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5주차 과제인 인문학 글쓰기인데요.
6주차 과제와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대신 올려봅니다!
다음 중 옳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현실에 대한 세부적, 사실적 묘사를 바탕으로 소외된 계층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도시 빈민의 고통과 좌절을 압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입주권을 사들인 부동산업자와 철거민 사이의 갈등 관계가 형상화되어 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이 수록된 국어 교재의 문제다. 우리는 70년대의 가난, 도시 빈민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난쏘공을 배운다. 용역들의 망치질에 부서지는 담을 뒤로 하고 난장이 가족이 식사하는 장면을 보며 집 없는 설움을 배운다. 한 편으로는 이런 안도감이 든다. ‘지금은 이런 세상이 아니라서, 나에게는 몸 뉘일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곤 친구와 우리나라가 얼마나 부자 나라가 됐는지 너무 쉽게 얘기한다. “요새 돈 없어서 배곯는 사람이 어디 있냐?”
과연 21세기 한국에는 배곯는 사람이 없을까?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아서 고통받는 사람은 제 3세계 만의 얘기일까. 아니다. 우리는 서울역 앞을 지나칠 때, 냉장고에 쉰 김치만 남아 있었다는 어느 가족의 비극을 마주할 때 ‘굶어 죽음’을 목격할 수 있다. 어디 굶어 죽는 것뿐일까. 요즘의 가난은 일상의 가난, 상대적 빈곤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부부, 아들, 딸 네 식구가 반지하 투룸에서 다달이 세를 지불하며 산다. 일주일에 세 번쯤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아이들에겐 급식 카드가 지원된다. 이들은 적어도 배곯지 않으니, 충분한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인가? 지방에서 상경한 취준생이 1.5평 강남 고시원에 머물며 김밥으로 끼니를 때운다면, 가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의 가난은 우리 눈앞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멀쩡하게 옷을 입고 나와 비슷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주변 사람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무관심과 안도, 재개발과 같은 국가의 폭력에 의해 가난은 ‘비가시화’ 되어 왔다. 21세기의 가난과 가난한 자의 육체노동은 숨겨야 할 치부로, 능력 없음의 상징으로, 냄새 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요즘의 가난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심지어 가난은 게으른 자의 말로로 여겨지도록 교묘하게 변질되어왔다. 70년대의 가난의 상징인 이 책과 21세기 가난의 상징인 영화 ‘기생충’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뚜렷하다.
난장이는 끊임없이 일한다. 채권 매매, 칼 갈기, 고층 건물 유리 닦기, 펌프 설치하기, 수도 고치기 같은 힘들고 위험한 일을 매일 같이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난장이의 가족도 공장에 나가 죽은 듯이 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족은 고기를 먹지 못한다. 그때의 가난은 땀 흘려 일하지만 결국 극복할 수 없는 것, 끈질기게 대물림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반면 영화 ‘기생충’의 아버지 기택은 일하지 않는다. 몇 번의 사업이 실패한 후로 그의 가족은 전원 백수다. 그들은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잘 살아갈 궁리를 한다. 겨우 부업 수준인 피자 박스 접기를 하는데, 그마저도 대충해서 불량품을 만들고 만다. 결국엔 부잣집에 기생하고 그들의 삶을 시샘하며 좀 먹는다. 평창동 부잣집의 지하, 보이지 않는 곳에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스스로를 가둔 채 살아가는 더 가난하고 몰염치한 빈대마저 존재한다. 영화 ‘기생충’ 속 가난한 자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일을 관두게 됐지만 결국 그 상황에 굴복하고 무전취식 하려는 존재로 그려진다. 감독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사람들은 극장을 나서며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논하기보다, 가진 게 없는 자들의 뻔뻔함에 혀를 내두른다.
지금, 21세기의 가난은 일종의 죄악이자 게으름의 표식이다. 마트에서 시식 알바를 하고 있는 학생을 보며 자신의 아이에게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돼!”라고 말하는 주변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공부를 안 하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번듯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시급에 의존하는 육체 노동자로 산다는 사회적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40년 동안 더 나아지지는 못할망정, 가난은 왜 죄악이 되어 버렸을까. 난쏘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유가 보인다. 난장이 가족이 계층 상승의 다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결국 가진 자들의 입맛에 맞게 재편되어 왔기 때문이다.
역사는 대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라는 큰 축으로 나뉘어 흐른다. 또 하나의 큰 축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자와 육체노동을 하는 자이다. 가난한 자들은 가지지 못한 자이면서 동시에 육체노동을 하는 자이다. 난장이 가족은 늘 땀 흘려 일한다. 영수 영호 형제는 땀 흘려 일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걸 이른 나이에 깨달았다. 이들은 부연 톱밥 더미 안에서, 인쇄 공장에서 피땀 흘려 일했고, 노동자의 땀으로 공장과 경제는 성장했다. 그러나 임금은 오르지 않았고, 잔업과 철야는 당연시됐으며 공장을 가진 자들은 노동자의 항의를 묵살했다. 폐업 위기와 같은 협박으로, 기계의 소음과 칸막이로 노동자들을 철저히 분리시켰고 불만을 제기하는 자는 가차 없이 해고했다. 87년에 이르러서야 전국적으로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하루에 30건이 넘는 투쟁을 일으켜 정규직, 타당한 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노조에 참여했던 이들은 지금 기득권이 되어 20대 노동자와 비정규직의 의견을 묵살한다.
난장이의 아들들이 철썩같이 믿었던 계층 상승의 다리는 노동 이전에 공부였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하지 않고는 우리 구역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공부를 한 자와 못 한자로 너무나 엄격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미개한 사회였다.’ 하지만 공부조차도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돼야 꿈꿀 수 있는 것이었고, 대학에서 고등 교육을 받기 위해 부모는 소를 팔아야 했다. 좋은 대학에 갈수록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었고 등 따숩고 배부르게 살 확률이 높아졌다. 사람들은 점점 소위 ‘인서울’만을 바라보고 달렸고, 고액 과외와 해외 유학은 필수 코스가 되어 갔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그토록 떠들어 대던 학종(학생부 종합 전형)은 아는 교수가 없으면, 적절한 봉사 활동을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독서 목록을 만들어 주고 토론을 이끌어 줄 사람이 없으면 이루기 힘든 것이다. 21세기의 개천에서는 용이 태어나지 못한다. 이른바 ‘강남에서 용 나는 사회’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대학을 계층 세습을 정당화시키는 제도라고 말한다. 자본을 가진 자가 부모의 자본을 그대로 세습 받는다면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겠지만,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 기득권을 누린다면 정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공부를 잘한다는 것, 좋은 대학에 간다는 것도 결국 자본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유리하도록 변해왔다. 요즘 사회에서 수능, 공부가 가장 평등하다고들 하던데, 과연 그럴까? 그런 말들로 부의 세습을 정당화하며 가난한 자들을 비웃어 온 건 아닐까. 작가 조세희는 일찍이 이런 사회를 경고했다.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라고. 과연 그렇다. 그들은 노동과 교육을 자기편으로 만들며 가난을 손가락질 해왔다.
학교와 사회 제도마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울타리가 되지 못한다. 주변인들에게 가난은 숨겨야 하는 치부이지만, 그나마의 생활을 위한 지원을 받기 위해서 가난을 헤집어 드러내 보여야 한다. 배곯는 초등학생이 급식비를 지원받기 위해서, 돈 없는 취업준비생이 국가의 지원금을 타내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뼈 빠지게 힘든지를 정량적으로 정성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심지어 때때로 손가락질받기도 한다. 배려 없는 몇몇 선생님은 가난한 학생을 차별하고 때로 반 학생들이 누가 가난한지 알게 만들었다. 초등학생 때의 나는 우리 반의 기초수급자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취업 지원금마저 속 편히 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왜 세금으로 돈을 주나며, 그걸로 유흥을 즐길지 어떻게 아냐며 부당하다고 말한다. 과거의 가난한 자들은 ‘우리’라는 이름으로 연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가난한 자들은 각자가 속한 사회에 숨죽이며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가난한 자들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그들의 게으름 탓할 게 아니라, 사회 구조적 개혁의 문제를 논의해봐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복지 정책은 무엇일지 고민해봐야 한다. 여공들의 노동 운동사를 다룬 영화 ‘위로공단’의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 삶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아니었어요.” 난쏘공의 지섭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가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당연하게 가난한 자들을 손가락질 하게 된다. “젊었을 때 얼마나 공부를 안했으면, 얼마나 게을렀으면….” 같은 생각이 불쑥 자리 잡는다. 청소 노동자, 마트 판매원, 공장 노동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나조차도 무심코 육체노동을 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로 사람들을 구별 짓고 흠칫 놀랄 때가 많다.
우리는 자주 파업 현장을 기사로 목격한다. 기어이 현수막을 앞세우고 파업에 들어가야 겨우 주목 받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외면당하는 경우가 많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대가가 사회로부터의 소외이자, 능력 없는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이라면,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도태된 사람은 더 깊은 곳으로 도태되는 사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가난, 빈익빈 부익부, 복지 국가 같은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난쏘공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가 아니라, ‘난쏘공에 반추해 봤을 때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