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실은 항상 시대의 모순을 비켜간 사람들이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서글픔이 때로 진정한 자기성취까지도 외면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걷는 이 길이, 풀 섶에 맺힌 이슬방울이 내가 미리 씻어야할 맑은 눈물방울만 같습니다.
새로운 감수성을 담은 시대가 선포되고 과거와 함께 현재의 모순까지 묻혀져가는 오늘의 현실에 맞서서 진정한 인간적 고뇌를 형상화하는 작업보다 우리를 힘있게 지탱해주는 가치는 없다고 믿습니다.
슬픔을 만나러 가는 길을 서둘러 걷는 이들은 없습니다. 비록 역사의 한 굽이에 스며든 슬픔일지라도 자칫 날선 겨울바람처럼 가슴을 애일지 모르기에 더더욱 가슴을 여미며 조심스레 여정을 떠나는 길이 있습니다.
천년이란 세월을 담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그러나 진도는 누구에게나 천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절로 동화시키는 곳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던 고도의 유적과 명승이 어우러진 곳도 아니요 문명의 시발을 찾는 열쇠가 숨겨진 곳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진도에 가면 누구나 한 역사의 풍향을 감지하게 됩니다. 구르는 돌멩이와 풀잎과 수북하니 쏟아지는 가을밤 달빛을 따라가 보면 문득 너무 오래 잊혀졌던 한 인물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관습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 저를 그리워하지 않아, 나는 이미 청년의 탐탐한 눈빛을 무망한 시간의 제단에 바친 지 너무도 오래 그래도 당신은 진정한 사내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아무런 굴욕도, 은밀한 내약도 휘황한 능력도 앞세우지 않고 굵은 동아줄 가슴에 감아 한 판 상씨름을 겨누고도 더운 김을 흘리지 않는 그런 사내를 한 번 소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이 바로 배중손. 삼별초의 많은 장수들 중에 유독 왜 배중손인가?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장엄한 비극을 예감한 시대에 스스로 창조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들 누가 시비를 걸진 않겠지요. 적어도 배중손을 오늘 논한다면 더더욱 말입니다.
다급히 무엇을 챙겨 가려는 이들에겐 너무 멀어서 그 노래가락 끝자락이 가물하니 휘돌아오는 느낌으로 찾아 나설 때 진도는 바다가운데서 홀연히 떠오른다고 합니다. 괜스런 신명에 취해 자랑거리만 가지고 살다보니 헐렁한 신세와 닳아진 꿈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처지도 잠시 잊었습니다.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바다포구가 왼편으로 길게 드리워진 마을. 수년 전에 이 마을 입구 소나무 밑에 새로 사당이 중건되었습니다. 동네사람들도 그저 시큰둥하니 관에서 계획짜 하는 일이니 하여 애써 토를 달며 집착을 보인 사당은 아닌 듯 합니다.
중건이란 다시 보수를 제대로 했다는 것인데 모든 사업이, 예를 들어 중창불사라던가 교회를 높이 올린다던가 할라치면 본디 마음자리는 한쪽으로 밀려나고 돈의 위력이 처마를 떠 바치게 마련입니다. 여기가 배중손장군 사당입니다. 힘들여 모은 팔뚝과 오른쪽 15도 각의 상향시선이 웬지 어색해 보이면서도 ‘아아 여기에도 세월과 바람이 더 오래 깃들어 만나야 하겠구나’ 첫 인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를 기리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단지 이곳 궁벽한 바닷가 마을 당골(무당)과 주민이 지은 할아버지당 안에 ‘임경업’과 ‘최영’의 자리를 물리치고 장군상으로 앉아 있었다는 구전이 남아있지요. 그는 어쨌든 패장이었습니다. 그를 패장으로 규정한 동안 이 나라도 역시 사대주의에 물든 패전국과 식민지국가의 사관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그를 다시 역사의 격랑을 헤친 인물로 끌어 올린 이들은 바로 피폐한 시대를 죽창처럼 찔러 일어난 농민들이었습니다. 피끓는 섬마을 출신의 사병장교(아직도 강화도 길상면 선두리와 진도 굴포리 출신 주장이 서로 제기되는 실정)에 불과했던 그를 역사의 전면으로 일으켜 세운 이들도 농민과 유민과 어촌사람들이었듯이.
그보다 더 앞서 이 부근 물길을 바로 잡았던 이웃 완도의 장보고가 겹쳐 어리기도 합니다. 그도 오랜 전투의 항해 끝에 하나의 해상왕국을 건설하려 했지만 외국이 아닌 동족의 충복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배중손이 해상왕 장보고보다 더 뛰어난 장수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늑대의 성깔로 수많은 왕족, 귀족들을 단칼에 베어버린 잔인한 뱃놈 출신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민족의 정신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비굴한 항복으로 일신의 안위와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금갑포를 지나 꿈속같은 이상향을 그리는 ‘이어도사나’ 붉은오름에 그 또한 오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김통정과 마지막 70전사의 결사항전에 앞서 배중손은 이곳 굴포리에서 왜곡되지 않을 역사를 새겨놓았습니다.
나를 구원할 절대적 타자를 갈구하는 시대가 악을 낳고 전쟁을 낳았습니다. 히틀러나 히로히토와 모든 정복전쟁의 주인공들은 인류역사를 잠시 불행한 페이지로 장식하는데 앞장섰습니다. 하나의 진리를 품은 표상을 그리워할 때 독재와 이단이 한 세계를 지배하게 됩니다. 배중손은 또 하나의 진리이기도 했지만 또 하나의 악몽을 준비한 사내였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수만명의 백성 진도민중들은 수십년을 허허로운 중국 벌판에서 전쟁포로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피로 시작된 팔십년대가 아무런 확답도 없이 저물어갈 때 우리는 100년 전 호남에서 전국으로 불타올랐던 동학의 반외세 자주정신이 어디에 뿌리를 두었던가 낡은 역사의 책장을 뒤적이다 문득 포효의 눈을 부릅떠 아직도 바다 밖을 노려보는 한 사내와 만나게 됩니다.
불과 일년을 못 버티고 몽고와 고려괴뢰정부에 의해 더운 피를 진도에 쏟아냈던 거대한 잠룡 배중손을 만나 농민세상의 깃발에 다시 새겼습니다. 여의도는 바로 그들의 출전지요 집결지이며 성도가 되었습니다. 강화에서 진도로 제주에서 다시 여의도로.
이게 진도농민회의 예정된 한 역사였습니다. 그저 한 시대의 불우한 외침에 머무는 단체가 아니라 가장 슬픔의 밑바닥에 제 어미와 어버이를 기꺼이 누이고서 제 모습과 제 길을 똑바로 찾아낸 이들이 이곳 진도의 농민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변방의 노래만을 불러왔는지도 모릅니다.
마음 길이 괜스레 흔들렸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역사의 길을 더듬다 보면 제 격정에 가끔 책장을 접곤 하지 않습니까? 다시 써야 할 역사의 길목에서도 우선 한탄과 자괴로 한동안 몸을 추슬러야 합니다. 한 가을 밤 깊은 호반의 사유로 떠오르는 섬 하나를 우뚝 딛고 선 한 사내와 만나기 위해서는 더더욱 말입니다.
오늘도 물길은 한라산을 향해 흰 포말을 뿜으며 목포발 훼리호와 화물선들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재작년엔 온 국민이 이곳 물 밑의 보물찾기에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굴포리 앞바다 죽도라는 섬이야기는 처음부터 어색한 극본에 불과했다고 사람들은 금새 기억속에서 지워버렸습니다.
시가 허투루하니 쓰여질 때 나는 배중손을 떠 올렸습니다. 내 그리운 사내 배중손. 제대로 된 적을 만들 줄 알았던 사내. 제 운명을 스스로 거역하며 불우한 신화가 되고자 한 사람. 한 때는 역사의 바깥으로 튕겨나갈 정도로 제 이름과 운명에 가혹했던 이의 진정한 꿈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오래 동안 너무 사내답지 못한 것에 화가 치밀고 부끄러워질 때 주술을 외우듯 찾았 던 이름 배중손이 왜 이리 손에 잡히지 않는가?
‘망할 자는 육지로 나간자요 살아남을 자는 삼별초를 따라 바다로 나가는 자’라고 호언하던 그 사내. 오늘 스치는 바닷바람 어디에도 그의 끊어 담은 숨결을 찾을 길은 없다. 지금도 바다는 기회의 푸른 밭으로 넘실대지만 진도는 닻줄이 풀린 채 빙글거리고 있다.
그의 팔뚝은 결연하니 천만근을 들어올릴 듯 굴포리 앞바다를 한눈에 삼켜 안아 일어서는데 나는 무엇에 오늘을 주저하며 중년의 삶을 이토록 황폐하니 이끌어왔던가?
진정한 슬픔은 거대한 꿈을 가졌던 이들에의 경배와 위로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저 회피와 주저로 일관한 협량한 가슴에는 슬픔이 아니라 단지 애상한 바람이 스칠 뿐이다.
굴포리의 가을은 먼저 바람이 앞장을 선다. 새로 단장한 사당은 삼별초에 대한 선명한 복원을 약속하기 보다는 너무 서둘러 무대 위에 올려놓아 서툰 연기와 줄거리에 관객들이 오히려 조바심을 하는 형국은 아닌가.
아직 초상화 한 점 없는 사당은 호위장으로 푸른 소나무가 우뚝 서 있을 뿐이다. 굴포리는 아름다운 포구가 아니다. 비릿한 갯내음에 취한 어부가 화랑게 걸음새를 하며 갯펄을 넘나드는 조선소와 개량지붕들을 가둔 브록크 담이 완강하니 옛 시대와 절별하고 있다.
이곳에서 한 고개를 넘어 자리한 남도석성은 둘레가 160미터에 높이 5미터의 작고 아담한 옹성에 불과하지만 성안 돌담집 마당에서 수군만호가 자리했던 비석거리를 걷노라면 문득 자신이 철립과 전포를 입은 수군이 군호를 품은 채 교대 경비를 나서는 듯한 환상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평화를 사랑했지만, 평등을 갈구했지만 변방의 방패막이로 생을 마쳐야 했던 옛 젊은이들의 한이 흰 당목천으로 풀려나는 가을하늘 구름과 만나기도 합니다.
배중손은 여기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곳으로 오고자 했던 마음이야 아니 이곳을 벗어나 함께 ‘붉은 오름’까지 오르고 싶었던 간절한 열망을 그는 굴포리 앞바다에서 접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겨울에도 터질 듯이 핏빛으로 타오르는 동백꽃처럼 진도의 산과 바다를 지키고 있습니다.
싸움이 곧 삶이고 사랑이며 내일의 아침을 여는 고단한 행군임을 누구보다 더 절실히 깨달아 사는 이들, 진도의 농민들은 오늘 너무도 공허한 외침 앞에 서 있습니다. 애국의 길이 가로 막히고 생존의 길도 마구 허물어져 가는 이 시대를 앞장서 구원할 깃발과 해답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토록 힘을 다해 지켜왔던 쌀농사도 이제는 한숨과 절망의 씨앗으로 변하려 합니다. 농민은 그저 늙어 죽어야만 농촌문제가 해결된다는 정부관리들의 안이한 정책자세로 이 땅은 이미 병들어 썩고 있습니다. 농촌에 사는 일이 죄가 된지도 오래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는 가장 변방의 땅 진도에서 태어나 다시 진도를 찾은 배중손을 떠 올립니다.
고뇌의 흔적은 몇 겹의 주름처럼 용장리 산성에 남았지만 그 기상은 미처 재를 넘지 못해 의신면 진설리 말무덤과 전설로 남기고, 오직 화해할 수 있는 것은 책임있는 죽음이지 시대의 한계가 아니었음을 분명하니 가르쳐 준 곳 굴포리에서 나는 당신이 처음 진도에서 만났던 가을을 떠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