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광주 교육의 출발지, 향교 사마재
남도 최초의 근대 공립학교가 된 전라남도관찰부 공립소학교는 1896년 11월, 광주 향교의 부속 건물인 사마재를 빌려 개교한다. 일명 문회재라고 불리었던 사마재는 과거 1차 시험인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향론을 펼치며 친목을 다졌던 일종의 지적인 사교클럽이었다.
사마재가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488년 광주 향교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올 때 이미 사마재가 있었고, 명륜당 건물 내 서쪽의 방 하나를 사마재라 부르며 사용했다는 기록이 광주읍지에 나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마재는 향교 밖에 별도의 건물을 지어 분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1879년 발간된 광주읍지에는 사마재가 “향교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왜 사마재가 향교에서 분가하여 동쪽으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과거 시험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교생(향교의 학생)과 1차 시험 합격자였던 생원·진사들과의 보이지 않은 갈등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향교 동쪽으로 옮겨졌다는 남도 최초의 근대 교육의 출발지였던, 옛 사마재 터는 지금 어디일까? 광주향교지(1952)를 보면, 사마재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문을 닫았고, 그 터는 광주 공원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사마재 터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단서는 1960년대 말 최윤상이 쓴 전남 60년사란 글 가운데 광주천의 물이 사마재(기념탑) 밑에 이르러 소를 이루는데 이곳을 깊게 패인 물웅덩이라는 뜻의 ‘아래 꽃바심’이라 부르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최윤상씨가 언급한 기념탑은 그 무렵까지 남아 있었던 광주금융조합창설기념탑을 말한다. 이 기념탑은 광주문화재단 주차장에서 향교 쪽으로 오르는 길 왼편에 위치한 어린이 헌장탑 자리에 있었다. 즉 지금의 어린이 헌장탑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근대 광주 교육의 출발지, 사마재의 터다.
사마재 건물을 넣고 광주를 배경으로 찍은 1920년대 옛 사진 한 장이 남아 전한다. 어린이 헌장탑에서 바라다 본 광주 어디에도 옛 사진 속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멀리 무등산은 그대로 서 있었고 광주천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사마재에서 시작된 공립소학교의 초기 모습은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학교 운영을 맡은 전남관찰부조차 광주목 관아를 빌려 쓰던 형편이었기 때문에, 새 학교 건물을 지을 여력이 없었다. 향교의 사마재를 빌려 임시 교사로 사용한 이유였다. 재미있는 것은 학비와 학용품이 공짜였지만 공립소학교가 설립되고 2년이 지난 1898년 말까지도 단 한명의 학생을 모집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왜 공짜로 실시된 근대 교육기관에서 2년 동안 단 한명의 학생도 모집하지 못했을까? 이는, 근대 교육에 대한 관심 부족이라기보다는 광주 지역민들의 경계심이 컸던 탓 때문으로 보인다. 1896년 초 광주향교는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기우만을 중심으로 한 호남의병이 창의하면서 본부로 썼던 건물이었다. 정부의 근대 개혁에 반대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향교 소속의 사마재에 문을 연 공립소학교에 자녀를 보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초창기 공립소학교가 아직 틀이 잡히지 않았음은 서석 100년사에 실린 교원들의 근무 연한에서도 확인된다. 교원들은 대개 한성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초임 교원이었는데, 1899년까지는 1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만 봉직하다 광주를 떠난다. 초대 교원인 조한설은 6개월, 2대 이헌은 11개월, 3대 장성화는 3개월만 근무했다. 그러나 1900년이 지나면서 광주 근대 교육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교원들의 근무 기간도 2년이 넘었으며, 홍병하는 1902년부터 1907년까지 6년 동안 재직한다. 학생수가 늘자 교장인 관찰사의 관심도 각별해진다. 1900년대 초 관찰사 이근호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지필묵을 나눠주고 집무실인 선화당에 자주 불러 상을 내리곤 했다.
1906년 보통 학교령에 의거 전라남도관찰부 공립소학교는 공립광주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꾼다. 이때부터 수업 기간은 공립소학교 시절의 3년제에서 4년제로 늘어난다. 1907년에는 사마재를 떠나 동문 안 사정리(현 구 도청 앞 전일빌딩 자리)로 옮긴다. 공립광주보통학교가 처음으로 독립된 교사를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그리고 이 무렵 광주의 근대 교육은 어느 정도 터를 잡는다. 1910년에 졸업한 보통학교 1회 졸업생이 18명, 2회 졸업생이 20명, 3회 졸업생은 27명이었음도 그 증거다. 사정리로 옮긴 20년 후인 1927년, 지금의 서석초등학교 터로 옮겨 보금자리를 튼다.
학교 이름은 이보다 훨씬 많이 바뀐다. 전라남도관찰부 공립소학교(1896), 공립광주보통학교(1906), 광주공립보통학교(1911), 광주제1공립보통학교(1934), 광주서석공립심상소학교(1938), 광주서석공립심상고등소학교(1940), 광주서석공립국민학교(1941), 광주서석국민학교(1950), 그리고 지금의 서석초등학교(1996)다. 수많은 교명 중 국민학교는 일제 치하 황국신민을 길러낸다는 뜻을 지닌 일제 35년의 제국주의 망령도 묻어 있다.
학교 운동장에 개교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다. 그 기념비 받침돌에 새겨진 ‘1896~1996’은, 서석초등학교가 광주·전남 최고의 역사를 지닌 남도 근대 교육의 출발임을 보여준다. 1960년대 한때는 학생수가 만 명을 넘는 매머드 학교였고, 밀려드는 학생수를 감당하지 못해 3부제 수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서석초등학교는 200여 명의 초미니 학교가 되어 있다. 도심이 텅 빈 공동화 현상의 결과다.
1930년에 지은 당시 전국 최초의 대 강당이었던 빨간 벽돌 강당과 1935년에 붉은 벽돌로 지은 2층의 본관 교사가 남아 초창기 근대 공립학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학교의 터가 어디였건, 이름이 어떻게 바뀌었건 간에 교육 도시로 불리게 된 광주 근대 교육의 출발은 광주공원 사마재에서 시작된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였음은 변함이 없다.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
교육도시라 불리는 광주의 근대 교육의 출발은 언제부터일까? 1894년 갑오개혁 이전, 교육은 서당과 향교, 성균관에서 이루어졌다. 유교 이념이 주된 교육의 내용이었고, 유교 경전은 주요 교과서였다.
서당 대신 근대학교가 도입되고 서양에서 신문물이 밀려오자, 기존의 천자문 대신 새로운 교과서를 필요로 한다. 그 필요성을 절감한 분이 고종 황제였다. 이에 고종은 1895년 2월, 덕, 체, 지를 교육의 3대 강령으로 삼은 교육입국조서를 반포한다. 교육이 국가를 발전시키는 근본임을 밝힌 교육입국조서는 한국 근대 교육의 기본 방향을 설정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교육입국조서가 반포된 후 7월, 고종 칙령 제 145호로 소학교령이 반포된다. 소학교령에 의하면 교과목은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산술, 체조를 기본으로 하면서 한국지리, 역사, 도화, 외국어 중 1과목 또는 수학을 추가할 수 있었다. 입학생들의 나이는 8세부터 15세까지였다. 소학교령은 각도의 부와 군에서 관내의 아이들을 취학시킬 수 있는 공립소학교 설치를 의무화했다. 이런 연유로 갑오개혁 이후 1896년부터 도청소재지였던 광주에 최초의 근대 공립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다. 지금 광주 서석초등학교의 전신인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