학교에 보급되었습니다. 1907년 5월18일, “제5차 로마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윤치호를 파견하여 실행부 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국제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어 1908년 4월, 브라운(Brown,F.H.)과 해밀 선교사가 한국주일학교를 지원할 목적으로 내한을 하였습니다. 1910년 5월19일, ”제6차 워싱턴 세계주일학교대회”에서 모펫선교사가 명예부회장, 윤치호가 실행부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존스 선교사는 대회에서 강의를 하여 한국주일학교를 소개하였으며, 이승만도 회원자격으로 참석하였습니다.
1911년 4월, 세계주일학교협회 특별위원 브라운이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주일학교협회 실행위원회”를 조직하고 세계주일학교협회와 협력관계를 구축하였습니다. 남장로교 스윈흐르트(초대회장), 북장로교 홀드크로프트(총무,James G. Holdcroft,허대전), 블레어, 크로터스, 캐나다장로교 푸트, 호주장로교 맥래, 남감리교 콜리어, 북감리교 빌링스, 노블부인과 함께 한국인 대표로 윤치호(부회장), 장덕로(서기), 현순, 한석원, 남궁혁, 홍병선이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05년, 장로교감리교연합공회는 “주일학교 공과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910년 “세계통일공과”를 사용하게 되었고, 1911년, 장감연합공회 산하에 “종교교육위원회”를 13인 합의체로 설립하였습니다. 1913년 4월19일, 서울 경복궁에서 세계주일학교협회 실행부 회장 하인즈와 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14,700명의 주일학교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1913년 7월8일, “제7회 취리히 세계주일학교대회”에 감리교 신흥우가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실행부 위원에 선출되었습니다. 1919년 1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계간지 ”主日學界“(주일학계)를 발간하여 전국주일학교 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학생들을 위한 잡지와 참고서가 출판되어 전국에 보급되었습니다. 1920년, 전국주일학교는 14,000개로 성장하였고, 1921년, 서울YMCA, 태화여자관, 승동교회, 감리교중앙교회에서 2,000명의 주일학교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전국주일학교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대회에 세계주일학교연합회 지도자인 톰슨(W.T.Thompson)이 주강사로 초빙되었고, 레이시, 홀드크로프트, 클락, 남궁혁, 홍병선, 변성옥, 한석원이 강사로 연설하였습니다.
주일학교의 발전에는 불신부모들이 한몫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육의 기회가 균등하지 못한 한국에서 비록 부모가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상황에서 교회가 자녀들에 대하여 바른 교육을 해줄 수 있는 곳이라는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주일학교에서 양육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불신부모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출석하게된 자녀들로 인하여 불신부모가 교회에 등록한 사례도 적지않게 나타났습니다. 1921년, 전국주일학교는 3,899개 223,732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11월1일, 세계주일학교협회 총무 톰슨(J.V.Thompson)을 주강사로 전국주일학교 교사대표 1,000명이 참석한 승동교회와 YMCA대강당에서 순회강습회를 개최하는 동안 10,000명에 달하는 주일학교 학생들이 새롭게 입학을 하였습니다. 1922년 11월1일, 선교회와 각 기관대표 27명이 조선주일학교연합회를 결성하였고, 1930년 9월, “만국연합회”(세계주일학교협회)에 정식 가입하였습니다. 1925년 10월21일, “예수는 우리의 소망”이라는 주제로 YMCA, 종교교회당, 새문안교회당에서 “제2회 전국주일학교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주일학교 대표 2,000명이 참석한 대회에 일본 일요학교연합회 간사 콜만이 주강사로 참석하였고, 윌리엄 클락, 하디, 스톡스, 왓슨, 클라크, 홀드크로프트, 한석원, 남궁혁, 이철호, 이순기, 홍병선, 변성옥, 김준옥 등 선교사와 유학파 출신대표들이 강의에 참가하였습니다. 1927년, 로스엔젤레스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알렌 선교사(곽안련), 김관식, 이성휘를 파송하여 조선주일학교연합회와 세계주일학교협회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였습니다. 1929년 10월9일, 평양 남산현교회와 서문밖교회, 숭전대학강당에서 개최된 제3회 전국주일학교 대회에는 3,000명의 주일학교대표와 전국에서10,000명이 참석하여 성공적인 대회가 되었습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전국주일학교대회와 “주일학교통신”(1923), “주일학교잡지”(1925), “아이생활”(1926), “주일학교신보”(1929), “종교교육”(1930), “SS연합회보”(1933) 등 출판물을 통하여 주일학교 선교, 교육, 운영, 관리에 이르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하였습니다. 1930년, 주일학교는 전국 5천개, 250,000명의 학생들로 성장하였습니다. 전체 주일학교의 85%가 장로교였고 그 가운데 50%가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이었습니다. 주일학교의 성장은 1932년까지 한국주일학교 총무로 활동하였던 홀드크로프트와 부총무인 정인과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정인과 목사는 1925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와 1932년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로서 주일학교에 헌신하였고, 그후 1935년 9월, 제24회 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28년, 감리교가 별도의 “감리교종교교육협회”를 신설하고, 1933년, 장로교도 종교교육부를 독자적으로 조직하여 장로교와 감리교는 각각 별도의 주일학교 전국운동을 전개하였고 공동출판하던 주일학교 공과도 1937년, 예수교서회와 예수교장로회 종교교육부로 분리되어 출판하였습니다.
한국의 주일학교는 일반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조선인 아이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교육하고 올바른 사회지성으로 양성하는 두가지 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사회는 다자녀출산이 관습처럼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질병으로 인하여 영유아기때 사망률도 높았으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방치되는 경우도 허다하였습니다. 10세가 넘으면 집안일을 돕거나 농사일에 참여해야 하고, 농번기가 되면 학교도 중단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교육과 환경과 위생으로부터 아이들은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교회는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고 아이들에게 자기 나라언어를 일찍부터 가르치고 교육함으로서 자립(Self-Support), 자치(Self-Government), 자전(Self-Propagation)이 가능한 미래세대로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 하기아동성경학교(여름성경학교)
1922년,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정동교회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5명의 교사와 100명의 학생들로 시작한 하기아동성경학교는 1924년 3월31일, 주일학교연합회에 “하기아동성경학교위원회”를 조직하여 도마련, 홍병선, 김창준, 구자옥, 김기연, 윤치호, 래시요한, 이석낙을 실행위원회로 구성하였습니다. 세계하기아동성경학교 창설자인 보빌 총무를 초청하여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하였습니다. 하기아동성경학교는 성경을 중심으로 체육, 음악, 세계위인전, 수공, 사회봉사 등을 포함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복음과 교회와 신앙과 세상과 사회를 하나의 과정속에 연결하였습니다.감리교 연회와 장로교 총회는 하기아동성경학교를 전국 각 교회가 실시할 것을 결의하고 김기연 목사와 이보식 장로를 영입하였습니다. 1926년, 감리교 한석원 목사를 전담간사로, 1928년, 감리교 김형식 목사를 총무로 영입하여 보다 적극적인 전국운동으로 확산하였습니다. 1924년, 96개 학교, 790명의 교사, 11,000명의 학생에서 1929년, 459개 학교, 3,130명의 교사, 38,763명의 학생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931년, 800개 학교, 4,000명의 교사, 70,000명의 학생으로 성장하였고, 1932년에는 전국 1,071개의 학교에서701,786명의 학생이 수료함으로서 하기아동성경학교는 기독교 복음선교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기아동성경학교에 참여하는 불신자가 30%였고 이 가운데 결신율이 50%에 달하여 성경학교가 복음전파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을 증명하였습니다. 1920년, 하기아동성경학교는 7월25일에서 8월25일까지 1개월간 지속되었는데 성경을 중심으로 한글, 국사, 산수, 노래, 유희, 체조, 공작을 가르쳐 지역사회와 학부모들로부터 지지와 호응을 받았습니다. 1930년, 7월25일부터 8월10일까지 14일간 개최된 하기아동성경학교는 성경을 중심으로 한글, 국사, 산수, 노래, 유희, 체조, 공작을 교육하여 불신가정과 빈곤가정은 물론 일반계층에서도 많은 아동들을 교회학교에 보내주는 등 복음적 성과에 진척이 있었습니다.
1930년 2월, 숭실대학 킨슬러 교수는 학령 초과 아동의 단기교육을 위해 “아동성경구락부”(Children's Bible Clubs)를 조직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성경을 소재로 한국어 독본을 만들어 교육하고 지리, 산수, 자연 등을 가르쳐 교육받을 세대가 지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교육과 사회교육을 병행하였습니다. 1주에 5일간 매일 3시간씩 1년과정으로 교과과정을 설정하고 주 1일은 구락부의 날로 정해 건전한 신항생활을 습관화 하도록 하였습니다. 숭실대학을 중심으로 시작한 성경구락부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매년 수만명의 학생들이 구락부를 통하여 학습받았고, 이들의 70%가 불신가정이었으며 그 가운데 60%가 결신하는 것으로 확인되어 복음적 성과도 매우 높게 나타났습니다. 이와함께 미션스쿨의 숫자도 늘어나 1922년, 장로교선교회는 대학1개, 전문학교 2개, 중학교 30개, 소학 787개로 확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