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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에스라 10:18-10:44
제 목 : 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라
18 제사장의 무리 중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는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와 엘리에셀과 야립과 그달랴라
19 그들이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하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으며
20 또 임멜 자손 중에서는 하나니와 스바댜요
21 하림 자손 중에서는 마아세야와 엘리야와 스마야와 여히엘과 웃시야요
22 바스훌 자손 중에서는 엘료에내와 마아세야와 이스마엘과 느다넬과 요사밧과 엘라사였더라
23 레위 사람 중에서는 요사밧과 시므이와 글라야라 하는 글리다와 브다히야와 유다와 엘리에셀이었더라
24 노래하는 자 중에서는 엘리아십이요 문지기 중에서는 살룸과 델렘과 우리였더라
25 이스라엘 중에서는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라먀와 잇시야와 말기야와 미야민과 엘르아살과 말기야와 브나야요
26 엘람 자손 중에서는 맛다냐와 스가랴와 여히엘과 압디와 여레못과 엘리야요
27 삿두 자손 중에서는 엘료에내와 엘리아십과 맛다냐와 여레못과 사밧과 아시사요
28 베배 자손 중에서는 여호하난과 하나냐와 삽배와 아들래요
29 바니 자손 중에서는 므술람과 말룩과 아다야와 야숩과 스알과 여레못이요
30 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앗나와 글랄과 브나야와 마아세야와 맛다냐와 브살렐과 빈누이와 므낫세요
31 하림 자손 중에서는 엘리에셀과 잇시야와 말기야와 스마야와 시므온과
32 베냐민과 말룩과 스마랴요
33 하숨 자손 중에서는 맛드내와 맛닷다와 사밧과 엘리벨렛과 여레매와 므낫세와 시므이요
34 바니 자손 중에서는 마아대와 아므람과 우엘과
35 브나야와 베드야와 글루히와
36 와냐와 므레못과 에랴십과
37 맛다냐와 맛드내와 야아수와
38 바니와 빈누이와 시므이와
39 셀레먀와 나단과 아다야와
40 막나드배와 사새와 사래와
41 아사렐과 셀레먀와 스마랴와
42 살룸과 아마랴와 요셉이요
43 느보 자손 중에서는 여이엘과 맛디디야와 사밧과 스비내와 잇도와 요엘과 브나야더라
44 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라 그 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
1. 보시기에 좋았더라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이상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벌써 우리의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해졌지만 지난여름은 정말 무더웠습니다. 한 달이 넘는 긴 기간 동안 밤잠을 설쳤습니다. 그때 우리가 했던 말 ‘이번 여름 날씨는 정말로 이상해’였습니다. 얼마 전 수원에서도 일어났던 일이지만 요즘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지진이 빈번히 발생하면서 우리를 불안케 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하는 말 ‘요즘 지구가 뭔가 이상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입니다.
지난 11월 14일에 슈퍼문이라고 해서 아주 큰 달이 떴습니다. 달이 지구 근처에 가장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육안으로 보아도 크기가 14%, 밝기는 30%까지 증가했었다고 합니다. 그때 우리가 하는 말 ‘이상해’였습니다. 또 슈퍼문이 떴을 때, 평소보다 바닷물이 육지 쪽으로 훨씬 더 많이 밀려들어와서 일부 바닷가 저지대는 바닷물에 잠기는 침수사태까지 겪었다고 합니다. 그때도 우리가 했던 말, ‘이상해’였습니다. 예.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상해’라는 말을 정말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상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상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오히려 정말 이상한 일이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지난 주 아내와 함께 TV를 통해 한 토크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그 방송에 출연한 물리학자가 하는 말이 적어도 물리학적인 관점에서는 ‘이상해’라는 말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리학적인 관점에서는 이상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특별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냥 무심코 지나쳐버릴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물리학자의 이 말에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물리학자의 이 말을 통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체계가 얼마나 나약하고,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이상한 일이 결코 일어날 수도 없고, 이상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도 않는다는 말,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모든 현상, 모든 일에는 다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따른 결과로서 어떤 현상,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든,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든 다 원인이 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드물게 일어나는 일은 덮어놓고 ‘이상해’라고 말합니다. 원인이 무엇인지 따져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그 결과에 대해 덮어놓고 ‘이상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지난 여름의 무더위, 최근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진, 얼마 전 떴던 슈퍼문이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일이었다면 우리는 결코 ‘이상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 일들이 일어난 원인을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결코 ‘이상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우리의 인식체계를 가동합니다. 또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 경험한 범위 내에서만 우리의 인식체계를 가동합니다. 이 범위 밖에 있는 일은 그냥 이상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볼펜이 하나 있습니다. 이 볼펜을 제가 제 손에서 놓아보겠습니다. 볼펜이 떨어졌습니다. 혹시 놀라신 분, 계십니까? ‘어, 이상한 일이 일어났네!’라고 생각하신 분, 계십니까?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이렇게 생각하신 분, 계십니까? 아무도 안 계실 것입니다. 예. 아무도 놀라워하지 않고, 아무도 신기해하지 않고,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흔히 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볼펜이 떨어지지 않는 게 우리에게 이상한 일이지, 볼펜이 떨어지는 일은 우리가 흔히 보는 일이기에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더라도 볼펜이 떨어지는 원인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지구 중심 쪽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력으로 인해 물건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 자주 보는 일, 또 원인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일은 우리에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 결론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이나 여러 가지 일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 기준이 철저하게 사람 자신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흔히 보는 일, 사람에게 익숙한 일, 사람이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사람이 흔히 볼 수 없는 일,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 사람이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일은 그냥 이상한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예. 사람은 언제나 사람의 입장에서, 사람의 기준에서 인식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여쭈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즉 사람이 흔히 보지 못하던 일,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 사람이 도대체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일이 자연현상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하나님께는 당연한 일일까요, 하나님께도 이상한 일일까요? 하나님께는 당연한 일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이상한 일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난여름은 굉장히 무더웠고, 요즘 지진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고, 얼마 전 슈퍼문이 떠서 물 피해를 당하는 이상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 일들이 하나님께는 당연한 일일까요, 하나님께도 이상한 일일까요? 하나님께는 당연한 일입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천지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께 이상한 일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이해하고 계셔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지만물이 천지창조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사람에게 좋았더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사람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고, 유익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고, 유익이 되게끔 천지만물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난여름 무더위도, 요즘 일어나는 잦은 지진도, 얼마 전 슈퍼문도 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일어난 일이고, 그 일들은 사람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난여름 무더위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몇 년 안에 더 큰 재난이 우리에게 닥칠 수도 있다는 뜻이고, 지금 작은 지진이 빈번하게 일어나지 않으면 수 년 안에 인류에게 대재앙이 될 수 있는 훨씬 더 큰 지진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또 슈퍼문이 뜨지 않았으면 우주에 대변화가 일어나 인류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재난을 당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당연한 일이고, 결국은 그 일이 사람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실감이 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별로 믿음이 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욥에게 하나님을 가르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욥기 38:4-6],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모두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뜻입니다.
또 [욥기 38:25-29],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모두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하신 이 일이 창조의 원리에 비춰볼 때 누구를 위한 일이겠습니까? 모두 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예.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람과 관련이 있고,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는 당연한 일만 존재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사람,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이상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지식, 나의 경험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인정하면 세상에 이상한 일이란 결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지금까지 자연현상을 중심으로 우리가 ‘이상해’라고 표현하는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상해’라고 표현은 하지만 실제로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낯설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우리가 원인을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당연한 일이고, 이 일을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비춰보면 오히려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헌신 때문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상해’라고 표현하는 일들이 자연현상 속에서 더 많이 발견될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의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더 많이 발견될까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이 이상한 일들이 우리를 훨씬 더 힘들게 하고, 우리를 훨씬 더 지치게 하고, 우리를 훨씬 더 낙담케 하고, 우리를 훨씬 더 우울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이상한 일 몇 가지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아마도 힐러리를 응원했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 이유는 트럼프라는 사람이 너무나 이상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생김새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말하는 내용도 그렇고, 조금은 정상에서 벗어난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당사자인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도 다 그렇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여론 조사도 모두 힐러리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서 힐러리가 최초의 미국 여성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한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트럼프 본인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론 조사와 달리, 모든 사람의 기대와 달리, 그 이상해 보이는 트럼프가 당선이 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미국은 아직까지도 선거 후유증으로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이상한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졌습니다. 국민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일한 사상 초유의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국민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사용한 어처구니없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통령이 근무하는 청와대가 오직 한 사람만의 유익과 이익을 위한 심부름센터가 되어버린 웃지 못 할 일, 참으로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정치권에만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닙니다. 얼마 전 인천 모교회에서 아이를 가지지 못한 한 여 성도가 목사로부터 기도를 받고 아이를 낳았는데, 알고 보니 그 아이의 아버지가 기도를 해준 목사였다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유전자 검사까지 해서 목사가 아버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그 목사와 아이의 엄마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이상한 주장을 하면서 정을 통한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천에 예수가 나타났다는 이상한 조롱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이상한 사건을 예로 들었지만 이외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 사람이 일으키는 이상한 일은 차고 넘칩니다. 자연현상은 비교의 대상도 되지 않습니다. ‘이상해’라는 말을 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상한 일은 우리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남자 이상해. 그 여자 이상해. 그 영화 이상해. 그 노래 이상해. 그 대통령 이상해. 그 나라 이상해. 그 목사 이상해. 그 교회 이상해.’ 예. ‘이상해’라는 이야기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한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상하다고 표현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이상하다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이상한 게 있으면 이상하지 않은 게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이상한 것과 이상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상식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 보편적인 지식, 보편적인 가치, 보편적인 윤리를 상식이라고 합니다. 그 상식을 기준으로 해서 이상한 것과 이상하지 않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기준이 되어서 이상한 것과 이상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을 짓는 것입니다.
조금 전 자연현상 속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은 사람이 보기에 흔하지 않은 일,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 사람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사람의 입장, 사람의 기준에서 이상한 일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도 결국은 사람이 기준이 되어서 이상한 일과 이상하지 않은 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현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에게 이상한 일이 하나님께는 이상한 일이었습니까,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습니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 즉 사람의 상식으로 판단했을 때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이 하나님께는 이상한 일일까요, 당연한 일일까요?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일이 하나님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지으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전무결하게 지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어떤 흠도 없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죄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사람이 불완전한 존재, 흠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완전한 존재, 흠 있는 존재, 즉 죄인이라는 존재에서 예외적인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예. 죄인 아닌 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인이 죄적인 생각을 하는 게 이상한 일입니까, 당연한 일입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죄인이 죄적인 결심을 하는 게 이상한 일입니까, 당연한 일입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죄인이 죄적인 행동을 하는 게 이상한 일입니까, 당연한 일입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예.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이 하는 생각, 사람이 하는 결심, 사람이 하는 행동에는 이상할 게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사람은 똑같습니다. 더 이상한 사람이 있고, 덜 이상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더 선한 사람이 있고, 덜 선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사람은 죄인일 뿐이고, 죄인이 죄인의 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벌이는 이상한 행동은 하나님께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상한 것과 이상하지 않은 것을 구분합니다. 사람의 상식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 상식에 합당하면 이상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 상식을 벗어나면 바로 이상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여쭈어 보겠습니다. 사람의 상식이 완전한 것입니까, 완전하지 않은 것입니까? 완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의 상식이 진리입니까, 진리가 아닙니까?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의 상식이 항상 옳은 것입니까,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상식은 결국 죄인의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인인지라 사람의 상식은 결국 죄인의 상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3.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그런데 더 심각한 일이 일어납니다.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는 사람의 불완전한 상식, 결코 옳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의 불완전한 상식, 결국은 죄인의 상식이 기준이 되어 이상한 것과 이상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즉 죄인의 상식으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의 상식으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해서 옳지 않은 것을 정죄하고, 옳지 않은 것을 징계한다는 것입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사람의 상식, 즉 죄인의 상식이 기준이 되어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했습니다. 그 구분이 바르겠습니까, 바르지 않겠습니까? 바르지 않습니다. 사람의 상식, 즉 죄인의 상식이 기준이 되어 옳지 않은 것을 정죄했습니다. 그 정죄가 바르겠습니까, 바르지 않겠습니까? 바르지 않습니다. 사람의 상식, 즉 죄인의 상식이 기준이 되어 옳지 않은 것을 징계했습니다. 그 징계가 바르겠습니까, 바르지 않겠습니까? 바르지 않습니다. 바르지 않은 구분, 바르지 않은 정죄, 바르지 않은 징계가 일어났습니다. 그 사회가 행복하겠습니까, 불행하겠습니까? 불행합니다.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상식에 입각하여 제 아무리 제도를 뜯어고치고, 사람이 상식에 입각하여 제 아무리 법률을 개선하고, 사람이 상식에 입각하여 제 아무리 담당자를 바꾸어도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왜? 기준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인의 기준을 가지고 죄인의 방식으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세상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선언해주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 중에서도 구약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선언해 주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에스라의 지시로 밝히 드러난 이방여자와 혼인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방여자들과 이방여자들이 낳은 자녀들은 모두 다 이스라엘 사회로부터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졸지에 남편을 잃고,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상태에서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도대체 이들이 무슨 죽을죄를 지었습니까? 도대체 이들이 쫓겨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이 쫓겨나는 이유는 바로 에스라의 욕심 때문입니다. 에스라의 야망 때문입니다.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을 장악해서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에스라의 죄적 심보 때문입니다. 죄적 원리에 눈이 어두워지니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해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사람들을 징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식, 자신의 기준으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나누고, 자기는 옳다는 생각 하에 옳지 않은 것을 정죄하고, 징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더 안타까운 일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대부분의 목사가, 또 대부분의 신학자가 이런 일을 벌인 에스라를 칭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모델인 이스라엘 국가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남자들과 혼인한 이방여인과 그녀들이 낳은 자녀들을 추방한 일이 옳은 일이었다고 에스라를 칭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한 번 해보십시오. 우리나라에 이미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이 낳은 자녀들 또한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다문화가정이라는 표현이 더 이상 낯선 표현이 아닐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오천 년 한민족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 오천 년 백의민족의 순수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게 옳은 일입니까, 옳지 않은 일입니까?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이게 칭찬받을 일입니까, 비난받을 일입니까? 비난받을 일입니다. 그렇다면 에스라가 한 일이 옳은 일입니까, 옳지 않은 일입니까? 옳지 않은 일입니다. 에스라를 칭찬해야 합니까, 에스라를 비난해야 합니까? 비난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에서 대부분의 목사가, 또 대부분의 신학자가 에스라가 옳은 일, 정당한 일을 했다고 칭찬하고 있고, 에스라를 위대한 신앙의 모범으로 치켜세웁니다.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구분을 잘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하겠습니까? 그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그 기준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옳아야 정말로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옳지 않으면 정말로 옳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당신은 옳지 않아. 당신은 틀렸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할 수 없겠습니까? 쉽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지 않다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완벽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옳지 않아. 당신은 틀렸어.’라는 말을 절대로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너는 옳지 않아. 너는 틀렸어.’라고 누군가를 꼭 집어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4. 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라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런 의문을 제기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명단은 무엇입니까? 이방여자들을 아내로 맞은 사람들의 명단 아닙니까? 어쨌든 그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것이고, 잘못한 그 사람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내용이 아닙니까?’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예.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께 오히려 제가 여쭈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잘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까발려 터뜨리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사람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와 용서와 화해와 화평의 하나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결코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명단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이스라엘이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명단에 기록된 이 사람들만 아니라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8절, ‘제사장의 무리 중에’라고 기록하고 있고, 23절, ‘레위 사람 중에서는’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24절, ‘노래하는 자 중에서는’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25절, ‘이스라엘 중에서는’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이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죄인이기에 모든 이들이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았고, 모든 이들이 이방여인을 통해 자녀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에스라 너도 1차로 돌아온 사람들의 무리 중에 있었거나 그들의 자손이었다면 너 역시 그랬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네가 과연 1차로 돌아온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정죄하고, 1차로 돌아온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징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방식, 하나님의 방식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어느 한 사람을 꼭 집어서 그 사람을 칭찬하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은 어느 한 사람을 꼭 집어서 꾸짖지도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그 사람만을 꾸짖고 나무란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사람이든,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 죄인으로 다 똑같은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의 불행이 똑같은 죄인인 에스라로 인하여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러려고 하나님이 되었나?’라고 하나님께서 자괴감을 느끼시는 말씀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그 내용이 44절 마지막 부분, ‘그 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입니다. ‘그 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 이 말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 말은 자녀를 낳은 여인과 그 여인의 자녀를 이스라엘의 백성으로 인정해 주고 받아들였어야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인정해주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추방함으로써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괴롭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7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그 목사님의 부모님이 그 결혼을 찬성했을까요, 반대했을까요? 반대했습니다. 7살 연상의 여인을 며느리로 받아들였을까요,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혼식에 참석도 하지 않으셨고, 결혼한 이후에도 일체 왕래가 없었습니다. 남이 된 것과 다름없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동안 왕래는 없었지만 그래도 손자 얼굴이라도 보여드리겠다는 마음으로 목사님과 사모님은 큰 용기를 내어서 손자를 품에 안고 부모님을 찾아갔습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부모님이 이들을 내쳤을까요, 받아들였을까요? 받아들였습니다. 며느리로 인정을 해주었고, 손자로 인정을 해주었습니다. 즉 가족으로 받아들여준 것입니다. 예. 이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어떻게 했습니까? 이방여인은 물론 그녀들이 낳은 자녀들까지도 이스라엘 사회에서 다 쫓아냈습니다. 이게 사람입니까?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이러려고 하나님이 되었나?’라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괴감이 들겠습니까, 들지 않겠습니까? 들 수밖에 없습니다. 예. 하나님은 에스라를 보고 정말로 안타까우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라를 보고 정말로 속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쭈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라가 잘못 했다고 에스라를 정죄하고 에스라를 꾸짖는 장면이 성경에 나옵니까, 나오지 않습니까? 나오지 않습니다. 에스라가 잘못했다고 에스라를 징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까, 나오지 않습니까? 나오지 않습니다. 예. 하나님은 에스라를 정죄하지도 않았고, 에스라를 징계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에스라는 죄인이고, 죄인이 죄인의 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정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징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죄인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5. 에스라를 마치며
오늘로서 에스라 강해설교를 마치게 됩니다. 모두 스무 번에 걸쳐서 에스라를 살펴보았습니다. 에스라는 결국 죄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율법을 왜곡한 사람이었고, 이스라엘의 불행을 가져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말씀드렸다시피 성경 어디에서도 에스라가 잘못되었다고 하나님께서 에스라를 정죄하고, 에스라를 징계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기준이시고, 하나님만이 옳으신 분인데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원리를 떠나 죄적 원리를 추구하는 에스라가 옳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도 아닌 죄인의 상식으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죄인의 상식으로 옳지 않은 것을 정죄하고, 죄인의 상식으로 옳지 않은 것을 징계합니다. 그러니 세상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사람들의 상식, 즉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생각, 보편적 지식, 보편적 가치, 보편적 윤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상식이 있어야만 그래도 세상이 유지될 수 있다고 저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상식만 지켜도 세상은 그래도 살만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식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도 반드시 알고 계셔야 합니다. 이 상식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도 반드시 알고 계셔야 합니다. 이 상식이 얼마나 사상누각인지도 반드시 알고 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유익과 이익이 상식과 충돌하게 되면 사람들은 상식을 거침없이 버리고 나의 유익과 이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식에 의존하게 되면 세상은 좋아지는 방향으로 전진하는 게 아니라 나빠지는 방향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식이 아니라 절대 기준입니다. 그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결코 요동하지 않으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절대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절대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 절대 기준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절대 기준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절대 기준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따져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의 관점에서 옳지 않은 것이 발견되었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옳은 방향으로 해결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만이 절대 기준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인정하고,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라는 존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가슴 깊이 이해하시고, 나의 성도됨을 자랑하며, 성도로서 아름다운 삶 살아가실 수 있는 우리 다누림의 가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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