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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전도서 5 : 9 - 17
전도자 솔로몬은 그 동안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좋게 생각하고 흠모하는 몇가지 면에서 그것이 사람이 밖에서 볼 때는 좋아 보일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령 인간이 육신의 쾌락을 좋아하는데 물론 그것이 순간적으로는 좋아 보일는지 모르지마는 잠시 잠깐인 것이고 그 후에 오는 허탈감은 무엇으로 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아마 인류 역사상 솔로몬만큼 육신의 향락을 누려본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여기 어떤 육신의 향락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육신의 쾌락이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 진짜 맛을 몰라 그러지. 아, 나처럼 이런 재미를 좀 보고서 말하라지, 세상의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어?”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했다면 여러분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일찍이 여러분이 즐기시는 것 이상 다 육신적인 쾌락을 맛본 분입니다. 그 결론이 육신의 쾌락, 그것도 헛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합니다.
훌륭한 사업, 그것도 헛되다고 합니다. 저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면 “목사님은 사업을 해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큰 사업을 한번 해보십시오. 거기에도 재미가 있습니다. 물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업이 잘되어서 사업체가 하나씩 둘씩 늘어나고 돈이 돈을 모아서 생각한대로 모든 것이 되어 나가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게 되고 돈도 구애받을 것 없이 쓰고 싶은대로 써 보면 사람 사는 맛이 나거든요.
세상의 권세있는 사람이 별거 있습니까? 그저 크게 사업을 하다보면 다 제 손아래 들어옵니다. 국회의원도 장관도 별게 아닙니다. 모두가 우리 사업하는 사람을 배경으로 해야 정치도 하고 무엇도 하지 않겠어요?
그럼 학자들이 좋다고요? 글쎄 나는 사업을 하노라고 공부를 많이 못했습니다마는 학자가 별거 있습니까? 한 달에 돈 몇 푼 주면 고문이란 이름으로 혹은 그밖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채용해서 쓸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금력의 세상입니다. 목사님, 이 세상에서는 돈이면 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큰 사업 벌여 놓고 자기도 수를 정확히 기억 못하는 수많은 사원과 중역진을 거느리고 호의호식하며 대통령이던 장관이던 필요하면 언제나 만나서 함께 의논하고 어디가나 줄을 서서 ‘회장님, 사장님’ 하고 모시게 되면 세상에 높은 사람 별로 없어 보입니다. 이것이 사람 사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전도자 솔로몬은 그것도 헛되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여러분이 누리는 것 이상 몇 배나 누려 본 경험이 있는 분입니다.
혹시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육신의 향락이나 큰 사업이 헛될 수 있으나 명예나 권세야 사람에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돈 얼마 가지고 큰소리치고 제 잘난 체하는 것은 우스운 일인지 모르지만 사람에게 명예야 얼마나 귀합니까? 이것을 돈으로 사는 겁니까?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석자 남긴다’고 했는데요.
더구나 권력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권세 앞에야 누구하나 옴짝 합니까? 더구나 우리 한국같은 상황에서 한번 잡아 볼만 합니다. 매력이 있습니다. 이게 사람 사는 게 아닙니까?“
저는 그런 자리에 들어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전도자 솔로몬은 한 나라의 권세를 왕으로 차지했었고 특별한 지혜를 얻은 왕으로써 인근의 모든 나라의 왕들에게까지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명예와 덕을 한 몸에 지녔던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도 헛되다고 그것이 인간에게 참 행복과 기쁨을 주지 못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인간에게 참으로 행복을 주는 것은 남이 밖에서 볼 때 ‘아, 저 사람은 정말 행복하겠다’ 하는대로 꼭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제게 얼마 전에 어느 댁에서 심방을 요청하면서 “밤에야 주인이 들어오시니까 저녁 일곱시 후에 오시는데 목사님 꼭 혼자 와 주세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그 댁엘 갔더니 아주 좋은 주택에 아름답게 실내를 장식하고 훌륭한 자녀를 두었고 그 집주인도 한국에서 우수한 회사의 대표 이사 그러니까 사장님으로 계신 분입니다. 제가 간다고 했더니 위로 할머님, 사장님 내외분, 아들 자부, 손녀, 출가 안한 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정중하게 맞아 드려요. 아주 훌륭한 가정이에요.
그래서 먼저 안부를 하고 어떻게 사업이 다 잘되느냐고 물었더니 “뭐 사업이야 나 혼자 하는 것 아니고 여러분과 같이 하는 것이니까 별거 있겠어요? 이제 며칠 후에 미국을 위시해서 몇 나라를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럼 혼자 가세요?”
“아니요. 우리 나라에서 대표로 몇 사람이 함께 갑니다. 아마 이번 가게 되면 경제 문제 때문에 카터 대통령도 만나 뵙고 외국의 경제 각료들과도 좀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때 옆에 앉아 계시던 부인이 눈에 눈물이 글썽해서 제게 호소하듯 말씀해요.
“목사님, 제 사정 좀 들어주세요.” (제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남의 비밀일 이야기하기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 밤 저는 그 댁에서 오늘 우리 교회에 속한 가정 가운데 이런 가정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 이 이를 좀 잘 인도해 주세요.”
“왜요? 제가 아는대로 사장님 교회도 잘 나오시고 착실한 분으로 다 알려져 있는데요.”
“글쎄 그래도 제가 보긴 그렇지 않아서 그래요. 교회에 다니긴 해도 아직 멀었어요. 교회 일보다 사회 일을 더 열심히 하노라 하거든요. 이제야 이만 했으면, 더구나 나이도 50이 넘었는데 앞으로는 교회 일에 더 힘써야 되지 않겠어요?”
“아니, 이봐, 목사님한테 별 이야기 다하네. 아니 내가 월급 받고 일하는 사장이 월급만큼이라도 일해야 될 것이고 당신도 아는대로 여기 저기 관계되어 있는 것 그거야 나라에서 하라고 해서 그러는 것이니까 별 수 없지 않아” 남편이 곁듭니다.
“그런데 목사님, 이것 보세요. 남들은 나더러 얼마나 행복하냐고 부러워해요. 어떤 친구 사장 부인은 나한테 노골적으로 ‘나는 당신같은 멋있는 사람하고 한번 같이 살면 이제 죽어도 한이 없겠어’ 물론 그것이 농담이겠지만 저에게는 퍽 괴로운 말이에요. 이렇게 일년이면 거의 반 이상 외국에 나가 지내지요. 외국에 가서 무슨 짓을 어떻게 하고 사는지 누가 알아요. 그러니 어떤 때는 막 미칠 지경이예요.”
“이 사람 목사님한테 못하는 소리가 다 없네, 아니 내가 전에 외국에 갔을 때 내 방에 여자를 다 넣어주는 유혹을 받아서도 내쫓아 버렸다고 당신한테 말했잖아. 그런데 아직도 왜 못 믿고 그래. 애들 앞에서 창피하게 말이야.”
“뭣이 창피해요. 다 아는 사실인데요 뭐. 그런데 왜 당신 잠자다가 ‘요시꼬상 요시꼬상’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러니 그 날 밤은 두 분이 주무시지 못하셨겠네요.”했더니,
남편이 “잠이 다 뭡니까? 밤새 싸웠습니다. 이튿날은 회사에 나가서 밑에 사람들에만 짜증을 냈지요.”
“목사님, 그 뿐인 줄 아세요. 이 이가 이렇게 사업 잘하지요. 영어도 잘하지요. 외모도 남한테 떨어지지 않지요. 그러니까 무슨 파티를 하면 예쁜 여자들이 졸졸 따라요. 그러면 이 인 또 좋아서 함께 어울리고 저는 그 꼴을 못봐요. 그래서 혼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와 버려요.”
“그럼, 그날 밤 또 못 주무셨겠네요.”
“못자는게 뭐예요. 저 사람이 나 죽으면 어떤 여자와 결혼할까? 생각하면 뒷 목줄이 뻣뻣해지고 혈압이 오르고 미칠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있다가,
“그러면 사장님이 여자를 보고는 아예 인사도 하지 않으면 되겠어요” 그랬더니 이 부인이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아니 목사님 제 마음을 어쩌면 그렇게 잘 아세요. 네, 그래서 목사님을 수고스럽지만 좀 오시라고 했잖아요?”
옆에서 이 말들을 듣고 있던 대학 다니는 딸이 “남편 노릇하기 되게 힘들겠다”그래요.
그날 밤 주고받은 이야기가 다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지만 한가지 제가 깊이 깨달은 것은 ‘행복이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행복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세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사는 것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누가복음 12장 15절) 인간은 그 소유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욱 많은 것을 가지려 하기 때문에 돈이 적을 때보다 돈이 많으면 욕심이 더 생깁니다. 세상의 것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이 마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족의 비결를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아는 생활 비결이 곧 행복의 비결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은을 사랑하고 자기 마음을 거기에 두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를 아니합니다. 이만했으면 됐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하박국 2장 5절에 보면 “그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하였습니다.
이사야 5장 8절에는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가 있을찐저”하였습니다.
우리가 전에 본 잠언 30장 15절에 보면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자가 이와같다”고 하였습니다.
자연스러운 욕망은 소원하던 것이 얻어지면 그것으로 휴식합니다. 그러나 부패한 욕망은 만족이 없습니다. 자연은 적은 것으로 만족하며 은혜는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하나 탐욕은 그 어떤 것에도 만족을 느끼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55장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돈만 알고, 돈만 사랑하고,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며 사는 현대인에게도 경고가 되는 말씀입니다. 돈이면 다 되는 것 같으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만족과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에스겔 7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지는 것이 됨이로다”
본문 11절에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자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재산이 불어나면 더 좋은 집을 지어야 하고, 거기에 맞는 가구를 장만해야 하고 재산에 어울리는 차를 사야 하고 더 많은 사람은 고용해야 하고 더 많은 손님을 대접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더 많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먹고 입는 것 외의 모든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을 위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소유주 자신에게는 저희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소유하는 것이 더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에 대한 염려도 하게 되므로 마음놓고 휴식할 수 있는 여가도 제대로 가지기 어렵습니다.
본문 12절에 “노동자는 먹은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르므로 자지 못하느니라” 일반적으로 고되게 온 종인 일하고 자기가 일한 데 대한 것만 소유하는 자들은 아무런 고민없이 잠을 잘 잘 수 있습니다. 수고하는 사람의 잠은 답니다. 자기가 노동하므로 인해 피로하기 때문에 잠을 더욱 반가이 여기고 깊이 잠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그 잠을 방해할 정도로 머리를 채우고 있는 염려가 없습니다.
그는 비록 먹는 것도, 먹을 것도 적은지 모르지만 그의 피곤함이 그를 잠재워 줍니다. 혹시 많이 먹는다고 해도 그가 잘잘 수 있는 것은 그가 부지런히 노동하기 때문에 부른 배가 쉬이 꺼져 소화가 잘됩니다. 마찬가지로 부지런히 힘써 일하는 그리스도인도 역시 잠을 잘 잘 수 있습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심방하고 교회를 봉사하면 일한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평안히 잠잘 수 있습니다. 주안에서 평안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해야 할 사람이 일하지 아니할 때 자연히 이런 고민 저런 걱정으로 인해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의심과 번민, 고통과 좌절에 빠져 헤매이게 됩니다.
특히 소유가 많은 사람치고 마음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아도 자기 땅에 풍부한 소출을 내었을 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할까?’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너무 잘 먹기만 해도 몸이 별로 좋지 아니합니다. 심장에 과도한 부담을 주며 병들기 쉽고 따라서 안면 방해가 생깁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북한에서 이곳으로 남하하여 여러 가지 고생 많이 하면서 사업을 해서 어느 정도 안정된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그만한 자리에 이를 때까지 그저 안 먹고 안 쓰고 돈을 벌었습니다. 양복도 안 해 입고 그저 잠바만 입고 살았고 하여간 돈 안 쓰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60이 가까워 오면서 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 동안 돈 좀 모으노라고 안 먹고 안 쓰고 살았으나 이제는 몇 10억 정도의 재산은 되고 안전한 사업이니 먹는 것이나 좀 잘먹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 동안 돈 모으느라고 못 먹었던 그렇게 먹고 싶었던 소고기나 죽을 때까지 마음껏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함박을 많이 사다가 냉장고 냉동실에 넣어 놓고 매일 아침, 점심, 저녁, 한끼도 빠짐없이 먹었습니다. 몇 달 계속하니까 전에 보다 몸도 많이 불었습니다.
“역시 사람이 잘 먹어야 살이 오르누나!” 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하며 계속 먹었습니다. 6개월 이상을 그렇게 먹었는데 동맥경화증을 일으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잘먹기만 해도 병이 납니다. 잠이 안 옵니다.
전에 아하수에로 왕이 주연이 파한 뒤 손님들을 다 보내고 나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도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많은 재물이 해를 끼치기가 쉽습니까? 돈이 많으면 교만하기 쉽습니다. 세상에 너무 마음을 두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했습니다. 세상 유혹이 더욱 많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돈이 많으면 자연히 세상에 끌려갑니다. 염려와 걱정이 더 많아집니다. 그러다가 놓쳐 버립니다.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만들어 가지고 날아가 버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본문 15절 16절에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돈도 벌지 말고, 명예도 소용없고, 권세도 누리지 말고, 지식도 얻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가지고 내 것으로 생각지 말고 바로 사용하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스스로 반성해 보고 기도합시다. 내가 어디에서 만족을 얻으려 하였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으로부터 만족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까?
“내 만족은 주께 있나이다” 아멘, 우리도 이런 고백할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