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설픈 터키여행
2016년 여름, 터키에 가기로 했다.
출발 일주일 전 이스탄불에서 테러가 터졌다. 사람들이 죽고 공항이 폐쇄되었다. 가족들은 가지 말라고 했다.
아들이 말했다.
“굳이 불안한데 터키를 가야겠습니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여행은 모험이야. 남들이 안 갈 때 가는 거지.”
지금 생각하면 그 말부터 어설펐다.
여행사에 확인하니 7월 7일 출발은 가능하다고 했다. 정부가 여행 자제지역으로 지정했지만 예약을 취소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38명이 예약한 여행에 올랐고, 정작 비행기에 탄 사람은 19명이었다.
아시아나 항공기 네 좌석을 혼자 차지하고 누워서 갔다. 테러가 난 나라로 가는 비행기치고는 너무 편했다. 나는 그 편안함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11시간 뒤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공항은 의외로 평온했다.
‘별일 없네.’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곧 알게 되었다.
술탄아흐메트 광장에 도착하자 장갑차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검문검색을 거쳐 블루모스크에 들어갔다. 관광객보다 무장한 군인들이 더 눈에 띄었다.
그래도 사진은 찍었다.
여행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위험한 곳에서도 사진을 찍고, 배가 고파도 맛있는 것을 찾고, 겁이 나도 웃는다.
그런데 첫 식사부터 웃음이 나왔다.
터키에 왔으니 케밥을 기대했다. 나온 것은 빵과 수프, 샐러드, 튀김이었다.
“이게 케밥입니까?”
가이드가 웃었다.
“싼 게 비지떡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할 말이 없었다. 항공료보다도 싼 패키지 여행비를 내고 와서 최고급 음식을 기대한 내가 더 우스웠다.
싼 여행에는 싼 이유가 있었다. 여행사는 옵션관광과 쇼핑에서 부족한 것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도 여행은 계속되었다.
샤프란블루를 지나고, 카파도키아로 향했다. 새벽에는 열기구를 타러 나갔다. 7월이면 더울 줄 알고 얇은 옷만 챙겼는데, 새벽의 카파도키아는 생각보다 추웠다.
나는 덜덜 떨면서 열기구에 올랐다.
잠시 뒤 불꽃이 터지고 풍선이 천천히 하늘로 떠올랐다.
눈앞에 기암괴석이 펼쳐졌다. 땅에서 보면 기이했던 바위들이 하늘에서 보니 거대한 시간의 조각처럼 보였다.
그 순간만큼은 생각했다.
‘그래, 오길 잘했네.’
여행은 사람을 쉽게 용서하게 만든다.
조금 전까지 춥다고 투덜대던 사람도 하늘에 오르면 감탄하고, 형편없는 식사를 하고도 멋진 풍경 하나에 만족한다.
문제는 내 배였다.
여행 내내 속이 편하지 않았다. 물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커피포트도, 배탈약도 챙기지 않았다.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 여행은 작은 벌을 내린다.
그래도 나는 또 말했다.
‘여행은 계속해야지.’
안탈리아에 도착해 지중해 크루즈 옵션이 있었다. 대부분의 일행은 신청하지 않았다.
현명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몇 명만 배에 올랐다.
바다를 보며 파티를 하고 수영도 했다. 나도 젊은 시절 수영을 좀 했다는 생각에 바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물살이 생각보다 거셌다.
점점 배에서 멀어졌다.
돌아가려고 했지만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옆에는 아내가 있었다.
나만 믿고 따라온 사람이다.
그 순간부터 여행이 아니었다.
나는 구명조끼를 붙잡고 물 위에서 허우적거렸다.
‘큰일 났다.’
다행히 다시 배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당시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여행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은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가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일을 겪고도 금세 잊는다.
여행 막바지, 우리는 마켓투어를 위해 아울렛에 들렀다. 피로가 쌓일 대로 쌓였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 응급실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세 시간 가까이 의식이 없었다고 했다.
아내가 곁에 있었다.
그제야 미안했다.
터키에 오자고 고집한 것도 나였고, 여행은 모험이라고 큰소리친 것도 나였다. 그런데 정작 내가 쓰러지자 여행은 아내에게 공포가 되어버렸다.
병원에서는 통역사와 운전기사까지 붙여 나를 돌보아 주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낯선 사람들이 나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문득 ‘형제의 나라’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이 그날만큼은 역사책 속의 문장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프면 국경도 언어도 잠시 사라진다.
다행히 몇 시간 뒤 일행과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쉬린제 마을과 에페소 여행은 포기해야 했다.
여행에서 처음으로 포기라는 것을 배웠다.
마지막 일정은 트로이를 지나 그랜드 바자르였다.
해외여행을 가면 우리는 찻잔을 하나씩 샀다. 여행이 끝난 뒤 그 잔에 차를 따르면 먼 나라의 시간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드는 터키 찻잔 두 쌍을 골랐다.
80유로라고 했다.
나는 절반을 불렀다.
“40유로.”
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45.”
나는 돌아섰다.
‘잡겠지.’
그런데 잡지 않았다.
다시 돌아갔다.
“40.”
이번에는 단호했다.
“노.”
터키 사람의 자존심이 그렇게 센 줄 그때 처음 알았다.
결국 45유로를 주고 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찻잔보다 그때의 내 고집이 더 우습다.
여행 마지막 날,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았다. 배 위에서 터키 행진곡이 흘렀다. 나는 찻잔에 담긴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살아서 끝났구나.’
7박 9일.
테러도 만났고, 장갑차도 보았고, 형편없는 케밥도 먹었다. 열기구를 타고 하늘에 올랐고, 지중해에서는 죽을 뻔했고, 병원 응급실에도 누워보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또 다른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터키 군부가 이스탄불 공항과 방송국 등을 장악했다는 군사쿠데타 소식이었다.
나는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출발 전 테러를 보면서도 나는 말했다.
여행은 모험이라고.
남들이 안 갈 때 가는 거라고.
그 말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나는 용감했던 것이 아니라 무모했던 것은 아닐까.
여행은 세상을 넓혀주는 일이지만, 때로는 내가 얼마나 작은 사람인가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터키에서 나는 그것을 배웠다.
돌이켜보면 가장 어설펐던 것은 케밥도, 준비물도, 수영도 아니었다.
나 자신을 너무 믿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여행을 떠날 때면 조금 천천히 생각한다.
갈 수 있는가보다,
돌아올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한다.
터키에서 사 온 찻잔은 아직도 집에 있다.
그 잔에 차를 따르면 2016년 여름이 돌아온다.
하늘로 떠오르던 열기구와 푸른 지중해, 병원의 흰 천장, 아내의 걱정스러운 얼굴, 그리고 귀국하던 날 들었던 쿠데타 소식까지.
차는 따뜻한데,
그 여름의 기억은 아직도 서늘하다.
어설픈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 여행 이후 나는 조금 덜 무모한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