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마다 부처의 미소..'천년 신라' 다가오는 듯
<25>경주 남산 포석정~금오산~용장골 5.8km..신라 영광 서린 '부처의 산'
소나무 명품숲 삼릉·남산 지키는 석탑..문화유산 가득한 '야외 박물관'
용장사곡(谷) 석조여래좌상. 경주 남산에는 이 불상처럼 얼굴없는 돌부처상이 많다 © 뉴스1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의 옛이름은 서라벌, 또는 새벌이다. 그 의미에 대해 여러 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서라벌은 ‘(한반도에서) 동쪽의 벌판’, 새벌은 ‘아침 햇살이 가장 먼저 비치는 땅’이라는 뜻이다. 서라벌과 새벌의 발음이 변하면서 현재의 ‘서울’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경주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천년의 도읍으로, 우리나라 국보의 10%(34점), 보물의 4%(93개), 사적(史蹟)의 15%(77개소)가 집중되어 있는 ‘문화 수도’다. 서라벌에 얼마나 많은 불교유산이 있었는지 삼국유사에 “절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하고(寺寺星張),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늘어섰다(塔塔雁行)”고 적혀 있다.
서라벌에서도 불교유산이 가장 촘촘하게 집중되어 있는 곳이 남산이다. 남산은 절터 150곳, 불상(佛像) 129개, 탑 99개, 왕릉 13개 등의 문화유산이 차고 넘치는 야외박물관이다. 신라인들은 남산을 신성시하고 바위를 숭배했다. 그래서 토목공사를 한 흔적은 거의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지형에서 암자를 짓고, 불상을 새기고, 탑을 세웠다. 신라인들의 불교신앙에 대해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들어 있는 부처님을 찾아낸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한나절 산행을 하면서 남산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재를 접할 수 있는 포석정-삼릉-금오산-용장사계곡 코스를 간다.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 포석정-삼릉-금오산 3.3km “포석정에서 신라의 슬픔을, 삼릉계곡에서 신라의 미소를 보다”
포석정. 별궁 건물이 사라지고 주변에 마을이 들어서서, 예전의 운치는 알 길이 없다. 돌수로 옆 느티나무 거목도 외과수술 흔적이 깊다 © 뉴스1
포석정 ; 포석정(鮑石亭)은 신라왕실의 연회장으로, 전복(鮑) 모양의 둥그런 돌 수로에 술잔을 띄워 놀았다는 곳이다. 여기서 파티를 하던 신라의 경애왕이 이곳을 급습한 후백제의 견훤에게 잡혀 목숨을 잃었다니, 어쩌다 한 나라의 왕이 자기의 궁궐에서 상대국의 왕에 의해 죽었다는 것인지 당시 신라의 나라꼴을 짐작해본다. 그 때 견훤은 신라의 왕을 죽이고서도 왜 신라를 병합하지 못했을까? 신라를 인수할 만한 정치력이 부족했고, 경애왕을 죽임으로써 신라인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석조여래삼존입상의 ‘천년의 미소’ 사진. 외할머니의 온화한 표정,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표정이다 © 뉴스1
석조여래삼존입상 ; 포석정을 나와 10분 거리의 삼불사 옆에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돌로 만든 세 분의 부처상)이 있다. 사진을 보면, 가운데 부처상의 통통한 뺨과 입가의 미소가 외할머니의 온화한 표정같기도 하고, 천진스러운 아이와도 같다. 해탈을 하면 저런 표정일까? 그러나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코가 많이 닳아 있고, 보호각(閣)에 의해 그늘져서 ‘천년 미소’의 음영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삼릉, 소나무숲 ; 5분쯤 오솔길을 더 가면 3개의 커다란 왕릉이 있고, 왕릉을 호위하듯 늘씬하면서도 유려하게 휘어진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에 이른다. 사진가들이 즐겨 찾는 포토존으로, 이른 아침의 안개가 삼릉을 휘감고 있을 때 소나무 사이로 비스듬히 내리쬐는 햇빛기둥이 연출하는 풍경이 일품이다. 삼릉 아래에 그 이름도 슬픈 경애왕(景哀王) 왕릉이 외롭게 비껴나 있다.
석조여래좌상(1). 인근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옮겨놓은 불상이다. 머리와 손이 없어 보는 이의 가슴이 먹먹하다 © 뉴스1
석조여래좌상 ; 삼릉계곡을 따라 오르는 등산로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불상은 길가에 앉아있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돌로 만든, 앉아있는 부처상)이다. 이 불상을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나 섬찟할 것이다. 머리와 손이 없기 때문이다. 남산에는 머리없는 불상이 많다. 오랜 세월이 지나 목 부분이 약해서 떨어져 나갔거나, 누군가 일부러 파손했거나, 지진과 홍수로 엎어져 매몰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 불상의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주름과 옷고름(매듭)이 매우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다. 부처님에게는 죄송하지만, 그 옷고름을 풀면 금방 부처님 몸이 드러날 듯하다.
마애관음보살상. ‘신라의 미소, 미스 신라’로 불리던, 자비로운 표정이다 © 뉴스1
마애관음보살상 ; 여기서 왼쪽 산길을 50m쯤 오르면 마애관음보살상(磨崖觀音菩薩像/바위에 새긴 보살상)이 돌기둥 모양의 바위에 돌출되어 있다. 작고 갸름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입술에 붉은 칠을 한 듯이 보여 ‘신라의 미소’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오랜 풍화작용으로 미소가 좀 사라져, 자비스런 표정으로만 보인다.
선각육존불. 사진을 확대해서 보면, 스케치한 그림을 바위에 붙여 선을 새긴 듯, 살아움직이는 부처들이다 © 뉴스1
선각육존불 ; 석조여래좌상에서 100m쯤 오르면 계곡 왼쪽으로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바위에 선으로 새긴 여섯 분의 부처)을 만난다. 넓은 바위에 붓으로 그림을 그린 듯, 선을 파서 새긴 부처님들이다. 앞쪽의 바위는 부처를 가운데 두고 양쪽의 보살들이 연꽃을 받쳐 든 모습인데, 금방 스케치한 그림처럼 살아움직이는 작품이다.
선각여래좌상. 하회탈 표정이기도 하고, 희극인 남희석같기도 하다 © 뉴스1
선각여래좌상 ; 여기서 5분쯤 바위길을 올라 선각여래좌상(線刻如來坐像/선으로 새긴, 앉아있는 부처상)의 미소와 만난다. 바위벽에 새긴 부처의 동그란 얼굴 표정이 하회탈처럼 보이는데, 어떤 사람은 희극인 남희석처럼 생겼다고 한다. 민중에게 친근한 모습이다.
석조여래좌상(2). 당당하고 균형잡힌 몸매로 ‘몸짱부처’라 불린다 © 뉴스1
석조여래좌상 ; 산비탈을 따라 100m쯤 걸어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돌로 만든, 앉아있는 부처상)을 알현한다. 등산로 초입에 있었던 석조여래좌상과 달리 머리가 붙어 있지만, 얼굴이 파손되어 성형한 흔적이 하얗게 남아있다. 운동선수처럼 튼튼한 체구가 당당해서 ’몸짱 부처‘로 불리기도 한다.
다시 등산로로 나와 400m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며 땀 한 바가지를 흘리면 상선암이다. 쪼그만 법당 안에서 어떤 분이 온 몸이 땀에 젖은 채 계속 절을 하고 있다. 등산로 주변에서도 아무 바위에나 합장을 하는 분들의 모습이 많았다. 기도 없이 호흡만 가라앉히고 있는 나에게 암자의 보살님이 미숫가루물 한 컵을 내민다. 정말 불심이 가득한 산이다.
남산에서 바라보는 경주벌판. 가까이 형산강, 멀리 왼쪽 단석산, 오른쪽 구미산이 보이고, 그 사이로 경부고속도로가 북쪽으로 달린다. © 뉴스1
상선암에서 잠깐 오르면 곧 능선이고, 능선길 모서리에서 너른 경주 들판과 유유하게 흐르는 형산강 조망이 확 펼쳐진다. 발 끝 아래에 포석정이 있고, 멀리 단석산과 선도산 능선 사이로 경부고속도로가 북쪽으로 달리고 있다. 저 통로로 후백제의 견훤이 말발굽 요란하게 달려와 포석정을 아비규환으로 몰아넣으며 경애왕을 무릎 꿇렸을까, 그런 장면이 영화처럼 떠오른다.
능선의 끝에 비틀린 소나무와 바위들이 어울려 만든 ‘동양화 풍경’에 다가섰더니 금송정(琴松亭)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옥보고가 가야금을 뜯으며 시름을 달랬다는 곳이다. 소나무 그늘 아래서 시원한 바람과 조망을 즐기며 멍때리기에 좋은 장소다. 멍때리기, 즉 걱정과 생각을 비우는 무심(無心)의 경지에 이르기는 정말 어렵다.
마애석가여래좌상. 높이 6m. 돌 속의 부처가 밖으로 드러난 듯 조각된 모습이다 © 뉴스1
마애석가여래좌상 ; 금송정에서 내려와 바위길을 따라 5분쯤 가면, 마애석가여래좌상(磨崖釋迦如來坐像/바위에 새긴, 앉아있는 부처상)을 해설하는 작은 표지판이 나온다. 내려다보니,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이 눈을 반쯤 뜨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얼굴은 돋을새김을 해서 입체적이고 몸은 바위 겉면에 선으로 새겼다. 그래서 정말 돌 속에 계신 부처가 스르르 밖으로 나온 듯한 느낌이다.
◇ 금오산-용장사 삼층석탑-용장골 2.5km “남산을 기단으로 삼은 삼층석탑의 위용, 금오신화가 탄생된 용장사”
금오산 정상(468m)은 조망이 없고, 인증사진만 찍는 곳이다. 정상석에 쓰여 있는 ‘金鰲山’의 한자 ‘오(鰲/자라)’를 누가 알아볼 것인가? 한글로 고쳐 세웠으면 한다. 정상에서 약간의 내리막 끝에 너른 임도를 만난다.
가다보면 길 옆에 묘지가 있고, 그 앞에 ‘묘지를 이장해줄테니 신청을 하시오’라는 국립공원사무소의 표지판이 있다. 남산에는 이곳을 명당으로 삼아 마구 쓴 개인묘가 무려 6300개나 있었는데, 그 중 1100개를 이장했다고 한다. 나머지도 어서 이장을 해야하는데 연고자를 찾기 어렵고 연고자들끼리 합의도 어렵다고 한다. 개인묘는 식물훼손과 경관 위화감, 성묘객에 의한 샛길 발생과 산불위험 등의 폐해가 많다. 산 전체가 문화재이고 국립공원인만큼 연고자분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린다.
용장사곡(谷) 삼층석탑. 남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묵직하고 당당한 탑이다 © 뉴스1
용장사곡(茸長寺谷) 삼층석탑 ; 용장골로 내려가는 가파른 돌길을 15분쯤 내려서면, 낭떠러지 위에서 경주의 속세를 내려다보고 있는 삼층석탑을 만난다. 네모난 돌 네 개를 단정하게 올린 탑인데, 묵직한 중량과 당당한 기품이 주변을 압도한다. 유흥준 교수는 이 탑이 “거대한 바위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큰 탑이다”라고 표현했다. 탑은 부처의 사리(舍利/유골)를 보관하면서 기도의 대상으로 삼는 조형물인데, 이 석탑은 그 자체가 부처로 보인다. 이 탑의 돌을 안아보았다. 돌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듯한 품이었다.
이 탑을 설명하는 해설판에 “탑이 무너져 절터 아래쪽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사리는 없어졌다.”는 내용이 있다. 문화재의 생명인 ‘원형’이 훼손된 것이다. 남산도 여러 임도와 등산로, 샛길, 개인묘지 등으로 자연의 원형이 훼손되어 있다. 남산의 자연도, 문화재도 ‘원형’에 가깝게 돌려놓는 공원관리, 문화재 관리를 기대한다.
용장사곡(谷) 석조여래좌상.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 위에 부처님 얼굴이 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다 © 뉴스1
용장사곡(谷) 석조여래좌상 ; 삼층석탑에서 급한 내리막의 100m 아래에도 ‘머리없는 부처’가 있다. 원반 모양의 둥그런 돌받침 3개 위에, 머리가 없어졌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돌부처의 모습은 단정하고 흔들림이 없다. 마침 파란 하늘에 하얀 돌부처가 대비되면서, 부처님 머리는 어느 뭉게구름 위에 떠서 “나 여기 있지”하며 어린아이 미소를 띄고 있지 않을까 상상을 해본다.
더 내려가면 용장사터가 있다. 암자 하나 간신히 들어섰을 빈터에 대나무와 망초만 무성하다. 용장사는 방랑하는 학자였던 김시습이 이곳에 숨어지내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곳이다. 금오신화는 조선시대의 절망적인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김시습이 그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쓴 판타지 소설이다.
이후 장송(長松)이 드문드문 박힌 컴컴한 대나무 숲길을 내려와, 가뭄에 물소리가 조용한 계곡길을 1시간쯤 걸어 용장마을로 나와 산행을 마친다. 5.8km의 산길에서 여러 돌부처와 돌탑을 알현하고 나니, 만나는 바위마다 부처가 있지 않은지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무표정한 돌에 부처의 미소를 새기고, 혼을 불어넣은 신라인들의 신앙과 예술력에 감탄한 인문산행이었다.
삼릉의 소나무 숲. 휘어지며 쭉쭉 뻗은 소나무들 사이로 비추는 아침햇살. 사진 김하영, 국립공원공단 © 뉴스1
경주에서 먹어줘야 하는 빵은 황남빵이고, 마셔주어야 하는 차는 ‘영화 경주’에서 주인공이 즐긴 황차다. 황색으로 반짝 빛나는 동그란 황남빵 한조각을 베어 물었다. 입 속에서 퍼지는 팥이 정말 달달하다. 황차는 마음의 차다. 몸이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달이 뜨고, 왕릉과 안압지에 조명이 비추는 경주의 밤은 그윽하면서도 화려하다. 신라의 영광과 슬픔이 함께 있는 천년 고도의 야경 위로 교교히 흐르다 탑 끝에 걸린 달… 신라의 달밤이다.
오늘, 경주의 현재에서 천년 전의 미소를 보았고, 그런 과거와 현재의 미소는 앞으로도 천년 이상 이어질 것이다. ‘영화 경주’에 이런 과거-현재-미래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경주를 중국시로 빗댄 멘트가 있다. “사람들이 흩어진 후/ 초생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 격동의 역사에서 달은 무심하게 다시 뜨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새 날이 온다는 글이다. 경주는 시간여행의 도시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