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하계수련회[제주여행기]
일시 : `92. 7. 23 ~27
장소 : 제주도
참석 : 천, 최, 이 부부
총회 : 최 경수 2년 임기의 차기회장으로
7월 23일
모두 정확히 9 : 49에 대구공항에서 택시를 내렸다.
촌놈들이라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덜렁거리며 수속 마치고 비행기에 탔는데..
최는 거기서도 점잖지 못하게 창밖을 보느라 일어서서 난리를 쳤다.
비행기는 정시에 제주공항에 도착했고 호텔버스로 약 30분을 달려서 숙소에 도착,
대강 정리하고 한림읍으로 가서 중국집에서 점심 먹었는데 참 괜찮은 집이었다.
에어컨까지 가동되어 시원했는데,
최는 계속 ‘냄새.. 냄새...’ 하면서 툴툴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멀쩡했는데...
식사 후, 시장에서 저녁거리 먹거리를 사서 협제로 돌아와 근처에 있는협제굴 관람을 했다.
시원해서 나오기 싫은 곳이었다. 히히덕거리며 사진 찍고 바다 구경도 하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다 좋았는데.. 에어컨, 애구 에어컨.. 그놈의 에어컨이 비정상이었다.
저녁에 1992년 총회를 열어 최를 차기회장으로 선출했다.
천은 계속 에어컨, 에어컨하며 툴툴거렸고 이에 최가
“너그 집에 에어컨 있나?”
라고 물었다.
“없다...그래도 돈 내고 들어온 집인데!”
여자들 방은 춥다고 했다. 망할 놈의 에어컨 중국집에도 수퍼에도 있었는데...
7월 24일
오늘은 하루 종일 한라산 <漢拏山國立公園>을 오르고 내리고 해야 한다.
<버스정류장>
<영실휴게소 가는 길>
제주시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아침 먹고 김밥 사들고 영실로(원래 어리목을 예정하였으나 변경)
버스를 내려 매표소로 입구에서 슬리퍼로 올라가려는 등산객과
그런 신발로는 못 올라간다며 시비하는 매표원과 그 옆에 앉아 있는 신발장수를 보고 개탄했다.
<영실 기암>
올라가는 길은 그런 대로 괜찮았는데 영실 기암을 쳐다보며 어느 정도 오르다 보니
한라산의 장대한 평지(선작지왓)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 때.. “한라산은 평원이다!!” 하는 큰 소리가 들렸는데,
갑자기 눈앞이 확 트이니까 詩心이 우러나 한 수 지으려다가.. 능력이 부치자 포기하고 일차원적으로 외친..
孤峰의 소리였다.
정상아래 평원의 샘물은 정말 기가 막혔다. 이가 시리고 머리를 적시니 얼얼...
조금 더 가니 윗세오름,
여기서 점심 먹고 기세 좋게 출발했으나..
눈앞의 지름길을 두고 백록담 주위를 오른 쪽으로 돌고 돌아서(이때 힘을 많이 소비) 걸으니
오르막 등산로가 나왔다. 여기서 마지막 약 200미터 정도의 거의 수직코스를 오르기 시작했는데...
<화살표가 있는 조금 검은 곳이 우리가 오른 곳이다>
아!.. 햇볕... 1,900高地의 한 여름 햇볕이여...
우리뿐 아니라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여기서 많은 고생을 했다.
벌겋게 익어 가는 종아리! 팔뚝! 햇빛 차단 크림을 준비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며
모두들 죽을 고생을 해서 올라갔다. 6살짜리도 올랐는데 뭐.
정상 근처의 길바닥에는 아주 작고 둥근 돌들이 깔려 있어서 여기저기서 미끄러졌는데,
孤峰도 거기에 끼어들었다.
내려오는 길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버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문 여사의 사투..... 그러나 모두 승리하여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승리의 기념으로 팥빙수 2,500원 짜리를 먹었는데 제주에서 먹은 것 중 최악이었다.
버스로 한림으로 가서 잘 먹으려고 했는데...
냉면 실패, 삼겹살 실패... 육개장 시켜 먹고 있던 최는 뻐기면서 말했다.
“글쎄 음식 갖고 모험하지 마!..”
제주의 삼겹살은 허연 기름덩어리 그 자체였고 냉면은 無味였다.
탈진상태인 우리들의 비위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군것질거리 사 가지고 택시로 협제의 호텔로 가서 피곤한 몸을 뉘였다.
7월 25일
최는 종씨 성을 가진 최남단 마라도 <馬羅島>를 꼭 가야 한다고 전부터 별렀다.
그러나 정보에 어두운 우리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후퇴해야만 했고,
대신 괜찮은 음식점을 찾은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마라도의 일정을 다음날로 연기하고 서귀포 西歸浦市로 갔다.
정방폭포, 천제연 폭포를 구경하고 맛없는 냉면을 먹고 안덕계곡으로 푸짐히 들고 갔으나...
그곳은 육지의 계곡과는 너무나 달라 겉모습만 보고 입장료까지 지불하고 들어간 우리들을 실망에 빠지게 했다.
그래서 처음에 별거 없다고 지나쳤던 중문단지 <中文觀光團地>로 가서
천지연 폭포에서 발과 종아리를 담그면서 이 번 여행 중 가장 여유롭고 한가한 30분을 보냈다.
이 덕택에 벌겋게 익어 터질 것 같던 종아리와 익은 팔도 완전히 식혔다(계속 부어 올라 모두 걱정했음 화상은 그 부위를 처음부터 확실하게 식혀야 하는 건데...)
모슬포 摹瑟浦로 가서 저녁을 먹고 들어가기로 하여
그 곳 중국집에서 고량주와 함께 탕수육, 간짜장, 볶음밥을 먹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최와 천은 모슬포의 한 다방에서 작은 것과 큰 것을 해결하고 나머지는 밖에서 각각 자기 할 일들을 하였다.
숙소에 돌아와 방을 바꿨으나 에어컨은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알고 보니 가스를 넣지 않은 것)
7월 26일
-국토의 ‘최남단’- 마라도
다음 날 孤峰 부부의 희생정신으로 우리는 마라도를 갈 수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표를 사러 갔음)
모슬포는 음식이 깔끔하고 비싸지도 않아 인상적인 곳이었다. 아침도 잘 먹고 배에 올랐는데...
“앗! 멀미.......... 조금만 오래갔더라면 모두...&%^)(G((Y^%I@$$$%#..........”
마라도는 조용했다. 왁자지껄 떠들며 배타고 온 사람들 다 어디 갔는지 대개가 낚시를 온 사람들이고
우리처럼 완전히 하루를 바쳐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드문 것 같았다.
여기서 그냥 하룻밤 머물 수 있었으면..
돌아오는 배는 대만원이었다. 기다릴 때에는 한 대에 다 탈것 같지도 않았는데
막상 타고 보니 그 많은 사람들이 여유 있게 들어갔다.
갑판에 서서 바람을 쐬면서 오니 멀미도 없고 좋았다. 다리가 좀 아팠지만...
모슬포에서의 점심 역시 괜찮아서 우리들에게 모슬포는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디저트로 먹은 팥빙수의 맛까지 우리들을 감동시켰는데, 孤峰이 한마디 했다.
“2,500원 짜리보다 낫다!!”
버스를 타고 삼방굴로...
아들에 미련 있는 최, 이 부부는 올라갔고, 천 부부는 남아서 체력 조절을 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호텔 앞 바다에 뛰어 들었다.
어찌 제주의 바닷물 맛도 모르고 돌아간단 말인가?
천씨 부부가 뛰어들자 이, 최도 들어왔는데 최는 10년 만에 바닷물에 들어왔다고 했다.
마지막 제주에서의 저녁을 위해 우리는 ‘모험’을 피하기로 하고 한림읍의 그 중국집으로 가기로 늦게 결정,
시간이 다된 집에 우리가 먹을 음식의 양으로 승부.. 사정사정 해서 들어가서 잘 먹었다.
7월 27일 마지막 날
아침에 일어나 TV를 켜니 황영조가 일본 선수와 선두 다툼을 하고 있었다.
곧 선두에 나서서 우리들을 흥분시키더니 기어이 1위로 골인... 전 국민을 열광시켰다.
공항으로 먼저 가서 짐을 보관하고 성산포로 갔으나 별로였다.
광순 부부만 끝까지 올라가서 사진만 잔뜩 찍어왔다
시간 때문에 만장굴 萬丈窟을 포기하고 성산포 입구의 고성에서 맛없는 보신탕 먹고 공항으로 여유 있게 와서 얼쩡거리다가 비행기 탔다. 비행기 안에서 최와 이는 항상 콜라, 천은 물이었다. 대구 도착 후 공항 근처에서 저녁 먹고 우리는 헤어지고 말았다.
- 제주 기록 遊壯
8월 임시모임 <여기부터 孤峰 기록>
일시 : `92. 8. 18 ~ 19
장소 : 울산
참석 : 전원
8월 10일 천씨 단독 울산 내방 후, 처자식 이끌고 계곡으로 가기로 하였으나... 계속되는 우천으로 거사 실패. 그냥 울산 방문, 집에서 빈둥대다 다음날 극장 한 프로,
주차장에서 小河의 완벽한 신발 끈 작전으로 1000원 지폐 획득,
조씨는 비슷탈로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학교에 갔음.
12월 월례회. 망년회
일시 : `92. 12. 25~26
장소 : 진보 광순 집
참석 : 전원, 권우택 권희진
의제 : 신회원 가입, 동계 수련회, 적금 등
의결 : 권우택, 권희진 입회 결정!!!
동계 수련회 `93년 1월 27~29일 소백산 결정, 매월 적금 3만 원 정도 들기로 합의,
신년부터, 차기 월례회부터 각 집 돌아가며 열기로.
25일 3시경 집합 잠시 노닥거리다가 입암 약수터 닭불고기 집에서 회합.
광순 집 1박 후, 11시경 해산.
* 그 동안 진보의 다른 선생들과의 형평성이니
너무 설쳐대면 좋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미뤄져왔던 신 회원의 문제가 여러 가지 여건의 성숙으로,
또 두 사람의 일관된 입회 의지로 이루어지게 되어 가람뫼의 제 2기가 출범되었다.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