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현장 지켜본 木제대 보존
로마 라테란의 성 요한 성당은 아비뇽 사건으로 교황청이 1307년 프랑스로 이전되기 전까지 교황청이 있던 교황좌이었다. 천여 년간 교황좌이던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에서는 역대 교황의 대관식, 착좌식이 열렸고, 이곳에 묻혔다.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중심인 이곳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은 바티칸을 도시국가로 인정한 라테란 조약(1929년)이 맺어진 곳이며, 현재 로마 대주교의 주교좌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에서 ‘은총의 대희년’이라고 부르는 지난 2000년, 교황 고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 라테란 성 요한 대성당으로 이동, 성문(聖門)을 열기도 하였다. 성당 입구 오른쪽 맨 끝에 있는 성문은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던 구약의 내용을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재현된 이래, 25년마다 열린다. 치외 법권이 인정되는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의 가장 큰 보물은 최후의 만찬 때 사용된 낡은 나무 제대이다.
황제 친위대가 있던 곳이 성전으로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은 과거 로마 황제의 친위부대, 그것도 첫 기마부대가 있던 라테란 궁전이 교황청으로 변신한 곳이다. 일명 성 지오반니 대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은 원래 라테란 궁전이었다. 그런데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귀족인 라테란 가문의 파우스타와 결혼하면서, 파우스타가 결혼지참금처럼 가져온 라테란 궁전을 교황(실베스떼르 1세)에게 선물하면서 교황좌로 바뀌게 되었다. 교황이 부동산을 갖게 된 첫 사례이기도 하다. 천년 가까이 교황좌가 있던 이곳은 마르틴 루터가 이곳을 뛰쳐나가 종교개혁을 부르짖으며 찢어진 신구교 일치를 위한 라테라노 공의회가 다섯 차례 개최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반달족의 침입, 지진 피해, 화재 등으로 무너지고 파괴되었으나 다시 재건하였다. 최후의 만찬때 사용된 낡은 나무 제대가 보존되어 있어, 부활절 전 성 목요일이면 교황이 이곳으로 이동하여 주님만찬미사를 봉헌하는 유서깊은 교회이다.
12사도상을 볼 수 있어요
현관 왼쪽에는 다른 곳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상이 있다. 원래 로마의 목욕장에서 발굴된 콘스탄티누스 대제상을 기독교의 큰 공로자임을 감안하여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성전 중앙통로 양쪽 기둥에는 12사도의 석상(별도 박스 참조)이 있다. 6m나 되는 사도들의 석상은 모두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열두 사도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12사도의 면면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잘나고, 유능하고, 위대한 힘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나약하고 급하고 소심하고 손가락질받는 사람을 불러 제자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연약함과 결점을 지녔지만,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주는 하느님께 삶을 의탁했던 사람들을 사도로 삼은 사실은 우리도 얼마든지 무한한 은총의 세계로 자신을 내던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여기에서는 또 한 가지 모자이크화를 눈여겨봐야한다. 이 모자이크화를 보면, 현실세계에서는 교황이 가톨릭의 중심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성인이 더 존중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에서 보듯이 모자이크화에는 성인들에 비해 교황이 아주 조그마하게 그려져 있다. 이는 권력이 아니라, 얼마나 순수한 믿음을 지니고,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총을 향해 자신을 바칠 수 있느냐는 삶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매일신문, 2007년 5월 31일, 최미화 기자]
[성지를 찾아서] 로마 라테란 성 요한 성당 12사도像
◇ 베드로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반석’이라는 뜻을 지닌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고 교회의 첫 책임자가 되었다. 베드로 상은 오른손으로 천국을, 왼손에는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다. 그리스도로부터 하늘 열쇠를 받아, 천국문을 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형상화하였다. 베드로 사도 당시에는 교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 필립보
필립보가 늘 대면하면서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고 하였다. 바르톨로메오를 예수께 인도한 사도.
◇ 마태오
4대 복음사가 가운데 한 명. 원래 세리(세무공무원)였는데, 예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 그후 예수가 마태오와 함께 식사를 하자, 당시 유대 지도층은 죄인처럼 취급하는 세리와 같이 식사하는 예수를 비난하였다. 이때 예수는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하면서 ‘회개’의 소중함을 가르쳤다. 은행원과 장부 기장자의 수호성인이다. 책과 칼 또는 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 안드레아
사도 베드로의 친 동생으로 성실하고 신중한 성격을 지녔다. 예수님을 집에 모셨고,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종말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예수께 질문하였고, 한 소년이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여살렸다고 보고하였다. 그리스에서 선교하다가 엑스자형 십자가에서 순교하였기에, X형 십자가를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고도 부른다. 그리스 러시아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다. 긴 수염과 외투 그리고 맨발로 표현된다.
◇ 토마스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직접 넣어 확인한 사도. 토마스 사도로 인해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이 나왔다. 책과 칼 또는 창, 목공의 곱자, 돌 등을 들고 있는 사도로 표현되는데,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에는 곱자를 들고 있다.
◇ 사도 요한
4대 복음사가 가운데 한 명.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사도 요한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끝까지 따랐으며, 죽기 직전 예수는 요한에게 성모님을 당부하였다. 사도 야고보와 형제간으로 성격이 격하여서 ‘천둥의 아들’로도 불리었다. 요한은 황금색 술잔과 은색 뱀이 술잔을 감고 있거나, 수염없는 얼굴에 독수리와 집필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 대(大) 야고보
순례자의 수호성인으로 사도 요한의 형이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 생활을 하다가 아우 요한과 함께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서기 44년경 헤롯 아그리빠 1세의 박해 때에 사도 가운데 최초로 순교하였다.
◇ 시몬
갈릴래아 출신으로, 사도가 되기 전에는 극단적인 유다 민족주의로 구성된 열혈당원이었다. 이방인과 유다인, 이집트, 리비아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마지막으로 페르시아에서 선교하다가 타대오와 함께 순교하였다. 시몬은 톱으로 몸이 잘리는 순교를 당하였기에 십자가를 쥔 모습으로 그려진다.
◇ 마티아
가롯 유다의 배반과 자살로 비어있는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예수 사후 사도로 선출되었다. 부활한 예수의 승천을 지켜본 11제자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요한의 세례부터 예수님 승천까지 줄곧 제자단과 함께 있었던 사람 중에 마티아를 사도로 뽑아 예수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였다. 마티아는 유다지방을 두루 선교하다가 순교하였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수호성인.
◇ 유다(타대오)
절망에 빠진 자의 수호성인. 배반자 유다가 아니다. 최후의 만찬장에서 예수님께 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사도)들에게만 나타내 보이십니까 하고 질문을 던진 사도이다. 처음에는 팔레스티나에서 나중에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마지막으로 페르시아에서 시몬과 함께 순교하였다. 타대오는 도끼에 목이 잘려 순교하였는데,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유다로,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서는 타대오로 불린다.
◇ 소 야고보
대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 ‘알패오의 아들’ 혹은 ‘작은 야고보’ ‘의인 야고보’라고 불린다.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도 불릴 정도로 예수를 쏙 빼닮았고, 12제자 가운데 기도를 가장 많이 한 제자이다. 소 야고보에 의해서 시리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전도를 하다가 유다인들에 의하여 성전 꼭대기에서 던져지고, 돌에 맞았으나 죽지 않자 톱으로 잘라서 죽였다. 오른손에는 복음서를, 왼손에는 톱을 든 모습이다.
◇ 바르톨로메오
필립보의 인도로 예수를 만나 “선생님은 진정 하느님의 아들입니다.”고 고백하고 나자렛 사람 예수를 구세주로 믿게 되었다. 이후 소아시아에서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인도까지 선교하였다. 산 채로 피부가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박혀졌기에 벗겨진 얼굴 피부를 옷에 감싸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경련발작이나 신경병자 모피상인 피혁가공업자 제화공 등의 수호성인이다. [매일신문, 2007년 5월 31일, 글 최미화 기자, 사진=권정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