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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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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북부권문화 스크랩 의성김씨 팔오헌종택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94 12.03.12 10: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의성김씨 팔오헌종택(義城金氏 八吾軒宗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734
(원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읍 해저리 734)
건 축 주 :  김성구(金聲久)
건축시기 :  1700년
소 유 자 :  김호충(관리자 : 김호충)
문 화 재 :  봉화군 문화재자료 제445호, 2003-08-14 지정, 3동

건축 구성
의성김씨 팔오헌종택은 봉화 영주 사이의 36번 2차선 국도에서 20여 m 북쪽으로 들어앉아 있다. 밭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바깥마당이다. 따로 대문은 없다. 눈앞을 막아서는 것은 사랑채 건물이다.

사랑채 건물은 옛 목재를 거의 대부분 사용하여 말끔하게 보수를 하였다. 군데군데 새로 덧댄 목재의 색감과 옛 목재의 색감이 무리 없이 어울리기 위해서는 조금 세월이 흐를 필요가 있으리라.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서쪽 3칸 부분에는 앞으로 반 칸 규모의 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동쪽 1칸 부분은 앞쪽까지 방이 나와 있는데, 그 앞으로 마루판이 사선을 그리며 나아가 좁은 쪽마루를 만들어내고 있다.

서쪽 2칸은 방이다. 칸마다 2쪽의 방문이 마련되어 있고, 역시 2쪽씩의 여닫이 덧문이 달려 있다. 동쪽에서 첫 번째 칸은 4쪽의 큰 방문이 벽면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동쪽 두 번째 칸의 정면 벽도 역시 구조는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나와서 있고 조금 뒤로 들어앉아 있는 차이일 따름이다. 동쪽 첫째 칸이 앞으로 나오므로 두 번째 칸과의 사이에 생긴 반 칸 규모의 옆면에는 작은 2쪽 문이 달려 있다.

사랑채 건물의 서쪽으로는 반 칸 정도 뒤로 물러서서 정면 2칸, 측면 1칸의 문간채가 따로 붙어 있다. 사랑채 건물과 연결되어 있는 부분은 중문 영역이고, 그 서쪽은 1칸 규모의 방이다.

사랑채 건물의 동쪽 끝에 있는 방 앞으로 튀어나오게 가설된 쪽마루는 동쪽 건물채 영역으로까지 돌아나가도록 처리되어 있다. 동쪽 건물채는 5칸 규모이다. 5칸 중 남쪽 3칸까지 쪽마루는 돌아나간다. 네 번째 칸은 측문 영역이고, 다섯 번째 칸은 안채 건물의 동편 벽을 이루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도 앞으로 쪽마루가 덧붙여져 있다.

안채건물은 뒤에서 보면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로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앙의 2칸은 2쪽 나무판 문을 달고 있는 마루이고, 좌·우로 1칸씩은 방이다. 중문 안으로 들어가면 안마당은 사방이 서로 높이가 조금씩 다른 뜰로 둘려 있고, 굵은 모래를 깔아 풀이 많이 나지 않도록 처리되어 있다. 어쩌면 이곳의 토질이 모래 성분을 많이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안채 쪽에서 사랑채의 뒤편을 보면, 아랫부분이 반 칸 정도 일선으로 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굴뚝은 기와와 백회를 이용하여 50cm 정도 높이로 아랫부분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판으로 만든 4각 연통을 올려 세운 형식이다. 사당은 안채의 동쪽 측문을 통해 나가면 바로 눈앞을 막아선다. 사각형 모양의 높은 울타리를 짓고 들어앉았다. 사당의 문간채와 본채의 목재들은 빠짐없이 칠이 되어 있다.

현판
팔오헌(八吾軒)

안분지족하는 삶의 8가지 규범 팔오헌명(八吾軒銘) : 경오전(耕吾田 : 내 밭에서 난 식량을 먹는다.), 음오천(飮吾泉 : 내 샘의 물을 먹는다.), 채오령(採吾嶺 : 내 산에서 난 나물을 뜯어 먹는다.), 조오천(釣吾川 : 내 시내에서 낚시를 한다.), 피오편(披吾編 : 내가 엮은 책을 보고 공부를 한다.), 무오현(撫吾絃 : 내 거문고를 탄주한다.), 수오현(守吾玄 : 내 고요한 생활을 지킨다.), 종오년(終吾年 : 내 수명을 다 산다.)

문중 이야기
- 해저의 소나무 밭, 여씨에서 김씨로

전통시대에는 오늘날의 우리와 생각하는 방식이 많이 달랐다. 오늘날은 봉화 영주 사이의 36번 도로와 태백선 철도 때문에 잘려져 나갔지만, 전에는 해저마을 의성김씨 팔오헌종택에서 서쪽 방향으로부터 시작하여 남동쪽 방향을 향해 나가며 길게 소나무 숲이 조형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소나무 숲은 실제의 목적이 방수림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 지역은 내성천 물길이 휘돌아 나가는 곳으로, 홍수 때 범람의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도로 가설되었을 소나무 숲은 시대가 흘러갈수록 해저마을이 의성김씨 일문의 세거지로 확장되어 나갔던 역사와 맞물려서 재미있는 이야기 소재로 변환되기에 이른다.
원래 이곳은 의령여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기지였다. 그들이 이 지역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해저와 봉화읍 사이의 개따밭골 입구에서 호평들을 향하여 펼쳐진 산수의 모습이 한자로 여씨의 ‘여(余)’라는 글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데 이야기는 전제한다. 그 ‘여’자의 끝에 일선으로 소나무 숲이 들어서게 됨으로써 一자의 한 획이 더해져 ‘금(金)’자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고, 그것이 지력에 영향을 끼쳐 여씨 성의 퇴조, 김씨 성의 약진이라는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전국 구석구석에서 산견되지만, 여기 해저 마을에서도 우리는 그 사례 중 하나를 만날 수 있다.

관련인물
- 배출 인물

김여건(金汝鍵)
- 안분지족 하는 마음

의성김씨 팔오헌종택을 처음 지은 사람은 의성김씨 팔오헌 김성구이다. 김성구는 의성김씨 개암공파가 해저마을에 자리 잡게 한 입향조인 셈이다. 의성김문의 중시조는 첨사공(詹事公) 김용비(金龍庇)이다. 김용비는 4남을 두었는데 3남이 김영(金英)이다. 김영의 아들은 김지예(金之銳)이고, 김지예의 2남은 김용초(金用超)이다.
김용초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개국원종공신이다. 김용초의 시대에 이들, 의성김문의 한 갈래는 경기도 용인에서 낙남하여 성주로 옮겨 앉았다. 김용초는 의성김씨 세계상 13대에 속한다. 이 계열은 19대 김희삼이 4남을 둠으로써, 본격적인 번성의 길로 들어선다. 해저의 개암공파의 파조가 되는 것은 2남 김우굉이다.
개암공 김우굉은 성주를 떠나 상주 개구암(開口巖)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호 개암은 이것으로부터 기인된다. 개암공 김우굉이 상주로 이거하는 것은 배위인 남양홍씨의 친정 부근을 찾아든 탓이라 할 수 있다. 김우굉의 아들은 김득가(金得可)이고, 김득가의 아들은 김율(金?)이다.
김율은 임진왜란 때 모친을 등에 업고 피난을 다니다가 봉화의 호평(범들이) 마을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호평은 지금 해저마을 앞을 흐르는 물길 너머에 있는 너른 들이다. 김율의 2남은 김추길(金秋吉)이다. 김추길은 우복 정경세의 문인이다. 김추길의 2남이 의성김씨 팔오헌종택 김성구이다.
김성구는 자가 덕휴(德休), 호가 팔오헌이다. 팔오헌이란 앞의 기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내 밭을 일구어 먹고, 내 샘물을 마시고, 내 산에서 나물을 뜯고, 내 시내에서 고기를 낚고, 내 책을 펼쳐 보며 공부를 하고, 내 거문고를 뜯으며 즐기고, 내 그윽한 마음의 평정을 지키고, 내 수명을 다하리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안분지족하는 마음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명문이라 하겠다. 그는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사성에까지 이른다. 문집이 있다. 배위는 정부인 권씨로, 충재 권벌의 후손이다. 그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자손들이 오래 머물러 살만한 땅을 구하였는데, 그의 눈에 든 곳이 바로 해저마을이다. 김성구는 의성김씨 세계상 24대에 속한다.
김성구의 아들은 김여건(金汝鍵, 1660-1697)으로, 그의 자는 천개(天開)였다. 문과 출신으로 수찬에 이르렀다. 조덕린이 지은 행장이 있고, 이광정이 쓴 묘갈명이 있다. 그로부터 10대를 내려오면 현 종손인 김호충(金鎬忠)이 있다. 김호충의 자는 서백(恕伯), 1927년생이다. 부인은 진성이씨인데, 선산부사 이정의 주손인 이용순(李容純)의 딸이다. 차종손은 김흥원(金興源)으로, 1949년생이다.

팔오헌 김성구선생


성명 : 김성구(金聲久) , 1641년(인조 19)년 ~ 1707년(숙종 33)년
본관 : 의성(義城)
: 덕휴(德休)
: 팔오헌(八吾軒)
출신지 : 안동(安東) 내성현(乃城縣)
분묘지 : 영천(榮川) 영지산(靈芝山)에서 평은촌(平恩村) 뒷산으로 이장
입사경로 : 문과(1669년)
내관직 :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병조 참지(兵曹參知),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호조 참의(戶曹參議)
외관직 : 무안 현감(務安縣監), 여주 목사(驪州牧使), 정의 현감(旌義縣監),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평정을 잃지 않는 성품

김성구는 어려서부터 차분하고 대범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대여섯 살 때 또래 아이들과 집 근처 바위 밑에서 놀고 있었는데, 마침 벼락이 바위에 떨어졌다. 집안 식구들이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다른 아이들은 혼이 반쯤 나갔는데, 김성구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또 정의 현감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폭풍우를 만나 배가 거의 뒤집힐 뻔하였다. 같은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는데, 그만 단정하게 앉은 채로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같이 있던 임홍망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살고 죽는 것은 명에 달린 것이지, 내가 놀라서 허둥댄다고 해서 무슨 득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승지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숙직을 설 때 술이 과하여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임금이 급하게 찾았다. 옆에 있던 이들이 부축하고 조복(朝服)을 입혀주자 그가 문부를 지니고 들어갔다. 임금을 대할 때 매우 삼가는 태도로 대했으며, 글을 옮겨 쓰는데 글자가 매우 반듯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바로 취하여 쓰러졌다.
이처럼 그는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당황하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취해 있었어도 똑바른 자세가 필요로 할 때면 고도의 정신력을 발휘하여 평정을 유지하였다.
강직한 성품,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다

김성구는 관직에 나아가서는 공평무사하고 청렴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때문에 이항(李沆)은 “관직자들은 누군가의 후원을 받아 관직에 오른 자가 많지만, 김성구만은 누구의 후원 없이 청현(淸顯)에 이르렀으니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또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았으나 가사를 이유로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호를 팔오헌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팔오라는 것은, “내 밭을 갈고, 내 샘물을 마시고, 내 채마밭에서 나물을 먹고, 내 강에서 낚시질 하며, 내 거문고와 책을 뜯고 읽으면서, 분수에 맞춰 생을 마친다.[耕吾田 飮吾泉 採吾전(? +顚) 釣吾川 撫吾絃 披吾編 守吾玄 終吾年]”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처럼 그는 철저히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살아가는 삶을 살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삼찬오보(三竄五補)의 불운을 당하다

그는 언관으로 근무할 때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수찬 재직 시에는 국가재정에 관하여 각사(各司)의 비용과 내탕비(內帑費)를 줄여 진휼비에 보충하는 일과, 경사(經史)를 열심히 강론하여 치도(治道)를 구하는 일 등 수천 언의 소를 올렸고, 정언 재직 시에는 당시 형조 판서 남구만(南九萬)이 진휼비를 탕감했다고 고발하였다.
그런데 1679년(숙종 5) 장령(掌令) 재직 시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누어지면서 탁남의 견제를 받아 정의 현감의 외직으로 쫓겨남을 당했다. 이때 이봉징·이옥 등 3명은 유배당했고, 그와 이석관 등 5명은 외직으로 쫓겨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을 ‘삼찬오보’라고 하였다.

가  족

: 김율(金?)
생부 : 김추길(金秋吉)
: 전주유씨(全州柳氏) 유화(柳華)의 딸
형제 : 김성후(金聲厚)
안동 내성으로 이거 후 3대가 계속 진사에 오르다

김성구는 김우굉의 후손으로 원래 성주에 세거하던 집안이다. 그의 조부인 김율이 처음 안동부 내성현으로 이거하였고, 그와 그 아들인 김추길이 계속 진사에 올라 집안의 기초를 다졌다. 그리고 김성구까지 진사를 거쳐 문과에 올라 3대가 계속 진사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써 김성구의 집안은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특히 김성구는 부승지를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온 뒤 집을 봉화읍 석평리의 호평에서 해저로 옮기고 학록서당(鶴麓書堂)을 창건하여 후진 양성에 생애를 바쳤다.
형제간의 우애가 남다르다

그는 늘 자손들에게 잘못된 습속을 따르지 말고 형제간의 우애를 잃지 말도록 가르쳤다. 그 자신 역시 남다른 우애를 보였는데, 아이였을 때도 늘 동생을 데리고 놀다가 혹 동생이 넘어져 다치면 그를 얼싸안고 엉엉 울기까지 하였고, 동생이 일찍 죽자 그 자식들을 마치 친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다. 형님하고는 50년을 함께 살면서 한 번도 그 뜻을 어기지 않았고, 해저로 이사한 이후에는 늘 지팡이를 짚고 형님을 찾아뵈었다.
남의 흉을 보지 말아라

그는 후손들에게 다른 사람의 흉을 보지 말도록 엄하게 단속하였다. 집안의 어린 아이들 중에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말하는 아이가 있으면, 늘 “아이들은 공손함과 근신함이 중요하다. 그렇게 남을 흉보는 것을 보니 경박하고 상서롭지 못하다. 한갓 글재주가 있으면 무엇 하겠는가.” 하면서 나무라곤 하였다. 그 자신도 아무리 취해도 남의 말을 하지 않았고, 옆에서 누군가 남의 흉을 보면 묵묵부답 대꾸하지 않거나 혹은 못들은 척 하였다.
안동권씨와 혼인하여 3남 5녀를 낳다


김성구의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충정공(忠定公) 권벌(權?)의 5대손이고, 영릉 참봉(英陵參奉) 권목(權?)의 딸이다. 그녀는 19세에 시집와서 시부모 봉양과 남편 내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부귀영화를 구하지 말고 자신을 수양하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자식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네 아들의 이름은 김여건(金汝鍵)·김여용(金汝鎔)·김여당(金汝?)·김여병(金汝?)이다. 딸들은 사인(士人) 조해(趙瀣), 생원(生員) 홍서귀(洪瑞龜)와 혼인하였다.

학   문

향사 : 안동 백록사(柏麓祠)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손만웅(孫萬雄)
많은 후학을 양성하다

김성구는 원래 기억력이 좋아서 한번 암기한 것은 평생토록 잊지 않았는데, 한 번도 학문을 닦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연 학문의 성취가 남달랐는데, 간혹 동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의 교육 방법은 재주와 능력에 따라 진도를 달리하였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받고 과거에 오른 이들이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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