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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어차피 한번 죽는다.
산이란 산은 검푸른 초록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뭇잎들은 무성할 대로 무성해져 울창한 숲을 이루어내면서 산마다 진 초록빛으로 윤기나는 두꺼운 옷을 입혔다. 쑥빛의 초록으로 치장한 산들은 겨울산에 비해 넉넉하고 푸근하고 부드러워보였다. 한여름인 칠월 말의 녹음은 새잎들이 돋아 오르는 사오월의 그 다양한 색감의 초록빛이 아니었다. 잎들이 무성하게 자라나면서 어린 때의 색깔들을 벗어버리고 짙은 초록빛으로 물이 들었다. 산들은 무성한 나무숲들 속에 제 모습을 감추어 어느 산줄기나 골짜기도 강파르게 보이지 않았다.
염상진은 먼 눈길로 그런 산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그지없이 짙고 맑은 초록빛의 나무바다도 마음의 우울을 걷어가지 못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어지간한 마음의 그늘이나 무거움은 푸른 산줄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말끔하게 씻기고는 했었다. 사실 오늘의 우울이 산줄기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가시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지도 몰랐다. 그 우울은 깊이가 너무 깊었고, 농도 또한 너무 진했다. 저 산들의 굳건한 의지로, 저 나무들의 푸른 기상으로 모든 전사들이 여름투쟁을 전개하기 바랐던 것이다. 여름투쟁을 통해서 해방구를 지켜내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대한 투쟁사업이었다. 그런데 돌발적 상황이 야기됨으로써 기대했던 여름투쟁은 차질을 빚을 위험을 안고 있었다. 염상진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저 푸름에 보호받으며 빨치산들은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나뭇잎은 다 떨어져 은신할데 없이 행동은 노출되고, 눈보라치는 추위까지 몰아닥쳐 살벌해진 겨울산에 비하면 숲 짙고 물 많은 여름산은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여름산에 안겨 있는 빨치산들은 겨울에 고대했던 여름산의 행복감을 만끽하지 못하고 있었다. 휴전소식은 비밀일 수 없었고, 거기서 비롯되는 불안감이 빨치산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던 것이다. 물론 도당에서도 민주원칙에 따라 그 사실을 공개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학습을 강화시켜나갔다. 그러나 학습만으로 대원들이 서로 다른 입장에 따라 갖게 되는 불안감을 일소시킬 수는 없었다. 휴전을 받아들이는 감도는 우선 이북 출신과 이남 출신이 달랐고, 이남 출신 중에서도 지식계급과 농민, 기본출이 달랐다. 작년 후퇴 때 그랬듯이 이북 출신들이 가장 심하게 불안감을 드러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상의 빈약도 아니었고 특별히 겁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그건 조직원의 이성이기 이전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본능적 반응이었다. 학습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여 이북 출신들의 이성회복을 촉구했다. 그 다음으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 이남의 지식계급 출신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두 가지 양상을 드러냈다. 전혀 끄떡도 않는 축과, 불안을 느끼는 축이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쪽보다는 불안을 느끼는 쪽이 한결 많았는데, 그 불안의 원인은 그들이 머리를 굴려가며 휴전 다음의 상황을 꼬치꼬치 따지는 데 있었다. 지식계급에 비해 농업인민이나 기본출들은 꽤나 태평한 편이었다. 이래 살다 죽으나 저래 살다 죽으나 어차피 한세상인데, 바라는 세상 못 볼 바에는 실컷 싸움이나 하다 죽겠다는 태도였다. 그런 의연함은 기본출일수록 많이 나타났다. 그런 분석은 각 지구의 정치위원회가 일치하고 있었다. 그 분석을 입증이라도 하듯 한 사건이 총사에서 일어난 것이다.
염상진은 또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하나도 아니고 두 사람의 생명이 달린 사건이었다. 그들은 살아날 가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자신에게 특별한 변호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들을 살려낼 만한 논리를 전개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휴전이 그렇게도 두려웠던 것일까? 그들에겐 휴전이 곧 죽음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일까? 그들의 의지는 고작 그런 식으로 가변적이었을까? 그러면서도 무엇하러 입산을 했던 것일까? 일시적인 피신이었을까? 그럼 왜 작년 말에 실시한 하산 권유를 듣지 않았던 것일까? 저들의 감정적인 초기보복 때문에 산이 더 안전하다는 기회주의적 판단을 내린 것일까? 아니면, 고생을 하다 보니 의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다가 휴전소식을 듣게 되자 완전히 변해버린 것일까? 그들은 배울 만큼 배웠으면서도 역사에 대한 전망을 그렇게도 할 수 없었을까? 자의로 바른 역사를 선택했다면서도 그렇게 역사에 대한 신뢰가 빈약할 수 있을까? 목숨 때문이라고?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역사의 편에 선 자가 목숨을 변명의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치졸이고 비겁이다. 애초에 역사의 선택은 목숨의 위험을 뛰어넘는 차원에서부터 시작된다. 목숨을 아까워하는 자가 어찌 혁명에 나설 수 있으며, 피 흘리기를 두려워하는 자가 어찌 투쟁에 뛰어들 수 있는가! 피 흘리기를 주저하고, 목숨버리기를 무서워하면서 혁명의 열매만 따먹으려고 역사를 선택했다면 그런 자들은 반동보다 더 악랄한 적이다! 혁명은 대가를 예약해주지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혁명은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이고, 과정이며 혁명에 가담하는 자는 그 연료로써 타오르기를 각오하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혁명에서 대가를 바랄 때 목숨에 연연하게 되고, 목숨에 연연하면 투쟁력이 약화되면서 기회주의가 싹트게 된다. 탈주를 감행한 그 두 사람은 결국 목숨에 연연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만약 탈주에 성공했더라면 어찌했을 것인가? 그들은 제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어제까지의 동지들을 적에게 팔아 넘길 것이다. 어찌 그런 자들이...
염상진은 다시 먼 산줄기를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마음에서는 그들을 부정하는 논리만이 줄줄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또 괴로웠다. 동지를 적의 손에 잃는 것도 괴로움인데, 자신들의 손으로 잃어야 하는 것은 더 큰 괴로움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용서받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고 처단 당하는 것이라 해도 동지로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어제의 세월이 괴로움을 만들어 냈다. 그 괴로움은 결코 감상이 아니었다. 혁명의 대열에서 이탈해서 그렇게 값없이 더러운 죽음을 해야 하는 자에 대한 안타까운 괴로움이었다. 혁명투쟁에 나선 자의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은 적과 싸우다가 동지들의 가슴에 영원한 추앙의 괴로움을 남기고 죽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확고하게 믿는 자만이 역사를 짊어질 수 있었다.
염상진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재판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건의 중대성에 따라 총사의 전체재판이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몇몇 간부들의 제한된 의견과 판단으로서는 될 일이 아니었고, 모든 전사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해야 될 일이었다. 탈주를 모의한 두 사람은 순천중학교 출신으로 선후배 사이였다. 그들은 부대를 이탈해 도주하다가 해방구 접경에서 정보과 분트요원들에게 적발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탈주의 마지막 고비에서 실패한 셈이었다.
염상진은 산비탈을 걸어 내려갔다. 한낮인데도 나무숲이 울창해 햇빛이 스미는 곳이 별로없었다. 그는 고개를 젖혀 숲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심결에 감탄을 흘렸다. 햇볕을 받고있는 나뭇잎들을 아래서 올려다보면 그 잎들은 하나같이 가늘게 뻗어나간 잎맥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투명한 초록빛으로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숲 그늘에는 초록빛이 아련하고 신비롭게 감돌고 있었다. 그는 햇볕을 안고 있는 이파리들을 올려볼 때마다 형용하기 어려운 경이로움과 함께 생명의 약동을 느꼈다. 핏빛의 붉은색에서 혁명의 열정을 느낀다면, 그 해맑은 초록빛에서는 혁명의 성취를 느꼈다. 그는 행군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낮은 감탄의 소리가 절로 흘러나오고는 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숲 그늘에는 벌써 총사의 대원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염상진은 눈어림을 해보았다. 삼백여 명 되어 보였다. 그들은 근무자를 제외한 전원일 것이었다. 인원수에 비해 그들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들은 오늘의 모임이 오락회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표시였다. 물론 삼백여 명씩 모여서 벌이는 오락회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나무숲은 박수소리와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로 들썩거렸을 것이다. 오락회도 투쟁이다! 그건 학습 다음으로 중요시되었다. 오락회는 내일의 강건한 투쟁을 위해 오늘의 피로를 푸는 것인 동시에 그것을 통해 전사들간의 화목과 유대를 강화시켜 투쟁력을 배가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곧 문화사업은 오락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염상진은 오락회를 먼발치에서 볼 때마다 신기함과 아울러 미안스런 아쉬움을 느끼고는 했다. 대개 중대 단위로 벌어지는 오락회에서 어느 중대원들이나 술도 없고 아무 음식도 없는데도 신명나고 신바람 나게 잘들도 어울려들었던 것이다. 여자대원들이라고 해서 몸을 사리거나 부끄럼을 타지 않았다. 같은 대원으로서 한 덩어리가 되어 어우러지고 흥겨움을 나누었다. 여자대원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남자대원들이 술기운 하나도 없이 그렇게들 신명이 날 수 있다는 것이 염상진은 언제나 신기했다. 그러면서, 저 모임판에 술은 금물이니까 먹을 것이나마 조금씩 마련해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미안스런 아쉬움을 갖고는 했다. 그런 생각은 오락회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각양각색의 총을 볼 때도, 제각기 다른 옷차림을 볼때도, 코가 찢어진 검정고무신을 새끼로 묶거나 헐어빠진 짚신발을 볼 때도, 그때마다 저런 것들을 제대로 갖추어주면 얼마나 더 잘 싸울 것인가 하는 생각을 죄스럽게 하고는 했다.
그는 어쩌다가 오락회에 끌려 들어가 노래를 요청 받을 때가 있었다. 그럴때면 서슴없이 노래를 불렀다. 학생 시절부터 술이 만취할 때나 불렀던 아리랑이었다. 물론 춤도 추고 싶은 대원은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게 했다. 맨 정신이면서도 요청에 선뜻 응하는 것은 그 미안스러운 아쉬운 마음 탓이었다. 맨 정신으로 노래를 한다는 것이 처음 몇 차례는 어색하고 멋적었지만 자꾸 하다 보니 분위기에 어우러져 제법 흥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노래가 들을 만해서 그러는 것인지, 예의를 차리느라고 그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으레 재청이 들어오고는 했다. 그러면 그는 시 하나를 낭송했다. 그는 노래를 부를 때와는 다르게 두 다리를 어깨넓이로 벌리고 똑바로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내 조국을 떠날 때 사랑하는 동무는
깃발을 메고 돌아 오라 하였거니 오냐,
떼몰려 압록강 건너 장백산을 타고 넘어다 우리 나라 서울로 진군하련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은 인민의 깃발
둥둥 두리둥 치는 북은 쇠사슬을 끊으리
고국 산하에 구슬픈 호둘기 소리가 우렁찬 자유의 노래 소리로 변할 때까지 동무야 싸우자
형제야 싸우자 못내 뜻을 이루고 싸우다 죽으면 이내 가슴 위에 돌을 세워다오 돌 위에는 새겨라
'조국 해방 만세'라고.
항일 무장투쟁을 그린 김사랑의 [조선의용군]이란 연극에 나오는 시였다. 염상진은 그 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오락회의 목적을 십분 살리고자 했다. 그 효과는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그 시를 듣고 난 대원들은 하나같이 숙연해지고 비장해졌던 것이다. 노래는 분명 투쟁의 무기였다. 시 또한 그에 못지않는 투쟁의 무기라는 것을 그는 실감하고는 했다.
염상진은 부사령관의 자리에 앉았다. 간부의 자리라고 해서 무엇이 특별하게 준비된 것이아니었고, 사령관의 옆에 놓인 판판한 돌이 그의 자리였다. 소수의 간부회의가 아니고 이렇게 야외에서 전체 모임이 열릴 때는 간부들의 자리는 지형이 약간 높은 곳에 앉기 편한 몇개의 돌을 옮겨다 놓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빨치산식의 급조된 의자였다. 곧 재판이 시작되었다. 두 사내는 칡넝쿨로 팔이 묶여 대원들 앞에 세워졌다.
"지금부터 신동식과 윤재일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먼저 두 사람이 범한 죄상에 대해 보고하겠습니다. 신동식과 윤재일은 삼연대 일중대에 소속된 자들로서, 휴전회담이 개최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부터 투쟁의욕을 상실해가다가 마침내 두 사람은 학교 선후배라는 관계를 이용하여 반당적이며 반동적인 탈주음모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신동식과 윤재일은 바로 그저께인 칠월 삼십일 부대를 이탈하여 적진을 향해 탈주를 시도하였던바, 해방구의 경계선상 부근에서 분트요원들에게 적발,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죄상에 대하여 인민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대원 여러분들의 기탄없는 의견 개진과 아울러 공정한 처벌을 결정 내리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발언 시작해 주십시오." 정치위원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한 사람이 "여그 언권 주시오!" 외치며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발언하시오." 정치위원이 발언권을 주었다. "야아, 저 일이 가당찮고 선하품 나는 일이라논께 나가 질게 말허고 잡지도 않으요. 우리넌 인민에 새나라럴 맹글기 위혀서 굶어도 항꾼에 굶고, 죽어도 항꾼에 죽고, 살아도 항꾼에 살자고 맹세허고 투쟁헌께로 다 동문 것인디, 똥이야 원제 나올런지도 몰르고 인자 방구 한방 뽀옹 나온 것이 휴전회담이라는 것인디, 고까짓 것에 시퍼러니 겁묵고 즈그덜만 살아보겄다고 당과 동무덜얼 배반하고 똥줄 빠지게 달아난 저런 반당분자, 반동분자덜언 볼 것웂이 총살시켜뿌러야 허요. 나 발언 접수혀주씨요." "알겠습니다, 발언 접수합니다. 다른 대원 발언 받겠습니다." "여그있소." 다른 사람이 팔을 뻗쳐올렸다. "예, 발언하십시오." "앞엣 동무가 쌈빡쌈빡허니 발언 잘혔응께로 나넌 같은 말이야 빼고, 한 가지만 말허겄소. 쩌그 저 두 사람은 중핵교꺼정 나와 배울 만치 배왔다는디, 배운 사람덜이면 배운 값얼 혀서 우리 헹펜이 안 좋게 돌아가먼 배운 머리털 써서 존 쪽으로 돌릴라고 혀얄 것인디, 배운머리로 못된 꾀럴 내서 당이고 동지덜이고 다 내뿔고 즈그덜만 살아보겄다고 나댔이니, 고런 느자구웂고 보초웂는 짓거리가 이 시상에 또 워디 있겄소. 고것은 우리 빨치산의 챙피요. 나도 저 반동분자덜얼 총살시키라고 재청허겄소." "예, 재청 발언 접수합니다. 다른 대원 발언하십시오." "나요, 나!"
한 남자가 팔도 들지 않고 몸부터 일으켰다. "워따, 중우도 안 내리고 똥싸네, 저 사람." 누군가 핀잔했고, "항, 싸게 삼청을 채와야 쓴께." 누군가가 말을 받았다. "예, 발언하시오." 정치위원이 그 남자에게 발언권을 인정했다. "나넌 폐일언하고 총살 삼청이오. 원 시상에 사람이 그랄 수넌 웂는 일이오. 우리가 멋 땀시로 죽기럴 한허고 묵을 것도, 입을 것도, 잠자리도 웂는 요런 산골짝에서 고상얼 허고 있겄소. 근디 중도에 즈그덜만 살겄다고 원수덜헌티로 내빼! 고것이 워디 사람이 헐 짓거리여! 요런 개돼지만도 못헌 인종들아아, 워디 대답 잠 혀봐라아!" 그 남자는 그만 제풀에 흥분을 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다가 정치위원에게 제지를 당했다.
"됐습니다, 됐습니다. 진정하시고 앉아 주십시오. 동무의 발언을 삼청으로 접수합니다." 정치위원이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난장맞을, 폐일언은 머시고 질게 새살까는 것은 또 머시여" "저 사람 성질이 기차 화통이시." "와따, 들을 만헌디 내빌나둬보제잉." 여기저기서 나오는 소리였다. "삼청까지 나왔으니 반대발언 있으면 하십시오."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숲 그늘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웂소, 판결내리씨요오!" 누군가가 외쳤다.
"옳소!" "옳소, 싸게 허씨요!" 여기저기서 수십명의 목소리가 합창해댔다. "알겠습니다, 조용히 해주십시오." 정치위원이 팔을 넓게 흔들고는, "그럼 사령관 동지께서 최종판결을 발표하시겠습니다." 그는 옆으로 비켜섰다. 사령관이 일어나서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 두런거리던 소리들이 뚝 그치며 조용해졌다. 팔을 묶인 두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전체 대원들의 결의를 존중하여 당과 인민의 이름으로 신동식과 윤재일에게 총살형을 언도하는 바이오!" 그때였다. "사령관 동지, 살려주시씨요오." "동무덜, 한분만 살려줏씨요. 한분만!"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무릎을 꿇고 앉으며 울부짖었다. 숲 그늘에는 침묵뿐 그 많은 사람들한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동무덜, 나가 잘못혔응께로 한분만, 한분만 용서해주시씨요. 다시넌 고런 맘 안 묵겄소." 한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대원들을 향해 연방 고개를 주억 거렸다. "동무덜, 우리럴 불쌍허니 생각혀서 참말로 한분만 용서혀주씨요. 글먼 더 용감허니 투쟁허겄소." 사령관을 향해 무릎을 꿇었던 남자가 대원들 쪽으로 돌아앉으며 목메이게 부르짖었다. "저런 짜잔헌 새끼덜, 당장에 쥑여라!" 마침내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것을 신호로 삼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서 분노에 찬 외침이 터지기 시작했다.
"저런 벌거지만도 못한 새끼덜, 당장에 쳐죽여라!" "저런 새끼덜헌테넌 총알이 아깝다. 죽창으로 찔러뿌러라!" "죽여, 죽여!" "싸게싸게 죽여!" 대원들의 분노와 흥분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고 있었다. 염상진은 어금니를 꾹 물며 눈을 감았다. 대원들이 어째서 저리도 분노하고 흥분하는지를 그는 일고 있었던 것이다. 대원들은 두 범인이 보이고 있는 남자답지도, 빨치산답지도 못한 비굴과 비겁에 또 한번의 배신을 당하는 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만에하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려면 죽음을 앞에 놓고도 빨치산다운 당당한 태도를 취했어야했다. 대원들이 온갖 악조건을 무릅써가며 투쟁을 하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빨치산이면 잠결에 물어도 할 수 있는 대답 - 해방된 인민이 주인인 새나라 건설이었다.
투쟁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도 오직 그 목적달성을 위한 의지와 긍지감에서 비롯되고있었다. 현실적 영광도 지위도 없는 그들을 지탱시켜주는 빨치산의 그 긍지를 두 범인은 눈물범벅된 비굴과 비겁으로 끝내 손상시키고 훼손했던 것이다. 그들 두 범인이 대원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려면 정반대의 태도와 발언을 했어야 했다. 염상진의 의식 속에는 백아산에서 목격했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대원들은 진정되었고, 두 범인은 끌려갔다. 재판은 끝나고, 처형만 남아 있었다. 염상진은 돌의자에서 일어났다. 마음은 더 우울하고 무거워져 있었다. 두 사람이 보인 민망한 행태 탓이었다. 그때 백아산지구에서도 중요한 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광주 외곽에 있는 형무소를 습격해 동지들을 구출해내는 중대한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한 대원을 정찰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는 나무꾼 출신으로 발이 빠를 뿐만 아니라 무등산 주변의 지리에 밝아 특별히 뽑힌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고 말았다. 형무소 위치를 대충 알고 있었던 그는 방심한 채 정찰을 소홀히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보고를 받고 부대를 투입하고 보니 그 형무소는 텅빈 껍데기였다. 헛탕을 친 데다가 토벌대의 추격까지 받는 위험을 겪어야 했다.
그 정찰병은 당연히 재판에 회부되었고, 대원들 전원의 만장일치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지가 저질른 잘못은 입이 열 개라도 헐말이 웂구만이라. 지겉은 얼빙이넌 열 분 죽어두싸제라. 지넌 동무덜이 정헌 대로 먼첨 죽을 것잉께, 동무덜언 더 열성으로 투쟁혀서 인민의 새나라럴 꼭 맹글고, 거그서 복받고 살기럴 바래능마요. 지넌 저시상에 가서도 그런 날이 싸게싸게 오기럴 빌겄구만이라. 지 잘못을 용서허시씨요." 그 정찰병은 대원들을 향해 똑바로 서서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겼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동무덜! 저 동무럴 살립씨다. 저 동무가 진짜배기 빨치산이오!"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 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맞소, 저런 동무럴 죽이기넌 아까우요." 누군가가 동의를 하고 나섰다. "옳소, 살립씨다아!" "그려, 그려. 저런 맴이 진짜배기여!" 모든 대원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재판은 다시 열리고, 모든 대원들의 만장일치로 그 정찰병은 죽음 직전에서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염상진은 커다란 감동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따꿍 - 따꿍 -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산속에서 한 발씩 울리는 총소리는 산울림으로 하여‘따꿍’하고 들렸다. 총소리가 사라지고, 대원들은 부대별로 숲 그늘을 떠나갔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무겁고 어두웠다. 염상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짜피 한번 죽는 건데 못난 사람들 같으니라구..."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개구리 울음소리들이 바글바글 끓어댔다. 개구리들은 한낮에는 전혀 아무런 소리가 없다가도 어둠살이 퍼지면서부터 울어대기 시작하면 그 소리는 서로 다투듯 시간이 갈수록 요란스럽게 번져나갔다. 모기도 때를 같이해서 날기 시작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여름밤의 정취라면, 모기떼들이 엥엥거리며 날아다니는 것은 더위와 함께 여름밤의 큰 고역이었다. 빨치산들에게 모기떼는 겨울의 이만큼 짜증스럽고 귀찮은 존재였다. 이를 잡아도 잡아도 없앨 수가 없듯 모기도 쫓아도 끝없이 달겨들었다. 그래서 빨치산들은 이와 모기를 가리켜‘너희들은 우리의 또 하나의 원수’라고 이름붙였다.
이태식의 연대원들은 날아드는 모기들과 슬슬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찰조럴 짜야 쓰겄는디, 세 명씩 두 조로 여섯잉께, 지원자는 나스씨요." 연대장 이태식이 나직하게 말했다. "여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쁘게 팔을 들며 일어난 것은 여자였다. "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던 이태식이 그 다음 말을 얼른 멈추었다. 말에서처럼 얼굴에도 그의 감정변화가 민감하게 드러났다. 찌푸려지려던 그의 얼굴이 어색하게 웃음짓고 있었던 것이다. 조원제는 빙그레 웃으며 그런 연대장과 여자대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몇몇 대원들도 소리죽여 쿡쿡 웃고 있었다. 대원들은 연대장이 꿀꺽 삼켜버린 말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었다. 그건‘...동무요?’였다. 연대장은 그 말을 더 해서는 안 되게 되어 있었다. 그 말을 자칫 잘못 입 밖에 냈다가는 정식으로 자기비판에 붙여질 판이었다.
"이, 강경애 동무가 지원혔고." 이태식은 일부러 이름까지 불러가며 못을 박듯이 하고는, "다른 동무덜 또 지원허씨요."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대원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되았소. 되았소. 거그꺼정만 여섯이고, 남치기 세 사람은 도로 앉으씨요." 이태식이 일어선 순서대로 지원자 여섯을 지목했다. 이런 데는 아예 자격이 없는 조원제는 빠른 몸놀림으로 열을 빠져 나가고 있는 자원자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치일꾼인 문화부중대장은 전투가 벌어지는 화선에서도 다소간 안전한 곳에 위치했고, 이런 경우에도 자원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간부보호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돌격대, 매복조, 정찰조 같은 위험부담이 큰 조직을 짤 때는 지명이 아니라 자원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그건 민주적 방법의 조직운영인 동시에 투쟁의 자발성을 키우기 위한 방법이었다. 강제성이 완전히 배제된 그 방법에도 불구하고 자원자는 언제나 모자라는 일이 없었다. 그건 매일 실시되는 학습과 함께 전체 빨치산들의 투쟁열을 입증하는 일면이었다. 그런 데다가 연대에서는 언제부턴가 야릇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앞을 다투는 자원자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회담이라는 달갑지 않은 소식으로 야기될 위험이 있는 사기저하와는 반대되는 현상이었다. 그 변화가 바로 강경애한테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조원제는 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저 강 동무한테 나가 판판이 지는구만." 정찰조가 임무수행을 하러 떠나자 이태식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원칙을 바꾸기 전에야 판판이 지게 생겼지라." 조원제는 씽긋 웃었다.
"그렇겠네. 좌우당간 여자 몸으로 워찌 저리 간도 크고 야물딱진지 몰르겄소. 그런다고 여자 일이 안 매시라운 것도 아니겄고. 나이넌 쪼깐혀갖고 영 사람 애믹이오." "저리 용맹시런 부하가 생겠응께 인자 강철부대가 강강철부대 되게 생겼는디 머땀시로 애썩고 그러시오?" 조원제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어허! 넘 솔 몰르고 그 무신 땁땁헌 소리여? 아, 지가 후방부에서 기동대로 온 지가 을매나 됐다고 지원이 있을 때마동 넘 먼첨 불쑥불쑥 나스냐 그 말이여. 산에서 살았다고 다 빨치산이간디? 염불도 지각각, 잿밥도 지각각이드라고 빨치산도 다 지각각으로 달브덜 않더라고? 후방부에 있다가 기동대로 오먼 빨치산 삥아린디, 삥아리먼 삥아리맹키로 얌전허니 있어야제 삥아리가 겁도 무섬도 몰르고 나댄께 위태위태허제." "연대장 동무가 시방 헌 발언 나가 강경애 동무헌테 그대로 전허겄소." 조원제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이고 지도원 동무, 요것 나가 실없는 소리 혔소.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허씨요." 이태식도 당황하면서 금방 공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건 가식도 술수도 없는 이태식의 일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순진할 정도로 순수한 그는 무엇이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행동했던 것이다. "아이고, 장난이오, 장난." 조원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엣끼! 장난헐 말이 따로 있제." 이태식이 조원제의 어깻죽지를 쳤다. 강경애가 후방부에서 이태식의 연대로 온 것은 한 달 가까이 되었다.
토벌대에게 해방구 반을 빼앗기면서 입은 병력손실을 보충할 때였다. 이태식은 전부터 여자대원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체로 남자에 비해 전투력이 약한 여자를 받아들이게되면 그만큼 부대의 전투력이 약화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연대에 있는 여자대원은 간호병 역할과 취사를 겸해서 맡고 있는 최소의 인원뿐이었다. 그런데 강경애는 간호병도 아니고 엉뚱하게도 전투병 중의 하나로 전속되어 온 것이다. 이태식이 강경애를 선선하게 받아들였을 리 없었다. 지체없이 지구사령부에 재고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강경애가 강철부대에 자원한 것이니까 좀 곤란하다는 사령부의 응답이었고, 그러는 사이에 강경애의 내력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녀의 남다른 내력을 알고 나서야 이태식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강경애는 며칠만에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나섰다. 그 날 매복조를 짜는데 제일 먼저 자원을 하고 나섰던 것이다. "아니 강 동무, 워쩔라고 그요?" 이태식이 어이없는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머시럴 워째라. 매복조 지원이제라." 강경애는 새침한 얼굴로 대꾸했다. "동무넌 안 되겄소." "음마, 지원이람서 지원헌 사람이 워째 안 돼라?" 강경애의 말은 또렷했다. "동무넌 인자 총도 포도시 쏨스로, 매복이 먼지나 알고 그러요?" "매복이야 적이 많이 댕길 만헌 길목에 숨었다가 적얼 때래잡는 일이제라." "고런 말이 아니라, 고것이 을매나 에롭고 위험헌 일인지 아냐 그 말이오." "그렁께 싸게싸게 배와야제라." "허 참!" 이태식은 기가 막히다는 듯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우리가 시방 아그덜맹키로 고샅에서 물총쌈 허는 것이 아니오. 매복이라는 것은 예사 쌈보다도 훨썩 위험시런 것인디, 여자가 나슬 일이 아닝께 가만 있으씨요." "연대장 동무, 무신 발언얼 그리 허시오! 인민해방은 모든 사람이 차등웂이 똑겉이 되는것이고, 거그에 따라서 남녀도 평등허게 된다는 것을 아시오, 몰르시오? 나럴 여자로 차별혀서 지원을 안 받아줄라고 허는 것은 해방정신의 기본에 위배되는 일이오. 나럴 지원에 받아주던지, 그 틀린 발언에 대해 자기비판얼 받든지, 연대장 동무는 양단간에 하나럴 골르씨요." 이태식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강경애의 유별난 내력을 다시 생각하며 그녀의 자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태식이 그런 정도의 강경애 논리에 대응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을 조원제는 안타까워했다. 강경애의 공박은 꽤나 틀을 갖추고 있었지만, 결정적 허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인민해방에 따른 남녀평등이란 인권의 평등이었지 획일적인 능력의 평등이 아니었고, 아무리 자원이라고 해도 임무수행에 대한 능력평가는 지휘관의 권한이었던 것이다. 이태식은 그 점을 들어 반격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태식은 전투력은 누구보다 강했지만 논리전개에는 약한 사람이었다. 그 점이 그의 약점이면서 열등감이기도 했다.
강경애는 그 뒤로도 서너 차례 자원자를 뽑을 때마다 어김없이 제일 먼저 손을 들고는 했다. 그때마다 이태식은 "또..." 하며 얼굴을 찌푸리다가는 얼른 표정을 바꾸어 억지웃음을 짓고는 했다. 이태식의 그런 염려 속에서 강경애는 매번 무사하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고, 날이 갈수록 그녀가 야멸찬 전사로 변해가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눈매가 고운 강경애는 자주 자상하고 정이 많은 여자일 뿐이었다. 틈이 나는 대로 남자대원들의 찢어진 옷을 꿰매주려고 했고, 가위로라도 긴 머리를 깎아주려고 했으며, 몸이 불편한 대원이 있으면 지성으로 돌보아주었다. 그런 강경애의 모습은 지극히 여성다웠다. 그런 강경애가 싸움에 나설 때는 남자들이 무색할 지경으로 용맹스러워진다는 것은 꼭 거짓말 같은 일이라서 대원들 모두는 한동안 어리둥절해져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바느질을 하면서 몇몇 대원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대원들에게 그녀는 자신을 이해시킬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우리 성제간은 오빠허고 나허고 남매였는디, 집안은 그작저작 밥술은 묵고 살아서 오빠넌 중학교꺼지 나오고, 나넌 소학교는 나왔제라. 성제간이 딱 둘잉께 우리넌 아조 우애가 짚었는디, 오빠는 일정 때부텀 좌익얼 혔제라. 그래 논께 나도 솔래솔래 좌익물얼 묵어갔구만이라. 그러다가 해방이 된께 오빠는 지시상 만내갖고 일정 때 못허든 활동얼 날개 달고 훨훨 허기 시작혔는디, 우리가 다 알디끼 그 활동이란 것이 금세 불법이 안 되야부렀소. 그리된께 오빠도 지하로 숨어 비합법투쟁으로 들어갔는디, 오빠가 원체로 표나게 활동얼 허다봉께 경찰덜 눈에 딱 백혀서나 날이 갈수록 옴치고 뛰기가 애롭게 되야갔소. 그려서 안전한 비트를 장만혔는디, 거그가 워디냐 허먼, 집 앞 논두렁에다가 굴을 판 것이오. 그 논두렁이 양쪽에 논이 붙어 있는 흔헌 논두렁이 아니고 한쪽으로는 높으단허니 밭이 시작되는, 굴파기에 아조 존 그런 논두렁이었제라. 글고 누가 보드라도 논 저짝 논두렁에 사람이 숨은 굴이 있을지넌 생각도 못허게 생겼고라. 그 굴에넌 우리 오빠 혼자만 숨은 거이 아니고 오빠친구도 한 사람 있었구만요. 나가 새북이나 밤으로만 밥얼 날르는디, 겨울에 눈이 오면 발바닥이 찍혀 굴 있는 자리가 표가 나게 된께, 그런 날언 논 얼음장얼 깨감스로 맨발로 물 속을 걸어 굴로 밥얼 날랐소. 근디도 오빠럴 살래야 된다는 생각으로 발이 시런 줄도 몰랐제라. 그리 허기럴 일년얼 다 해가는디, 경찰에서넌 오빠 잡을라고 사흘거리로 집얼 뒤지고, 아부지럴 잡아가고 난리판굿이었제라. 아부지가 잽혀가 고초당 허는 것도 못 볼 일이고, 아부지가 고초당험시로 정신이 날다들다 허다가 오빠가 숨은 디럴 말해불란지도 몰를 일이고혀서 나넌 아부지도 지키고 오빠도 지키자 허는 생각으로 맘에 하나또 웂는 시집얼 가기로 작정허고 말었구만요. 그 사람이 순경인디, 오빠 잡으로 우리집얼 발바닥 닳아지게 나들다가 벨로 보잘 것도 웂는 나헌테 미쳤응께라. 나가 그 순경헌테 시집얼 가고 난께 아부지가 고초럴 면허게 되고, 오빠도 무사허니 피했다가 여수, 순천서 그 일이 터지자 굴에서 나왔구만요. 근디 그 일이 또 오래 못가게 된께 오빠는 산으로 들어갔제라. 오빠는 산에서 투쟁허다가 해방전쟁얼 못 보고 죽고, 그 전쟁도 또 뜻대로 안 풀리니 인공 때 여맹서 일헌 나가 워째야 쓸 것이오. 정웂는 냄편 내뿔고 입산혔제라. 입산허는 날로 총 들고 나서서 오빠 몫아치꺼정 나가 다 헐라고 맘묵었는디, 당에서 워디 그 말얼 쉽게 들어줍디여? 후방투쟁도 똑겉은 투쟁이다, 비무장 남자대원덜이 너무 많은께 기둘려라, 그럼시로 차일피일 날만 가는디, 참말로 기가 맥힙니다. 나가 입산헌 것은 오빠헌테서 배운대로 위대헌 사회 맹글라고 싸우는 것이었제 집구석에서 허든 일 산에서도 헐란 것이 아니었응께라. 근디, 그리 바래든 일인자 허게 되얐응께로 나가 을매나 신바람이 나겄소. 나가 우리 오빠 몫아치꺼지 허잔께 지원도 자꼬 허고 그러제라잉. 나가 허는 것 보고 오빠도 저시상에서 좋아라헐 것잉마요." 스물두 살 강경애는 이론무장도 꽤나 실한 편이었다. 그녀가 틈틈이 남자대원들의 옷을 기워주거나 머리를 깎아주거나 하는 것은 단순히 여자로서의 자상함이나 정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행위를 통해 동지애를 키우는 한편으로 암암리에 투쟁력을 고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수시로 자기 오빠의 용감한 투쟁담을 이야기했고, 자기가 그런 오빠를 알마나 존경했으며, 남자다운 남자는 바로 자기 오빠 같은 남자라는 말을 은근히 덧붙이고는 했다. 사람을 가리는 법 없이 누구나 따뜻하게 대하는 그녀를 싫어하는 남자대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의 오빠같은 남자가 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 증거가 바로 그녀를 뒤따라 자원자들이 갈수록 불어나는 것이었다. 조원제는 그런 변화를 유심히 포착하며 혼자 중얼거리고는 했다. "정치일꾼 열 목 허네웨..."
노을이 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이 온통 불붙어 타고 있었다. 그건 광채 찬란한 불바다였다. 눈부신 찬연함으로 불타는 노을의 색깔은 이글거리는 불덩이의 싱그러운 생명력이었다. 여름해의 그 뜨거운 열정만큼 노을도 장엄하고 현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침노을이나 저녁노을이나 햇살이 아래서 뻗어오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침노을은 아래서부터 사위어 오르고, 저녁노을은 위에부터 변색해 내려왔다. 그리고 아침노을은 경쾌한 느낌이 많은데, 저녁노을은 장중한 느낌이 강했다.
"참 곱군요." 이지숙이 노을을 그윽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소." 옆에 선 안창민도 노을을 바라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노을을 이렇게 바라보기도 오랜만이네요." "그런 것 같소." 그리고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지숙은 싸리나무잎 하나를 따서 입술 끝에 물었다. 그리고 그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말이 별로 없는 남자는 진중해 보이기도 하지만 답답할 때도 있었다. 불필요한 말을 거의 하는 일이 없는 안창민은 당사업을 하는 데는 진중한 일꾼이었지만, 이렇게 단들이 만났을때는 더없이 답답한 남자였다.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것은 어느 경우에나 좋은 일이었지만, 필요한 말을 필요한 경우에도 하지 않는 것은 좀 곤란한 일이었다. 이지숙은 그 점이 안창민에 대해 불만이었다. 공석이 아니고 이렇게 단둘이만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인데도 안창민은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자신이 바라고 있는 말이 나올리가 없었다. 자신의 가슴에서는 안창민을 향한 마음이 저 붉은 노을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안창민은 그 노을을 보는 것인지, 못보는 것인지 단둘이 만나면 씨익 웃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안창민에게 듣고 싶은말은, 그의 가슴에서도 자신의 가슴에서 타고 있는 노을과 같은 노을이 타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마음의 표현이야 여러 가지 말이 있을 수 있었다. 직접적일 수도 있고, 간접적일 수도 있고, 소극적일 수도 있고, 상징적일 수도 있고, 우회적 일수도 있고, 말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서로 마음을 열고 나서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안창민은 남자로서 필요한 한 마디를 여지껏 하지 않았던 것이다. 꼭 그 말을 들어야만 되느냐고 자신을 나무라기도 해보았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말이 그냥 소리와 다른 것은 거기에 마음과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닌가. 사상이 말을 통한 논리의 구체성이듯이 사랑도 말을 통한 마음의 구체성이었다. 자신은 그 구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말을 목말라하고 있었다. 그 말을 꼭 들어야 하느냐고, 여자란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그 모독적인 말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사상에 있어서는 그런 모독을 참아낼 수 없지만 사랑을 앞에 놓고는 그 모독을 달게 감수하면서 필요한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안 동무는 저런 노을을 보면 무슨 생각이 나시나요?" 이지숙은 싸리나무잎을 뱉으면서 안창민을 옆눈길로 살짝 쳐다보았다. "글쎄요, 경치가 아름다울수록 감탄만 나올 뿐인데... 저 노을을 보면서... 혁명의 성취가 저렇게 눈부신 색깔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아이고 맙소사! 그만 이 말이 터져 나오려 하는 것을 이지숙은 짐짓 참아 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혼자 웃음지었다. 제 가슴에서는 저런 노을이 타고 있는데 안 동무의 가슴도 그런가요? 이렇게 물으려다가 너무 노골적이고 야한 것 같아서 물음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물었더라면 안창민의 대답은 십중팔구 '예, 내 가슴에서도 혁명의 열정은 저렇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했을 것 같았다. 이지숙은 혁명전사로서 강건하게 서 있는 안창민에게 만족하자고 생각했다. 혁명의 정열이 뜨거운 사람은 사랑의 정열도 그만큼 뜨겁다는 말을 믿기로 한 것이다. 사실 지금의 상황에서 그에게 사랑의 말을 듣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일지도 몰랐던 것이다. 지구정치위원으로서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사랑 운운하는것이 오히려 남자답지 못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용한 '안 동무' 라는 호칭도 그런 분위기를 유발하기는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볼 때 그건 혁명적호칭이었지 애정적 호칭은 아니었던 것이다.
"저 붉게 타는 노을빛은 마치 동지들이 흘리고 간 피가 한데 모인 것 같아요." 이지숙은 감정을 일신시키며 말했다. "그렇소, 그런 느낌도 들어요. 사실 말이오... 우리가 입산하고 난 다음에 이 산골, 저 산골에서 죽어간 전사들이 그 얼마요. 우리 전남도 당만이 아니라 각 도당마다 죽어간 전사들을 다 합치면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를 것이오. 그 사람들 거의가 농사를 짓거나 노동을 하던평범한 인민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오. 그들이 흘리고 간 피를 전부 모으면 저 정도로 하늘을 덮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오." "어쩌면 더 넓을지도 모르지요. 피를 흘리지 않는 혁명은 없고, 위대하지 않은 혁명은 없다는 말을 갈수록 절실하게 실감하게 돼요." "그렇소, 인민은 혁명을 낳고, 혁명은 역사를 낳는 것 아니겠소. 그러나...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이 따를 것인지가 문제요." 안창민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조직개편이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들리는데, 사실인가요?" 공적인 입장을 회복한 이지숙은 비로소 안창민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토벌대들의 공격이 강화되면서 모든 행방구들이 타격을 입고 있으니 아마 불가피한 일일것 같소." "적들의 공격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도 휴전과 어떤 관계가 있겠지요?" "물론이요. 반격에 총력을 기울였던 적들이 삼팔선 부근에 집결되어 있다가 휴전문제가 나오기 전후로 해서 대병력을 우리들 쪽으로 투입하기 시작한 거요. 그건 우리가 바라는 바이고, 우리의 투쟁이 거두고 있는 성과 중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오." "적의 병력을 분산시켜 인민군들의 전쟁수행을 돕는다는 뜻인가요?" "그렇소." "이승만정권은 정전반대국민대회라는 것을 각처에서 매일 열어대고 있는데, 그게 휴전회담에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수많은 인민들이 또 이승만 반동정권을 위해 동원되고 있는데, 그 영향이란 미국에 대한 영향이니까 예측하기가 어렵고, 그 대회라는 것이 우선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건 틀림없소." "어떻게 말인가요?" "그 대회 소식이 대원들을 심정적으로 안정시키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소." "아 예, 저도 그런 걸 느꼈어요. 그런데, 앞으로 투쟁이 어려워지겠군요." "사실이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투쟁이 너무 쉬웠다고 생각해얄 거요. 특히 우리 전남도당은 해방구를 철저하게 확보해왔으니까." "그렇지만 해방구 확보가 불로소득은 아니었잖아요." "물론이오. 그게 불로소득이란 뜻이 아니고 앞으로는 해방구가 없이 투쟁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뜻이오." "아, 비무장병력이라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면..." 이지숙은 나뭇잎을 손에 잡히는 대로 쥐어뜯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 안타까움이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안창민은 느꼈다. 그건 도당 상부에서부터 한 사람의 전사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느끼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은 말로 곱씹는다고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가며 치열하게 투쟁하는 것으로 풀어나가야 했다. 그게 적의 무기로 무장을 확대해나가는 빨치산의 기본전략에 충실하는 일이었다. 빨치산의 입장에서 안타까움을 갖자면 끝이 없었고, 그 안타까운 조건들이 해결된 다음에야 투쟁을 할 수있다면 결국 투쟁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또 그런 조건들을 전제하는 것은 빨치산일 수가 없었다. 혁명이 인간들이 만드는 기적이듯이 빨치산도 기적을 만들어내는 군대이어야 했다. 그러나 안창민은 이런 말을 굳이 이지숙에게 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그런 것을 모를 리 없었고, 순간적으로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염상진 동지께서는 안녕하신가요?" 이지숙은 양쪽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두어 번 손가락 빗질을 해 매만지면서 물었다. 평소에는 고무줄로 잘끈 동여매던 머리를 안창민을 만난다고 풀어헤쳤던 것이다. "무사하시오. 하대치 동지나 다른 동지들은 더러 만났소?" "예, 하대치 동지는 가끔 만나게 돼요. 긴 얘기는 못하는데, 그 동지만 만나면 저도 힘이 솟겨요. 그 동지는 언제나 기운이 펄펄한 게, 꼭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사람 같아요." "우리에게 보물이 따로 있겠소." "그 동지는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라 잔정도 많아요. 얼마 전에는 글쎄 저를 일부러 찾아왔는데, 엉뚱하게 분통 하나를 내놓지 않겠어요. 보투 나갔던 부대에 묻어들어온 건데, 두고쓰라는 거예요. 빨치산이 분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했더니, 총질도 안 하는 빨치산이 무슨 빨치산이냐며 씩 웃고 돌아서는 거예요. 우습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그러데요." "그게 잔정이 아니라 그 동지가 표시한 남다른 동지애요. 그 동지는 아픈 동지를 살리기위해 자기는 사흘씩도 굶는 사람이오." 안창민은 일부러 이지숙의 말을 지적했다. 이지숙은 안창민에게로 빠르게 눈길을 돌렸다.
안경 속의 안창민의 눈이 이지숙을 나무라고 있었다. "예,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허지만 그 동지의 그런 마음을 가볍게 보진 않았어요." 이지숙은 금방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이지숙은 안창민이 그런 지적을 하고, 자신이 잘못을 시인한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서운하거나 언짢은 기분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자기비판이 생활화된 탓이었다. "그리 생각하면 잘됐소. 우리가 구빨치투쟁을 할 때 내가 몸살 비슷한 병으로 아주 심하게 앓았는데, 그 동지는 나를 살리기 위해 자기는 사흘을 꼬박 굶었소. 그때 난 동지애가 부모의 정과 맞먹는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소. 내가 그런 동지애를 가질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했고, 혁명투쟁을 하다가 그런 동지와 함께 죽는다면 아무런 아쉬움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소."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지숙은 하대치의 얼굴을 떠올리며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 동지는 사람으로도 예사 사람이 아니고, 전사로도 예사 전사가 아니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부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걸 보고 무섭기까지 했어요." 안창민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이지숙은 안창민을 새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공적인 이야기로 끝나는 만남이었지만 이지숙은 단둘이 보낸 시간 그 자체를 소중하게 마음에 담았다. "우리의 투쟁은 이제부터 새로 시작일 거요. 서로 건강 지킵시다." 안창민이 멀리 눈길을 보낸 채 담담하게 말했다. "네, 조심하세요." 이지숙도 안창민이 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을은 어느덧 변색해 사위어가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마음으로 한곳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지숙은 혼자 후방부로 돌아가면서 계속 목메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보아왔던 이름모를 시체들이 자꾸만 눈앞에 밟히고 있었다.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데도 투쟁은 이제부터 또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번 꼬인 역사를 바로잡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인가... 인민해방의 표적을 향해 불화살이 되어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않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되짚을 때마다 그녀는 가슴 쓰라리고 저릿거리는 통증이 주체할 수 없는 통곡으로 사무쳐오는 것을 느꼈다. 백삼십여 만명의 친일반민족세력으로 뭉쳐진 반인민적 반동정권을 쳐없애기 위해서 인민들의 희생은 너무나 컸다. 입산투쟁으로 죽어 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자들의 강압적 동원으로 또 수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입산투쟁으로 죽어가는 것은 그래도 보람차기나 했지만, 그자들의 폭압에 끌려나가 죽는 인민들에게는 억울함뿐이었다. 그런데 그자들에게 인민을 폭압할 수 있 폭력을 제공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자들에게 미국이 없었으면 인민은 단 한 사람도 피흘리지 않고 그자들을 모두 처단해 인민해방을 맞이했을 것이다. 미국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민족의 적이고, 인민의 적이었다. 그러니까 민족해방전쟁이나 빨치산투쟁은 곧 미국과의 싸움이었다. 빨치산들중에서 그 사실을 모르고 죽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투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 비무장이 태반인 후방부는 어찌될 것인지 이지숙은 마음이 무거웠다. 벌써 새로운 투쟁을 위한 대비는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병기과가 어디인지 모를 곳에 비트를 장만해서 자취를 감추었다. 병기과의 비트는 땅속을 파고 들었다는 말이 있었다.
백아산지구와 마찬가지로 조계산지구도 해방구를 절반 가까이 잃은 상태였다. 그들이 제일 먼저 대책을 세운 것이 병기과의 보호였다. 적과의 싸움에서 총알은 밥보다 더 우선했던것이다. 그래서 병기과는 땅속에 굴을 파서 잠적했다. 그것도 만일에 대비해서 여러 곳으로 분산시켰다. 김종연과 서인출도 두더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의 비트는 실개울이 흐르는 어느 골짜기의 비탈에 있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어디에나 있는 흔한 산골짜기고 비탈일 뿐이었다. 키가 크고 작은 잡목들이 숲을 이루고, 여러 가지 잡풀들이 엉켜 무성하고, 여기저기 바위들이 널려 있는 평범한 산골짜기의 하나였다. 실개울도 수량이 적어서 별달리 눈에 띄지 않고, 그저 있는 듯 만 듯했다. 그 골짜기에 병기과 비트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오는 사람까지도 믿지 않을 정도로 아무런 특색도 특이함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곳 어디에 총알을 만들어내는 굴이 있는지 찾아낼 수도 없게 산에는 흠집 하나 나 있지 않았다.
병기과의 비트는 골짜기의 중간 못 미쳐, 실개울에서 이십 미터쯤 떨어진 왼쪽 비탈의 서너 개의 바위가 널린 곳에 있었다. 그 지점의 특색을 굳이 찾자면 서너 개의 바위였다. 산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 바위들 중의 하나가 비트의 출입문이었다. 그 골짜기에 병기과의 고정비트가 들어선 것은 비트 설치조건이 완벽했기 때문이다. 첫째, 물이 있었다. 절대조건인 물이 있으되 적들이 의심을 품을 만큼 큰 개울이 아니라 그냥 지나치고 말 보잘것없는 실개울이었다. 그러나, 비트 옆의 실개울 바위 아래 파놓은 웅덩이에는 비트요원들이 넉넉하게 마시고도 남는 물이 언제나 괴어서 넘치고 있었다. 둘째, 골짜기가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첫눈에 은신하기 좋게 느껴지는 곳은 적들의 눈에도 똑같이 느껴지게 되어 있었다. 은신의 가능성이 희박한 곳일수록 은신의 최적지였다.
굴 안은 너덧 평의 넓이였다. 천장은 서서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높았고, 무너지는 사고를 대비해서 통나무들을 세 줄로 가로질러 기둥으로 받쳐놓고 있었다. 통나무 기둥에 걸린 네 개의 석유등잔이 굴속을 밝히고 있었다. 그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여섯이었다. 그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이번에 땅속으로 숨어들면서 여자들은 다 제외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밤낮을 바꾸어 작업을 해나가고 있었다. 굴속에서는 낮과 밤이 따로 없었지만, 낮에 작업을 하다가 혹시라도 무슨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 토벌대에게 발각될지도 모를 위험을 아예 없애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밤이 아니고서는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물을 떠오고, 대변을 보고 하는 일들은 다 밤에 이루어졌다. 며칠 간격으로 후방부에서 식량과 재료를 가지고 와서는 총알을 가져갔다.
"해를 못 보고 살아서 긍가 어쩐가 속할라 워째 요리 찌푸르둥둥허기도 허고 뻑쩍찌끄리 허기도 허고, 참말로 요상시럽네웨." 김종연이 윗배를 문지르며 나오지 않는 트림을 하려고 목을 늘였다 줄였다 하고 있었다. "벨 요상시런 소리 다 듣겄네. 해허고 배허고 무신 상관이여, 상관이. 밥얼 넘버덤 많이 묵을라고 씹을 새도 웂이 막 넘게서 그렇제라." 배삼성이 엇지게 질러대고 나왔다. 말하기 좋아하는 그가 일부러 말거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아니 시방 누구 복창 터치자는 심뽀요? 나가 동무맨치로 속이 시커먼 줄 아시오?" 김종연이 지체없이 맞받아쳤다. "허, 나가 속이 옥양목맹키로 희연헌 것이야 여그 동지덜이 먼첨 아는 일이고, 배가 그리텁터그리허고 묵지그리헌 것은 해럴 못 바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도 오래 니노지 맛얼 못바서 그런 것이 아니겄소?" "이, 지속 짚어 넘 속이드라고, 동무넌 니노지럴 굶으면 잠지에 이가 기는 것이 아니라 배가 그리 되는갑소이. 잠지 뿌랑구가 뱃속꺼지 뻗친 빙신이 아니까?" 김종연이 언제 배가 거북하다고 했냐 싶게 배삼성을 몰아댔다. 누군가가 쿡쿡 웃었다. "얼랴, 나럴 생짜로 빙신 맹글어뿌네?" 배삼성이 어이없어했다. 그는 역시 김종연의 빨리 돌아가는 머리를 당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김종연의 말꼬리를 먼저 잡고들었지만 번번이 말문이 막혔다.
"속이 안 좋먼 소금 한 주먹 묵제 그려." 서인출이 염려스러운 듯 김종연을 쳐다보았다. "아니시, 소금도 양석인디." 김종연은 목을 늘이며 헛트림을 하고는, "짐승도 해를 못 보먼 죽는다든디, 사람이 해럴 안 보고 을매꺼지 살아지는지 누구 아는 사람 있소?" 그는 장난기 없이 말하며 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김 동무, 여길 그리 갑갑하게 생각지 마시오. 내가 어떤 외국소설에서 읽었는데, 하늘은 구경도 할 수 없는 지하감방에 갇혀서 몇 십년을 살더군요. 그에 비하면 우린 밤하늘도 보고 하니까 평생 동안 아무렇지도 않을 거요. 김 동무가 여기보다는 자꾸 화선투쟁에 나서고 싶어하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아니겠소? "공과대학 출신인 조장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메, 쪽집게 무당이시요이. 동무, 동무가 과장동무헌테 말혀서 워찌 화선으로 잠 나갈 수 웂을께라?" 김종연은 금방 애걸조가 되었다. "김 동무, 이 일에 그냥 마음붙이시오. 갈수록 형편은 어렵게 되고, 총알은 더 많이 필요하게 되고, 기술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할 형편 아니오? 화선투쟁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총알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어떻게 화선투쟁이 이루어지겠소. 모두가 중요한 혁명사업이니까 김 동무가 성질을 좀 누르고 마음을 느긋하게 먹도록 하시오." "항, 총알이 핑핑 날아댕기는 화선에 비허자먼 여그사 목심 보존허기가 용궁이제." 배삼성이가 얼른 토를 달았다.
"먼 소린지 몰르겄네. 용궁이야 토꽹이가 목심이 경각에 달린 딘디, 그 무신 뜽금웂는 무식헌 소리여!" 김종연이 화풀이하듯 쏴질러버렸다. 서너 사람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정작 멀뚱한 얼굴로 눈을 껌벅거리고 있는 것은 배삼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