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을 날아서… 꿈, 날개, 호접지몽
동양화가 정한나
정한나는 꿈속을 그리는 동양화가이다. 그는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꿈속의 풍부한 단상들을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그려낸다. 사실 꿈을 조형화 하는 것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물질)과 기억(정신) 그 경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몽환적이며, 서서히 번지며 확장해 나가는 정신의 전개는 이성적 해석을 뛰어넘는 언어 그 이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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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품에 그려진 꿈의 이야기들은 무의식속에 유영하듯 떠다니는 의식이 파편들로, 천공의 공간으로 펼쳐진 의식적 영역과 무의식적 영역의 경계에는 구름이 흐르고 학이 날고, 낙타도 있고 권총도 있으며 때론 거울도 표현된다. 화면에 펼쳐진 형상들은 작가가 현실 속에 지각한 물질들이지만 이 형상들은 작가의 마음속으로 옮겨지고 그리고 일단 마음의 영역(心的思想:psychic event)으로 전이된 심상들은 유·무형으로 변하여 심적 사상의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정체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기는 하나 이미 잠재의식에 동화되어 있는 주름진 뇌 속 한 켠에 숨겨진 사상으로, 무의식에 동화된 경험은 꿈에서 그 선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즉, 작가의 모티프들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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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학과 날개, 총알은 모두 날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이는 날고 싶다는 작가 의식의 대체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이달로스의 아들 이카루스가 미노스궁을 도망치며 낮게 날아야한다는 약속을 깨고 태양을 향해 높이 날다 뜨거움에 타죽었다는 신화속의 이야기처럼 날개를 다는 것은 날고 싶은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원형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꿈꾸는 천공의 성 라퓨타나 비행신화들처럼 작가의 화면은 인간의 뇌에 화석처럼 감춰버린 신화의 원형으로까지의 확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작가의 작품에 확장된 동공의 눈동자는 무의식 속에서도 선명한 심상을 기억해 내는 작가의 섬광과도 같은 정신이다. 이 눈동자는 전지전능하여 화면전체에 섬세하게 정신을 흩어내고 있는데, 동양화의 삼원법과 같이 보이지 않는 자연을 마음으로 관통하듯이 세계를 관조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눈동자는 가장 완성된 원형, 양의 극치인 태양의 또 다른 이미지일 수도 있다. 신사에서 둥근 거울을 걸고 태양신께 제사를 올리듯이 청동기 거울이 신과의 교접물로 신성시되었음을 보아도 작가의 의식은 절대적 실재에 대한 갈구와 염원으로까지 발전되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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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나의 화면은 고대의 신화, 전설, 그리고 원시적인 제의에 얼마간의 원형을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권총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낸다. 작가의 기억 속에 깊숙이 침잠해 작가 자신도 기억할 수 없는 스토리이지만 권총은 그 조형성에서 열쇠와 오버 랩핑 되고 있다. 권총과 열쇠는 남성적인 성(性)으로의 상징과 강한 힘일 수도 있지만 문을 열수 있다는 희망, 선의 확장된 하나님에 대한 희구, 전능한 신께로 나아가는 소망을 의미하기도 한다.이러한 그림들에 등장하는 총과 학, 낙타, 배의 모티브들의 반복된 사용은 동일한 이미지들을 반복(repitition)시키는 상사(相似)놀이의 전개를 통해 복제물간의 변화의 차이를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동일한 형태와 주제들이 여러 번 반복할 때 얻게 되는 한 화면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미묘한 시각적인 효과를 획득하고 있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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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품에 표현되고 있는 이러한 몽환적 초현실성은 바탕에 칠해진 겹쳐진 맑은 색과 거친 바탕 효과로 인하여 더욱 강조된다 하겠다. 소녀 적인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는 겹쳐진 색들은 개개의 색들이 분명 자신의 존재성을 뚜렷이 가지고 있다. 세로줄을 형성하며 그어진 선 처리는 컴퓨터 코드들의 조합된 흐름을 연상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어 시각적으로 익숙한 인터넷 시대의 동시대성을 보여준다. 때론 실험성이 돋보이는 거친 마티에르의 효과로 드러낸 불완전한 이미지는 보는 이의 예민하게 흔들리는 심리적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 또한 둥둥 떠다니는 안료의 덩어리들은 부유하는 의식의 한 조각들을 표현하듯 현실의 공간이 아닌 정의할 수 없는 의식속의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꿈속을 날으며 만나는 단상들을 조형으로 옮긴다는 작가의 말처럼 적절한 조형언어를 설레이듯 가볍게 매우 적절한 기법으로 풀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화면들은 신비적이며 초현실적인 꿈속의 표현이지만 성긴 여백으로 동양화의 정신성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그리고 작가 자신으로 은유된 모티브들이 등장하는데, 자신이 학이 되어 날고 있다고 말하듯이 깨어있는 정신세계와 무의식의 세계가 공존하는 화면을 표현한다. 이는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과 상통한다 할 수 있는데,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날았는데, 깨어나니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자인지 꿈도 현실도 구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물일체의 절대경지로 여기는 호접몽의 물아일체의 경지는 삶과 죽음의 구별, 사물과 나의 구별은 상대적인 개념일 뿐 무의미함을 제시한다 하겠다. 즉, 작가의 회화세계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으며 색즉시공(色卽時空), 색과 공이 하나인 불교 사상과도 연결되는 동양전통의 사상적 맥락을 구사하고 있다 하겠다.
작가의 여린 듯 조용한 작품이 가진 내용과 상징성은 꿈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강한 의식의 선명함처럼 힘을 가지고 있다. 이제 시작되는 순정과 열정으로 펼쳐내는 작가의 초현실속에 부유하는 꿈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앞으로 매우 기대가 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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