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선생--밤늦도록 상해 임시정부 이야기 나눠
[499호] 1987년 09월 26일 (토) 원불교신문
내가 백범 김구 주석을 만나게 된 것은
이승만 박사의소개도 있었고 팔타원님의 역할도 계기가 되었다.
나는 상산님과 함께 이화장에 가서
그곳에서 백범선생과 부통령을 역임했던 이시영 선생과 한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박사는 우리를 불교헉명 운동한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우리교단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백범 선생은 한동안 이박사의 말씀을 들은 후
『내가 중국에 있을 때 국민의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핵심된 불교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원불교가 바로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종교인것 같습니다』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그리고 이박사에게도 『이북에 안가시기를 잘 했습니다』하면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가 돌아올 때는 「백범일지」를 상산님과 나에게 각각 한권씩 선물하셨다.
이때 만나게 된 이시영 선생과의 인연으로 그 후 여러번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세상 인연이란 묘한 것이다.
내가 20여년전 서울에 갔을 때
이시영 선생 형님이었던 이회영 선샌의 친손자인 이종찬씨가 나를 신촌교당으로 찾아왔다.
현재 국회의원인 이종찬 의원은 종조부인 이시영 선생과 우의를 생각하여
내가 서울에 가기만 하면 찾아와 인사를 하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서울에 있는동안 국내 정치인들과의 교류가 잦았었다.
정교동심의 차원에서 허심탄회하게 그들을 대했기 때문에
그들도 부담없이 나를 만나주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백범 선생과는 유난히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물론 이박사의 소개도 있었지만,
팔타원님께서 부군인 강익하 선생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하셨던 것이 계기가 되기도 했다.
팔타원님께서는 틈틈이 강선생에게 우리 교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
평소 좋은 인식을 하고 계셨다.
백범 선생과 강선생은 사제지간이었다.
백범 선생이 한때 글방 훈장을 하실 때 강선생이 글을 배웠다.
이러한 인연 관계는 백범 선생이 상해에서 해방이 되고 귀국을 하셨을 때
강선생은 한달음에 달려가 죽은분을 다시 만난 듯 기쁨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부자간처럼 친밀한 인정속에 그로부터 백범 선생의 활동자금을 많이 대게 되었다.
이러한 교류속에서 강선생은 「불법연구회」에 대한 이야기를 간간히 하셨던 것이다.
『전북 이리에 총본부를 두고 있는 「불법연구회」에는 종사님이라고 하는 큰 도인이 계시답니다.
거기에 다니는 신도들은 모두 방짜입니다.
제 안사람도 거기 다닙니다.
그곳 사람들은 속세인들과는 다릅니다.
시기 질투 모략 중상이 없고 과욕도 부리지 않는데
그 위대한 스승의 상수제자가 서울에 와 있답니다. 언제 한번 만나 보시지요』
불법연구회와 나에 대한 예비소개를 강선생은 이렇게 하셨다고 한다.
이화장에서 처음 만난 백범 선생은 그 후 자주 한남동에 들리셨다.
처음 백번 선생이 오셨을때 일인들이 쓰다남은 의자가 하나 있어 그 자리에 모시려고 했더니
백범 선생은 극구 사양하셨다.
하나밖에 없는 의자, 거기는 내가 앉아야 한다면서 자신은 청법자라고 했다.
그리고는 꼭 존경어를 쓰셨다.
나는 민망해서 『아버지 같으시니 말씀을 낮추십시요』라고 했더니
백범 선생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종교인은 어디까지나 정신의 지도자인데
그렇게 세속인들처럼 함부로 말을 낮출수는 없다고 하셨다.
때때로 머리 아픈 일이 생긴다든지 틈이 나면 한남동에 오셔서 쉬고 가셨던 백범 선생님.
그분은 상해임시정부 시절의 이야기를 밤늦도록 목이 매이시며 들려 주셨고
거기에 모인 우리 교역자들에게 붓글씨도 써주셨다.
그러나 얼마나 곤궁한 생활이었는지
종이가 없어 그분의 친필을 다 받지 못해 오늘날 퍽 아쉬운 마음이 남아있다.
어느날은 예고도 없이 백범 선생이 오셨다.
생신을 맞이하여 주위의 술렁거리는 눈치를 보고 이곳 한남동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상해시절 주위의 동지들이 어머님 생신을 맞아 돈을 드리면
어머님은 그것을 모아 독립자금에 보태라고 내놓으셨다 말씀하시고는
내가 어찌 생일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더구나 우리나라 형편이 안정이 안되고
남북문제가 해결이 안된 상태에서 그럴수는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밭에 있는 콩잎을 쪄 된장과 함께 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만일 시장에 반찬을 사러가는 일이 있으면 나는 이대로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셔
있는 그대로를 대접했다.
어느때는 맹장염으로 수술한지 일주일이 된 며느리를 데리고 오셔서
『이 사람 누울 자리 좀 마련해 주시요』하시고는 한동안 요양하게 하셨다.
소탈한 서민의식,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는 생명을 내걸었던 애국지사,
천추만대에 그 이름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훌륭한 어른을 대하면서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때 한남동 주변에는 복숭아밭이 있어 여름이면 거기서 따온 복숭아를 대접하기도 했다.
이박사와 백범 선생은 처음에는 형제처럼 사이가 아주 좋았었다.
나는 두 분에게 『형제처럼 끝까지 변치말고 지내십시요』라고 말씀드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들의 견해차이 내지는 가치관 때문에
그분들의 사이를 갈라 놓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날 백범 선생에게 다음과 같은 충언을 드렸다.
『아무래도 이 나라는 이박사가 맡아야 할 것 같으니
잠시 수양하러 가십시요』라고 말씀드렸던 것이다.
첫댓글 이박사와 백범 선생은 처음에는 형제처럼 사이가 아주 좋았었다.
나는 두 분에게 『형제처럼 끝까지 변치말고 지내십시요』라고 말씀드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들의 견해차이 내지는 가치관 때문에
그분들의 사이를 갈라 놓기 시작했다.
이승만 박사와 백범 선생이 이렇게 사이 좋은 적도 있군요.
그러나 대산종사님은 앞날을 이미 에견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