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릿재 들새 울음/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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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너릿재 들새 울음

추연구/ 수필가

둘째 고종 사촌 동생이 스물한 살 되던 해에 애석하게도 일찍 우리 곁을 떠났다. 1989년 12월 한겨울, 이름은 문동윤.

장흥 시절, 어려서부터 유달리 희고 고운 피부만큼 품성이 착하고 웃음이 정겨웠다. 그런데 광주로 이사해서 살 때는 어딘가 아파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주로 집에 있었다.

그러던 그해 겨울 저녁에 가족들과 TV를 보다가 사소한 채널 다툼이 있어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 뒤 방송 보도를 통해서야 마지막 행방이 고숙에게 전해졌다. 남광주에서 화순으로 넘는 너릿재 쪽 길가 큰 저수지였다.

나는 당시 서울에 있을 때라 그보다 훨씬 뒤늦게 그 보도된 당사자가 동생이었음을 알았다.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비보에 한참을 넋이 나가 있었다. 그 뒤로 한동안은 꽃가루가 찬바람에 휘말리는 날에는 문득 그 시들은 좌절에 홀로 목메곤 했다.

동생 위로는 형인 성배와 누나인 진란이 있고, 아래로 여동생 소희가 있다. 우리 집은 고모 댁 인근에 있었다. 아버지가 소식을 접하고 한승 고숙과 성배 동생, 용인 당숙과 함께 가서 화장한 뒤, 남의 문중 시향 산 양지바른 데 뿌려 놓아줬다고 한다. 철마다 제삿밥이라도 얻어먹으라는 배려로써 그 애석한 넋을 달래려는 비책이었다.

그러기까지 고모에게는 차마 누구도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들을 기다리는 모정의 애통함이 하루가 천년 같은 곡절로 깊어지자, 어느 날 부득이 굳은 입을 뗄 수밖에 없었다. 유달리 눈물 많고 정이 두터운 무자 고모는 그 순간을 어찌 감당하셨을지, 상상할 길이 없다.

그 뒤로 고모는 어떤 슬픈 일이 있더라도 눈물이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너릿재 산바람은 야속하게도 철 따라 그 산야를 춤추며 노닐었으나, 고모 가슴은 그해 긴 겨울 저수지 얼음처럼 얼어붙어 봄날이라도 여름날이라도 일생 시린 날이 되고 말았다. 그 물구덩이가 피눈물 같은 모정의 바다가 되고 말았다.

성배 동생은 말문을 닫은 속앓이가 여러 해라는 소식이 들려왔었다. 누이동생들이야 더 말해서 뭣하랴.

그런 극난한 우환 중에도 고숙과 고모는 남은 자식들을 생각하며 자포자기도 못 한 채 살아가기 위해 모진 세월을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버텨내셨다고 한다.

집을 팔아서 빚을 좀 갚고 작은 문구사를 전세로 얻어 안쪽에 사시다가 다시 빚을 얻어 도롯가에 2층 집을 지었다. 낮에 기술자들이 일을 마치고 가면 밤에는 내외가 잡부 일을 해서 가까스로 지었다고 한다. 오늘의 소태동 광주남초등학교 후문 앞, 아래층은 세놓고 위층에서 오래도록 사시면서 온갖 고생을 감내하셨다. 그러는 사이 나는 차마 찾아뵙지도 못했다.

동윤 동생이 아직 함께 있었을 때 고모 집에 가끔 들르면 동생은 작은방에 있다가 수줍은 미소로 맞아줬다. 머리숱은 맹구의 가발처럼 풋풋했는데, 방안에는 비틀스 음악의 카세트테이프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움직임의 반경은 새장 같이 단순했어도 가슴 뜨거움은 온 세상을 아우르고 있는 듯 했다. 동생이 떠난 뒤 간혹 공기가 후덥지근한 날에는 문득 그 열정의 공간이 떠올라 소스라쳤다. 그 공간에 끝내 식구들을 가둬놓고 동생은 먼 먼 창공으로 훼치고 날았음이었다.

집 앞길 건너에는 넓디넓은 학교 운동장도 있었다. 그 마당을 돌며 밤바람이라도 쏘였더라면, 그도 모자라면 동네라도 한 바퀴 돌다 보면 동트기 전에는 그 가슴 불이 넉넉히 식을 만도 했을 것을.

너릿재는 택시라도 잡아타고야 이를 만한 곳에 있었다. 몹시도 차가운 엄동에 굳이 살얼음판까지 깨치고 들어가 몸을 담갔다니, 그렇게도 감춰온 세월이 뜨거웠음이었다.

그 몇 해 전에 나는 동생을 데리고 학동교회에 한 번 다녀왔었다. ‘동생 사람 좀 만들어주라.’ 하신 고모의 말씀을 듣고 나서였다. 그리고 그날 소태동 골목 빵집에서 찐빵을 함께 먹었다. ‘많이 먹어라.’라고 권할 때마다 유별나게 양보하며 겸연쩍어 미소 짓던 동생의 하얀 볼이 찐빵 빛깔보다 뽀얗게 고왔다. 이미 속 깊고 철든 어른이었지만, 그것을 드러낼 말미는 못 가졌다.

그 한 조각의 시간이 동생과 내가 마주해 나눈 마지막 추억이었다. 그 뒤로도 객지로 돌았던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오래 안쓰럽고 한스러웠다.

몹시도 청순하고 곱게 돋은 고운 싹은 그렇듯 미처 아롱져 꽃피우지 못한 채 청천에 흩어졌다. 고운 나비 같고 힘찬 새 날갯짓처럼 훨훨 날았다.

동윤 동생은 영계 해원에 이어 축복받았다. 비로소 나는 그간 아리던 가슴 한 움큼이 녹아내렸다.

그런데 아버지가 회고록을 정리하시던 무렵, 나는 연달아 충격을 금치 못했다. 다름 아닌 증조할아버지 슬하 가계에 요절한 분이 열 명도 훨씬 넘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가 알았던 분들보다 모르고 지낸 분이 더 많았다.

직접적 원인은 굶주림과 홍역, 질환, 사고 등이었고, 역사적으로는 혹독한 탕감 역사의 제물이었다. 그 기구하고 속절없는 사연을 어떻게 낱낱이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증조할아버지가 할아버지 형제를 이끌고 고흥으로 내려가 살던 시절에 용 바위 해변 바위굴에서 은신하던 때, 할아버지 동생이 굶주림을 못 이겨 요절했다. 그 시절 강진으로 따로 떠난 큰할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살이하며 지내다가 저수지에서 익사했다. 고흥 시절 아버지 아래 넷째 되는 작은아버지와 둘째 당숙이 어려서 운명했다.

그 뒤 장흥 시절 초기인 1944년경 둘째 고모가 세 살 때 홍역을 앓다가 요절했다. 이어 1946년경 작은집 고모의 큰딸이 조사했다. 그 무렵 큰집 큰누나가 세 살 때쯤 조사했고, 1950년대 중반 그 아래 누나가 세 살 때쯤 운명했다. 그 사이 6.25 전쟁 후 둘째 큰아버지의 외동딸이 일본에서 태어나 고향에 와서 지내던 중 험한 유행성 질환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첫째 부인인 나의 큰어머니는 난산의 산고 중 끝내 아이와 함께 별세하셨다. 그리고 셋째 당숙의 손자와 둘째 아들이 조사했으며, 여러 해 전 둘째 당숙 집 육촌형 딸이 바다낚시 중 선장의 폭력으로 친구와 함께 참변을 당했다. 작은집 동생도 투병 중 떠났다.

부모님이나 집안 어른들은 이런 곡절의 사연에 관해 여쭈면 쉽사리 입을 떼시지 못했다. 그만큼 가혹하고 모진 풍진이었다. 늦게나마 천상 해원 축복에 모두 모시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 개척 시대를 거치는 동안 그 외로도 때마다 집안의 여러 혈육이 희생되었다. 살아서 남은 가족 역시 그에 버금하는 참혹한 질곡의 격동기를 헤쳐 가며 연명한 이야기가 산더미와 같다.

어느덧 아버지 세대 집안 어른들이 많이 떠나셨다. 고숙 고모는 여전히 건강을 지키며 함께하고 계셔서 감사하다. 고모는 동윤 동생을 위해 허리 굽도록 정성도 많이 들이셨다.

몹시 침통하고 스산했던 너릿재 길을 이제는 산꽃 같은 미소 머금고 넘을 수가 있게 됐다. 들새 울음이 유난한 날에는 뽐내듯 수려한 동생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더 이상 움츠림 없는 자유와 환희로 활개 치며 비틀스의 노래를 외쳐 부르며 온 하늘 무대 삼아 활보를 시작했다. 빛나게 날개 돋는 봉황의 자태로 한 쌍이 어우러져 환무를 추는 듯 정겹다.

지난한 세월에 아롱지지 못하고 시든 꽃망울들이 활짝 만개하며 결실하는 은총의 시대다. 회한을 안고 간 혈육들이 빛 된 만복의 나날에 함께할 것을 생각하면 꿈만 같다.

그로써 파란중첩의 한스러운 탕감 역사도 마침표를 찍게 됐다. 오늘과 이후 세대가 각기 꿈을 펼치며 가는 길이 대낮같기를 늘 기원한다. 올해 문선명 선생 천주성화 10주년에 임한 천운이 이 땅을 두루 굽어 살펴 길이 가호하시리라.*

추연구

호, 은등재(隱燈齋)

1961년 전남 장흥 출생

서울사회복지대학원대학교 졸업

기획출판 문영 대표

문암역사연구소 대표

심정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등단

추연구

[靑山 /임흥윤]

추연구 기획 출판 대표님
심정 문학 18호에 좋은 수필 올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수고 많으 셨습니다
귀필로 기븐일만 가득 하시길 바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