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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도(출 40:34-38)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물위를 걷는 것을 베드로가 보고는 자기도 물위를 걷기를 원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물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을 때 더 이상 물위를 걷지 못하고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건져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신 이야기가 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왜 물에 빠지게 되었으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다고 하신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위를 걸을 수가 있다고 굳게 믿는 믿음이 적었음을 나무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된 것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힘으로 걷고 있는 것이지 자기 힘이 아닙니다. 결국 믿음이란 주님의 힘을 의지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바람이 부는 바다 위를 걷게 하셔서 주님이 계신 곳으로 인도해 가실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람이 불자 그 믿음이 사라집니다. 바람 때문에 자기가 물에 빠질 것이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걷고 있다면 그런 마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걷고 있다면 바람이 아니라 그 어떤 태풍이 불어도 주님은 나를 이 바다 위를 걷게 하셔서 주님이 계신 곳까지 도달하게 하실 것이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 때문에 주님의 인도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이야기는 지금 우리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은 한마디로 바람을 무서워하는 베드로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바람이 없을 때는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의 말씀대로 하려고 애를 쓰다가도 바람이 있으면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의심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있어도 주님께 내 인생을 맡기고 주님의 말씀에만 순종하겠다는 용기가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에 문제점입니다. 자기의 인생을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이나 자식의 인생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뭔가 되어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내가 하지 못했다면 자식이라도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소망에 대한 보장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장이 될만한 것을 찾아서 세상을 헤매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부분을 오해합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인생을 포기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성공적인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인생을 책임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까지 인도함 받는 그 성공을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이 부분에서 하나님과 뭔가 갈등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인생에 대해서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길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길이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길은 세상에서 잘되는 것입니다. 문제 속에서 해결이 있는 길을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이러한 길잡이로 일하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보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을 믿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갈등에 해결점을 얻기 위해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출애굽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신 것은 이스라엘을 어디론가로 들여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자리에서 살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곳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계속해서 살았으면 비록 애굽의 종으로 살았다고 해도 먹을 것은 해결하고, 먹고 싶은 것도 먹을 수가 있었고 목마를 때는 마음대로 마실 수가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오자 그 모든 환경이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 때문에 애굽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을 도저히 볼 수가 없고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갈등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이러한 신앙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하나 깨달아가고 믿어감으로 인해서 결국 내가 원했던 것은 잠시 동안의 행복이고 물거품 같은 것이며,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임을 점차 알아갈 때 그 사람은 출애굽의 과정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성막을 짓고 나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구름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르면 움직이고, 떠오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구름가운데 불로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이 구름으로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름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고 구름이 가는 곳이 바로 하나님이 가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구름이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름은 회막 위에 덮여 있습니다. 이스라엘 위에 덮여 있는 것이 아니라 회막 위에 덮여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회막 위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관심두고 계시고,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지키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회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신다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가치 없는 것은 버립니다. 가지고 있어봐야 별 필요가 없고, 귀찮고, 소용이 없는 것은 버려버립니다. 어떤 것은 버리면서도 속시원해 합니다. 그러나 귀중한 것은 지키고 보호합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가치 있는 존재입니까? 가치 없는 존재입니까?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까? 죄송하지만 오전에 말한 대로 벌레 같고 지렁이 같은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가치 없습니다. 지키고 보호할 만큼 귀중하고 사랑스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뭘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을 했습니까? 오히려 살면 살수록 죄만 보여주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뭐 잘났다고 하나님께 나와서 나를 지켜달라고, 나를 잘되게 해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구름은 회막에 덮여 있었습니다. 회막이 여호와의 중심입니다. 그러면 회막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하는 곳입니다. 양의 피가 뿌려지면서 이스라엘에 뿌려져야 할 여호와의 진노가 해결되는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 은혜를 중심으로 움직이십니다. 은혜를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 그 은혜 안에 있으면 그 자가 누구이든, 어떤 죄를 지은 자이든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회막은 곧 주님의 십자가의 피흘리심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십자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일하시고, 오직 십자가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주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구든 그 피에 자기를 맡기는 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을 우리의 생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누구든 주님을 영접한 자는 그 안에 거하시는 주님 때문에 하나님께 귀하게 여김 받고 하나님의 지키심을 받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심을 둔 자만 지키십니다. 나를 위해 피흘리신 주님께 관심을 두면서 나의 관심을 점차 포기하고 점점 세상에서부터 벗어나는 그런 신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는 것이며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지만 세상을 향한 우리의 관심을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에 자기의 관심이 가 있는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셔서 생명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고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붙들어서 나를 감싸고 나를 주장하며 세상으로 고개가 돌려질 때마다 나를 질책하며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도록 도우십니다. 왜 이런 도우심을 하찮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이런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안에서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자가 되겠습니까? 엉뚱한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세상일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상관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세상적인 관심을 도우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움직이는 자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주님의 피입니다. 돈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헛일입니다. 육체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역시 헛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관심을 가지고 사십시오. 그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항상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한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인도하심은 그리스도안에서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밖에 있으면서, 이미 관심은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기의 인생에 있으면서도 그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도우심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자는 생명은 그리스도임을 잊지 않습니다. 반면에 세상은 헛되다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 속에서도 생명에 대한 관심이 흐려지지 않고 주님을 보여주는 삶이 되기를 갈망하며 도우심을 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 힘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같은 문제를 두고 같이 기도를 하지만 관심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신자이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 목 : 낮에는 구름 밤에는 불
본 문 : 출 40:34-38
요 절 : (출40: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낮에는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었다. 또한 이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길을 친히 인도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하는 불이 있었다. 아마도 이 불은 항상 있었으나 어둠이 생긴 후에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신약에서 말하는 불은 언제나 성령의 임무와 관련되어진다.
이사야 4장 5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마치 하나님의 성막에 내리셨듯이 장차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주실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실인가!
1.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구름을 통해 사막의 강렬한 태양 빛으로부터 보호하셨다. 모든 식물을 목말라 죽게 하는 사막의 강렬한 태양의 열기도 우리 주님의 백성들을 해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크고 넓으신 손길로 단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거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안전은 보장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구름기둥 아래 있을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안전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모일 때에만 행군해야 하며 하나님의 덮개 밑에서 쉼을 얻고 모든 삶의 신성함을 깨달아야 한다.
2. 성령의 임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예수께서는 다시 하늘 나라로 가시며 성령의 도래를 약속하셨다. 그리고 예수의 약속대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재하셨다. 성령은 그후 하늘로 가시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남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며 그들을 인도해 가신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듯이 성령은 오늘도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또한 "그 거하시는 온 시온"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의 집을 뜻한다. 성령은 성도의 가정에도 늘 함께 하신다.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가저잉 성전이 되고 사랑하는 가족마다 돌아가면서 성직자가 된다면 그 얼마나 놀라운 은총이 될 것인가! 이런 가정으 극히 드물지만 가능한 일이다.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자들은 이것을 이상으로 삼도록 하자.
3. 성령은 모든 예배와 성도의 삶을 인도하시고 채우신다.
옛날 구름의 움직인이 장막과 사람들의 움직임을 결정했듯이 오순절로 시작된 교회에서 성령은 인도자와 감독자와 실행에 옮기시는 분이 되셨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오늘의 성령시대를 전적으로 이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피조물된 인생들의 가장 온전한 모습과 삶의 방향을 분명히 아신다. 건축자가 그가 지은 건물의 구조를 가장 잘 알 듯이 우리을 만드신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장 잘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 개인적인 일이든지 교회의 일이든지 성령의 뜻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시작하심과 가르치심과 무한한 복 주심을 기다리며 전적으로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하면 영광과 보호하심이 낮의 구름 기둥으로 밤의 불기둥으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적용
1) 죽음의 빛이 내리쬐는 사막의 백성들을 구름으로 보호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이셨다.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온전히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은 십자가의 그늘 뿐이다.
2) 오늘의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지금도 그의 성도들을 구름과 불로 인도하신다.
3)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미래를 온전히 인도하시는 분임을 확인하고, 개인이나 교회의 삶 전체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한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