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1 – 설교문 (임보라 목사, 우리회 성평등위원회 위원장, 섬돌향린교회)
다시 새기는 부르심의 뜻
(창 3:22-24; 시 37:5-7; 롬 5:14-18; 마 18:10-14)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구분하여 정한 교회력 중 이번 주일부터 창조절이 시작됩니다. 창조절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이렇게 창조절 첫째 주일에 전국각지와 해외에 이르기까지 각처에서 생명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여교역자들을 기억하고 기도할 수 있게 되어 그 의미가 더욱 깊게 다가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지에서 이름없이 마음을 다해 섬기고 있는 여성목회자들, 그리고 여성목회자들과 함께 사역 중인 성도들께도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나눌 오늘의 성서본문은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정한 2022년 교회력을 따라 정했습니다. 올해 기장 총회 주제가 무엇인지 한번 새겨볼까요?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생명⋅치유⋅회복’입니다.
우리의 삶과 이 사회에 생명, 치유, 회복이 온전히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말씀을 새겨봅시다.
‘생전 처음으로 보는 것은 우리의 눈을 끌어 관심을 갖게 되지만 언제나 보는 자연이나 사람의 모습은 무심히 보아 넘깁니다. 그럴 때는 한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세요. 그래서 내가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이것을 처음 보게 된다는 생각으로 보면 그 보는 것이 새롭고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글쓰기 하하하, 이오덕, 164쪽)
2003년 작고하신 교사이자 어린이문학가 이오덕 선생님의 글쓰기 교육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언제나 보는 것, 익숙한 것으로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를 둘러싼 자연, 사람, 때로는 사물 중에서도 언제 봐도 늘 변함없이 똑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쁜 일상을 산다는 이유로 계절이 변하면서 산천수목의 모습이 달라지지만 한 톨만큼의 감흥도 전혀 없이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며 무심히 지나치는 날들도 많습니다.
로마서 5장의 말씀은 죽음이 지배하던 시대와 생명이 지배하는 시대의 차이를 말해줍니다. 죽음이 지배하던 시대는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이르지만, 생명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한 사람의 은혜로 선물이 넘쳐서 유죄가 아닌 무죄선언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이런 말씀조차도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하게 지나치고 맙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시대에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른다는 그 죄는 무엇일까요? 5장 19절에는 이를 ‘순종하지 않음’이라고 설명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처럼 이번엔 순종이 무엇인지 생각해볼까요? 순종의 사전적 의미는 ‘순순히 따름’입니다. 순순히 따랐느냐, 따르지 않았느냐로 죄인과 의인의 판정이 갈리고, 이에 따라 죽음과 생명이 나뉩니다. 문제는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아서 생긴 결과는 죄인 판정으로 연결되고, 한 사람이 순종한 결과는 많은 사람이 의인 판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순종이길래 한쪽은 한사람 때문에 쫄딱 망하고, 다른 한쪽은 한사람 덕에 의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중 하나인 시편 37편에는 의를 빛과 같이, 공의를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려면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라’고 우리를 격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는 것이 순순히 따르는 순종이지요.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은 주님만 의지하지 않고 다른 많은 것들에 의지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시선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한 시선들, 즉 편견, 선입견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의과 공의 대신 불의한 삶을 선택할 때가 있고 이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아담으로 대표되는 인류가 저지른 하나님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 근본적인 불순종의 죄는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30년 전쯤에는 30도만 넘어도 열대야라면서 매스컴이 호들갑을 떨던 여름 기온이 이제 30도는 일상이 되었고 일기예보에서 34도, 36도와 같은 낯선 숫자를 자주 보게 됩니다. 기후 위기는 온 생명을 잘 돌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순히 따르지 않은 불순종의 대가입니다.
이번에는 색다른 관점에서 순종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순종이 미덕이던 시대는 지났다.’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순종이 결코 나쁜 의미가 아님에도 ‘무엇을 순순히 따를 것인가?’와 같은 질문은 우리를 고민에 빠트립니다.
현재 방영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야기를 예로 들어봅니다. 재판이나 법률은 이미 정해진 틀이 정해져 있는 견고한 사고의 틀이 있습니다. 정의를 실현하는 목적이 있음에도 우영우 변호사는 법률 적용을 할 때 정해진 룰에 무조건 ‘순종’하기보다는 억울한 피해자 입장에 서서 한 번 더 고민하면서 틈새를 파고듭니다. 현상적으로는 불순종 즉, 순순히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법의 본래 목적인 ‘정의’와 ‘공정’을 세우는 결과를 낳습니다.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지금까지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 혹은 놓치고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우영우 변호사가 좋아하는 돌고래가 뛰어오르는 장면이 나오는 순간 틈새가 보입니다. 시작은 불순종으로 시작하여 결과는 새로운 순종의 길로 닿게 되고 변화를 일으킵니다.
앞에서 읽어드렸던 이오덕 선생님의 글에 나오는 것처럼 한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실까요?
편견과 선입견을 거두고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이것을 처음 보게 된다는 생각으로’ 자연과 사람과 우리 주변의 많은 사물들을 다시 보면 어떨까요? 돌고래가 뛰어오르는 장면이 보입니까? 안타깝게도 당장은 다른 것 없이 이전과 똑같이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주변을 둘러보면 어떨까요?
이제는 10대 후반이 된 교회 청소년이 어린이였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니 남자도 목사가 될 수 있어요?’ 예배 차 방문한 한 남성이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하자 깜짝 놀라며 한 말입니다. 꽤 오래 전 이야기인데 제게는 잊을 수 없는 순간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면 그 말을 듣기 바로 며칠 전 저는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도 목사가 될 수 있어요?’ ‘여성 목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고, 이렇게 만나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예요’ 여성교역자라면 종종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2022년인 지금도 여성지도력을 인정하지 않는 교단들이 있습니다. 감리교가 1930년대에 여성안수를 허락하였는데 한국인에 대한 여성안수는 1955년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은 1994년에 여성안수 헌의안을 통과시켜서 1996년에 첫 여성장로, 첫 여성목사 안수를 했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56년 여성장로 안수, 1974년 여성목사 안수가 통과되었습니다. 그보다 40년이 지난 2004년에서야 여성 안수를 가결한 기독교대한성결교회도 있습니다. 국민일보는 올 3월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 안수하지 않는 교단 3곳 “필요성에 공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합신, 고신, 3개의 교단은 여성안수 제도를 채택하지 않는 대표적인 교단입니다. 인터뷰에 응한 분들은 여성 선교사, 군목의 예를 들거나 후임자가 없어 강단이 무너지면서 여성 안수를 고려한다는 예를 들면서 5-10년 사이 변화가 생길 것을 예고했습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목사 안수가 큰 장벽을 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성 목사 안수는 하나님 창조 질서의 근간에 속한다. 성경은 여성을 목사로 세우는 것을 금한다”와 같이 성경을 그 이유로 내세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을 이유로 여성 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순순히 따르는 ‘순종’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고집을 순순히 따르라는 강요일까요?
창조절 첫째주일이자, 전국여교역자회주일인 오늘, 세번째 말씀인 창세기 3장을 주목해 봅니다. 사람의 불순종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결과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쫓겨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과 노예로 철저히 계급이 나뉘는 사회에서 고된 노동을 죄의 댓가로 이해하곤 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아담과 하와는 신뢰가 깨진 나머지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끝없이 살려고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보다 불순종한 후, 그 이유에 대한 핑계가 늘 차고도 넘칩니다. 이 불순종은 아담과 하와만이 아닌 땅까지도 저주를 받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여성지도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매우 긴 세월을 지나야 했습니다. 여교역자회주일을 통해 여성안수를 선도적으로 허용했던 우리 교단에서도 여전히 여성목회자들이 마주해야 하는 목회현장의 높은 장벽이 있음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교단 안팎으로 여성목회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한 애씀으로 새 길을 내어 왔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틀을 흔든다는 이유로 마치 불순종하는 자들처럼 여겨지고 비난을 받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그 ‘불순종’이 어떤 길을 내어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이 지배하던 시대에 스스로 ‘불순종’을 자행함으로 어떤 길을 내어왔는지 우리는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순종은 범죄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는 무조건적 순종으로 인해 생명을 거스르는 또 다른 범죄의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반면 불순종으로 오해받는 일일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쫒는 순종의 행위를 통해 생명을 얻는 결과를 나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그 때를 깨닫는 하늘의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종교가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은 종교가 권력을 포기할 때다. (중략) 종교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며, 공동체의 양심이 되고, 권력에는 도덕적 한계가 있으며 (중략) 종교의 진정한 과업인 삶을 변화시키는 일로 돌아갈 수 있다.” (하나님 이름으로 혐오하지 말라, 랍비 조너선 색스, 348쪽)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온’ (롬5:2) 여러분! 생명을 살리는 일, 삶을 변화시키는 일, 생명, 치유, 회복으로 나아가는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뜻을 새기는 오늘, 그 뜻을 구체적으로 이루기 위해 실천해야 할 과제를 마태복음을 통해 찾아보고자 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은 18장에 있는 작은 사람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실천에 있습니다.
10절에서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고 경고합니다. 업신여긴다는 것은 ‘교만한 마음에서 남을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는 행위로 본래 헬라어는 kataphroneō (카타프로네오) 즉, ‘경멸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매우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낮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 중에 여교역자라는 이유만으로 하찮게 여김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경멸의 시선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또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반대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아프다는 이유로, 내가 대도시 사람이 아니라 변방의 오지에 산다는 이유로, 또 다른 어떤 이유로 쓸데없거나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은 적이 있습니까?
‘작은 자’는 크기, 나이, 숫자, 영향력 등에 있어서 작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사회적 약자로 불릴 때도 있고, 소수자로 불릴 때도 있습니다. 소수자의 실제 의미는 단순히 적은 무리라는 의미보다는 사회의 주류가 아닌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기독교인이 소수자로 취급되지 않지만 이집트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기독교인이 소수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탄압을 받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소수자는 누구인가요?
마태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사회, 혹은 교회가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행위로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이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주 노동자, 난민, 성소수자, 북한이탈주민 등은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들입니까? 우리가 겪어왔던 부당한 차별의 경험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이들이 아닐까요? 우리는 언제든 어떤 이유로든 소수자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우리 여성교역자들은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통념으로서의 순종이 아닌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작은 사람들을 향하는 생명의 길을 내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통념이나 틀을 넘어서는 사랑의 실천으로서의 ‘불순종’은 온전한 뜻을 이루어가는 ‘순종’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순종할 때와 불순종할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 무심함이나 편견을 거두고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하는 사랑을 우리에게 덧입혀주시길 기원드리며 이제 잠잠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