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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화서연원(학파) | 독립운동자 | 독립유공자 | 계 | 비 고 |
서울·경기 | 407 | 83 | (29) | 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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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 150 | 66 | (28) | 216 | 여성1명 |
경상남도 | 153 | 11 | (5) | 1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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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 23 | 10 | (7) |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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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 1,787 | 174 | (25) | 1,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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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 896 | 41 | (15) | 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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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 220 | 56 | (28) | 2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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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 621 | 60 | (21) | 6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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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 130 | 42 | (9) | 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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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 269 | 87 | (29) | 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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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 6 | 12 | (3)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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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 122 | 58 | (19) | 180 | 여성1명 |
제주도 | 9 | 8 | (1)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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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 불명 | 2,387 | 30 | (1) | 2,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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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합계 | 7,180 | 738 | (220) | 7,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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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외세의 침략과 외세를 배경으로 한 내국인들의 사건들에 대항한 화서학파의 행동양태는 상소운동, 의병항쟁, 독립투쟁, 애국계몽운동, 임시정부로 이어졌다. 그동안 화서학파는 서울,경기 83명, 강원 66명, 경상 21명, 전남 174명, 전북 41명, 충남 56명, 충북 60명, 제주 8명, 평남 42명, 평북 87명, 황해 58명, 함경 18명, 거소불명 30명 등 746명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조사됐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고 수많은 화서연원들이 역사 속에 숨어버렸다.
우리나라는 항일독립투쟁의 총집결체인 상해 임시정부에서 무장투쟁 중에 국제질서의 영향으로 광복을 맞이했다. 여기에는 전 민족적인 국내외에서 벌인 구국운동의 영향도 컸다. 그 중에는 위정척사사상과 그 실천의지로 무장된 화서학파의 구국운동 활약상이 국내ㆍ국외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을 보이고 있다.
기왕의 연구자들은 화서학파들 중에 위정척사사상에서 벗어난 독립투쟁을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화서의 위정척사론은 일관되게 국가와 민족의 생존권 수호에 있다. 화서학파가 투쟁하여 온 목적은 상실된 국권을 회복하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 민족의 노예화에서 벗어나 는 것이다. 국가와 민족이 생존과 사멸의 갈림길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화서가 군주제를 옹호했다거나 의병이 근왕병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그들의 애국애족심을 훼손하는 것이다.
“정치는 필요악이다.” “정치는 권모술수다.”라고 하듯, 사실 일본이 공들여온 정한론과 아시아의 맹주를 꿈꾸는 침략의 야만성을 알고도 개화파는 일본을 끌어들여 개혁이란 명분으로 변화를 도모하려다가 그들에게 당하고 말았다. 개화정치가 결국은 국가소멸과 민족의 노예화를 자초한 것이다. 개화정객들이 이정도도 몰랐다면 어불성설이다. “정치는 필요악이다”란 말이 딱 들어맞았다.
그러나 국가의 소멸과 민족의 노예화 속에서는 개화파든 동학도든 불교든 기독교든 대종교든 그 투쟁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목적은 국권회복과 민족생존권의 회복이라는 데 동일하다. 그러므로 국권회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방법을 달리한 경우가 허다하다.
위정척사는 당시 정치중심이 아닌 재야선비들의 외세배척의 일치된 이념이었다. 화서는 그 대표학자였다. 화서학파는 정치집단이 아니다. 위정척사론은 공자의 춘추의리에 입각한 국구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조정의 허락 없이 백성(국민)들이 침략해오는 서양과 일본세력, 친일세력(亂臣賊子)을 먼저 토멸하고 후에 보고하는 의리의 정당성은 충분하다. 이것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의병항쟁과 독립투쟁은 불법과 난동으로 아무의미가 없는 것이다. “난신적자는 누구나 다 벨 수 있다”는 춘추대의요 척사의리에 입각하여 의병봉기는 정당화된다.
화서는 상소문에서 자주 자강책으로 의려(의병)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서학파의 척사정신이 가장 심화되어있는 양평(양근·지평)에서 을미의병(지평의병)이 처음 논의되고, 전국에서 가장 먼저 봉기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양동면 덕수 이씨와 순흥안씨 집안에는 위정척사로 무장된 선비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양동에서 시작된 을미의병(지평의병)은 원주 제천을 거쳐 충주공격을 앞두고 연합의병진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연거푸 실패한 의병대장 류인석은 고종의 의병해산 권고에도 불구하고 해산하지 않고 재기를 꿈꾸며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갔다.
그 후 만주에는 1909년 유인석을 도총재로 하는 13도의군이 편성되었다. 유인석을 대장으로 하는 중군장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국가와 민족의 원수 이등박문 일행을 사살하는 쾌거가 있었다. 1919년 4월 만주에서는 모든 독립운동단체들이 합쳐진 ‘대한독립단’이 결성되었다. 도총재 박장호, 총단장 조맹선을 비롯하여 화서학파가 그 주역을 담당했다. 동시에 중국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모든 독립운동은 임시정부 산하에서 전개되었는데, 백범 김구 주석에 이르러 대일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역시 화서학파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 임시정부 법통은 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
이 책을 엮어내는 목적은 “양근 벽계는 국가의 원기가 되는 고장”이라는 말과 “양근은 의향이다”라는 말의 의미와 벽계마을에 ‘한국민족독립운동발상지비’와 ‘화서학파독립운동기념비’를 건립하는 역사적 합리성과 타당성을 찾는데 있다. 그러므로 주제에 따른 방대한 내용을 압축한 개론적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2. 화서학파와 국내 독립운동 단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모이는 갓이 단체다. 독립운동단체의 목적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불합리한 지배로부터 자주권을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지배자라는 상대와 싸워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즉 일본은 어떤 명분으로든, 무력으로든 그 목적을 방해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므로 각 단체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탄압을 받아 좌절하기 일 수였다.
여기서 각 독립운동 단체들은 수 없는 시작과 수 없는 해체를 반복하였다. 헤쳐 모이고 또 헤쳐모이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단체를 이끄는 주역들은 수 없는 단체를 만들어야만 했다.
본 고에서 밝힌 국내단체 16개와 국외단체 60여 단체의 조직과 해체의 경우를 보면, 조직은 자의적이지만 해체는 외부적 힘에 의해 물리적으로 한 경우와 내부적 갈등에서 비롯된 경우 있다. 목적은 모두 똑같은데 조직을 이끄는 사람들의 목표는 다르고 방법도 다르기 때문에 독립운동 단체들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화서학파의 줄기를 이루는 후학들은 크게 보면,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 운암 박문일 성암 박문오,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금계 이근원 등으로 분류되고, 다시 지역적으로 대별한다면 남부는 최익현 계열, 북부는 유인석 계열로 대별된다. 그러므로 북한지방은 대부분 박문일 계열과 유인석 계열이 주류를 이루고, 박문일 계열은 유인석 계열에 흡수되어 유인석의 문인들이 절대적인 숫자를 점하고 있다.
1. 공성단
공성단(共成團)은 현기정(1878∼1922)이 1919년 11월 그의 고향인 평안북도 개천으로 돌아와 조직한 비밀결사대로 군자금을 모아 대한독립단을 지원하였던 독립운동단체다. 여기에 현기정은 유인석 문인이다.
2. 대한광복회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는 1913년 채기중이 경북 풍기에서 결성하고,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과 황해도 송화군 사람 화사 이관구(1885∼1953) 등이 대한광복회로 확대 조직하였다. 1916년 만주사령관에 이진룡(류인석 문인)을 임명, 김좌진 노백린 등이 합세하였다. 여기에는 평북 소재, 양택선, 변동환, 조선환, 고석노, 이관구, 윤헌, 오찬근, 양봉제, 임용승, 박동흠 등이 모두 화서학파다.
3. 대한독립일신청년단
대한독립일신청년단(大韓獨立日新靑年團)은 평안남도에 소재한 독립운동단체다. 1920년 음 6월 김경하(1879∼1927)는 김예진 장덕진 등 20여명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단장 김경하는 국동 조병준(박문일 문인)의 제자로 화서학파에 속한다. 이들은 국내 독립투쟁과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4. 대한독립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은 1920년 평북 태천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 지단장 백낙기, 부지단장 김택서(1866∼1936), 총무감 김용서, 재무감 백용진, 서기 홍순기 등이었다. 여기서 김택서는 류인석 문인, 김용서 백용진 등은 박문오 문인으로 화서학파다. 지단장 백낙기도 화서학파로 분류된다.
5. 독립의군부
독립의군부(獨立義軍部)는 임병찬(1851∼1916)이 조직한 항일독립운동 단체다. 임병찬은 전북 옥구 출신으로 1912년 고종의 밀조를 받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도순무대장에 임명되어,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조직을 확대 강화했다. 그해 12월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전라남북도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임병찬은 1913년 1월 아들 응철(應喆)을 서울로 보내 이인순(李寅淳) 곽한일(郭漢一) 전용규(田瑢圭) 등과 협의케 하는 한편 호남지방의 유생 임태흥(林泰興) 임창현(林昌鉉) 김덕장 등과 같이 전라남북도 조직 정비에 착수했다. 여기서 임병찬, 곽한일, 임응철, 김덕장 등은 최익현의 문인으로 화서학파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6. 서우학회
서우학회(西友學會)는 1906년 10월 서울에서 설립되었고, 발기인은 평안도 황해도 지방 출신의 관료, 지식인들이다. 박은식 김병도 장응량 김윤오 김병일 김달하 김석환 김명준 곽윤기 김기주 등 12명이다. 회원은 1000여명으로 확대되었는데, “사회진화론적 인식에 근거한 실력양성론으로서 민력 양성을 통한 국권회복과 민권신장을 목표”로 삼고 있다. 백암 박은식(1859∼1925)은 화서 문인 박문일의 제자로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황해도 독립운동가다.
7. 숭의단
숭의단(崇義團)은 1920년 5월 정원범(1881∼1920)이 정치민(鄭致敏)과 함께 조직한 비밀결사다. 정원범은 대한청년 숭의단을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숭의단은 “국내로 잠입하는 독립운동자의 신변을 보호하고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는 한편 만주의 독립군이 국내로 진공할 때 이에 호응하여 국내의 각 관공서를 습격하고 관공리를 처단” 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여기 독립운동가 정원범(1881∼1920)은 유인석의 제자로 철산군 철산면 출신이다.
8. 신민회
신민회(新民會)는 1907년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하는 비밀애국계몽단체다. 성재 유중교 문인인 후조 고석노의 제자 백범 김구(1876∼1949)가 여기에 가담하여 해주 총감으로 활동하고, 1910년 양기탁(梁起鐸)이 소집한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백범 김구가 화서학파임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9. 신안사
신안사(新安社)는 1926년 10월경 김정업(1880∼ ?)이 김택서 김기한 김두운 이종기 등이 독립 쟁취에 필요한 투사를 모집하고 광복 후의 정부요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창설한 단체다. 이들은 각 서당을 순회하며 유능한 젊은 청년들을 모집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여기서 이종기를 제외한 네 명은 박문일 혹은 유인석 문인으로 화서학파에 속한다.
10. 대한독립단 태천지단
대한독립단 태천지단은 단장 백낙기, 부단장 김택서, 총무감 김용서, 재무감 백용진, 서기 홍순기 등이 1920년 김택서 집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다. 이 단체는 독립운동을 원조하고 군자금을 조달운동을 벌였다. 여기서 김택서 김용서 백용진은 화서학파에 속한다.
11. 종유계
종유계(宗儒契)는 1904년 12월 평안도 유림들을 중심으로 정진원 장세정 등이 조직한 항일독립운동단체이다. 정진원(1868∼1943)은 평남 덕천 출신이고 장세정(1859∼1931)은 평북 용천출신 인데 모두 류인석의 문인이다.
12. 천마산대
천마산대(天摩山隊)는 평북의주 소재한 독립운동단체다. 1919년 최시흥(崔時興) 양세봉 양봉제 등 대한제국기의 군인 출신들이 평안북도의 천마산을 근거지로 하여 조직한 항일 독립운동단체로 일제 군경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후에 만주로 이동하여 대한 통의부에 편입하였다. 여기서 양봉제(1896∼ ?)는 평북 회천 출신으로 박문일 문인이다.
3. 화서학파와 국외 독립운동단체
1) 고려혁명당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은 1926년 4월 5일 중국 지린 성[吉林省]에서 결성된 항일독립운동단체다. 이 시기까지 만주지역 한인민족운동은 직접적인 무장투쟁과 민생교육 등의 자치활동에 주력해왔다. 고려혁명당 창당 당시 간부진은 위원장 양기탁, 책임비서 이동구, 위원 정이형 현정경 고할신 오동진 이동락 현익철 이규풍 주진수 등 13명이었다. 당원 수는 정당원과 준 당원을 합하여 1,500여 명이었다. 여기 현정경(1884∼1941)은 유인석의 문인이다.
2) 광복군참리부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는 1920년 경 만주 관전현 홍통구 향로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광복군참리부는 대한독립단(기원파, 민국파), 한족회, 대한청년연합회, 대한의용군사회가 통합되어 상해 임시정부에서 승인한 남북만주 교민통치기관으로 조직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부 직속 하에 두고 광복군사령부와 양립하면서 교민의 자치기관으로 활동하였다. 주요 인사를 보면, 광복군참리부장 조병준, 협찬 김승만, 내무사장 신우현, 외무사장 김두만, 재무사장 백기준, 법무사장 신언갑, 교통사장 백의범, 경무사장 윤창수 등이다. 이 중에서 화서학파를 살펴보면 조병준은 박문일의 문인이고, 김승만 신우현 신언갑 백의범 등은 조병준의 문인으로 화서학파다.
3) 광복군사령부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의 정식 명칭은 대한광복군사령부(大韓光復軍司令部)이다. 1920년대 만주 관전현 홍통구 향로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단체이다. 광복군사령부는 기원독립단, 민국독립단, 한족회, 대한청년회연합회, 대한 의용군사의회 등을 통합하여 임시정부의 통일전선 구축을 위한 남북만군사기관(南北滿軍事機關)으로 조직되었다. 광복군사령부는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부 직속 하에 두고 광복군 참리부와 양존하면서 무장독립군단체로 활동하였다.
주요 인사를 보면 광복군 사령장 조맹선, 부관 오형근, 참모장 이탁, 군정 및 군기국장 김승학, 군법무국장 변창근, 군수국장 유응하, 군령국장 박이열, 소모국장 홍식, 정보국장 양기하, 훈련국장 여형근, 고득수(제3영 제1대대장) 등이다. 이 중에서 화서학파의 인물은 조맹선은 유인석의 제자이고, 김승학 박이열 홍식은 박문일의 제자 조병준의 문인이다.
4) 광복단
광복단(光復團)은 남만주에 소재한 독립운동단체이다. 광복단은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韓焄)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서 비롯한다. 1915년에 대구의 박상진 양제안 우재룡 등과 합류하여 광복회(光復會)로 개칭되었고, 다시 1916년에 노백린 김좌진 최면식 등이 가담하였다.
광복단은 만주에서 군대를 편성하여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한다는 목표를 세운 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부호들에게 군자금 모집 취지서를 발송하고 친일파 처단활동을 했다. 여기에 최면식(1891∼1944)은 연락책으로 국내로 잠입했다가 대전에서 붙잡히어 공주형무소에 무기수로 복역하였다. 최면식은 경기도 포천의 면암 최익현의 손자로 화서학파이다.
5) 광한단
광한단(光韓團)은 1920년 2월 남만주 지역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조직은 한족회의 소장파 현정경 현익철 이호원 김석선 홍원경 등과 국내에서 새로 만주로 건너간 장명환 김관성 이춘산 김태호 박정호 등 40여 명에 의해 관전현 향로구에서 조직되었다.
당시 남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는 정식군대를 지휘하여 국내 진격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그동안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남만주 지역의 정세가 대규모 군사행동이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한단은 전국 2백여 군의 각 면에 동지를 배치하여 기관을 두고 폭탄과 단총을 구입하였다가, 어느 시기에 일제히 궐기하여 군사시설과 행정기관을 파괴한다는 목표를 갖고 결성되었다. 여기 중앙집행위원장 현정경(1884∼1941)은 유인석 문인으로 화서학파다.
6) 민국독립단
민국독립단은 대한독립단 총재부 간부들 사이에 이념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마침 연호 사용문제를 놓고 노년층에서는 ‘단기’ 또는 ‘융희’를 사용하자는 주장이었고, 청년층에서는 ‘민국’연호를 사용하자는 주장이었다. 전자는 기원독립단, 후자는 민국독립단이라 한다.
주요인사는 도총재 조병준, 부총재 변창근, 자의부장 조정환, 총단장 신우현, 부단장 유응하, 총무부장 백기준, 소모부장 홍식, 훈련부장 여형근, 선전부장 양기하, 경호부장 고득수, 교통부장 김시형, 재무부장 김승학, 국내특파원 박이열 백의범 김익곤 배준호 박찬계 장학구 등이다. 여기서 조병준 변창근 신우현 백기준 홍식 고득수 김시형 김승학 박이열 백의범 등은 조병준의 문인으로 화서학파다.
7) 기원독립단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은 민국독립단과 대치된 분파조직이다. 그러나 조국독립운동에서는 서로 원조하고 협력하였다. 그러나 1920년 7월에 두 단체는 광복군사령부로 통합되었다. 기원독립단의 주요인사는 화서 문인 박장호와 이웅해 김평직전덕원 강규묵 김정희 백진해 채원개 백경수 등이다. 이 중에 박장호 이웅해 전덕원 강규묵 백진해 등은 화서학파다.
8) 국민부
국민부(國民府)는 1929년 정의부 중심의 전민족유일당협의회파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모체로 결성한 남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이다. 국민부는 1927년 4월 15일 제1회 대표자회의를 계기로 만주지역에서 활발하게 조직·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과 삼부통합회의가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하고 분열된 결과로 조직되었다. 즉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들은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위해 다양한 논의를 했으나, 개인 가입을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조직 촉성회와 단체중심조직론을 내세운 전민족유일당 사이의 견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립했다. 여기에 중앙집행위원장 이세영과 군사위원장 이웅해, 법무위원장 현정경은 화서학파에 속한다.
9) 군민의회
군민회의(軍民議會)는 남만주에 소재한 독립운동단체이다. 1928년 지린[吉林]에서 열린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의 3부 대표들은 한국독립당과 군민의회(軍民議會)를 조직했다. 조병준의 문인 김승학은 1920년에는 임시정부 직할의 광복군사령부 군정(軍政) 겸 군기국장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했고, 1921년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이 되었다. 1925년 임시의정원 평안도대의원, 임정 학무부차장·학무총장대리를 역임하였다. 그는 1927년 임정 참의부 참의장을 지내고 군민의회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10) 권업회
권업회(勸業會)는 브라디보스토크 소재한 독립운동단체다. 이 단체는 1911년 12월 19일 노령 해삼위 신한촌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이 권업회는 노령 해삼위의 유력자 이종덕이 러시아 당국의 허가를 받아 본부를 신한촌(新韓村)에 설치하였으며 해조신문을 발행하고 민지(民智)를 개발하고 애국계몽에 주력하였다. 주요 인사를 보면 이종덕 정재관 이상설(1870∼1917), 김도여 김입 윤해 등이다. 여기서 회장 이상설은 의암 유인석의 문인으로 화서학파이다.
11) 농무계
농무계(農務契)는 만주에 소재한 독립운동단체로 조병준, 백삼규, 전덕원 등이 조직한 단체이다. 이 독립운동단체는 만주에 산재한 동포를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다. 이 단체는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의병장 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자치운동을 목적으로 예속(禮俗)을 권장하고 둔전영농(屯田營農)을 하며 전술을 훈련하여 국내 진입 작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주요 인사를 보면 백삼규 조병준 전덕원 등이다. 이들 셋은 모두 화서학파이다. 백삼규와 조병준은 박문일 문인이고, 전덕원은 유인석 문인이다.
12) 대조선독립단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은 철원사람 박용만이 1919년 3월3일 미국의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350명을 규합하여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다. 이 단체의 목적은 독립운동에 한국민족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원동(遠東)의 각 단체와 더불어 대동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운동자금을 모금, 각지와 연락하여 군사운동을 후원하며, 출판과 외교사업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 해 5월에 김현구(1889∼1967)가 가입하여 대표를 지내기도 하였다. 김현구는 최익현의 제자로 화서학파에 속한다.
13) 대한교육회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는 1919년 10월 15일 박은식이 상해에서 조직한 단체인데, 국민교육의 연구와 유학생 파견 및 지도를 목적으로 국민교육 진흥 단체이다. 회장은 화서학파의 백암 박은식이다.
14) 대한군정부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는 1919년 8월 7일 서일, 김좌진 등이 정의단을 대한군정부로 개편하였고, 다시 9월에 북로군정서로 개칭하였던 독립군단이다. 김원조는 군정부의 군자금 책으로 1920년 1월 2일 서울로 잠입하여 낙원동에서 부호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요구하다 신고로 형사대가 추격하자 이천에 숨어 있다가 12월 28일 형사대에 붙들려 1923년 4월 15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5) 대한독립단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은 1919년 4월에 조직되어 만주 유하현 삼원보 대화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한국 독립운동단체다. 1910년 유인석을 도총재로 한 13도의군 다음에 조직된 가장 큰 독립투쟁단체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후 수 많은 애국지사들과 청년들이 만주로 건너감에 따라 만주 각지에 산재되어 있는 독립운동단체인 의병단, 유림단, 보약사, 향약계, 농무계, 포수단 대표 등 560인이 집회하여 기존단체를 모두 해산하고 단일 독립투쟁 기관인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단은 국내 지단을 설치하는 등 전투부대를 편성하여 활동하였다.
간부를 보면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총무부장 김평식, 자의부장 박치익, 사한장 김기한, 부참모장 박양섭, 총참모 조병준, 참모 송상규, 참모 강규묵, 조응걸, 이정근 유제춘 등이다. 또한 평안남도 지단장 궁인성, 함남지단장 김성엽, 박천지단장 박승연, 단원 유제춘 등으로 이들은 모두 파서학파에 속한다.
16) 대한독립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은 1919년 4월 봉천성(奉天省) 안동현(安東縣) 구시가(舊市街) 풍순루([豊順樓)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단체다. 총재 안병찬, 단장 함석은 등을 중심으로 백용진 김용서 홍순기 김병린 등으로 결성되었다.
여기 백용진 김용서 홍순기 김병린 등은 대한독립단 태천 지단을 조직하고, 다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조달에 노력하는 한편 항일운동에 헌신하였다. 여기에 재무감 백용진(1871∼?)과 김용서(1872∼?)는 박문오 문인으로 태천 출신의 화서학파이다.
17) 대한인국민회의
대한인국민회의(大韓人國民會議)는 북미 중심의 독립운동단체이다. 홍종표(1880~1951)는 홍언(洪焉)이라고도 한다. 1902년 중국(中國)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양지사무소(量地事務所)에서 사무를 보는 한편, 1903년 간도의 한 사숙(私塾)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04년 귀국한 뒤 1905년 넷째형 경표(景杓)와 함께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하와이로 이민 후 가와이섬 막가윌리 사탕농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1906년 6월 송건 등과 함께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고, 이듬해인 1907년 9월 동포들의 실력 양성과 교육 장려를 위해 활동하였다.
1907년 9월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되었던 24개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대표자 30명이 호놀룰루에서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여 하와이의 모든 단체를 망라하는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조직하고 동년 10월 기관지 「한인합성신보(韓人合成新報)」를 창간하자, 동 기관지의 주필로 임명되어 1909년 1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활동하였다.
또한 1909년 2월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미주의 공립협회(共立協會)가 해외 한인의 통일기관을 설치하기 위해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고 그 총무로 활동하였다.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로 임명되었다.
1911년 11월에는 미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로 선출되는 등 1908년부터 약 4년 동안 신문을 제작·발행하여 조국의 국권회복과 한인동포들의 안녕 보장 및 민족교육 장려, 문맹퇴치운동,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헌신하였다.
홍언은 1923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무로 선임되어 회의 재정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1924년에는 김현구(金鉉九) 최진하(崔鎭河) 등과 함께 이문회(以文會)라는 문예창작그룹을 조직하여 그의 문재(文才)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김현구는 하와이 총회장으로 활동한다. 여기서 홍언은 김평묵 계열이고 김현구는 최익현의 제자로 화서학파의 독립투쟁은 구미에서도 활발하다.
18)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는 1920년 만주 관전현 홍통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단체다. 그 조직과 활동을 보면,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각지에서 청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산만하게 추진되어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청년운동을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통일된 연합회체제로 정비한 것이다. 이 단체는 상해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아 교통사무를 담당하고 임시정부 발행 독립신문을 국내에 배부하는 한편 ‘대한청년보’를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 선전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결사대원을 선출하여 의용대를 조직하였다.
여기에 주요인사는 총재 김승만, 부총재 박춘근, 총무 김찬성, 재정부장 김시점, 편집부장 함석은, 통신부장 오학수, 교육부장 최지화, 서기 오능조․ 유건혁․ 安炳贊․ 지응진 김두만 차경신 여형근 김봉성 최봉린 송세하 홍리관 백덕현 이탁 이애시 등이다. 여기서 총재 김승만은 조병준의 문인이다.
19) 대한통의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는 1922년 8월 23일 군정서, 대한독립단, 관전동로한교민단, 대한광복군영, 대한정의군영, 대한광복군총영, 평안북도독판부 등 이른바 8단(團) 9회(會)의 대표 71명이 환인현 마권자에 모여 대한통의부 결성과 동시에 6개항을 결의하고, 8월 30일 남만한족통일회 회장 김승만 명의로 이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간부는 모두 73명이었는데, 주요 간부는 총장 김동삼, 비서과장 고활신, 재무부장 이병기, 법무부장 현정경, 교통부장 오동진, 군사부장 양규열, 사령장 김창환, 부총장 채상덕, 민사부장 이웅해, 교섭부장 김승만, 학무부장 신언갑, 실업부장 변창근, 참모부장 이천민, 경무감에 전덕원 등이었다. 이 직제에 의하면 대한 통군부에서 ‘대한통의부’로 확대 발전하며 군사활동과 한인자치를 더욱 강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현정경 양규열 채상덕 이웅해 김승만 신언갑 전덕원 등은 화서학파에 속한다.
20. 독립군(獨立軍)
이 독립운동 단체는 1919년 만주에서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하던 인사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대한독립단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군을 편성하여 훈련을 계속하다가 광복군사령부 소속으로 흡수되었다. 여기에 주요인사 주요인사는 의암 유인석 문인 趙孟善이다.
21. 독립군(獨立軍)
이 독립운동 단체는 1916년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황해도 평산에서 거의하여 활동하던 이진룡이 1919년 10월 의병진 부장 한정만에게 지휘권을 위임하고, 본인은 만주로 망명하여 국내진공을 계획하여 조직한 것으로 보인다. 1916년 9월 평양에서 운산, 북진으로 돌아오는 일본의 송금마차를 습격한바 있으며 계속 국내진입을 위하여 계획하며 활동하였다. 여기에 주요인사는 이진룡 조맹선 황봉운 황봉신 김원섭 김일 김효선 한치현 이종협 등이다. 여기서 화서학파는 이진룡(1879∼?) 조맹선(1869∼1922) 이다.
22. 독립군(獨立軍)
이 독립운동 단체는 1919년 만주 관전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조직과 활동을 보면, 전덕원이 일제 침략에 무력 항쟁코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진입하여 일본 기관 파괴와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리하여 1919~1920년 관전현, 통화현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국내에 진입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 모집 및 일본 경찰과 교전하는 등 활동하였다. 주요인사는 전덕원(1870∼?), 옥영준, 이학천 등이고, 전덕원은 유인석의 문인으로 화서학파의 독립운동가다.
23. 독립군(獨立軍)
이 독립운동 단체는 1919년 만주 관전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1906년 국권이 침탈되자 백삼규는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대한독립단 부총재가 되어 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전술한 전덕원계의 독립군과 같으며, 1920년 왜적이 관전현 향로봉 소재 청년단을 습격한다는 정보를 받고 청산구에 출격하였다가 간부진이 붙잡히게 됨으로써 사실상 활동이 종료되었다. 이 독립군의 중심 인사는 유인석의 문인 백삼규(1855∼1920)다.
24. 동의단지회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는 안중근 등 12인이 무명지를 자르며 맹세한 단지동맹 결사대다. 안중근은 1909년 독립운동을 같이 하던 유인석(김두성)을 총재,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 대한국 13도의군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안중근은 참모중장으로 선임되어, 독립특파대장의 이름을 띠고, 치열한 한일투쟁을 결행하기 시작한다.
안중근(1879∼1910) 의사는 1909년 2월 11인의 동지와 함께 의병의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1909년 3월 5일(음력 2월 7일), 연추 하리(下里) 마을에서 생사를 같이하며 구국운동에 투신하는 동지 11인과 단지동맹을 결행하고 ‘조국 독립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위하는 목적으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안중근 김기룡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백규삼 황영길 조응순 김천화 강창두 등 12인은 무명지를 잘라 피로 쓴 ‘한국독립기’와 단지동맹 때 자른 손가락 기타 서류는, 독립운동가 들과 러시아 지역 한국인들에게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국가와 민족의 원수인 일본의 전쟁범죄자 이등박문(伊藤博文) 등을 하얼빈역에서 사살 다음해인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서 순국하였다. 13도의군을 추진한 것은 1908년부터이고, 안중근이 거사전에 유인석이 있는 맹령(孟嶺)에 가서 고하고, 이등박문을 사살한 권총이 이진룡이 준 것이고, 이진룡이 거사자금을 제공하고, 안중근이 배후를 대라는 문초에 춘천에 김두성이라 한 점이다. 춘천에는 김두성이란 항일활동자가 없고, ‘金斗星’이 의미하는 것은 북두칠성이다. 북두칠성은 하늘의 좌표다. 밤길을 잃었을 때에 방향을 알 수 있는 좌표로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유인석은 김구가 독립투쟁하면서 유인석을 좌표로 삼았듯이, 안중근 독립운동의 축도 유인석에게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김두성이 만약에 왕을 뜻하여 대답한 것이라면 태양(해)에 비추어 말했을 것이다. 하늘의 중심은 태양(日)에 있고 왕은 국가와 국민의 축이 되기에 말이다.
안중근과 안중근이 노령에 다녀올 때에 동행한 이진룡 정재관은 화서학파다. 안중근은 후조 고석노(1840∼1922)의 제자고 정재관 이진룡은 유인석의 제자다.
25. 동제사
동제사(同濟社)는 1912년 7월 상하이에서 결성된 항일독립운동단체다. 1911년 3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중국혁명에 적극 참여했던 신규식을 주도로 하여 박은식·신채호·조소앙·문일평·김규식·박찬익·조성환·신석우·윤보선·장건상·여운형·조동호·홍명희 등이 참여했다.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베이징[北京]·톈진[天津]·만주 등 중국지역과 구미(歐美), 일본에 지사를 두었는데, 본부의 이사장과 총재는 신규식과 박은식이 맡았다.
26. 민국독립단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은 서간도 소재한 대한독립단의 분파이다. 조병준, 도총재, 변창근(부총재), 신우현(총단장), 홍식(소모부장), 고득수(경호부장), 김시형(교통부장), 김승학(재무부장), 박이열(국내특파원), 백의범(국내특파원), 김성엽(국내특파원), 김영달(비밀연락원) 등이다. 이들은 모두 화사학파다.
27. 민족유일독립당
민족유일독립당(民族唯一獨立黨)은 만주에 소재한 독립운동단체다. 여기에 구성원인 현정경은 집행위원이었다.
28. 백서농장
백서농장(白西農庄)은 1915년 신흥학우단과 부민단 간부들이 신흥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만주 통화현 팔리초(八里哨) 소백차(小白岔)에서 조직하였다. 이들은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하기위한 기반을 갖추고자 군영인 백서농장을 건설한 것이다. 초대 장주는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김동삼이었고, 간부들은 주로 신흥학우단의 회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대외적으로는 백서농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나 내부에서는 우리 군영(軍營)이라 불렀다. 여기에 양규열은 1917년 훈독으로 교육에 힘썼다. 후에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한다.
29. 부민회
부민회(扶民會)는 1914년 7월 공리회를 합쳐서 부민단(扶民團)을 결성하여 신흥학교가 위치한 만주 통화현 제6구 하니강(哈泥河)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이름이 전체적이 못 된다 하여 대표자 대회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하고 부민회라 개칭하였다.
단장을 적임자로 교체할 것, 단(團)을 회(會)로 바꾸어 범위를 넓힐 것, 지방직을 단총에서 총관이라 개칭할 것, 교포간의 소송을 담당할 검찰과 사판(査判)장을 둘 것, 신흥학교의 경비, 교육비를 책임질 것, 흉년에도 불구하고 조국광복에 일로매진한다는 등이다.
부민회의 주요 인사를 보면 회장 이상용, 부회장 이세영, 의사부장 김동삼, 재무부장 안동식, 학무부장 양규열(재훈), 검무감 최명수, 사판장 이진산, 검독 성인호, 중앙검찰 김형식 등이다. 여기서 이세영은 양헌수 문인이고, 양규열은 재훈이라고도 하는데 양평군 용문면 사람으로 성재 유중교의 문인이다.
30. 북로군정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1919년에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조직된 무장 독립운동 단체. 서일, 김좌진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여기에 경상도 안동 출신으로 평해군수를 역임한 송석 강재천이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붙잡히어 옥중 순국하였다. 강재천은 최익현의 문인으로 화서학파에 속한다.
31. 서로군정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는 1919년 4월 남만주에서 조직된 군정부가 상해임시정부를 민족의 총본영으로 인정하여 독립운동을 임시정부 중심으로 하자는 취지하에 남만대표로 윤기섭을 상해에 파견하는 동시에 서로군정서라 개칭하였다. 1920년 서로군정서는 신흥학교를 개편하여 정식 사관학교로 개교식을 가졌는데, 고광은 계속해서 교장을 맡아 독립군양성에 주력하였다. 부서를 보면 독판 이상용, 부독판 여준, 정무청장 이석, 군정청장 양규열(재훈), 참모장 김동삼, 교관 이청천 등이다. 여기서 고광 이세영은 양헌수 제자이고 백당 양규열은 유중교의 제자로 화서학파이다.
32. 성명회
성명회(聲明會)는 1910년 8월 17일 결성하여 해삼위를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단체이다. 성명회는 1910년 8월에 이르러 일제 침략의 마수가 노골화됨에 따라 망명 온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국권 침탈을 저지 반대하기 위하여 조직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국권 침탈 행위는 국제공약의 배신행위라고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왜적의 죄상을 폭로하는 한편, 대중집회를 열고 애국청년들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성명회의 주요인사는 유인석, 이범윤, 김학만, 이상설, 차석보, 김좌두, 김치보 등이다. 화서 문인 유인석과 그의 제자 이상설이 있다.
33. 신민회
신민회(新民會)는 1907년 안창호, 양기탁, 신채호 등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항일 비밀 결사단체다. 이들은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우고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는 등 꾸준히 항일 활동을 벌였으나, 1910년에 데라우치(寺內) 총독 암살 모의 사건으로 많은 회원이 투옥됨으로써 해체되었다. 여기에 소속된 송석 강재천은 최익현 문인이고, 우송 김현제(만제)는 유인석의 제자로 화서학파다.
34. 신동아동제사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는 신규식(申圭植) 등이 1911년 신해혁명 직후 상하이에서 한국독립을 위하여 조직한 단체다. 박은식 김규식 신규식 신채호 등 30여 명은 동제사(同濟社)를 결성, 한국과 중국의 혁명지사를 서로 연결하고 두 국민 사이의 우의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신아동제사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중국국민당의 중진인사들인 쑹자오런(宋敎仁) 천잉스(陳英士) 등 30명이 참가하였다. 신규식은 중국의 혁명인사들에게 독립운동에 필요한 전술전략의 전수와 군수물자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신아동제사의 활동이 기반이 되어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프랑스인 거주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다. 신규식이 죽은 다음 신아동제사는 해산되었다. 여기에 소속해 있던 백암 박은식은 화서학파다.
35. 신한청년단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은 1918년 8월 중국 상해(上海)에서 우리나라의 망명독립지사들이 조직한 한국독립운동단체이다. 일명 신한청년당이라고도 한다. 이 조직을 이끈 중에는 백범 김구가 이사로 있었다.
36. 신흥학교
신흥학교(信興學校)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1910년 유하현 제2구 삼원보 추가가(鄒家街)에서 신흥강습소로 창설되어 군사 훈련을 시켜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다시 통화현 제6구 합니하(하니강) 근처로 옮기고 ‘신흥학교’로 개칭하고 군사반을 두어 훈련을 실시하였다. 주요 임원을 보면 교장에 이세영, 부교장에 양규열(후에 교장), 학감 윤기섭, 훈련감 김창환, 교육대장 이청천, 교관 계용보․원병상․백종렬․오상세, 경리 남정섭․김자순 등이다. 여기서 교장 이세영은 양헌수 제자이고 부교장 양규열은 류중교 제자로 화서학파다.
37.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1919년 5월 3일 신흥학교를 개칭하여 만주 유하현에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군사학교라고 하겠다. 1911년 신흥강습소가 만주에서 군사교육의 효시를 이루고 있어서 통화현 하니강(唅泥河)변으로 이전하여 신흥학교로 개칭하고 다시 신흥무관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교육과정을 보면 중등과정의 학과와 군사학을 교수하여 오다가 다시 유하현 고산자(孤山子)에 이전하여 신흥무관학교로 개명하여 군사학과 군사훈련을 교육하였다.
교육과정으로는 하사관반은 3개월, 특별반은 1개월, 장교반은 6개월 등 3개 과정을 두고 1920년 8월 폐교당할 때까지 2,100여명의 독립군을 배출하였으며, 청산리전투의 대첩과 친일 주구들을 주살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주요 인사를 보면 교장 이세영, 부교장 양규열, 교감 윤기섭, 교관 오광선 신팔균 이범석 김경천 이장섭 안사영 이청천 등이다. 이중에서 이세영은 양헌수의 문인이고, 양규열은 성재 유중교의 문인이다.
38. 십삼도의군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은 1909년 7월 이상설 이범윤 등이 노령 해삼위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는데,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1910년 6월 연해주의 연추(煙秋)(엔치허)와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유인석 이상설 이범윤 최재형 이재윤 안중근 정재관 이진룡 우병령 등이 주동이 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은 국내 진공을 목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그러므로 노령의 의병을 규합하여 두만강을 건너 국내에 진입하여 무력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이범윤 최재형을 제외하고 13도의군도총재 유인석을 비롯한 이상설 이남기 등 나머지는 화서학파다.
39. 안동현임시의사회
안동현임시의사회(安東顯臨時議事會)는 1919년 만주 안동현 안동지역에서 창설된 독립운동단체로 조직과 활동에 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주요 인사를 보면, 대표 김승만을 비롯하여 여형근, 김두만, 오학수, 장재후, 신언갑 등이다. 여기서 김승학 김승만 신업갑은 국동 조병준의 문인으로 화서학파에 속한다.
40. 야단대표
야단대표(野團代表)는 1920년초에 연길현 세린하와 동불사 일대에서 청림교를 책임졌던 임창세는 교주 한오와 리몽필을 떠나 "대성유교"를 신봉한다고 표방하면서 겉으로는 유고를 선전하고 이면으로는 정천자가 조선왕으로 군림한다는 남정의 주장을 덧붙이면서 단군교를 돌출하고 조선민족독립을 선양하였다. 그리고 청림교 교리중의 선도적 색채를 배제해버리고 북두칠성님께 일제의 멸망과 신도들의 행운을 기도드리는 내용을 덧붙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임창세는 신포 오석영 김광숙 윤좌형 현기정 지창욱 임방혁 등을 중견으로 항일무장야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90여 자루의 무장을 가진 야단성원들이 북로군정서와 연합하여 항일할 것을 합의하고 사령은 김좌진이 맡고 군사고문은 임창세가 맡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야단 대표 오석영과 현기정은 평남개천 사람으로 류인석 문인으로 화서학파다.
41. 의군부
의군부(義軍府)의 정식 명칭은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로 1922년 만주 환인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 군사조직이다. 1922년 만주에 무장단체가 통의부로 통합되었으나 내부 조직상의 불만이 있고 신진 청년간의 불화가 노출되어 새로운 무장단체로서 조직되었다. 의군부는 주로 국내 적(일본)기관의 파괴를 목적으로 한다. 이들은 1924년 8월 8일 청성진경찰서 습격을 비롯하여 의주, 신의주경찰서 경찰들과 투쟁을 벌이고 왜경 등을 사살하며 활동하다가 상해 임시정부직할로 조직된 주만참의부로 개칭하였다.
여기에 주요 인사를 보면 총장 채상덕, 군무총감 전덕원, 정무총감 김평식, 재무총감 이병기, 사령장 오석영, 부관 강규묵, 사법부장 계춘강, 사한장 박승연, 산포대 서무 신동렬, 양재묵, 군사부 서무 김유술 등이다. 이 중에서 계춘강을 제외한 나머지는 화서학파들이다.
42. 의민부
의민부(義民府)는 1920년 남만주의 각단체를 통합하여 광복군 사령부와 광복군 참리부로 통합하여 활약하던 중, 남만주 대학살 시에 후퇴작전에 따라 벽지로 분산 주둔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광복군참리부장 조병준은 신우현 김승학 백기준 승영준 등 여러 동지들과 그 가족을 대동하고 수원성 포두현 중탄에 이주하여 배달농장을 만들고 자활기지로 삼고 의민부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직할 하에 두었다. 이 농장의 수입금은 정부자금과 교통연락비로 매년 2회씩 제공하는 한편, 배달학교와 대종교 수광시교당을 설치하고 청년들에게 항일독립정신 고취시키고 중국 항일군과 합작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주요부서와 인사를 보면 총재 조병준, 부총재 신우현, 총무부장 김승학, 재무부장 조종서, 군사부장 황학수, 훈련부장 백기준, 교육부장 신언갑, 연락부장 신동열, 섭외부장 승영준․승영제, 부녀부장 신정숙․조운명 등이다. 여기서 황학수 승영준 승영제 신정숙 조운명을 제외한 신우현 김승학 신언갑 등은 화서학파에 속한다.
43. 전국연합전선협회
전국연합전선협회(全國聯合戰線協會)는 중경에 소재한다. 백범 김구 등은 1939년 5월 좌우파의 ‘연맹’과 ‘연합회’를 합쳐져서 ‘전국연합전선협회’를 발족하였다. 독립운동전선의 통일 요구와 중국 국민당 정부의 권유로 김구, 김원봉 합의로 ‘전국연합진선협회’를 결성한 것이다. 김구는 후조 고석노의 제자다.
44. 정의부
정의부(正義府)는 1925년 만주 길림성에서 통의부, 길림 주민회, 의성단, 광정단 등의 여러 단체들이 모여서 조직된 항일무장 독립운동단체다. 영구적이고 전면적인 군사 활동 실시를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교육 문화 사업과 경제 자활 사업도 아울러 벌였다. 여기에 화서학파로는 중앙위원장 이세영, 법무부위원장 현정경은 화서학파다.
45. 조선혁명당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은 1929년 12월 20일 민족유일당 조직 동맹의 발전적 형태로서 길림성에서 결성되었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 일대의 유력한 정당으로서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칙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사업을 완수하는 것을 당면한 임무로 삼고 설정했다. 여기 현정경(중앙집행위원장), 이세영은 양헌수 문인이고, 함흥 출신 이웅해(군사부 책임)는 박문일 문인이다.
46. 참의부
참의부(參議府)의 정식명칭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로 1923년 8월 만주 집안현 장백산하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벌였다. 참의부는 1922년 8월에 발족한 통의부의 의용군 중 1․2․3․5중대장이 1923년 8월경 별도로 모여 군사조직을 가지고 상해임시정부에게 백광운 등을 파송하여 이 군단을 남만군정부(南滿軍政府)로 인정하여 줄 것을 요청함에, 상해 임정에서는 1927년 3월 김승학을 참의장으로 임명, 파견하여 협력함으로써 군사와 민정을 아울러 통할하는 기관으로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1929년 10월 19일 해체될 때까지 평북 위원에서 재등실(齋藤實) 조선총독을 저격하고, 만주 집안현 고마령 산곡에서 5개 중대 군사회의 개최 도중 초산경찰서의 습격을 받아 항전하였으나 참변을 당하였고, 만주에서 친일단체 보민회, 일민단 등 매국행위를 하는 친일배를 소탕하는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여기 주요인사 중에 참의장 김승학은 조병준의 문인이고, 제3중대장 양봉제는 박문일의 문인이다. 이수흥(제2중대 특보정사)은 최익현 문인 채상덕의 제자다.
47. 통군부
통군부(統軍府)의 정식 명칭은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로 1922년 2월 만주 관전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일군의 대학살 만행으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선상에서는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어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정비가 급선무였다. 광한단, 광복단 총영, 한족회, 독립단, 대한국민단, 대한청년연합회 등을 통합하여 조직하였다. 이렇게 민족단일의 독립단체를 지향하여 민사․군사를 통합하여 활동하였는데, 이것이 1920년 8월 통의부로 발전하였다.
주요 인사를 보면 총장 채상덕, 비서장 고할신, 민사부장 이웅해, 군사부장 이천민, 교육부장 김동삼, 실업부장 변창근, 사령관 김창환, 경무감 전덕원 등이다. 그 중에 채상덕 이웅해 이천민 변창근 전덕원 등은 화서학파다.
48. 통의부
통의부(統義府)의 정식 명칭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1922년 8월에 만주 환인현을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군사단체다. 일본군의 만주 출병 후 남북만주에서의 무장단체통합체로 출현한 통군부를 개편하고, 더욱 확장하여 대단합의 통일무장단체로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민정, 군정을 병행한 조직체로서 남만주지역내에 독립된 정부형태를 갖추고 한교(韓僑)의 호적관리, 학교의 증설, 부업의 권장, 구호 등에 관한 일반행정 지원을 계속하면서 통의부 의용군을 편성하여 만주 독립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군사집단으로 활동하였다.
주요 인사를 보면, 총재 박장호, 부총재 채상덕, 총장 김동삼, 민사부장 이웅해, 군사부장 이천민, 재무부장 오동진, 법무부장 현정경, 학무부장 이병기, 실업부장 변창근, 외무부장 김승만, 참모부장 전덕원, 교통부장 강제하, 검찰국장 선우일, 선전국장 김창희, 교통국장 이관실, 군법국장 이종건, 사령장 김창환 등이다. 이 중에서 박장호 채상덕 이웅해 이천민 이병기 김승만 전덕원 등은 화서학파에 속하는 독립운동가 들이다.
49. 평북독판부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는 1919년대에 만주 관전현 향로구를 중심으로 하는 항일독립운동단체이다. 이들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다시 대한청년단 연합회를 조직함과 때를 같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지도를 받는 독립운동기관으로 발족하였다. 평북 독판부는 대한청년연합회와 동일체로 구성, 간부진도 대부분 청년연합회 간부가 겸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 지시를 받으며, 독립신문의 국내 배포, 독립운동상의 교통안내와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주요 인사로는 趙秉準 안병찬 김찬성 신경신 金承萬 오능조 유건혁 이애시 최지화 김시점 이탁 김두만 박춘근 여형근 등이다. 이중에 조병준 김승만은 화서학파에 속한다.
50. 한교공회
한교공회(韓僑公會)는 이세영(=李天民) 특무부장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환인현에 거주하는 이천민 손병헌 손극장 윤세용 독고욱 등의 발기로 인근 각처의 청년들을 다수 망라하여 단일 독립운동단체로 조직되었다. 이 한교공회는 후에 특무부(特務府)라 개칭하여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 본부를 두고 각처에 지부를 두어 왜적의 각 기관을 습격, 파괴하며 홍승국, 백토벌 등 일본 주구들을 색출 숙청하여 많은 공적을 올렸다. 이 단체는 1923년에 이르러 육군주만 참의부에 통합되었다. 주요 인사를 보면 특무부장 李天民, 서무부장 손병헌, 재무부장 윤세용, 검무부장 독고욱, 청년부장 사병희, 외무위원 김창천 등이다. 여기서 이천민은 화서연원이다.
51. 한국노병회
(韓國勞兵會)는 1922년 10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다. 중국 상하이에서 군인 양성, 한국 독립군 사기진작 및 독립군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결성된 일제강점기 한국의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김구 조상섭 등이 조직하고, 백범 김구가 이사장, 박은식, 김현구 손정도 등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기능을 보완하여 조직하였다. 여기에 김구 박은식 김현구는 화서학파다.
52. 한국독립당
안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정당이다. 결성 이후 한국독립당은 재건(1935.9), 통합(1940.5)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그 조직이 변화했다. 1940년 5월 8일 우익 민족 3당인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은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한국독립당 간부는 집행위원장 김구, 집행위원 홍진 조소앙 조시원 이청천 김학규 유동열 엄항섭 외 13명이 있었으며, 감찰위원에는 이시영 등 3명이 있다. 통합된 한국독립당은 3당의 과거를 역사적으로 계승하고, 1930년대 이후 우익독립운동계에서 널리 수용되었던 ‘삼균주의’를 근간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김구와 엄항섭은 화서학파이다.
53. 한인애국단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은 1931년 10월 백범 김구 등 민족주의자와 애국청년들이 상하이에서 결성한 비밀독립운동 결사대이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직후에 상해 임시정부는 특무공작을 통해 그 위상과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기하기로 하고, 그 전권을 김구에게 위임했다. 김구는 임시정부 산하에 비밀결사대원 80여 명을 모아 '실행을 중히 여기고 발언을 피하는 실천적인' 비밀조직으로 한인애국단을 결성한 그 총책임자였다.
주요단원은 안공근 엄항섭 김동우 안경근(安敬根) 손창도 백구파(白九波) 김의한 김현구 김홍일 손두환 이덕주(李德柱) 유상근(柳相根) 이수봉(李秀峰) 최흥식(崔興植) 등이었다. 1932년 1월8일 이봉창의 일본 도쿄 의거, 4월 29일 윤봉길 상해 홍구공원 의거도 한인애국단의 실행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1942년까지 지속되었다. 여기서 엄항섭은 구초 이만응의 제자, 김현구는 최익현의 제자, 이덕주, 유상근, 최흥식 등은 김구의 제자들이다.
54. 한족동맹
한족동맹(韓族同盟)은 중국 남경에 있는 중앙대학에서 송지영 조일문 박철원 신영묵 이정선 등과 중국정부 특파원 능지남(凌志男) 상교와 접선하여 조직된 비밀결사대다. 이들 송지영 등은 1944년 대대적인 검거선풍에 일본 경찰에 의해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송지영은 유인석의 문인 김두운의 제자다.
55. 한족회
한족회(韓族會)는 1919년 4월 유하현 삼원보에 집합하여 남만주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를 조직하고, 남만주에 동포의 자치기관으로 조직되었다. 한족회는 교민 1천호마다 총관(總管) 1인, 교민 1백호마다 백가장(百家長) 1인, 교민 10호마다 십실장(十室長) 1인을 두었다. 그리고 중앙에 총장을 두고 각지방에 총관을 두어 한족신보(후에 새벽달)를 발행하고 서로군정서의 재정을 부담하여 교민들에게 의헌금(義獻金)을 부과하였다. 한족회는 후에 광복군사령부가 되고 다시 각 단체와 합작하여 통군브(統軍府)가 되었다.
한족회의 주요 인사를 보면 정무총장 이석, 서무사장 김동삼, 외무사장 양규열(재훈), 법무사장 이진산, 검찰사장 최명수, 학무사장 윤기섭, 재무사장 안동원, 군정서독판 이상용 등이다. 여기서 양규열은 화서연원이다.
56. 향약단
향약단(鄕約團)은 1919년대 만주 관전현 소아하를 중심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단체다.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이 침탈되자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병기와 군사면에서 월등한 일본군을 당해낼 길이 없자 만주로 망명한 의병들을 규합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국내진공을 계획하였다. 이 향약계는 국내 유교 지도층으로 의병장 등을 재규합하여 둔전영농과 산야의 수렵 등으로 생활정착을 도모하고 국내진격을 계획하면서 때때로 왜경을 습격하는 등 항전하였다. 여기 주요인사는 단장 백삼규를 비롯하여 조병준 전덕원 등 화서학파에 속하는 독립운동가 들이다.
57. 향약사
향약사(鄕約社)는 백삼규 조병준 전덕원 등의 의병장은 만주 관전 환인현 등지로 근거지를 옮겨 농무계(農務契)와 향약사(鄕約社)란 단체를 만들어 재기를 도모하였다. 을미의병에 패배한 유인석은 재기를 꿈꾸면서 곡창지대인 서간도로 향했다. 유인석의병장의 생각은, "조선과 청국의 사이에 있는 서간도에는 수십 년 전에 청국인이 처음 거주하기 시작했지만, 우리 조선인도 근래에 와서 기근 등으로 인해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무릅쓰고 이주정착한 수가 만여호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래도 나머지 땅이 커서 가히 몇 만 호를 받아들일 만하고, 토지가 심히 풍요로워서 한 사람이 경작하면 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1년 경작하면 3∼4년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그 곳에는 인의지계(仁義之計)가 있으므로 가히 나라의 흥복지계(興福之計)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유 인석의 의견은 그대로 본토내의 의병진에도 퍼지게 되었고, 따라서 차후의 의병항쟁에서 일제에 밀린 의병들이 서간도로도 많이 옮겨 와서 활동했다. 그리하여 유인석 의병장의 뜻을 이은 전덕원, 백삼규, 조 병준 등의 의병진이 관전(寬甸)과 환인(桓仁)등지로 옮겨 와서 농무계, 향약사 등의 준 자치적 단체들까지 만들고 본토수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58. 혁신의회
혁신의회(革新議會)는 1928년 12월 만주 길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 단체다.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의 삼부 통합운동이 추진될 때 전 민족유일당 조직회를 결성하였으나 단체본위 조직론과 개인본위 조직론의 양론으로 분열되자, 개인본위 조직론을 주장하는 측에서 전 민족유일당 조직 촉성회를 구성하고 군정부(軍政府)의 설립을 위하여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존속기간을 1년으로 한정하고 신민부, 참의부의 해체를 선언하고 새로운 군정부 설립을 위하여 활동하는 한편 친일파 숙청에 주력하여 1929년 5월 해체될 때까지 선민부(鮮民府)를 비롯하여 한교동향회 등 일제주구기관 박멸 등에 성과를 거두었다.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기까지 추진하였으나 단체본위 조직론 측의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에서 國民府를 창설하게 됨에 따라 전민족유일당은 출현하지 못하였다.
이 단체의 주요 인사로는 김동삼․ 황학수․ 지청천 김승학 김원식 김상덕 정신 등이다. 이 중에서 김승학은 국동 조병준의 문인으로 화서학파에 속한다.
59. 흥사단
흥사단(興社團)의 전신은 1909년 2월 국내에서 창립된 청년학우회였다. 흥사단은 1913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강영소의 집에서 안창호의 주도로 경기도 홍언(洪焉= 宗杓), 강원도 염만석, 충청도 조병옥, 황해도 민찬호, 경상도 송종익, 평안도 강영소, 함경도 김종림, 전라도 정원도 등의 8도 대표를 포함한 25명의 발기인에 의해 창립되었다. 흥사단의 목적 조항은 '건전인격'과 '신성단결'을 위한 '무실역행'으로 '우리민족 전도(前道)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을 표방했다. 홍언(1880∼1951)은 국외 독립운동가로 화서학파다. 이는 재미 역사학자 안형주 교수의 확고한 주장이다.
60.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단체가 아니고 국가 정부이다. 편의상 단체 순서 끝에 넣었다. 1919년 이후 상해임시정부의 주역인 박은식(제2대 대통령), 김구(주석, 임정의 실질적인 무장독립투쟁 주도) 엄항섭(임정 선전부장, 임정의정원) 조병준(임정 광복군 참리부장(경찰 치안총수), 조맹선(대한독립단 총단장, 임정 광복군사령부 사령장(군사 최고 책임), 김승학(임정 광복군 사령부 군정국장, 임정의정원, 독립신문 사장), 김승만(임정 광복군 참리부 협찬, 평북 독판부 최고간부), 신우현(임정 광복군 직속 내무사장), 양재훈(양평 용문출신, 신흥무관학교<독립군 양성소> 교장, 임정 서로군정청장), 조종서(임정 직속 의민부 재무부장), 김재덕(임시의정원의장 손정도 비서) 등 임시정부와 그 산하의 독립투쟁 주역들은 대개 화서학파다.
대한민국은 헌법상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건국되었다.(헌법 전문)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이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다면, 화서학파의 척사사상과 항일투쟁은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높게 평가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화서와 화서학파가 조국광복에 이바지한 바는 실로 지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대 선비들은 “화서선생은 난세의 성인이다” “화서선생의 功業은 日月과 같다”라고 하는 것이다.
4. 맺는말
이상 전국에서 가장 방대한 화서학파가 국내와 국외 항일독립운동단체에서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살펴보았다. 화서가 벼슬을 외면하고 벽계마을에서 위정척사를 역설하고 그 배운 바를 반드시 실천하라는 교육의 효과는 당대에 양헌수, 최익현, 유인석, 홍재학, 백낙관, 유홍석 같은 창의호국 인물들이 살신성인하고 사생취의하여 구국운동 조국광복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화서학파의 독립운동을 볼 때에 청출어남(靑出於藍)이라는 말에 공감할 것이다. 문경공 화서 이항로 선생은 스승은 있었지만, 20대에 주자대전과 송자대전을 독학으로 연구하여 스승을 뛰어넘는 도를 깨달음으로 청출어남이란 말이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화서학파에서는 사승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화서를 ‘아성’이니, ‘난세의 성인’이니 하는 말은 실감나는 말이다.
화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벽계마을로 찾아오는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그러므로 벼슬이 제수될 때마다 상소사직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화서의 벼슬은 내려진 것일 뿐, 실제로 재직하여 집무를 보지 않았다. 전라도사 공조참판 등은 실직이 아니다. 오로지 19세기 국제정세를 우려하며 나라를 걱정하고 무너지는 도덕을 걱정하며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배우면 반드시 실천해야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도피하지 않고 현실에 뛰어들어 방책을 제시하였다. 선비로서 지조를 지켰다.
화서 대외방책은 위정척사론에 입각한 내수외양(內修外攘)이다. 여기에는 서세동점 시에 서양 적들의 출몰로 나라가 혼란하자, 이를 극복하는 자강책으로 백성(서민)을 괴롭히는 시폐(時弊=폐단)의 혁파와 정치적 자주, 경제적 자립, 문화적 자존, 군사적 자위를 제시하였다.
서양과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에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등 화서 문하생들은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척양척왜를 외쳤다. 최익현의 강화도조약 반대상소(도끼상소)는 너무도 유명하다. 즉, 1866년 화서 이항로의 병인상소, 1876년 최익현 등의 병자조약 반대 상소, 1881년 신사척사상소운동, 1895년 을미의병 봉기, 1905∼1907년 을사 정미의병, 1910년 강제합방 이후 1945년 광복까지 전국 각 지역과 국외에서 화서학파의 항일독립투쟁 활동은 가장 두드러진다. 화서학파 약 8천여 명, 독립운동자 730여 명, 독립유공자 220여 명, 순국 순절자도 100여 명이다.
그러므로 화서학파가 한국근대민족운동사에서 그 위상은 최고를 점하고 있다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양평은 의향이요, 화서 이항로가 후학을 양성한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은 한국근대민족독립운동의 근원지로서 ‘한국민족독립운동발상지비’와 ‘화서하파 독립운동기념비’를 세울만한 역사적 합리성과 타당성이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양평군은 고결한 조선조선비의 상징인 화서 이항로 선생의 동상건립을 빨리 서둘러야한다.
그것은 각 지방들은 그 지방의 두드러진 역사적 인물들이나 근현대인들에 대한 동상을 건립하여 자랑으로 삼고 있다. 즉 이름 난 도둑, 올림픽 금메달 운동선수, 허구적인 소설가, 하물며는 동물이나 곤충의 동상(모형)들을 건립하고 있다. 화서학파의 동상도 수십 개 섰는데, 그 정점에 있는 화서 이항로에 대한 동상이 세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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