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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세 명의 아이들에게 운동화도 사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중고 세탁기를 팔겠다는 집을 찾았습니다. 집은 대단히 크고 웅장했습니다. 최고급 가구들과 주방 시설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어렵게 사는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니 처량했습니다. 울컥했습니다. 세탁기를 들고 나오면서 주인 부부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중고 세탁기를 구입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두 아들이 얼마나 개구쟁이인지 신발이 남아나지를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주인 여자가 갑자기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주인 남자의 설명에 따르면, 부부에게는 딸이 한 명 있었습니다. 태어난 이후 십이 년 동안 한발자국도 걸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신발을 신을 일도 없었습니다. 주인 여자는 그런 자신의 딸이 생각나서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현관에 놓여있는 아들들의 낡은 운동화를 한참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아보며 회개했습니다. 건강한 아이들을 생각하며 감사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러시아 대문호Tolstoy의 “악마와 빵 한 조각”이라는 단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난한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밭으로 나갔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시장기가 돌 때면 미리 준비해 온 빵 한 조각을 먹었습니다. 하루는 빵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농부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악마가 한 짓이었습니다. 농부는 죄를 짓기는커녕 오히려 “오늘 하루 굶는다고 해서 죽지는 않겠지. 누구든지 필요한 사람이 가져갔을 거야. 그 사람이라도 잘 먹으면 좋겠다.”라고 축복했습니다. 자신은 물로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악마는 전략을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농부의 빵을 훔쳐가는 대신 소출을 충분히 늘려주었습니다.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가 찾아와도 전혀 상관없이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충분히 먹고 남은 곡식으로는 술을 빚으라고 부추겼습니다. 동시에 그동안 허기를 달래주던 양식은 쾌락의 도구로 바뀌었습니다. 농부는 친구들을 불러서 먹고 마셨습니다. 즐겼습니다. 술자리가 파할 때쯤이면 인간의 모습은 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단단히 묶여 있었던 온갖 사나운 짐승들이 뛰쳐나왔습니다. 마음이 달라지자 완전히 다른 삶이 펼쳐졌습니다. 그吳圭原는 “어둠은 자세히 봐도 역시 어둡다.”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1
어둠이 내 코앞, 내 귀 앞, 내 눈앞에 있다.
어둠은 역시 자세히 봐도 어둡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말장난이라고 나를 욕한다.
그러나 어둠은 자세히 봐도 역시 어둡다.
어둠을 자세히 보면 어둠의 코도 역시 어둡고
눈도 귀도 어둡다.
어둠을 자세히 보는 방법은 스스로 어둠이 되는
길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둠을 자세히 보는 방법은 거리를 두는 길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어둠을 자세히 보는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어둠이 어두운 게 아니라
어두운 게 어둠이라는 사실이다.
2
어두운 게 어둠이므로 어두운 날 본 모든 것은 어둠이다.
어두운 게 어둠이므로 어두운 날 본 꽃도 사랑도
청춘도 어둠이고
어두운 게 어둠이므로 어두운 날 본 태양도 어둠이다.
그러니까 어두운 것으로 뭉친 어둠은 어둡지 않는 날
봐도 역시 어둡다.
...
그는 어두운 날 본 것들은 아름다운 꽃도, 마음을 설레고 두근거리게 만드는 사랑도, 활기가 넘치는 청춘도, 천지를 비추는 태양도 어둡다고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똑같은 상황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환호성을 지르는 감사의 제목이 될 수도 있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게 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편, 환호성을 지르며 감사했던 상황이 오히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울 기력조차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상황이 오히려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위한 전주곡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장의 성공이 내일의 화근禍根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당장의 성공 앞에서 흥분합니다. 기뻐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장의 실패가 내일의 선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하지 못합니다. 당장의 실패 앞에서 의기소침해 집니다. 무기력해집니다. 절망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이들의 삶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Helmut Thielicke는 20C를 대표하는 반체제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적인 양심을 지켰습니다.
나치의 공포 정치, 삶의 터전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는 연합군의 시도 때도 없는 공습,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과 소망과 감사와 찬송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모든 일의 궁극적 결과 되시는 하나님, 모든 인생의 궁극적 종착점 되시는 하나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을 바라보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만나게 되는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사람은 하나같이 감사의 조건입니다. 찬송의 조건입니다.
만사의 궁극적 원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선으로 바꿔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2023년 한 해 동안 값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추수감사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과연 주어진 삶을 누구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지극히 이기적이고 스스로를 다시는 돌이키기 어려운 파멸로 몰아붙이는 자신입니까? 허락하신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사람이 반드시 선으로 마무리 될 수 있도록 쉬지 않고 일해주시는 하나님입니까?
선지자는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다.”(욜1:4)라고 외쳤습니다. “메뚜기הארבה(아르베)” 떼가 엄습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천지를 시꺼멓게 완전히 뒤덮어버릴 정도였습니다. “팟종이והגזם(가잠)” 떼가 뒤를 이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모두 다 잘라버렸습니다. “황충이הילק(옐레크)” 떼가 뒤를 따랐습니다. 쉬지 않고 게걸스럽게 갉아 먹어치웠습니다. “느치והחסיל(하씰)” 떼로 이어졌습니다. 아예 끝장을 내버릴 기세였습니다.
똑같은 메뚜기 떼였지만 습격하는 모습은 각기 달랐습니다. 나타나는 양상樣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메뚜기 떼들이 지나간 지역은 남아나는 것이 아예 없었습니다. 말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욜1:7),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끊어졌고 여호와 앞에서 섬기고 있는 제사장은 슬퍼하고 있다.”(욜1:9)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을 때 누렸던 부귀와 영화는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짐승은 물론 사람들이 먹을 양식도 없었습니다. 비록 지극히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지만 매일 반복되고 있었던 제사마저도 드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진멸 직전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바람 앞에 놓인 등불 같은 위기였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라.”(욜2:12b-13a)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이제라도 회개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눈 가리며 아웅 하듯 형식적으로만 회개하는 척하지 말고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당신께로 돌아오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는 분이시다.”(욜2:13b)라는 증거대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십니다. 자비로우십니다. 쉽게 노하지 않으십니다. 인애가 크십니다. 줏대 없이 마음이 너무나 약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스스로 감수해 가면서까지 뜻을 돌이키는 분이십니다.
당연히 전심으로 회개하는 당신 백성을 기꺼이 용서해주십니다. “금식하라.”는 구절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불나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스로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던 성민 이스라엘을 모른 척 버려두신 데에는 그들을 위한 거룩한 목적이 있었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밥 먹듯 저지르고 있던 죄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깨달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죄의 결과가 주어지는지 정확하게 깨달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회개하고 죄로부터 돌아서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였습니다. 마침내 성민답게 구별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삶속에서 벌어지는 무수히 많은 일들 가운데 우연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라.”(욜2:21),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욜2:23a)라고 이어집니다. “땅אֲדָמָה(아다마)”은 단순한 땅אֶרֶץ(에레츠)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생존을 위한 근거를 가리킵니다. 땅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완벽한 회복입니다. 땅의 완벽한 회복은 생존권의 완전한 확보로 이어집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존재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금식하며 회개하는 당신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인애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뜻을 돌이켜 주셨습니다. 기꺼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곧 위대한 일Great things을 행하셨습니다. 잃어버렸던 땅을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진멸되어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에 담보擔保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성민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당신의 통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시온으로 거룩하게 구별해 주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아니 아예 포기하고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행하여 주셨습니다.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어 주셨습니다. 무화과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포도 열매는 달리지 않았습니다. 올리브 농사는 망했습니다. 밭곡식은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양떼는 간데없었습니다.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 안에서 환호성을 지르겠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 뛰겠습니다.”(합3:18)라고 외쳤습니다. 남 왕국 유다에 내려질 징계가 완벽한 진멸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진정한 부흥을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흥은 자아의 완벽한 실현이 아니라 오히려 죄 된 자아의 완벽한 몰락과 함께 하나님의 완벽한 지배를 받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와 하나님이 완벽한 하나Cling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당신 백성이 견디기 힘든 고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피눈물을 흘리며 지켜보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큰 힘과 위로와 용기를 주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한편, 선지자는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욜2:18)라고 외쳤습니다. “극진히 사랑하다.”를 직역하면 “중심이 뜨겁다.”입니다. “열심을 내다, 질투하다” 등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미완료는 물론 과거형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언적 과거로 본다면, 미래에 이루어질 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장차 누구나 다 알 수 있도록 반드시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열심을 가리킵니다. 당신의 전부를 다 쏟아 부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한 희생 제물로 기꺼이 내놓으신 것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질투할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능력 전부를 다 쏟아 부으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놓으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곧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사망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끊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창세전 작정을 반드시, 완벽하게 이루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선지자는 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가 나라들 가운데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욜2:19)라고 외쳤습니다. 회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곡식은 소멸되리라고 선포하셨던 실제로 소멸되기도 하였던 바로 그 곡식입니다. 새 포도주와 기름도 마찬가지입니다.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께서 소멸되었던 바로 그 소출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일한 만큼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누구에게도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죄와 불신앙으로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을 흡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충분히 회복시켜 주십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저는 센터에서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는 편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끔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을 듣기도합니다.
월급을 더 주거나 특별한 대우를 해주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때 저는 센터가 일한 만큼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꼭 챙겨주실 것이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을 충분히 챙겨주십니다. “내가 북쪽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앞의 부대는 동해로, 그 뒤의 부대는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욜2:20a)라는 증거대로, 강력한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평안하게 보호해주십니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욜2:23b)라는 증거대로, 때에 꼭 맞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욜2:27)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백성과 영원히 함께 동행 하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당신이 실제로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우상은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고 누릴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큰 복입니다. 한 현자賢者는 “...감사하는 마음이 죽었다면, 그 사람은...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했습니다. 근대 인도의 시인인 동시에 종교 개혁가였던 그Devendranath Tagore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을 결정하게 되어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라고 외쳤습니다.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어떤 사정이나 형편에 놓이게 되든지 절대로 원망하거나 불평을 늘어놓지 말고 반드시, 무조건 감사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쳤습니다. 유일하고도 궁극적이며 또 영원한 감사의 조건은 천문학적으로 많이 쌓아둔 부副가 아닙니다. 무수히 사람들이 따르며 존경하게 만들어주는 명예名譽도 아닙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강력한 권세도 아닙니다. 지극히 이기적이면서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저와 여러분도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도 결단코 한 치의 변함도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완벽하게 이루어주시기 위하여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하나님입니다. 어떤 자격이나 조건도 갖추지 못한, 오히려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저와 여러분에게 세상 그 무엇으로도 끊어놓을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값없이 부어주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나는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b), “내가 결단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b)라는 약속대로, 오늘 다른Another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간과하지 말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든 상황을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주권과 누구도 감히 예측할 수 없는 탁월한 섭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결코 바라지 않는 힘겨운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사람을 만나게 된다할지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감사의 조건으로 삼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소중한 사람들에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범사 곧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사람을 감사의 이유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자신을 역사 이래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는 감사절, 언젠가는 반드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세상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할 수 있는 감사절, 오직 하나님께만 어울리는 진실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복된 감사절을 보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