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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애지」겨울호 연재분
송수권 /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
목호(牧胡)의 난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가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종 때 제주 판관 하담(河澹)이 40여 년 전 사건을 목격자로부터듣고 기록한 글)
정월 대보름 새벌 오름 억새밭에 불을 지르며 어름비 평원을 내려다 본다. 탐라가 몽고의 국영 목마장이 된 것은 고려 원종 14년(1273)이었고 그때부터 목호(牧胡)들의 세상이 되었다. 여몽연합군에게 삼별초군이 무너지고 무려 100년의 통치를 받고나서야 공민왕 5년(1356)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반원정책을 펴면서 목호군과 수차례 충돌이 있었다.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가 네 차례나 목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서야 공민왕은 100여 척의 군선을 파견했으나 목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공민왕 23년(1374) 명(明)은 탐라에 있는 원나라의 말 2천 필을 고려에게 요구했다. 목호들은 원수의 명나라에게 말을 내줄 수 없다고 난을 일으켰다. 마침내 공민왕은 군선 314척, 정예병 2만 5605명을 최영 장군에게 주어 목호 토벌에 나섰다. 요동 정벌군이 3만 8830명인 것에 비해 이에 근접한 병력이며 당시 탐라 인구보다 많은 숫자 였다. 100여 년의 세월을 걸치면서 탐라 사람들은 어떻게 버티고 어떻게 싸워 왔을까?
또 몽골 병사가 1400~1700에 불과 했으나 수차례 고려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최영 장군은 출정 한 달 만에 명월포(현, 웅포 포구)에 진격 하자 목호군은 기병 3천과 보병으로 맞섰다. 최영은 먼저 11척의 선발대를 상륙시켰으나 모두 참패했다. 본진이 상륙하고서야 목호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밝은 오름 - 검은데기 오름 - 어름비 - 새벌 오름 - 연래(서귀포시 여래동) - 홍도(서홍동) 에까지 목호들은 밀려났고 우두머리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는 가족과 수뇌부들을 이끌고 서귀포 앞 범섬으로 탈주했다
최영은 범섬 앞 법환리 포구에 군막을 치고 전함 40척을 이어 묶어 배다리를 놓아 섬으로 건너갔다. 그래서 법환리 포구는 ‘막숙', 배를 연결한 지점을 ’배염줄이‘ 또는 ’배연줄이‘라고 부른다. 출정군이 범섬으로 건너가자 수뇌부 가운데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와 관음보(觀音保)는 벼랑으로 몸을 던져 자살하고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와 아들 3명은 붙잡혀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이로서 100여 년의 탐라 지배는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횡포는 더 극심하여 우왕 5년(1379)부터 공양왕 4년(1392)까지 13년 동안 무려 2만 필 이상의 말을 조공했다. 지금도 마불림굿이 행하여 오는 것은 말 숫자를 늘이기 위한 순전히 이 횡포 때문이었다. 한반도와 탐라의 개국, 제주인의 주체성과 자주성은 어디에 서 온 것일까?
이재수(李在守)의 난과 드레물*
1
심란한 모랫바람이 그 벌판에서 불어온다
모슬포, 그때부터 사람들은 못살포라고 불렀다
그 험란한 벌판을 동학농민군으로 참패한
동학장이들이 숨어들어와 화전민으로 땅을 일구고
지금도 그 벌판을 지나다 보면 안개 속에
일제강점기의 격납고가 유렁들처럼 엎드려 있고
감자꽃 유채꽃 파꽃들이 흐드러져 피었다
그 벌판을 지나 대정읍에서 하나밖에 없었다는
이재수의 생가 터 드레물이 보고 싶었다
육지부에서 들어온 목민관과 봉세관(捧稅官)에 따라
그 때마다 드레물은 콸콸 솟기도 하고 바닥은
마르기도 했다
이재수의 난은 그 우물바닥이 말라붙자
1901년에 일어났다
포악한 봉세관 김봉헌이 도임, 천주교 왈패들을
마름으로 채용
화전세(火田稅)와 목장전(牧場錢), 진상품은
육지부의 세금보다 세 곱을 긁어갔다
이재수 생가 터 우물바닥은 지금도 말라 있었다
2
마름으로 들어온 천주교 왈패들은
가축, 밀감나무, 계란에까지 세금을 매겼다
주민들은 견디다 못해 병귤 나무 뿌리에 독약을 부었고
민회(民會)를 조직하여 성내(城內)로 들어가 항거했다
그러나 프랑스 신부와 교도들은 이를 박해와 민란으로 규정했고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한다
평화적 시위는 무력 충돌로 번졌다
4.3 항쟁과 이재수의 난은
어쩌면 이리도 중앙정부와 외세의 항거로까지
닮은 꼴인가?
민군(民軍)은 동쪽과 서쪽에서 동진과 서진으로
제주성(城)을 공략했다
대정 관아의 말단 관리였던 이재수는
서진을 이끌었던 오대현(五大鉉)이 붙잡히자
서진의 장두로 나섰다
강우백(姜遇伯)이 이끄는 동진과 서진은
제주성 남문 밖 황사평에 진을 치고
프랑스 신부가 이끄는 무장 교도들과 10여일을 공박
성내 주민들의 봉기로 성문이 열리자
천주교도 309명을 처영시켰다
곧이어 프랑스 함대와 중앙정부군이 파견되어
민란은 수습되었다
세 명의 장두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은
서울로 압송, 교수형을 당했다
3
3개 군의 도민들은 프랑스 공사가 요구한
교민의 피해 보상금으로 4300여 원을 부담했고
제주목에서는 사망한 천주교들의 매장 터로
황사평 1만 8천평의 땅을 내주었다
지금의 천주교 공동묘지가 그 곳
이재수의 난이 일어난 지 60주년
대정 지역 유지들은 민란의 장두
세 사람을 기리는 삼의사(三義士) 비를 세웠다
지금도 시쳇말로 전해오는
개 같은 목사 위에 봉사관이란 말,
이재수의 생가 터 드레물은 아직도 말라 있었다.
*드레물: ‘우물’의 제주 방언
설 두*
뀡새기 도새기 소낭 낭밭 어멍이란 말
제주말은 귀에 설어도 아름답기만 하다.
그 중에서도 코시롱한 맛이란 말과 맨드롱이라는 말을
나는 더욱 좋아한다.
모자반을 숭숭 썰어 넣어 도새기 살을 으깬
늘냇내 나는 느름 몸국을 좋아하고
절이 잘 삭은 자리젓에서 올라오는
쿠릿한 냄새를 사랑하고
돌하르방이란 그늘진 말도 사랑한다.
성읍 민속촌 못 미쳐 낭밭이라는 도새기 집이 있고
복아장(개장국)집이 있고 깅이횟집
게우젓(전복창)집도 있고 한라성이라는 뀡 메밀집도 있다.
돈내코의 원앙 폭포를 지나면 낭밭 도새기 집
도축장에서 오랫동안 칼을 잡았다는
그 칼잡이에게 얻어먹는 설두는 산중 별미다.
좁쌀 껍데기 오매기 술 한 잔에 설두 한 점
오물거리면
도리깨장부 도리깨 열에 얻어맞은 것처럼
겨울 추위도 온 삭신에 참숯불처럼 뜨거웠다 사그러진다.
*설두(뒤): 돼지 목 뒤 부분의 목도로기에 붙은 고기토막인데 칼잡이가 한 점씩 떼어 주는 맛보기 살 이다.
*도리깨장부 도리깨 열: 곡식의 낱알을 털 때 쓰는 농기구가 도리깨인데 낱알을 때리는 회초리(열)를 달아맨 장대(손잡이)를 도리깨장부라 부르고 3-6개의 (발)열을 마음대로 돌릴 수 있도록 맨 꼭지를 도리깨 꼭지라고 부른다.
감 따는 아이들
-한림읍 금능석물원에서・2
돌 속에도 이런 세상이 숨어 있었구나
가을이 되자 감이 익고 아이들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석물원 한복판에서 웬 노인이 나무 아래 서서
아이들의 모습을 쳐다보며 희희낙락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왜 하필 감 따는 아이들이냐고 물었더니
남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쳐다보면
불끈 용정이 솟아나고 둘째 부인에게서 얻은
늘그막에 본 막내아들 생각난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불알 두 쪽이 천진난만하게 감처럼 덜렁거리고
계집아이의 감씨 같은 그것도 보여서
아들 낳는데는 최상의 방중술房中術*이란다
명장* 너스레에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까르륵 자지러지고
돌 속에서 꺼내 놓은 한 세계가
가을 동화처럼 펼쳐지는 한낮이다
*방중술房中術: 황제경皇帝經은 중국 황제들이 사용했던 비결이기도 한 동양 최고의 의술이었다
*명장: 장공익(85세, 석물원 주인)
조랑말을 타고
비오는 날 마방에서 말이 새끼를 낳으면
새끼의 몸에 평생토록 얼룩이 진다고 한다.
그래서 어미 말이 슬프게 운다고 한다.
이는 제주인 들의 조랑말에 대한 속설이다.
말 새끼는 12개월 만에 나오는데
이때 말고삐 줄을 넘으면
제주 여자도 12개월 만에 애를 낳는다고 한다.
알고 보면 말에 대한 경외심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 수 있다.
산간 지방에서 조 이삭을 빻거나
메밀가루를 빻는 일도 조랑말이
그 연자매를 돌렸다.
연동주유소 가까이 있는 고수목마에서
일본 관광인들 틈에 끼어 나도 말고기를 든다.
말뼛가루 말재골 마사지 말스테이크 말피
지라와 간까지
구마모토 정식 코스를 들고 나서 효도관광 기념품으로
골다공증에 좋다는 말뼈를 사들고 가는 그들 틈에 끼어서
마불림굿*으로 조랑말 말총갓을 쓰고
나도 한번 우쭐거리고 싶어진다
*마불림굿: 지루한 장마가 끝나면 말(馬)의 숫자를 불어나게
해달라고 하는 굿
암소는 금방 엉거주춤 무릎을 꺾고 궁둥이를 땅에다 깔았다
경련을 일으킨 풀밭이 통째로 흔들리고 어디선가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낮게 낮게 들려왔다
*쇠좆메:소의 성기로 만든 방망이(옛날 육방관속(나졸)들이 차고 다녔던 방망이)
*곡두: 실제로는 없는 사람이나 사물이 환상으로 보이다가 사라져 버리는 착시현상
*마불림 굿: 말이 건강하고 숫자가 불어나라고 울리는 전통적인 맞이굿
*빙떡: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번철이나 프라이팬 따위에 얇게
펴서 부친 것 위에 양념한 무채 소를 넣고 말아서 지진 떡
*식개(식(食皆) 떡: 식개는 모두 모여서 먹는다는 뜻(마을공동체)
*걸명:제사가 끝나고 그 음식 일부를 사립에 뿌려서 잡신을 먹이는 일(사물)
*까마귀와 까치:제주의 텃새는 원래 까마귀였으나 아시아나항공이 취항하면서
그 기념으로 까치 200쌍을 방류한 것이 지금은 역세권으로 까마귀가 밀려 났음
*먼길 오젠 허난 속았수다: 먼길 오느라 엄청 수고하셨습니다.
4.3 가족 묘지라는 푯말 하나가 다시 눈시울을 적신다.
*들병이: 남사당패에 끼어 있는 여사당패로 놀이마당을 트기 위해 마을 부잣집에 들어 몸을 팔았던 여자.
애월읍 어음리 사람들이 숨어 있는 지하 땅굴 하나가 발각되었다
어음리에 진압군들의 소개령이 내린 것은 1948년 10월 경
한라산으로 쏟아져 들어왔어요 굴 속에서 우리도 어쩔 수
겨우 이틀만에 살아 나온 것입니다. 이는 2001년 6월 22일에
*빌레못굴: 천연기념물 342호(용암동굴) 1만 1천 749미터의 세계 최장 동굴
청개구리 한 마리가 올라앉아 두 눈알을 껌벅이고 있었다.
석 달 이상만 되면 샘물처럼 오히려 물맛이 좋아진다고 한다.
* 1945년 8월 현재 인구 23만이던 제주도에 7만5천여 명의 일본군 병력이 들어와 주둔,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결사 항전으로 제주도는 전역을 요새화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