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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파란만장했던 '정치인 DJ'의 삶
(출처; 조선일보, 김민철 기자 2009.08.19)
29세에 정치인의 길 입문 73년 中情에 납치되기도
92년 대선패배후 정계은퇴 DJP연대로 97년 '부활'
옥살이·가택연금·망명 등 정치적 시련…4수(修) 끝에 대권(大權) 잡아
2009.08.18일 서거한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기를 바랐을까.
그의 85년 생애는 한두 마디 수식어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다.
한국 현대사의 영광과 고난은 그를 빼고는 논하기 어려운 정도로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살았다.
그런 그도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마침내 생을 마감했다.
○하의도 소년
DJ는 1924년 1월 6일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세 시간 떨어진 작은 섬 하의도에서 가난한 소작농 김운식(1974년 사망), 장수금(1972년 사망) 부부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다.
생활력이 강하고 교육열이 남달랐던 그의 어머니는 하의초등학교 4학년 때 그를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이후 그는 당시로선 전국 10대 명문 중 하나였던 목포상업학교(5년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일제의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는 해운회사(목포상선)에 취업해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목포상선에 다닐 때 친구의 여동생(차용애·1954년 사망)에게 줄기차게 구애해 결혼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한때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했다가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탈퇴했다.
그의 건준 경력은 오랜 세월 색깔론에 시달리는 빌미가 됐다.
6·25전쟁 때는 자본가, 반동분자로 찍혀 우익인사들과 함께 목포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총살 직전 탈주에 성공해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긴다.
○정치 입문
1954년 그는 금배지에 도전한다. 동기는 소박했다. 그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국민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가 올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정치권 진입은 쉽지 않았다.
1954년 전남 목포에서 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첫 고배를 마셨다. 강원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4, 5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두 아들을 낳은 첫 번째 부인 차 씨와 사별한 것도 계속된 낙선으로 인한 시련 때문이었다.
◆시련의 정치인
사람들은 그를 '인동초(忍冬草)'라 불렀다.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초여름에 꽃을 피우는 이 덩굴 식물만큼 김 전 대통령의 85년 인생을 잘 표현하는 말도 찾기 어렵다.
그는 1924년 1월 6일(호적상 생일은 1925년 12월 3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 김운식씨와 어머니 장수금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목포상업학교(현 전남제일고)를 졸업했고, 첫 번째 부인 차용애씨와의 결혼도 목포에서 했다.
1963년 6대 총선 이후 그를 두 차례 당선시켜 전국적인 인물로 키운 곳도 목포였다.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김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6년간의 감옥살이, 10년간의 가택연금이 그의 시련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그는 4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도 자주 했다.
1950년 9월 공산군에 붙잡혔다가 총살 직전에 목포형무소에서 탈출했고,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 때 신민당 후보 지원 유세 도중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두 번째 죽을 고비를 맞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죽을 고비는 유신 때였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하자,
일본에 머물고 있던 그는 귀국하지 못한 채 곧바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 내 반(反)박정희 세력을 규합, 반체제 활동의 선봉에 섰다. 그러자 1973년 중앙정보부가 도쿄 시내 한복판에서 그를 납치했다. 이때 중정은 그를 동해상에서 수장(水葬)시키려다가 미국 등의 압력으로 포기했을 것이라고 김 전 대통령측은 추정하고 있다. 중정은 김 전 대통령을 서울로 데려와 동교동 자택에 연금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국내에서의 민주화 운동에 들어간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2년여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1978년 석방됐지만 다시 가택연금됐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으로 김 전 대통령은 잠시 정치적 '봄'을 맞는다. 그러나 1980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그에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혐의를 씌웠고, 1981년 1월 대법원의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이른바 네 번째 죽을 고비였다. 그러나 국제적 구명 여론에 힘입어 '무기→20년 징역'으로 감형된 뒤 2년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82년 12월 그는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다.
이번에는 행선지가 미국이었다. 1985년 2월 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했지만 곧바로 가택연금됐다.
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민추협 공동의장으로 신민당 총선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는 1987년 6·10 민주화항쟁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정치를 재개할 수 있었다.
◆실패와 재기의 반복
김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 오를 수 있는 마지막 목표지점인 대권(大權) 고지에 올랐다는 점에서 성공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여정에선 숱한 실패와 좌절을 겪고 재기를 위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는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자신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그는 집에서나 감옥에서나, 망명생활 중에도 철저히 자신을 연마하는 집념을 보였다.
독학으로 영어를 익히고 폭넓은 독서로 식견을 넓혔다.
그는 29세이던 1954년 3대 총선 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고배를 들었다.
19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 1960년 5대 총선에 출마해 국회의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번 낙선하면서 그는 재산을 탕진하다시피 했고, 첫 번째 부인 차씨와도 사별했다.
처음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단 것은 1961년 5월 인제에서 치러진 민의원 보궐선거에서였다.
그러나 당선 3일 만에 5·16 쿠데타가 터져 국회가 해산됨으로써 그는 의사당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1963년 6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달았고, 1964년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 처리 때에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5시간19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연설하는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한 기록도 갖고 있다.
1971년 7대 대선 출마는 향후 30여년 동안 그를 한국 정치권의 핵(核)으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대권 4수(修)의 시작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신민당 내 '40대 기수 3인방'이었던 김영삼·이철승씨와 경쟁해 우여곡절 끝에 대선 후보 자격을 따냈다. 그러나 본선의 결과는 94만여표 차이의 패배였다.
이 예상 밖의 접전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유신독재'를 결심하게 하고,
DJ를 '제거해야 할 숙적'으로 여기도록 한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DJ의 2차 대선 도전은 1987년에 치러진 13대 대선이었다.
YS와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뒤 평화민주당까지 만들어 대선에 나섰지만 노태우·YS에 이어 3위에 머물렀다.
한동안 김 전 대통령은 민주진영으로부터 지역주의에 기댄 야권 분열의 책임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고, 김 전 대통령 자신도 훗날 "당시 내가 후보직을 사퇴하는 게 옳았다"고 회고했다.
적지않은 사람이 'DJ의 위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곧 이어진 13대 총선에서 평민당을 제1야당으로 만들어내 재기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이 이뤄져 평민당은 '소수 야당'으로 전락해 입지가 다시 좁아졌다.
하지만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단식투쟁을 통해 1991년 지방자치선거의 부활을 이뤄냈다.
1991년 9월 YS가 떠난 민주당의 이기택씨와 야권통합을 성사시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고,
이듬해 총선에서 97석의 의석을 얻으면서 대권 재도전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그는 대선 3수에 나섰지만 역시 패배했다. 숙적인 김영삼 후보에게 지자 그는 선거 다음 날인 12월 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40년 파란 많은 정치생활의 종막을 고하고 오늘로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다"며 야인으로 돌아가 1993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6개월간 머물면서 독일 통일 문제를 연구했고, 93년 7월 귀국했다. 94년 1월엔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해 정계복귀의 발판으로 삼았다.
정계에서 떠났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정치인 김대중'이었다.
1995년 6월 지방선거 지원유세에 나서면서 정계복귀의 가능성을 열고, 7월엔 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국민회의는 96년 15대 총선에서 개헌저지선(100석)에도 못 미치는 의석(79석)을 얻어 사실상 '패배'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 해인 1997년 대선에서 '정치9단'다운 묘수를 고안해 승리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DJP연대'를 성사시킨 것이다. 지역적으로 호남(DJ)과 충청(JP)이 연합해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당시 여당(한나라당)에 맞서는 구도였다. 이념적으로 보면 진보(DJ)와 보수(JP)의 불편한 동거였지만 DJ는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4수 끝에 97년 12월 1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건국 이후 최초의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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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민주화 동지-정적 ‘애증’-JP DJP 연합… ‘내각제’로 결별
(출처; 동아일보, 황장석 기자, 2009.08.19)
활짝 웃던 ‘3金시대’ 13대 대통령선거(1987년 12월 16일)를 두 달여 앞둔 1987년 10월 13일,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씨(왼쪽부터)가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인촌상 제정 축하 리셉션에서 만나 담소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 3金의 인연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2명의 정치인이 있다. 평생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 그리고 한때 공동정권을 이뤘지만 오래 못가 결별한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다.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한 이들 ‘3김(金)’은 한국 정치사에 진한 애증의 드라마를 남겼다.
YS와는 동지와 정적(政敵) 사이를 넘나드는 관계였다. 두 사람은 40여 년의 정치인생 동안 민주화 투쟁이라는 한 배를 탔지만 정치적으로는 DJ 부인 이희호 여사의 회고처럼 ‘물과 기름’ 같았다.
우선 스타일부터 달랐다. DJ는 어떤 일이든 철두철미한 논리를 중시했지만 YS는 순발력을 앞세운 ‘감(感)의 정치’를 중시했다. 1980년대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 활동할 때 직선제개헌 서명 목표를 놓고 벌인 설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DJ가 현실성을 감안해 ‘100만 명’을 제시하자 YS는 “누가 숫자를 세어보겠느냐”며 1000만 명을 주장했다.
DJ와 YS가 직접 대결을 벌인 것은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 1970년 신민당 대통령선거후보 경선, 1987년과 1992년 대선 등 네 차례다.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과 1992년 대선에서는 YS가,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DJ가 각각 승리했다. 1987년 대선 때는 두 사람 모두 패배했다. 특히 1990년 평화민주당이 빠진 ‘3당 합당’은 DJ로서는 뼈아픈 사건이었다. 3당 합당을 통해 1992년 거대 여당의 대선후보가 된 YS는 14대 대선에서 DJ를 누르고 승리했다. 대선 패배 직후 DJ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이듬해 영국으로 출국했다.
두 사람은 2007년 대선 때도 부딪쳤다. YS는 이명박, DJ는 정동영 후보를 지지했다. YS는 과거 민주계 조직을 대거 이명박 후보 선거캠프에 포진토록 했고, DJ는 대선구도를 ‘한나라당 대 반(反)한나라당’ 대결로 만들기 위해 민주당을 비롯한 당시 범여권 세력의 통합을 주문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대통령 임기 중 아들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YS는 차남 현철 씨가 한보특혜비리에 연루돼 구속되는 순간을 지켜봐야 했다. DJ도 아들들이 각종 이권사업과 관련한 비리 혐의로 구속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YS의 차남 현철 씨의 사면 문제로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1997년 5월 구속 기소된 현철 씨는 1999년 8월에야 사면됐다.
YS는 DJ의 퇴임 이후에도 그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구원(舊怨)은 DJ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풀렸다. 10일 세브란스병원을 찾은 YS는 중환자실에 누운 DJ 대신 이희호 여사를 만나 위로하고 돌아가며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되지 않았느냐. 그렇게 봐도 좋다”고 말했다. “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젊을 때부터 동지 관계였다. 둘이 합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고 소회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탄압을 받았던 DJ가 박정희 정권의 핵심이었던 JP와 손잡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DJ는 1954년 목포 민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잇따른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뒤 1961년 5월 13일 강원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3일 뒤 터진 5·16군사정변으로 의원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쿠데타의 주역 중 한 명이 청년장교 JP였다.
DJ가 자신과 정치적 노선이 전혀 다른 JP와의 연대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최소 100석을 목표로 했던 1996년 총선에서 자신이 만든 국민회의가 79석의 초라한 성적을 낸 직후였다. DJ는 1995년부터 지역등권론을 펴며 영남이 아닌 다른 지역도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외치고 다녔지만 JP와의 연대는 생각지도 않았다. 하지만 총선 직후 참모들은 충청권의 맹주인 JP와 연대하지 않으면 대선에서 승산이 없다고 끊임없이 조언했다. 결과적으로 DJ는 대선 직전 JP와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킴으로써 ‘호남+충청’이라는 이른바 ‘DJP연합’을 실현시켰다. DJP연합은 1997년 대선에서 충청표의 상당수를 끌어와 DJ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DJ는 집권 초 JP를 국무총리에 앉히고 자민련 몫의 장관들을 임명하는 등 JP와의 합의사항을 이행하려 노력했다. JP의 후임 총리도 자민련 몫(박태준 이한동 전 총리)이었다. 하지만 DJP연합 합의사항의 핵심이었던 내각제 개헌은 지키지 않았다. JP는 합의를 지키지 않는 DJ를 공격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곧 결별을 맞았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는 시민단체가 자신의 정계 은퇴를 주장하자 “DJ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JP는 2004년 4월 17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계를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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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로 파고들고 유머로 넘기고…달변가 DJ
(출처; 동아일보, 조수진 기자, 2009.08.19)
○ 논리적 설득; 정확한 통계수치 제시하며 “첫째 둘째 셋째…”식 접근
철저한 준비로 말실수 줄여
○ 유머로 부드럽게; ‘월급반납-고통분담’ 질문에, “靑서 밥먹여주고 재워줘
걱정 없으니 그럴 용의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말을 잘하는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
주로 “첫째, 둘째, 셋째…” 식으로 논거를 제시한 뒤 결론을 이끌어 갔다.
또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자신의 말에 객관성을 뒷받침했다.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을 지낸 민주당 박선숙 의원은
“어려운 내용일수록 서민적인 어투로, 정확한 수치를 인용해 신뢰감을 주는 것이 DJ 화법의 맛”이라고 말했다.
DJ는 말실수가 거의 없었다. 사전 철저한 준비가 비결이었다.
중요한 연설이 있을 때면 며칠 전부터 거울을 보고 표정을 살피거나 녹음을 해 목소리 톤을 조절했다고 한다.
야당 총재 시절 ‘말을 너무 잘하는 것이 탈’이란 지적을 받자 DJ는 “다 자기 스타일대로 살아가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DJ는 비판 받을 만한 일에 대해서도 나름의 논리를 세워 국면 전환을 꾀했다.
1997년 대선에 다시 출마했을 때 TV토론에서 상대 후보가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했다’고 비판하자
DJ는 “저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약속을 못 지켰을 뿐입니다. 거짓말과 약속 위반은 분명히 다릅니다”라고 받아쳤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이 되면 불출마하겠다”고 했다가 출마하면서
“전두환 씨가 직선제 제의를 즉각 수락하고 건국대 사태 관련 학생들을 용공으로 몰아 탄압하는 것을 중지한다면 불출마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고 해명했다.
뛰어난 유머감각은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선 직후 가진 첫 생방송 ‘국민과의 대화’에서 월급 반납 의향을 묻는 질문에 DJ는 “그럴 용의가 있다.
나야 청와대에서 밥 먹여주겠다, 재워주겠다 걱정이 없지 않느냐”고 조크를 던졌다.
1999년 1월 한 TV 특별프로그램에서는 “사형선고를 받았던 1980년에 아내가 ‘김대중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 뜻에 따르겠다’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가장 섭섭했다”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그는 곤혹스러운 상황도 유머로 빠져나가곤 했다.
1999년 2월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중국 신화통신 기자가 ‘자민련과의 내각제 합의를 지킬 것이냐’고 묻자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중국도 그렇게 내각제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낸 뒤 비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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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계 인사들이 전하는 ‘내 기억속의 DJ’
○ 한광옥(전 대통령비서실장)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여러 고통을 겪어서인지 인내심이 대단했다.
욕설이 나올 만한 상황에서도 “에이” 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게 전부였다.
1년에도 몇 권씩 쓴 수첩에는 깨알 같은 글씨의 메모, 좋은 정보나 문장을 담은 신문기사가 오려져 붙어 있었다.
감성이 풍부하고 눈물이 많아 TV를 시청하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
○ 박선숙(전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민주당 의원)
매우 꼼꼼하고 성실한 분이었다. 틈 날 때마다 “정치인은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모든 문제에 답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느냐’고 묻자 “관심을 갖고 일하다 보면 답을 갖게 된다”고 했다. 또 “정치인이 만나는 첫 번째 국민은 언론”이라며 늘 모든 조간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 이윤수(전 민주당 의원)
치밀하고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 10년 넘게 동교동에서 비서로 있으면서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디를 가든지 책부터 챙기는 등 공부가 생활화돼 있는 분이었다.
○ 이만섭(전 국회의장)
정치부 기자 시절 1961년 5월 실시된 강원도 인제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를 담당하면서 야당 후보였던 DJ와 가깝게 지냈다. 어찌나 열성적이었는지 사흘 뒤 발발한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직을 잃었을 땐 기자들도 가슴 아파했다. 6대 국회 때부터는 의정활동을 함께했는데 사카린 밀수 사건 등 대형 사건 때나 국정감사 때마다 예리한 송곳 질문을 퍼붓던 맹렬한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 김상현(전 민주당 의원)
1980년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이었다. 군사정권에서 내세운 한 재일동포가 법정에서 “DJ는 간첩이다”라고 외치자 나도 “이 날강도 같은 놈들아”라고 되받았다. 재판이 중단돼 법정을 나오는데 DJ가 내게 “김 동지, 한 건 했군”이라고 하더라. 최악의 상황에도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는 분이었다.
○ 이훈평(전 민주당 의원)
DJ는 머리 좋은 사람보다 성실한 사람을 높이 평가했다.
평민당 시절 밤 12시 넘어 퇴근하다 의원회관 한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자 누구 사무실인지를 알아보도록 했다. 평민당 A 의원이 B 의원과 바둑을 두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자 DJ는 “왜 국민 혈세로 운영하는 의원회관에서 전등을 켜고 바둑을 두느냐”고 역정을 냈다. A 의원은 다음 총선 때 공천을 받지 못했다.
○ 홍사덕(전 신한민주당 대변인·한나라당 의원)
한국 현대 정치사를 이끈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남북관계에 있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사명감을 갖고 기초생활수급제 등 사회안전망을 구축한 건국 이래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12대 국회 때 신민당 대변인 시절부터 DJ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다. 따뜻하고 섬세한 분이었다.
○ 김무성(상도동계·한나라당 의원)
혹독한 역경 속에서도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 없는 도전과 응전을 통해 꿈을 이룬 분이다.
정적(政敵)과도 끊임없이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는 진정한 정치인이었다.
정치가 실종된 지금의 정치권은 DJ가 보여줬던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 희망의 정치를 되새겨볼 필요가 많다.
○ 임동원(전 국가정보원장, 전 통일부 장관)
숱한 생사고비를 넘기면서도 단 한 번도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민주통일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헌신한 분이었다. 내가 아는 DJ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요, 합리적인 보수주의자였다.
○ 김명자(전 환경부 장관)
장관 시절 국무회의 때 대통령의 지적사항, 지시사항 등을 나중에 옮겨 적어보면 고칠 대목이 없는 문장이 됐다. ‘토씨 하나까지 그냥 쓰는 일이 없구나’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일이 많았다. 연두보고를 할 때에도 “소신껏 하세요” “규제완화에 중점을 두면 됩니다” 정도의 당부만 했다. 그 대신 주로 듣고 끊임없이 메모를 했다. 따뜻하고 자상한 분이었다.
○ 윤공희(대주교, 전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1964년 박정희 정권 시절 천주교 주교들과 가톨릭 신자 국회의원들이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첫 인연을 맺었다. 활력이 넘치는 젊고 유능한 정치인이었다. 당시 김대중 의원이 국회에서 의사일정을 끌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모양인데 의원발언으로 무려 5시간 이상을 끌었다. 그러나 억지로 시간을 끄는 것 같지 않고 말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내용이었다. 당시 참석자들이 웅변가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 손숙(전 환경부 장관·연극인)
예술에 관심이 많아 연극 작품과 작가들에 대해 ‘우리보다 더 많이 안다’고 느껴질 만큼 박식했다. 언젠가 김 전 대통령 집으로 초청을 받았는데 김 전 대통령은 “얼굴이 많이 상했다. 그렇게 힘들게 연극을 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면서 용돈을 쥐여주더라. 너무 감동을 받아 울어버렸다.
○ 오정해(영화배우)
영화 ‘서편제’를 상영할 때 김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직접 보러 왔다. 영화 관람 후 김 전 대통령은 “‘서편제’를 통해 국악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론 공부도 열심히 해 대학 강단에 선다면 국악의 길이 고급스러워질 것이다. 공부하라”고 당부하더라. 인재를 키우는 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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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유년시절 보낸 목포 첫 집 확인
(출처; 연합뉴스, 2009.08.20)
모친이 운영한 `고려여관`..빈 땅에 잡초만 무성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머니와 함께 신안 섬에서 목포로 나와 유년시절을 보냈던 첫 집이 확인됐다.
목포의 상징인 유달산 자락 만호진(1439년 설치) 성터 아래 자리 잡은 이 집은 삼학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목포시 만호동 2의 4번지에 자리 잡은 이 집은 김 전 대통령의 어머니인 고(故) 장수금 여사가 운영했던 495㎡ 2층 규모의 '고려여관'이다. 당시를 기억하는 주민은 이 여관이 목포에 몇곳 없는 고급여관이었다고 한다.
당시 여관임을 알 수 있는 출입문과 주춧돌 등이 남아 있지만, 건물은 헐렸고 빈터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폐허로 변해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하의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목포로 나와 북교초등학교를 거쳐 옛 목포상고(전남제일고)를 졸업할 때까지 이 집에서 청운의 꿈을 키웠다.
주민 김복님(항동)씨는 "김 전 대통령의 어머니가 여관을 운영하면서 아들과 홍일, 홍업씨 등 손자까지 키우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며 "지금은 서울 사람 소유로 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춘웅(69.목포 평민회 회장)씨는 20일 "김 전 대통령의 어머니가 여관을 운영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집터가 어딘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면서 "김 전 대통령은 유달산 정기를 받고 그림처럼 펼쳐진 '전설의 섬' 삼학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집에서 꿈을 키우면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 전 대통령의 어머니는 참 훌륭하신 분이다.
김 전 대통령이 하의초등학교에 다닐 때 명석한 두뇌와 언변에 감탄한 일본인 담임선생이 김 전 대통령을 섬에 놔두지 말고 목포로 나가 교육하라고 권유했고, 곧바로 목포로 이사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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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적부로 본 김대중`
(출처; 매일경제, 목포=연합뉴스 조근영 기자,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학창 시절 학적부를 살펴보면
그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품행을 보이며 어릴 적부터 큰 인물이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전남 신안군 하의 보통학교에서 4학년 때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한 10대 섬 소년인 김 전 대통령은
전학하자마자 1, 2등을 다투다 전교생 72명 가운데 1등으로 졸업했다.
1939년 4월 5일 일제 강점기 때 목포상업고등학교(현재 전남제일고)에 입학한 그는
학생의 절반가량이 일본인데도 일본인 담임교사가 파격적으로 급장에 임명할 정도로 뛰어난 성적과 통솔력을 보였다.
성적을 보면 1학년 때는 161명 가운데 1등이었고
일본인 담임교사가 작성한 종합생활기록란인 성행(性行)란에 `담백, 치밀, 활발, 이해력, 사고력이 매우 우수하다`고 적혀 있다.
2학년 때도 급장을 맡으면서 전교에서 4등을 했다.
그때 담임교사도 `두뇌가 명석하고 언변이 뛰어난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3~5학년 때 성행란에도 `독서력이 왕성하고 온순, 정직하며 통계력과 판단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진취적`이라고 기록돼 있다.
전남제일고 강성인 교장은 "모든 과목의 성적이 좋았지만, 영어는 90점 이상으로 뛰어나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 실력이 밑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4학년 때 전교에서 8등으로, 5학년에는 39등으로 떨어진 것은 항일 운동을 염두에 두고 학과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 교장은 "김 전 대통령의 학적부 원본은 해방 이전 기록물로 분류돼 국가기록원으로 넘어가 학교에는 없다"면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때마다 언론에서 학교에 비치된 학적부를 수없이 들춰봐 학적부가 닳고 누렇게 변했지만, 학창시절 우수한 성적과 행적은 더욱 선명했다는 말을 전임자들에게서 들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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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DJ 장서 3만권
(출처; 조선일보, 2009.08.24)
조용헌 얼굴을 보는 관상(觀相), 그 집의 형태와 구조를 보는 가상(家相)이 있지만,
서상(書相)이라는 것도 있다. 무엇을 '서상'이라 하는가?
서재의 구조와 정돈상태, 그리고 소장하고 있는 서책들의 질과 양을 모두 따져 보는 것을 '서상'이라고 한다.
서상을 보면 그 사람의 정신적 깊이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다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관상(觀相)이 불여(不如) 서상(書相)'이다.
문필업자인 나는 다른 문필가의 집을 방문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그 집의 서상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이 어떤 분야의 책들인가.
고전학자의 집에 가면 한문으로 된 고전들이 당연히 많고, 영어나 독일어로 된 서양서들은 별로 없다.
미국으로 유학 갔다 온 학자의 서재에는 유·불·선의 고전이나 한문 서적이 드물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인문학자의 서재에는 자연과학 책이 드물다. 아직까지 양쪽을 모두 갖춘다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임을 보여준다.
그동안 보았던 인상적인 서재 가운데 하나는 작고한 이규태 선생의 서재이다.
연립주택의 1층 지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면적은 대략 40평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하층이라 독립된 분위기가 있었다. 여기에 약 2만권의 장서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한문 고전도 있었고 국내 인문서들, 그리고 일본에서 간행된 자그마한 책과 문고본들이 많았다.
어느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온갖 주제의 책들이 많은 서재라는 점이 특징이었다.
책들 중간 중간에 밑줄을 그어 놓았고, 표시가 나도록 색종이 간지를 꽂아 놓은 책들이 특히 많았다.
생각나면 바로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장서(藏書)가 5000권 정도에 도달하면 독서인이라 할 수 있고,
1만권을 넘어가면 프로의 세계에 입문했다고 본다. 책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돈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1만권이 넘어가면 자기가 책을 쓰는 생산자의 입장으로 전환되는 수가 많다.
작고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서가 3만권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은 이 3만권의 장서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정치인이 3만권은 쉽지 않다. 각국의 정치지도자 가운데 유례가 드문 장서가가 DJ였다.
(출처; 조선일보, 김민철 기자 2009.08.19)
29세에 정치인의 길 입문 73년 中情에 납치되기도
92년 대선패배후 정계은퇴 DJP연대로 97년 '부활'
옥살이·가택연금·망명 등 정치적 시련…4수(修) 끝에 대권(大權) 잡아
2009.08.18일 서거한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기를 바랐을까.
그의 85년 생애는 한두 마디 수식어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다.
한국 현대사의 영광과 고난은 그를 빼고는 논하기 어려운 정도로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살았다.
그런 그도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마침내 생을 마감했다.
○하의도 소년
DJ는 1924년 1월 6일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세 시간 떨어진 작은 섬 하의도에서 가난한 소작농 김운식(1974년 사망), 장수금(1972년 사망) 부부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다.
생활력이 강하고 교육열이 남달랐던 그의 어머니는 하의초등학교 4학년 때 그를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이후 그는 당시로선 전국 10대 명문 중 하나였던 목포상업학교(5년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일제의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는 해운회사(목포상선)에 취업해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목포상선에 다닐 때 친구의 여동생(차용애·1954년 사망)에게 줄기차게 구애해 결혼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한때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했다가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탈퇴했다.
그의 건준 경력은 오랜 세월 색깔론에 시달리는 빌미가 됐다.
6·25전쟁 때는 자본가, 반동분자로 찍혀 우익인사들과 함께 목포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총살 직전 탈주에 성공해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긴다.
○정치 입문
1954년 그는 금배지에 도전한다. 동기는 소박했다. 그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국민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가 올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정치권 진입은 쉽지 않았다.
1954년 전남 목포에서 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첫 고배를 마셨다. 강원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4, 5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두 아들을 낳은 첫 번째 부인 차 씨와 사별한 것도 계속된 낙선으로 인한 시련 때문이었다.
◆시련의 정치인
사람들은 그를 '인동초(忍冬草)'라 불렀다.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초여름에 꽃을 피우는 이 덩굴 식물만큼 김 전 대통령의 85년 인생을 잘 표현하는 말도 찾기 어렵다.
그는 1924년 1월 6일(호적상 생일은 1925년 12월 3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 김운식씨와 어머니 장수금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목포상업학교(현 전남제일고)를 졸업했고, 첫 번째 부인 차용애씨와의 결혼도 목포에서 했다.
1963년 6대 총선 이후 그를 두 차례 당선시켜 전국적인 인물로 키운 곳도 목포였다.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김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6년간의 감옥살이, 10년간의 가택연금이 그의 시련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그는 4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도 자주 했다.
1950년 9월 공산군에 붙잡혔다가 총살 직전에 목포형무소에서 탈출했고,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 때 신민당 후보 지원 유세 도중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두 번째 죽을 고비를 맞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죽을 고비는 유신 때였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하자,
일본에 머물고 있던 그는 귀국하지 못한 채 곧바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 내 반(反)박정희 세력을 규합, 반체제 활동의 선봉에 섰다. 그러자 1973년 중앙정보부가 도쿄 시내 한복판에서 그를 납치했다. 이때 중정은 그를 동해상에서 수장(水葬)시키려다가 미국 등의 압력으로 포기했을 것이라고 김 전 대통령측은 추정하고 있다. 중정은 김 전 대통령을 서울로 데려와 동교동 자택에 연금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국내에서의 민주화 운동에 들어간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2년여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1978년 석방됐지만 다시 가택연금됐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으로 김 전 대통령은 잠시 정치적 '봄'을 맞는다. 그러나 1980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그에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혐의를 씌웠고, 1981년 1월 대법원의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이른바 네 번째 죽을 고비였다. 그러나 국제적 구명 여론에 힘입어 '무기→20년 징역'으로 감형된 뒤 2년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82년 12월 그는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다.
이번에는 행선지가 미국이었다. 1985년 2월 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했지만 곧바로 가택연금됐다.
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민추협 공동의장으로 신민당 총선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는 1987년 6·10 민주화항쟁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정치를 재개할 수 있었다.
◆실패와 재기의 반복
김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 오를 수 있는 마지막 목표지점인 대권(大權) 고지에 올랐다는 점에서 성공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여정에선 숱한 실패와 좌절을 겪고 재기를 위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는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자신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그는 집에서나 감옥에서나, 망명생활 중에도 철저히 자신을 연마하는 집념을 보였다.
독학으로 영어를 익히고 폭넓은 독서로 식견을 넓혔다.
그는 29세이던 1954년 3대 총선 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고배를 들었다.
19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 1960년 5대 총선에 출마해 국회의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번 낙선하면서 그는 재산을 탕진하다시피 했고, 첫 번째 부인 차씨와도 사별했다.
처음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단 것은 1961년 5월 인제에서 치러진 민의원 보궐선거에서였다.
그러나 당선 3일 만에 5·16 쿠데타가 터져 국회가 해산됨으로써 그는 의사당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1963년 6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달았고, 1964년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 처리 때에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5시간19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연설하는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한 기록도 갖고 있다.
1971년 7대 대선 출마는 향후 30여년 동안 그를 한국 정치권의 핵(核)으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대권 4수(修)의 시작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신민당 내 '40대 기수 3인방'이었던 김영삼·이철승씨와 경쟁해 우여곡절 끝에 대선 후보 자격을 따냈다. 그러나 본선의 결과는 94만여표 차이의 패배였다.
이 예상 밖의 접전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유신독재'를 결심하게 하고,
DJ를 '제거해야 할 숙적'으로 여기도록 한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DJ의 2차 대선 도전은 1987년에 치러진 13대 대선이었다.
YS와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뒤 평화민주당까지 만들어 대선에 나섰지만 노태우·YS에 이어 3위에 머물렀다.
한동안 김 전 대통령은 민주진영으로부터 지역주의에 기댄 야권 분열의 책임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고, 김 전 대통령 자신도 훗날 "당시 내가 후보직을 사퇴하는 게 옳았다"고 회고했다.
적지않은 사람이 'DJ의 위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곧 이어진 13대 총선에서 평민당을 제1야당으로 만들어내 재기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이 이뤄져 평민당은 '소수 야당'으로 전락해 입지가 다시 좁아졌다.
하지만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단식투쟁을 통해 1991년 지방자치선거의 부활을 이뤄냈다.
1991년 9월 YS가 떠난 민주당의 이기택씨와 야권통합을 성사시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고,
이듬해 총선에서 97석의 의석을 얻으면서 대권 재도전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그는 대선 3수에 나섰지만 역시 패배했다. 숙적인 김영삼 후보에게 지자 그는 선거 다음 날인 12월 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40년 파란 많은 정치생활의 종막을 고하고 오늘로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다"며 야인으로 돌아가 1993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6개월간 머물면서 독일 통일 문제를 연구했고, 93년 7월 귀국했다. 94년 1월엔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해 정계복귀의 발판으로 삼았다.
정계에서 떠났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정치인 김대중'이었다.
1995년 6월 지방선거 지원유세에 나서면서 정계복귀의 가능성을 열고, 7월엔 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국민회의는 96년 15대 총선에서 개헌저지선(100석)에도 못 미치는 의석(79석)을 얻어 사실상 '패배'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 해인 1997년 대선에서 '정치9단'다운 묘수를 고안해 승리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DJP연대'를 성사시킨 것이다. 지역적으로 호남(DJ)과 충청(JP)이 연합해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당시 여당(한나라당)에 맞서는 구도였다. 이념적으로 보면 진보(DJ)와 보수(JP)의 불편한 동거였지만 DJ는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4수 끝에 97년 12월 1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건국 이후 최초의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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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민주화 동지-정적 ‘애증’-JP DJP 연합… ‘내각제’로 결별
(출처; 동아일보, 황장석 기자, 2009.08.19)
활짝 웃던 ‘3金시대’ 13대 대통령선거(1987년 12월 16일)를 두 달여 앞둔 1987년 10월 13일,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씨(왼쪽부터)가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인촌상 제정 축하 리셉션에서 만나 담소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 3金의 인연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2명의 정치인이 있다. 평생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 그리고 한때 공동정권을 이뤘지만 오래 못가 결별한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다.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한 이들 ‘3김(金)’은 한국 정치사에 진한 애증의 드라마를 남겼다.
YS와는 동지와 정적(政敵) 사이를 넘나드는 관계였다. 두 사람은 40여 년의 정치인생 동안 민주화 투쟁이라는 한 배를 탔지만 정치적으로는 DJ 부인 이희호 여사의 회고처럼 ‘물과 기름’ 같았다.
우선 스타일부터 달랐다. DJ는 어떤 일이든 철두철미한 논리를 중시했지만 YS는 순발력을 앞세운 ‘감(感)의 정치’를 중시했다. 1980년대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 활동할 때 직선제개헌 서명 목표를 놓고 벌인 설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DJ가 현실성을 감안해 ‘100만 명’을 제시하자 YS는 “누가 숫자를 세어보겠느냐”며 1000만 명을 주장했다.
DJ와 YS가 직접 대결을 벌인 것은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 1970년 신민당 대통령선거후보 경선, 1987년과 1992년 대선 등 네 차례다.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과 1992년 대선에서는 YS가,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DJ가 각각 승리했다. 1987년 대선 때는 두 사람 모두 패배했다. 특히 1990년 평화민주당이 빠진 ‘3당 합당’은 DJ로서는 뼈아픈 사건이었다. 3당 합당을 통해 1992년 거대 여당의 대선후보가 된 YS는 14대 대선에서 DJ를 누르고 승리했다. 대선 패배 직후 DJ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이듬해 영국으로 출국했다.
두 사람은 2007년 대선 때도 부딪쳤다. YS는 이명박, DJ는 정동영 후보를 지지했다. YS는 과거 민주계 조직을 대거 이명박 후보 선거캠프에 포진토록 했고, DJ는 대선구도를 ‘한나라당 대 반(反)한나라당’ 대결로 만들기 위해 민주당을 비롯한 당시 범여권 세력의 통합을 주문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대통령 임기 중 아들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YS는 차남 현철 씨가 한보특혜비리에 연루돼 구속되는 순간을 지켜봐야 했다. DJ도 아들들이 각종 이권사업과 관련한 비리 혐의로 구속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YS의 차남 현철 씨의 사면 문제로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1997년 5월 구속 기소된 현철 씨는 1999년 8월에야 사면됐다.
YS는 DJ의 퇴임 이후에도 그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구원(舊怨)은 DJ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풀렸다. 10일 세브란스병원을 찾은 YS는 중환자실에 누운 DJ 대신 이희호 여사를 만나 위로하고 돌아가며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되지 않았느냐. 그렇게 봐도 좋다”고 말했다. “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젊을 때부터 동지 관계였다. 둘이 합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고 소회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탄압을 받았던 DJ가 박정희 정권의 핵심이었던 JP와 손잡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DJ는 1954년 목포 민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잇따른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뒤 1961년 5월 13일 강원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3일 뒤 터진 5·16군사정변으로 의원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쿠데타의 주역 중 한 명이 청년장교 JP였다.
DJ가 자신과 정치적 노선이 전혀 다른 JP와의 연대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최소 100석을 목표로 했던 1996년 총선에서 자신이 만든 국민회의가 79석의 초라한 성적을 낸 직후였다. DJ는 1995년부터 지역등권론을 펴며 영남이 아닌 다른 지역도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외치고 다녔지만 JP와의 연대는 생각지도 않았다. 하지만 총선 직후 참모들은 충청권의 맹주인 JP와 연대하지 않으면 대선에서 승산이 없다고 끊임없이 조언했다. 결과적으로 DJ는 대선 직전 JP와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킴으로써 ‘호남+충청’이라는 이른바 ‘DJP연합’을 실현시켰다. DJP연합은 1997년 대선에서 충청표의 상당수를 끌어와 DJ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DJ는 집권 초 JP를 국무총리에 앉히고 자민련 몫의 장관들을 임명하는 등 JP와의 합의사항을 이행하려 노력했다. JP의 후임 총리도 자민련 몫(박태준 이한동 전 총리)이었다. 하지만 DJP연합 합의사항의 핵심이었던 내각제 개헌은 지키지 않았다. JP는 합의를 지키지 않는 DJ를 공격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곧 결별을 맞았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는 시민단체가 자신의 정계 은퇴를 주장하자 “DJ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JP는 2004년 4월 17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계를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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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로 파고들고 유머로 넘기고…달변가 DJ
(출처; 동아일보, 조수진 기자, 2009.08.19)
○ 논리적 설득; 정확한 통계수치 제시하며 “첫째 둘째 셋째…”식 접근
철저한 준비로 말실수 줄여
○ 유머로 부드럽게; ‘월급반납-고통분담’ 질문에, “靑서 밥먹여주고 재워줘
걱정 없으니 그럴 용의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말을 잘하는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
주로 “첫째, 둘째, 셋째…” 식으로 논거를 제시한 뒤 결론을 이끌어 갔다.
또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자신의 말에 객관성을 뒷받침했다.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을 지낸 민주당 박선숙 의원은
“어려운 내용일수록 서민적인 어투로, 정확한 수치를 인용해 신뢰감을 주는 것이 DJ 화법의 맛”이라고 말했다.
DJ는 말실수가 거의 없었다. 사전 철저한 준비가 비결이었다.
중요한 연설이 있을 때면 며칠 전부터 거울을 보고 표정을 살피거나 녹음을 해 목소리 톤을 조절했다고 한다.
야당 총재 시절 ‘말을 너무 잘하는 것이 탈’이란 지적을 받자 DJ는 “다 자기 스타일대로 살아가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DJ는 비판 받을 만한 일에 대해서도 나름의 논리를 세워 국면 전환을 꾀했다.
1997년 대선에 다시 출마했을 때 TV토론에서 상대 후보가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했다’고 비판하자
DJ는 “저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약속을 못 지켰을 뿐입니다. 거짓말과 약속 위반은 분명히 다릅니다”라고 받아쳤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이 되면 불출마하겠다”고 했다가 출마하면서
“전두환 씨가 직선제 제의를 즉각 수락하고 건국대 사태 관련 학생들을 용공으로 몰아 탄압하는 것을 중지한다면 불출마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고 해명했다.
뛰어난 유머감각은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선 직후 가진 첫 생방송 ‘국민과의 대화’에서 월급 반납 의향을 묻는 질문에 DJ는 “그럴 용의가 있다.
나야 청와대에서 밥 먹여주겠다, 재워주겠다 걱정이 없지 않느냐”고 조크를 던졌다.
1999년 1월 한 TV 특별프로그램에서는 “사형선고를 받았던 1980년에 아내가 ‘김대중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 뜻에 따르겠다’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가장 섭섭했다”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그는 곤혹스러운 상황도 유머로 빠져나가곤 했다.
1999년 2월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중국 신화통신 기자가 ‘자민련과의 내각제 합의를 지킬 것이냐’고 묻자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중국도 그렇게 내각제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낸 뒤 비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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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계 인사들이 전하는 ‘내 기억속의 DJ’
○ 한광옥(전 대통령비서실장)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여러 고통을 겪어서인지 인내심이 대단했다.
욕설이 나올 만한 상황에서도 “에이” 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게 전부였다.
1년에도 몇 권씩 쓴 수첩에는 깨알 같은 글씨의 메모, 좋은 정보나 문장을 담은 신문기사가 오려져 붙어 있었다.
감성이 풍부하고 눈물이 많아 TV를 시청하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
○ 박선숙(전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민주당 의원)
매우 꼼꼼하고 성실한 분이었다. 틈 날 때마다 “정치인은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모든 문제에 답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느냐’고 묻자 “관심을 갖고 일하다 보면 답을 갖게 된다”고 했다. 또 “정치인이 만나는 첫 번째 국민은 언론”이라며 늘 모든 조간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 이윤수(전 민주당 의원)
치밀하고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 10년 넘게 동교동에서 비서로 있으면서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디를 가든지 책부터 챙기는 등 공부가 생활화돼 있는 분이었다.
○ 이만섭(전 국회의장)
정치부 기자 시절 1961년 5월 실시된 강원도 인제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를 담당하면서 야당 후보였던 DJ와 가깝게 지냈다. 어찌나 열성적이었는지 사흘 뒤 발발한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직을 잃었을 땐 기자들도 가슴 아파했다. 6대 국회 때부터는 의정활동을 함께했는데 사카린 밀수 사건 등 대형 사건 때나 국정감사 때마다 예리한 송곳 질문을 퍼붓던 맹렬한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 김상현(전 민주당 의원)
1980년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이었다. 군사정권에서 내세운 한 재일동포가 법정에서 “DJ는 간첩이다”라고 외치자 나도 “이 날강도 같은 놈들아”라고 되받았다. 재판이 중단돼 법정을 나오는데 DJ가 내게 “김 동지, 한 건 했군”이라고 하더라. 최악의 상황에도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는 분이었다.
○ 이훈평(전 민주당 의원)
DJ는 머리 좋은 사람보다 성실한 사람을 높이 평가했다.
평민당 시절 밤 12시 넘어 퇴근하다 의원회관 한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자 누구 사무실인지를 알아보도록 했다. 평민당 A 의원이 B 의원과 바둑을 두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자 DJ는 “왜 국민 혈세로 운영하는 의원회관에서 전등을 켜고 바둑을 두느냐”고 역정을 냈다. A 의원은 다음 총선 때 공천을 받지 못했다.
○ 홍사덕(전 신한민주당 대변인·한나라당 의원)
한국 현대 정치사를 이끈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남북관계에 있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사명감을 갖고 기초생활수급제 등 사회안전망을 구축한 건국 이래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12대 국회 때 신민당 대변인 시절부터 DJ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다. 따뜻하고 섬세한 분이었다.
○ 김무성(상도동계·한나라당 의원)
혹독한 역경 속에서도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 없는 도전과 응전을 통해 꿈을 이룬 분이다.
정적(政敵)과도 끊임없이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는 진정한 정치인이었다.
정치가 실종된 지금의 정치권은 DJ가 보여줬던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 희망의 정치를 되새겨볼 필요가 많다.
○ 임동원(전 국가정보원장, 전 통일부 장관)
숱한 생사고비를 넘기면서도 단 한 번도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민주통일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고 ‘행동하는 양심’으로 헌신한 분이었다. 내가 아는 DJ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요, 합리적인 보수주의자였다.
○ 김명자(전 환경부 장관)
장관 시절 국무회의 때 대통령의 지적사항, 지시사항 등을 나중에 옮겨 적어보면 고칠 대목이 없는 문장이 됐다. ‘토씨 하나까지 그냥 쓰는 일이 없구나’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일이 많았다. 연두보고를 할 때에도 “소신껏 하세요” “규제완화에 중점을 두면 됩니다” 정도의 당부만 했다. 그 대신 주로 듣고 끊임없이 메모를 했다. 따뜻하고 자상한 분이었다.
○ 윤공희(대주교, 전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1964년 박정희 정권 시절 천주교 주교들과 가톨릭 신자 국회의원들이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첫 인연을 맺었다. 활력이 넘치는 젊고 유능한 정치인이었다. 당시 김대중 의원이 국회에서 의사일정을 끌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모양인데 의원발언으로 무려 5시간 이상을 끌었다. 그러나 억지로 시간을 끄는 것 같지 않고 말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내용이었다. 당시 참석자들이 웅변가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 손숙(전 환경부 장관·연극인)
예술에 관심이 많아 연극 작품과 작가들에 대해 ‘우리보다 더 많이 안다’고 느껴질 만큼 박식했다. 언젠가 김 전 대통령 집으로 초청을 받았는데 김 전 대통령은 “얼굴이 많이 상했다. 그렇게 힘들게 연극을 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면서 용돈을 쥐여주더라. 너무 감동을 받아 울어버렸다.
○ 오정해(영화배우)
영화 ‘서편제’를 상영할 때 김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직접 보러 왔다. 영화 관람 후 김 전 대통령은 “‘서편제’를 통해 국악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론 공부도 열심히 해 대학 강단에 선다면 국악의 길이 고급스러워질 것이다. 공부하라”고 당부하더라. 인재를 키우는 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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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유년시절 보낸 목포 첫 집 확인
(출처; 연합뉴스, 2009.08.20)
모친이 운영한 `고려여관`..빈 땅에 잡초만 무성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머니와 함께 신안 섬에서 목포로 나와 유년시절을 보냈던 첫 집이 확인됐다.
목포의 상징인 유달산 자락 만호진(1439년 설치) 성터 아래 자리 잡은 이 집은 삼학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목포시 만호동 2의 4번지에 자리 잡은 이 집은 김 전 대통령의 어머니인 고(故) 장수금 여사가 운영했던 495㎡ 2층 규모의 '고려여관'이다. 당시를 기억하는 주민은 이 여관이 목포에 몇곳 없는 고급여관이었다고 한다.
당시 여관임을 알 수 있는 출입문과 주춧돌 등이 남아 있지만, 건물은 헐렸고 빈터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폐허로 변해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하의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목포로 나와 북교초등학교를 거쳐 옛 목포상고(전남제일고)를 졸업할 때까지 이 집에서 청운의 꿈을 키웠다.
주민 김복님(항동)씨는 "김 전 대통령의 어머니가 여관을 운영하면서 아들과 홍일, 홍업씨 등 손자까지 키우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며 "지금은 서울 사람 소유로 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춘웅(69.목포 평민회 회장)씨는 20일 "김 전 대통령의 어머니가 여관을 운영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집터가 어딘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면서 "김 전 대통령은 유달산 정기를 받고 그림처럼 펼쳐진 '전설의 섬' 삼학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집에서 꿈을 키우면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 전 대통령의 어머니는 참 훌륭하신 분이다.
김 전 대통령이 하의초등학교에 다닐 때 명석한 두뇌와 언변에 감탄한 일본인 담임선생이 김 전 대통령을 섬에 놔두지 말고 목포로 나가 교육하라고 권유했고, 곧바로 목포로 이사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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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적부로 본 김대중`
(출처; 매일경제, 목포=연합뉴스 조근영 기자,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학창 시절 학적부를 살펴보면
그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품행을 보이며 어릴 적부터 큰 인물이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전남 신안군 하의 보통학교에서 4학년 때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한 10대 섬 소년인 김 전 대통령은
전학하자마자 1, 2등을 다투다 전교생 72명 가운데 1등으로 졸업했다.
1939년 4월 5일 일제 강점기 때 목포상업고등학교(현재 전남제일고)에 입학한 그는
학생의 절반가량이 일본인데도 일본인 담임교사가 파격적으로 급장에 임명할 정도로 뛰어난 성적과 통솔력을 보였다.
성적을 보면 1학년 때는 161명 가운데 1등이었고
일본인 담임교사가 작성한 종합생활기록란인 성행(性行)란에 `담백, 치밀, 활발, 이해력, 사고력이 매우 우수하다`고 적혀 있다.
2학년 때도 급장을 맡으면서 전교에서 4등을 했다.
그때 담임교사도 `두뇌가 명석하고 언변이 뛰어난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3~5학년 때 성행란에도 `독서력이 왕성하고 온순, 정직하며 통계력과 판단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진취적`이라고 기록돼 있다.
전남제일고 강성인 교장은 "모든 과목의 성적이 좋았지만, 영어는 90점 이상으로 뛰어나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 실력이 밑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4학년 때 전교에서 8등으로, 5학년에는 39등으로 떨어진 것은 항일 운동을 염두에 두고 학과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 교장은 "김 전 대통령의 학적부 원본은 해방 이전 기록물로 분류돼 국가기록원으로 넘어가 학교에는 없다"면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때마다 언론에서 학교에 비치된 학적부를 수없이 들춰봐 학적부가 닳고 누렇게 변했지만, 학창시절 우수한 성적과 행적은 더욱 선명했다는 말을 전임자들에게서 들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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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DJ 장서 3만권
(출처; 조선일보, 2009.08.24)
조용헌 얼굴을 보는 관상(觀相), 그 집의 형태와 구조를 보는 가상(家相)이 있지만,
서상(書相)이라는 것도 있다. 무엇을 '서상'이라 하는가?
서재의 구조와 정돈상태, 그리고 소장하고 있는 서책들의 질과 양을 모두 따져 보는 것을 '서상'이라고 한다.
서상을 보면 그 사람의 정신적 깊이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다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관상(觀相)이 불여(不如) 서상(書相)'이다.
문필업자인 나는 다른 문필가의 집을 방문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그 집의 서상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이 어떤 분야의 책들인가.
고전학자의 집에 가면 한문으로 된 고전들이 당연히 많고, 영어나 독일어로 된 서양서들은 별로 없다.
미국으로 유학 갔다 온 학자의 서재에는 유·불·선의 고전이나 한문 서적이 드물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인문학자의 서재에는 자연과학 책이 드물다. 아직까지 양쪽을 모두 갖춘다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임을 보여준다.
그동안 보았던 인상적인 서재 가운데 하나는 작고한 이규태 선생의 서재이다.
연립주택의 1층 지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면적은 대략 40평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하층이라 독립된 분위기가 있었다. 여기에 약 2만권의 장서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한문 고전도 있었고 국내 인문서들, 그리고 일본에서 간행된 자그마한 책과 문고본들이 많았다.
어느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온갖 주제의 책들이 많은 서재라는 점이 특징이었다.
책들 중간 중간에 밑줄을 그어 놓았고, 표시가 나도록 색종이 간지를 꽂아 놓은 책들이 특히 많았다.
생각나면 바로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장서(藏書)가 5000권 정도에 도달하면 독서인이라 할 수 있고,
1만권을 넘어가면 프로의 세계에 입문했다고 본다. 책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돈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1만권이 넘어가면 자기가 책을 쓰는 생산자의 입장으로 전환되는 수가 많다.
작고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서가 3만권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은 이 3만권의 장서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정치인이 3만권은 쉽지 않다. 각국의 정치지도자 가운데 유례가 드문 장서가가 DJ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