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50년 7월26일 미군이 노근리 경부선 철로 위에 영동읍 주곡·임계리 주민 500여명을 “피난시켜 주겠다”며 모아놓고 무스탕 전투기로 기총 소사한 사건이다.
당시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당한 피난민들은 철교에서 뛰어내려 굴다리(노근 쌍굴)로 숨었으나 미군은 굴다리 앞 야산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29일까지 굴다리를 빠져나오는 양민을 차례로 쏘아 죽였다.
이 사건으로 영동군청에 신고된 피해자수는 사망 177명, 부상 51명, 행방불명 20명 등 248명이다.
후에 나중 미국의 발표에선 북한군으로 오인을 했다 라는 발표가있었는데
피난민을데리고 간 병산들이 미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이없는 변명이 있었대.;;
지금은 노근리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미국이 잘못을 시인했고 보상비를 줬고
지금의 평화공원이 세워진거래






AP 미 공식문서 공개이어 본보 현지증언서도 확인
한국전쟁 당시 미군측에 의해 저질러진
이른바 <노근리 학살사건>이 사실로 밝혀졌다.
미국 AP통신은 이와 관련, '노근리의 다리'라는 제목의 보도를 통해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힐 예정이다.
AP통신은 1999년 9월 27일 사고(社告)를 통해
당시 한국인 생존자들에 대한 인터뷰와 비밀해제된 국방부 문서 등을
검토한 결과 <노근리 학살사건>이 사실로 사실로 드러났다며
이 사건은 미군이 전쟁 초기 피란민을 비롯한 양민을
적군으로 취급하라(treat them as enemy)는
명령을 받았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본보 취재진이 노근리 주민들과 생존자 등을 인터뷰한 결과에 따르면
<노근리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6일 후퇴하던 미군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굴다리(쌍굴)속에
영동읍 주곡·임계리 주민 500여명을 '피란시켜주겠다'며 모아놓고
무스탕 전투기와 기관단총으로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미군은 피란 주민들을 경부선 철도를 따라 걷게 한후
무스탕 전투기를 동원, 기총소사했으며 이어 철로밑 굴다리(노근쌍굴)로
대피한 주민들을 향해 29일 새벽까지 기관총을 난사,
양민 400여명을 무차별 사살했다.
학살에 관여한 미군은 7월 20일께 미군 제24사단과 임무를 교대한
미군 제1기병사단 소속 제5기병연대였을 것으로 유족들은 추정하고 있다.
<노근리 학살사건>이 사실로 밝혀짐에 따라
그동안 끈질기게 피해보상과 사과를 요구한 유가족측의 요구에 대해
미국정부가 어떻게 대응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증언자 : 양 해 숙
<인적사항>
- ㆍ연 령 : 당시 11세
- ㆍ거 주 지 : 당시 영동읍 임계리, 현재 영동읍 회동리
- ㆍ피해정도 : 어머니 중상, 본인은 눈 실명, 할머니. 오빠. 동생 1명 사망
소개상황- 주곡리 사람들이 임계리로 피난왔다가 25일 미군들이 남쪽으로 피난 가라고 했음.
어둠 살이 질 무렵에 출발을 했었음. - 하가리 쪽으로 갈 때에 영동 쪽에서 온 피난민이 없었음, 이미 피난 간 상태였음.
- 엎드려 있어야 된다고 해서 엎드려 있으면, 차가 우루루 가는 소리가 났었고,
도로에는 불이 번쩍번쩍하는 차들이 있었음.
노숙후 - 철로상황
- 올라와서 휴대품 검사를 바로 마칠 무렵에 비행기 1대가 와서 둘러보고 갔으며, 그 다 음에 다시 1대가 나타나서 폭격을 가했음.
- 어머니가 동생 둘하고 저를 손으로 끌고 철로 옆에 있는 아카시아 밑으로 들어갔음.
- 비행기가 와서 막 퍼부으면 연기가 확 올라왔고 자갈이 바짝 올라와서 우두두 떨어졌으며 옆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음, 고종사촌 언니와 저의 식구들은 생존했음.
- 어머니는 하체를 6곳에 맞고 “아이구 나 죽겠다” 고 하셨으며, 나는 눈에 불덩어리를 맞아 눈알이 빠져 실명했음.
- 얼마 후 폭격이 끝나자 사람들이 내려가는 것을 보았으며, 어머니께 작대기를 주어다주고 손을 붙잡고 4살 동생은 뒤에 따라와 아카시아 나무쪽으로 해서 쌍굴로 갔음.
쌍굴다리 상황
- 쌍굴에 사람이 많아서 바깥에 있었으며, 자고 그 이튿날 들어간 것 같음.
- 해거름부터 시작해서 폭격(?)을 하고, 총 쏘고 뭘 때리는지 쾅쾅하고 그랬음.
바깥에 있으면 위험하니까 “가운데로 가야 산다” 고 한말을 들었음. - 물을 먹고 싶었으나 입구 쪽에 물이 있는 데로 가면 총을 쏘았음.
- 굴에서 이제 미군이 다 갔다, 갔으니까 이제 남은 사람들은 산다.
그래도 비행기 폭격 때문에 못가니 어두워지면 가라고 하는 말을 들었음. - 우리는 미군을 무서워했는데 어떻게 생겨서 그러는가 보고 싶어져서 보니, 바깥 터널도랑 쪽에 군복을 입은 2명의 미군이 서있는 것을 보았음.
- 총을 쏠 때 따다다 하는 소리가 났음, 오빠 사망, 동생 1명 사망.
증언자 : 정 구 학
<인적사항>
- ㆍ연 령 : 당시 8세
- ㆍ거 주 지 : 당시 주곡리, 현재 영동읍 계산리
- ㆍ피해정도 : 본인 총상. 어머니, 큰어머니, 사촌 누이들 사망
소개상황
- 부모님과 함께 임계리로 피난가서 1박 후 외가집으로 갈 예정이었음.
- 강변에서 숙영하던 밤에 포성이 많이 들렸음.
노숙후 - 철로상황
- 도로위에서 어머니가 냄비에 쌀을 씻고 밥을 짓는 준비했던 것과 철로 위에 있던 3~4명의 군인들이 피했던 것을 기억함.
- 얼굴이 화끈화끈하였고 이불 짐 같은 것이 타서 아수라장이 되었음.
쌍굴다리 상황
- 26일 초저녁에 미군은 밤새도록 총을 쏘아댔고 기동성 있고 건장한 남자들은 다 내뺐 음.
- 아버지와 형(형, 큰아버지 사촌형)들이 도망치고 나서 우리도 도망을 가려고 했으나 너무 총을 쏘았음. 새벽쯤 제 얼굴에 피가 주루룩 흐르는 것을 느꼈고, 총을 맞아 다리를 뒤적거렸음.
- 쌍굴다리 안에서 국방색 옷을 입은 군인 같은 사람은 보지 못했음.
- 자신 외에 큰어머니, 사촌 누이들 2명(1명은 선생)과 사촌누이의 아들ㆍ딸 2명 등 5명이 다리에 있었음. 여기에서 어머니, 큰어머니, 사촌누이들이 사망했음.
- 사촌누이들이 당시 일본어로 미군에게 “당신들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당신들이 왜 이렇게 배신하느냐. 우리 이렇게 총으로 쏴죽이지 말고, 살려 달라” 고 했음. 나는 이것을 보지 못했고 형님이 보았다고 함.
증언자 : 박 선 용
<인적사항>
- ㆍ 연 령 : 당시 25세
- ㆍ거 주 지 : 당시 주곡리, 현재 대전 서구 가수원동
- ㆍ피해정도 : 딸, 아들 사망. 본인 옆구리 총상
소개상황
- 주곡리 거주하고 있다가 소개령이 내려지자 임계리로 피난을 갔으나 그곳에 집이 몇채 안되고 좁아서 산속으로 들어갔음.
- 미군들이 부산이나 대구로 피난시켜 준다고 해서 사상이 뚜렷한 사람들은 모두 내려왔음.
노숙후 - 철로상황
- 아침에 4번 도로로 이동중에 미군이 서송원리에서 피난민을 철길로 인솔했음.
- 하가리에서 노숙할 때 일어나서 조금 돌아다니려 했던 사람은 몇 사람 죽었다고 함.
- 철로 위에서 미군은 피난민의 보따리를 앞에서 뒤까지 검사한 뒤에 무전 교신을 했음.
- 보따리 내용물은 미숫가루 옷가지 일부였음.
- 미군 감시병이 도주한 후에 즉각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렸음.
- 미군이 폭격하기 전에는 살라면 살고 죽으라면 죽을 수 있을 만큼 철썩 같이 믿었음.
쌍굴다리 상황
- 행기 폭격 시 좌측 팔 부상당하고 철로에서 미군에게 치료받은 후 바로 쌍굴로 대피했음.
- 쌍굴에 갔을 때 굴 주변에는 이미 많은 시체가 깔려 있어서 흙이 안 보였음.
- 26일 낮에 미군이 첫 번째 접근했을 때, 연대 다니는 조카가 우리는 인민군이 아니다,
양민이다 살려달라고 사정을 하니까, 미군이 “우리가 대전에서 많이 당해서 상부의 명령 이니까 할 수 없다. 다 죽이라는 명령이 있었다.” 고 답변. - 피난민 대열에 불순세력이 침투할 수가 없고, 전부 동네 사람이었음.
- 26일 낮에 쌍굴에 갔을 때 철교 위에 포탄이 떨어져서 굴을 무너뜨리려나 보다고 생각






만화가 박건웅작가의 노근리이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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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의 경부선 철교에 접근하고 있던 한국인 피난민 중에 조선인민군이 섞여 있다고 의심하여, 피난민을 철교 위에 모아 공군기로 기총소사하고, 달아나는 사람은 쫓아가서 사살한 사건입니다. 이 때문에 300여 명의 민간인이 피살되었습니다.
미군들의 은폐로 오랫동안 덮여 있었지만, 1994년에 살아남은 주민이 저서를 출판하였고, 1999년 9월 9일 AP통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29일 주한미군이 현지조사를 실시하여, 2004년에는 사건의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이 사건은 반미 감정을 높이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났던 경부선 노근리 쌍굴다리는 2003년 6월 30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