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6장 인간의 타락, 죄, 형벌에 관하여
1항 우리의 첫 조상은 사탄의 간계와 시험에 의해 유혹을 받아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죄를 범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결정에 따라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이 같은 죄를 허용하기를 기뻐하셨다.
1. 타락, 역사적 사건
죄는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신비입니다. 성경은 죄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기원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영적 존재, 사람, 심지어 하나님이 죄의 기원임을 설명하는 다양한 시도가 있지만 어느 것도 완전한 답변이 아닙니다. 죄가 타락한 천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나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가 다 선한 그때 대체 죄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침묵하는 것에 대해 멈출 수 있어야 하고 겸손히 모른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죄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왜냐하면 죄는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본성적인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으셨을 때 그들에게 어떤 죄악도 없었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에게 심히 낯설어서 죄가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 어떤 죄악도 죄악으로 인한 그 어떤 증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지적인 감정적인 그리고 도덕적 수준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죄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죄를 지니고 있었다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그러나 진화론과 자연과학의 영향으로 인해 죄를 타고난 본성적 문제로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죄는 역사적인 사건이고 이 사건으로 인한 본성의 타락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 또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해결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가? 선악과를 둘러싼 타락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뱀과 사탄을 동일시 합니다. 사탄은 뱀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습니다. 이 지점은 우리로서는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사탄의 미끼를 덥석 물었다고 보는 것은 명확한 답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유의지가 있지만 이것은 무한대의 자율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가 제한적이라면 과연 자유의지가 참되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변에 치우치고 그것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변적인 답변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죄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이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사탄이 한 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의 인격적 관계를 파탄 내는 거였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발생한 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하는 인격적 관계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것에 도전합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무한한 자율적 존재가 되기를 권합니다. 그렇게 사탄은 아담과 하와가 반역자가 되기를 유도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발생한 죄에 대한 가장 근원적 해결책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회복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회복은 당연히 말씀에 대한 믿음의 회복이기도 합니다. 그 점 때문에 구원은 오로지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얻을 수 있고 그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며 말씀에 대한 순종이듯이 같은 믿음과 순종이 신자인 우리에게도 요구됩니다.
2. 타락, 최고의 역설적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계획하셨고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기쁨이라는 말은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만약 우리라면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게 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와 계획에 미치지 못하실 정도의 분이신가?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식의 관점은 사탄의 유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왜 사람의 타락이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이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기쁨이 된다는 건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직관적, 다시 말해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해도 생각해 볼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무서운 것이지만 죄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 그리고 피조물의 한계를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죄는 분명 우리 자신을 바르게 알게 하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어야 한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듯이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악이라는 고통을 유발하고 이것은 우리를 겸비하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더 성숙한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더 분명해집니다. 이 영광을 위해 하나님은 죄를 허락하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죄가 허용적이라 가르칩니다. 이 부분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허용이라는 말은 마지못해 허락하셨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허용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 무능력하시거나 어쩌지 못하셔서 그렇게 역사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의 자녀로 고생해 보지 않고 철없이 사는 것보다 왕의 자녀이지만 자녀에게 훈련과 고생의 연단을 허락하는 것이 지혜롭고 선한 왕일 것입니다. 그래야 훗날 좋은 왕이 되어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온 세상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우리도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가 완전하지 않다고 해도 어느 정도 통찰력을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사처럼 지으신 것이 아니라 자녀로 지으셨습니다. 기계적인 순종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지위와 권위와 능력이 주어져 있고 온 세상을 다스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2항 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래의 의(원의)를 잃어버렸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끊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죄로 죽은 자가 되었고 영혼과 몸의 모든 기능들과 부분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졌다.
1. 전적부패
죄로 인해 인간 본성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그것을 네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원의를 잃었습니다. 원의란? 하나님의 형상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좁게 혹은 넓은 관점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좁은 관점으로는 의와 거룩함과 참된 지식입니다. 이 좁은 의미인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넓은 범주에서는 좁은 의미의 하나님 형상을 제외한 양심, 이성, 오성과 같은 것만이 아니라 몸을 포함한 전인에 해당합니다. 이 넓은 범주에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으나 너무 심각하게 손상을 입어 바르게 기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의롭지 못하며 부정하고 거짓됩니다. 그렇다고 죄로 인해 그 어떤 선한 일도 하지 못한다는 건 아닙니다. 전적 부패란?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의 파괴로 인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이를 수 없으며 거룩함은 회를 칠한 무덤이고 진실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거짓이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인간은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성과 양심이 감정에 호소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은 끊임없이 속이며 이성과 양심마저도 손상을 입어 항상 왜곡됩니다. 따라서 두 번째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됩니다. 불의와 부정과 거짓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타락의 상태는 하나님과 분리되고 그 분리된 상태조차 깨닫지 못하는 세 번째 죽은 상태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밖에서 진리를 외치고 듣기를 바라지만 들을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죄가 가져다준 사람의 비참함입니다.
죄로 인해 본성은 변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에 대해 살아 있었다면 죄로 인해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 엄청난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나 죽은 자는 인식하지 못하듯 그 차이를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바로 이러한 전적인 타락으로 인해 사람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것을 전적인 무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과 종교는 이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려 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문제를 의지의 문제나 혹은 아직 진화되지 못한 짐승의 본능의 탓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죄는 덮어둔 채 그 위에다 중용, 인의예지, 혹은 고행과 해탈, 무상무념의 세계 또는 선행과 윤회, 진화론과 자연과학과 같은 다양한 것으로 덮어버립니다. 이 모든 관점은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변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하며 이에 대한 가장 명확한 설명은 오직 성경만이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참 신자는 죄의 문제를 바르게 자각할 수밖에 없으며 죄의 문제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형식적으로 기독교 교인이라 해도 타종교나 사상을 따르는 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질문
1. 원의, 본래의 의란 무엇입니까?
2. 그리스도를 알기 전과 알고 난 후 나에게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3. 죄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느낍니까? 그럴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4. 신자라고 하면서 죄에 대한 자각이 없는 이들은 왜 그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