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은 없다
이정림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절에 가서 108배를 올린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 무릎이 벗겨질 정도로 절을 올리면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었습니까?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게 되던가요?
당신을 생각하면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재치 있고 발랄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 당신이 사랑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당신이 마음을 잡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그런 내게 오늘 아침 당신이 띄운 편지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군요.
“간밤에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제 곁에 누워 제 눈물을 닦아 주시며 등을 어루만져 주셨 습니다.
저는 꿈인데도 아픈 마음을 다 말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꿈에까지 오셔서 저를 안아 주시고 눈물을 닦아 주신 선생님!
생시에도 목이 멥니다.”
이 글을 읽고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당신이 지금 얼마나 힘들고 마음이 아플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까지 당신을 위해 해 줄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니, 해 줄 말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런 때 그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영원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신도 당신의 사랑이 영원하리라 믿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이 어느 날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 때문에’라는 빌미를 붙이고 싶었겠지요. 그 ‘누구’가 없었더라면 당신의 사랑은 영원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는 존재가 없었어도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은 없는 법이랍니다. ‘영원’이라는 말 자체가 아름다운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것은 조금씩 변해 가게 마련입니다. 냇가에 흐르는 물도 오늘의 물은 어제의 물이 아닙니다. 길가에 뒹구는 돌멩이도 어제의 그 모습에서 조금은 변해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그렇듯 겉으로는 한결같이 보이지만 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음을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을 따름이지요.
당신이 한 남자를 알면서 맛보았던 그 사랑의 기쁨도 처음이나 이제나 한결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설령 그 기쁨의 농도가 한결같지 않다고 하여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한결같지 않다는 그 변화가 때로는 우리를 구제해 줄 수도 있으니까요. 기쁨도 한결같을 수 없다면 괴로움도 한결같을 수 없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사별(死別)의 아픔도, 그 사별보다 더욱 괴로운 배신의 아픔도 잊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이렇듯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써 부정한 끝에 얻어진 결과가 무엇입니까. 허망(虛妄)함,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요? 당신이 지금 괴로워하는 것은 어쩌면 배신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허망함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허망함이란 가식(假飾)의 막다른 골목에서 얼굴을 내미는 진실의 전령사와도 같습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을 때 진실은 정면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 시기가 언제이든 우리에게는 반드시 ‘영원’이라는 그 아름다운 허상에서 깨어날 날이 옵니다. 그것이 어디 사랑뿐이겠습니까. 영원할 것 같은 젊음도, 영원할 것 같은 명예도, 영원할 것 같은 건강도, 언젠가는 그 ‘영원’이라는 수식어를 떼어 버릴 때가 오겠지요. 우리는 그날에야 비로소 허상에서 깨어나 진실의 실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애써 진실을 피하려 들지는 맙시다. 부정해도 찾아오는 진실이라면, 마음 비우고 선선히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영원한 행복이 없다면 이만한 행복도 감사하다고, 영원한 사랑이 없다면 이만한 사랑도 다행이지 않느냐고. 너무 불만스러운 표정일랑 짓지 마세요. ‘이만한’이라는 정도에 성이 차지 않는다면, 방법은 또 있으니까요. 그것은 그 ‘이만한’이라는 것도 깨끗이 포기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순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모든 괴로움을 접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날, 당신은 상처로 인해 작아진 모습이 아니라 진실과 마주 할 수 있는 성숙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 다기(茶器)를 닦고 향이 좋은 녹차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우리 다시 만나게 되는 날, 영원하지 않아 오히려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이정림 약력
<수필문예>로 등단(1974).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1976). *수필집 ≪당신의 의자≫ ≪이정림, 그의 수필과 인연들≫외 2권. *평론집 ≪한국수필평론≫ 외 1권. *이론서 ≪세상 모든 글쓰기-수필쓰기 개정증보판≫ ≪이정림의 수필 특강≫ 외 1권. *수필선집 ≪사직동 그 집≫ 외 2권. *수상 : 현대수필문학상, 신곡문학상본상, 조연현문학상, 조경희수필문학상본상, 올해의 수필인 상, 김태길수필문학상. (현재) 수필전문지 계간 <에세이21> 발행인 겸 편집인.
이메일 : sanyoungjae@hanmail.net
첫댓글 <에세이 21> 발행인의 작품입니다. 아주 까다로운 분이셔요. 가끔 제가 추천해드리기도 하는데
작가들의 작품에서 오류를 쪽집게처럼 뽑아내셔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