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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 13
더 좋은 제물! 예수님
(히 9:1~28)
히브리서의 첫 두 장이 일련의 영광스러운 확증들로써 그리스도의 위격(person)을 제시하였듯이, 8장부터 10:18절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가 성취하신 영광스러운 사업(work)을 설명한다. 먼저 천사들과 대조하면서 예수님의 위격(位格)을 높였듯이 여기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열등한 동물의 희생 제물들과 대조하여 제시한다. 그리스도를 동물들과 대조한다는 자체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동물의 죽음과는 질적으로 다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에 합당하다. 꽤 긴 설명이 이어지지만 요는 이것이다. 난제중의 난제는 죄인데, 그 죄를 정결케 하기위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그래서 어떤 결과가 발생되었는지를 바울은 히브리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성소제도를 통하여 밝히면서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원한 구속을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사업의 비유에 불과하였던 것임을 강조한다.
A. 본문의 이해
1. 좋은 피의 두 가지 약점(1~10절)
“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바울은 첫 다섯 절에서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5절)고 잘라말하면서 모세의 성소에 대하여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난감한 사실은 4절에서 금향로(금향단)가 언약궤와 함께 지성소에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잘못 위치된 향단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사람들이 무진 애를 썼지만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 대목이다.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차이나 착오처럼 이 부분도 단순한 저자의 착오로 볼 수도 있겠으나, 한 가지 가능한 성경적 설명은 열왕기상 6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16절에 보면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지성소를 ‘내소’라고 불렀는데(성소는 ‘외소’라 함) 22절에는 “온 전을 금으로 입히기를 마치고 내소(지성소)에 속한 단(향단/ 법궤는 단이 아님)의 전부를 금으로 입혔더라.” 즉, 금향단은 비록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휘장 앞인 성소에 위치해 있었지만, 그 성격상 지성소에 속했다고 본 것이다. 성경은 그 목적에 오류는 있을 수 없으나, 기술(記述) 방법에는 착오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인간들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화잇도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성경은 어떤 장엄한 초인간적인 언어로 꾸며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처하여 있는 그 위치에 이르시기 위하여 인성을 쓰셨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야만 하였다.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은 불완전하다. 같은 말로써 뜻이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표현을 할 수 있다. 각기 뚜렷한 사상을 표현함에 있어서 한마디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1기별, 20).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의 목적은 옛 성소제도의 두 가지 근본적인 부적합성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즉, (1) 한정된 접근과 (2) 한정된 정결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들은 매일 정규적인 봉사를 성소에서 수행했으나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차례 지성소에 한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성소의 다양한 희생 제물들과 먹고 마시는 예식들과 씻는 예식은 한정된 예식적 정결만 제공하였지 그것들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9절)었다. 옛 것은 나쁘지 않았고 ‘좋은 피’였으나 이런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2. 더 좋은 피의 유익(11~22절)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바울이 여기서 강조한 요지는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이다. 그렇다면 더 좋은 피요 언약의 피인 그리스도의 피가 끼친 효력은 무엇인가?
(1) 죄의 정결 즉, “영원한 속죄”(12절)이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양심으로 죽은 행실을 깨끗하게”(14절) 한다. 인간의 영원한 딜레마인 부정을 정결케 하는 길은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2)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14절) 하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와 동물의 피의 또 다른 차이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새 언약의 백성이 되면 하나님의 율법이 내 마음에 새겨지게 되는데 이는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신다는 뜻이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그분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빌 2:13)신다.
(3)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15절)신다. 마치 유언한 자가 죽어야 유언의 효력이 발생하듯이, 십자가에 죽으사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약속된 영원한 유업을 얻게 하였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피는 그의 “피 뿌림을 얻”(벧전 1:2)은 자들에게 “영원한 속죄(12절)”와 “영원한 성령(14절)” 그리고 “영원한 기업”(15절)을 주시는 ‘더 좋은 피’다.
3. 더 좋은 피의 결론(23~28절)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여기서 바울은 “그러므로”라는 결론을 설파한다.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재림성도들에게 익숙한 주제인 ‘하늘 성소의 정결’이다. 사실 바울의 언급은 거룩한 하늘에 무언가 정결케 해야 할 부정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므로 이상하게 들린다. 하지만 바울은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23절) 동물의 피보다 더 좋은 제물로 정결케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단언한다. 바울의 결론적 언급은 대속죄일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대제사장이 7월 10일 대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갈 때,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성소를 정결케 하고, 백성들의 죄를 정결케 하였듯이, 지상성소의 원형인 하늘성소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드려 흘리신 피로 정결케 하시기 위하여 참 하늘에 들어가셨다. 또한 옛 언약의 대제사장들이 정결케 하는 사역을 마치고 지성소에 나온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늘 지성소에서 언젠가 나오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28절)실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늘 지성소에 언제 들어가시며, 언제 나오시는가? 성경 연구자들은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하여 간혹 쓸데없는 추측을 남발하였다. 분명한 것은 두 시기에 대하여 바울은 본서에서 어떠한 힌트도 주지 않는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를 정결케 하시기 위하여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실 필요가 있었으며, 지성소를 나와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 것에 대하여 확실하게 단언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재림교회는 예언서인 다니엘 8:14절에서 첫 번째 시기에 대한 힌트를 발견하였다.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성소의 정결은 대제사장의 지성소 입장과 퇴장으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만약 이 예언이 퇴장, 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선언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지성소로 입장하심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재림교회는 성경에서 가장 긴 예언 기간인 2,300주야를 성경적으로 해석한 후, 그리스도께서 하늘 지성소 봉사를 1844년에 시작하셨다고 결론지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의 대속죄일 기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옛 언약의 대속죄일이 참으로 엄숙한 날이었듯이, 이는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가르쳐준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12).
B. 본문의 결론과 적용
오늘 본문도 역시 ‘예수님이 최고’시라고 증거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서의 핵심주제가 되는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의 봉사가 그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1) 영원한 속죄와 (2) 영원한 성령, 그리고 (3) 영원한 기업을 새 언약 백성들에게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 지성소에서 나와 우리 가운데 두 번째 나타나시기 전에 재림 전 심판을 집행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은혜의 기간 중에 살고 있는 새 언약의 백성들은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아버지의 집인 천국을 사모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돌아갈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십자가를 바라보시라. 그리고 살아계셔서 지금도 그대를 위하여 하늘 지성소에서 중보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라. 그러면 돌아갈 마음과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아버지를 섬길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된다. 아멘!
2013.7.9
Crossabbath Gospel Ministry
안식일복음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