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섭리에내맡김(韓) 제2장 - 02 흔히 하느님의 뜻은 반작용(反作用)처럼 드러나지만,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뜻을 실제 있는 그대로 알아듣게끔 해준다.
무화 16.07.28 22:03
《 제 2 장 거룩함이 끊임없이 샘솟아나는 원천인 현순간을 감싸안음에 대하여
02 흔히 하느님의 뜻은 반작용(反作用)처럼 드러나지만,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뜻을 실제 있는 그대로 알아듣게끔 해준다. 》
pp71-76
제 2 장
거룩함이 끊임없이 샘솟아나는 원천인 현순간을 감싸안음에 대하여
02 흔히 하느님의 뜻은 반작용(反作用)처럼 드러나지만,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뜻을 실제 있는 그대로 알아듣게끔 해준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과는 아주 차이나는 방식으로 사물들을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즉 그런 사람들은 감각의 명증성(明證性)에만 의지하고 있기에, 겉모습 아래 숨겨져 있는 대단히 귀중한 보물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명백하게 증명하는 성질. 또는 그런 정도.)
만일 우리가 변장한 어떤 사람이 실제로 우리의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단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는 어떤 이가 그에 대해 처신하는 방식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아주 색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왕인 줄 모르는 사람은 그를 보통 사람으로 여기고 그렇게 취급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하찮은 일거리들 안에서, 모든 불행 속에서 또 온갖 재앙 속에서 알아보고 있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똑같은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존경심을 가지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p.72 다른 이들이 두려워하고 멀리하려는 것을 우리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환영할 것입니다.
옷가지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남루하고 보잘것없이 보일 뿐이지만 우리는 그 속에 숨겨진 왕의 권위를 존중할 것이고,
우리의 임금님이라는 사실이 더욱 숨겨져 있어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하면 할수록 우리의 사랑은 더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권능에 있어 그토록 철저하게 비하(卑下)된 하느님의 의지, 그토록 겸손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뜻하심을 성심(聖心)이 받아들이실 때, '그 분은 어떠하셨을까?' 하는 것에 대해 나는 머리로 그려내 볼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가 그분을 마구간 마초 위에 흐느껴 울고 떨며 누워 있는 그 하느님의 가난을 보았을 때, 마리아의 그 애절한 마음은 얼마나 깊은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우리가 베들레헴 주민들에게 이 아이에 대해 그들이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어떤 해답을 얻게 될 것인지를 압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왕자로서 온갖 장식들로 둘러싸인 궁중에 태어났다면, 그들은 그에게 영예를 드리려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리아, 요셉, 삼왕 그리고 목자들에게 질문해 봅시다.
그러면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매력을 증가시키는,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바로 이 전적인 가난에서 발견하였음을 우리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우리 감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자극하고 증가시키며 풍요롭게 해줍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는 더 많이 믿게 됩니다.
p.73 타볼산에서 예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이나 주요 상황들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삶의 작은 일거리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보다 더 힘 있다든지 아니면 더 낫다든지 하는 것을 입증해 주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각을 통해 모순을 체험하게 되는 경우 이 모순을 파괴하려 드는데,
이보다 우리의 신앙이 결코 더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감각과의 싸움은 우리의 믿음에 찬란한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중요한 삶의 일거리들 안에서처럼 아주 보잘것없거나 평범한 일거리 속에서도 분명하게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믿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위대하고 특별한 신앙입니다.
현 순간에 대해 만족한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것을 통해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뜻을 음미하고 경배하는 것이며
또 사건들이 우리 위에 밀어닥칠 때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면, 우리가 지닌 신앙의 활력은 그분이 우리에게 펼쳐 놓은 상황이 아무리 굴욕적이라 해도 하느님을 경배하게끔 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눈길이 꿰뚫어 보는 곳으로부터 그분을 숨겨 놓을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이 "하느님은 없다." 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한 줌의 몰약을 더 바싹, 더 단단히 움켜질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놀라지 않을 것이고 몸서리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p.74 사도들이 도망치는 것을 보면서 마리아는 십자가 밑에 충성스럽게 남아 있었습니다.
아드님이 상처들로 찢기우고 침 뱉음을 당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어도 마리아는 그분이 당신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분이 심하게 매를 맞아 흘리시게 된 피는 그분에 대한 마리아의 애정과 경배심을 증가시켰습니다.
그분이 심하게 비난받으면 받을수록 마리아의 경외심은 깊어만 갔습니다.
믿음의 생활이라는 것은 그분을 변장시켜 수모케 하는,
다시 말해 그분을 파괴시키고 무효화(無效化)시키는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을 찾아나서는 쉼 없는 추구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보십시오. 마구간에서 갈바리아 산상에 이르기까지 성모님은 멸시받고 거절당하고 박해받는 하느님과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충실한 영혼들도 이런 일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 영혼들은 하느님 뜻을 감추려 드는 장막들과 그림자 그리고 환상들로 채워진 견고한 연속물들을 통과해야만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분을 따르며 사랑하는 영혼들입니다.
그들은 그림자들을 멀리하고 신적 태양만을 쫓아갑니다.
이 태양이 떠서 질 때까지 태양을 가리는 구름이 제아무리 짙거나 어둡거나 간에 그 신적 태양은 여전히 빛을 발하며 따스함을 가져다 줄 뿐 아니라
태양이 신비스러운 과정을 따라 휩쓸려 갈 때에는 그것을 찬미하고 찬양하며 묵상하는 충성스러운 마음을 활활 불타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저 하늘을 가로질러 큰 걸음으로 다가오실 때, 우리는 충실하고 복되며 지칠 줄 모르는 영혼으로 그분을 따라 앞으로 나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초목의 가장 연약한 잎사귀와 삼목의 작다란 숲 위를 걸으시고 작은 모래알을 밟으시며 지나가십니다.
우리가 밟고 지나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분이 현존해 계시기에 우리가 그분을 항구하게 찾는다면, 그분이 어디에 계시든 우리는 그분을 만나 뵙게 될것입니다.
p.75 믿음이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 줄 때 누리게 되는 평화보다 더 나은 평화는 없습니다.
이때에 어두운 모든 것은 빛이 되고 쓰디쓴 것은 달콤하게 변화됩니다.
믿음은 추악한 것을 아름답게, 적대감을 친절함으로 바꾸어 줍니다.
믿음은 부드러움과 신뢰심 그리고 기쁨의 모체입니다.
믿음은 적들에 대해 사랑과 자비심밖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며, 이로 인해 신앙은 더욱더 부요해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대적하는 피조물의 행위들이 가혹하면 할수록 하느님은 그것들을 우리 영혼을 위해 더 많은 유익함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도구가 우리를 해치려 하면, 모든 도구를 손에 쥐고 계시는 하느님의 명공(名工)은 영혼들에게 해악을 끼치려 하는 모든 것을 없애 주십니다.
순종하는 모든 영혼들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즐거움이고 은혜이며 보화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과대하게 신뢰할 수도 없고, 지나칠 만큼 그분 뜻에 우리 자신을 내맡겨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느님께 만사를 내맡긴다면, 그분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데 있어 필요로 하는 그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믿음은 이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
p.76 우리가 갖고 있는 감각에 대해 신뢰하지 않고 가증스러워하며 실망스러워하고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신앙은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선언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기 계신다. 만사형통이다."
믿음은 모든 것을 쳐부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어둡게 깔린 그림자들과 짙은 구름들을 꿰뚫고 나가 마침내 진리에 도달하게 되면 진리를 감싸 안으며 진리와 함께 합니다.
지도사제 13.06.06. 08:29
<우리는 그분의 뜻을 과대하게 신뢰할 수도 없고, 지나칠 만큼 그분 뜻에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릴 수도 없다.>
<아버지가(우리는 그분의 뜻을~~~ 맡겨 드릴 수도 없다)방에들어가셨다> 입니다.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제2장 2절 (흔히 하느님의 뜻은 반작용처럼 드러나지만,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실제 있는 그대로 그분의 뜻을 알게 한다)은, 요 글만이 아니라 이 글의 전체를 읽어 보아야 이해가 쉽습니다.
오히려 요 글(우리는 그분의 뜻을~ 맡겨 드릴 수도 없다)을 빼버리면 더 이해가 쉽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암만 하느님을 엄청나게 크게 믿고 신뢰한다고 해도,
그리고, 우리가 암만 우리의 모든 것들을 100%, 200% 다 맡겨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만사(일어나는 모든 일)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맡기는 것)>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요?
정말, 자신의 모든 삶을 하느님께 내맡기고(집중몰입) 사는 사람은,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죄>마저도요. 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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