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힌야지 05-10-14 15:31
애님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만경관 저녁 갯벌과 거기 내려앉는 도요새들의 이야기를 쓰던 새벽 여관방에서
나는 한 자루의 연필과 더불어,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의 절벽 앞에서 몸을 떨었다.
어두워지는 갯벌 너머에서 생명은 풍문이거나 환영이었고, 나는 그 어두운 갯벌에 교두보를 박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 것도 만질 수 없었다.
아무 곳에도 닿을 수 없는 내 몸이 갯벌의 이쪽에 주저앉아 있었다.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 아무것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은 기어코 감미로운 것이다. 라고 나는 써야하는가.
사랑이여, 이 문장은 그대가 써다오. - 52살의 여름에 김훈은 겨우 쓴다.
-김훈 에세이,『자전거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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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님, 혹자는 문장의 지나친 현란함 때문에 이 작가가 싫다고도 하더군요.
그러나 <어두워지는 갯벌 너머의 생명을 풍문이나 환영>으로 느껴본 영혼의 특권이 아닐는지요.
<갈 수 없는 길을 동경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으로 애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애님만의 문장을 만들어오는 여행이기를….
첫댓글 저도 '자전거여행'을 읽고 밑줄을 그은 데가 많았는데요.
애 05-10-14 22:24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저도 읽고 밑줄을 그은 데가 얼마나 많은지요.
참 유려한 문장이라고 생각하고 감명깊게 읽었어요.
옮겨와 인용을 해주셨군요.
늘 편안한 나날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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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사람
김언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람을 알고 있다
죽지 않을 만큼 땅이 파이고 피가 고이고
땅바닥은 뚜렷이 그의 얼굴을 알아본다
죽지 않을 만큼 사람들은 놀라고
괴로워하고 실컷 잊을 테지만,
지상에서 지하로 그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 그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가 떨어진 자리로부터 땅바닥을 치고
달아난 소문이 끝날 즈음 어디선가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그보다 더
무거운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떨어졌다
때가 되면 쏟아지는 비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한가 싶은 땅바닥엔 그가 남기고 간
얼룩과 행인들의 발냄새 간간이 보도블록을 비집고
솟은 엷은 풀냄새에 섞여 그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다
올려다보면 무심히 발 씻는 소리 내려와 쌓인다
그는 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