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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림 산 악 회 산 행(여행) 안 내
2015년 8월 경기 여주 신륵사 정기 산행(여행)
♣ 산 행 일 : 2015년 8월 11일 둘째 화요일
♣ 산 행 지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신륵사
♣ 산 행 코 스 : 신륵사 - 명성황후생가 - 세종대왕릉
♣ 출 발 장 소 : 봉무동 이스아 폴리스 7: 30 정각출발
불로대구은행, 공항 7: 35
아 양 교 7: 40
동 구 청 7: 45
큰 고 개 7: 50
강남약국옆 주유소 8: 00 정각 출 발
♣경 유 지 :
네 비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 회 비 : 25,000원 (아침, 점심제공,)
♣ 준 비 물 : 등산장비일체,우의, 여벌옷, 신분증,장갑,
찬물,각자 기호품,비상금,등.
* 산행코스는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으니 양해바랍니다
♣ 신청 및 연락 : 회 장 : 이 외 돌 010 - 3814 - 1303.
등 반 대 장 : 김 동 만 010 - 8560 - 5274.
산 행 안 내 : 이 인 호 010 - 4264 - 3326.
총 무 : 서 무 원 010 - 4520 - 3041.
☞ 회비 입금 선착순 ☞ 신청순 :
산행(여행)시 유의사항
1. 산행중 자신의 실수로 발생하는 사고에 대해서
송림산악회는 민.형사상의 책임을지지 않습니다.
2. 시간을 꼭 지켜서 많은 회원님들이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지 말아야합니다. (정시출발)
3. 혼자만 앞서 가기 보다는 힘들어하는 회원를 도와주며 함께 하는 산행이 더 즐겁습니다.
4. 산행시 개인행동을 자제하고 등반대장/산행리더 앞에는 앞서 가지 말아야 합니다.
5. 안전한 산행을 위하여 산행 중 음주, 흡연은 자제 합니다.
6. 등반대장/산행리더의 지시/안내에 잘 따라야 합니다.
7. 차량이동중에 음주가무는 자제한다.
8.추후 자세한 일정(산행코스,시간등)은 날씨등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 신청 하실분은 댓글을 달아주시거나 위 연락처로 연락 바랍니다, ♣
경기도 가볼만한곳,여주 신륵사
여주는 세종대왕릉과 목아불교박물관,명성왕후생가,
여주 프리미엄아울렛등 가볼만한곳이 많지만
여주의 대명사라 일컫는 신륵사가 단연 으뜸이며
그곳으로 가는길은 화사하면서 싱그러운 봄의 향으로 가득했습니다.
벚꽃,개나리,진달래,살구꽃,앵두꽃,새하얀 목련까지
마중 나와 있으니 그럴만합니다.
작년 말에 서울과 경기도 가볼만한곳 목록을 정리하다
신륵사에 풍경에 한참이나 머물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진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저를 이곳으로 향하게 했고
손꼽아 기다려왔습니다.
여주대교에 인근한 나즈막한 봉미산자락에 자리한 신륵사는
남한강자락의 여강이 유유히 흐르는 풍경이 장관을 이루는지라
관광객들의 벌걸음이 끊이지 않는곳이지요
이곳의 일출풍경을 으뜸으로 꼽지만 겨울철 안개로 피어난 상고대는
진풍경을 이루고 겨울철 사진가들이 장사진을 이루는 곳이기도합니다.
여주 강변의 사찰 신륵사神勒寺
도자기생산지로 유명한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의 봉미산 자락에는 우리나라의
사찰 중에서 강변에 조성된 천년 고찰로는 유일한 신륵사神勒寺가 자리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찰들이 산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신륵사가 충주에서 한양을
뱃길로 연결하는 초입인 여주 강변에 조성 되어진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을 것이다.
신륵사의 옷깃을 스치는 듯 흐르는 강을 여강驪江이라 한다.
검은 말을 닮은 강江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여강은 길고 먼 남한강의 물길 중 여주 일대를
감아 도는 구간을 따로 부르는 이름이다. 신륵사의 중수비문에 쓰여진 내용에 따르면 나옹선사와 목은 이색의 부친인 한산군 이곡이 이곳을 둘러 보다가 남한강의 푸른 물과 절벽이 어우러진
사찰의 풍광이 신묘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말했다는 사연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름이 신륵사라 하고 미국 CNN 방송도 신륵사를 한국의 아름다운 사찰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신륵사가 신라 진평왕 시절 원효元曉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뒷받침할 만한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신륵사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성종 4년(1473)에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이 여주로 옮겨 오면서 부터 신륵사가 영릉英陵의 원찰이 되고 그 이름도 보은사報恩寺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원찰의 의미가 쇠퇴하게 됨에 따라 본래의 이름인 신륵사로 복원되고 있다.
신륵사가 다른 사찰들과 달리 산속이 아닌 남한강변에 조성된 주요한 이유는 바로 물이 지니고
있는 도道의 상징성에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바람이나 구름도 그렇지만 물은 어떠한
장애물과 마주친다 하더라도 모든 것에 순응하고 모든 것을 받아 들인다.
현실생활 속에서 어느 특정인을 ‘물’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것이 그에게 욕이 되어
버릴 수 있지만 철학적으로는 그가 자신의 아상相我을 훌쩍 벗어 던져 버린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본다면 사사무애事事無涯의 성性을 지니고 있는 물의 상징성을 대강이나마 그려 볼 수 있다.
물은 푸른 하늘에 뭉개 구름으로 머무르다가 인연이 닿으면 비가 되어 내리기도 하고 산과 계곡을 따라 흘러 내려가다 폭포가 되기도 하며 강물이 되었다가 결국 바다와 하나가 된다. 예전의 수행자들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모든 것에 순응하는 자유 자재한 경지를 수행의 최종 목표로 삼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진리를 체화한다는 것이 어디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인가.
솔가지 감아도는
텅 빈 바람소리,
외딴 산길 홀로 가는 나그네
남녁 靑山 눈에 어려 떠난 길이 외로웁다.
그리운 靑山은
다가가면 멀어지고
강 건너 멀어진 靑山은
손짓하며 다시 오라 하는데.
산 아래 푸른 江은 멀리 돌아 나가,
나룻터도 가물하다.
먹구름 몰려와
흩뿌리는 비, 갈 길 재촉하고
종종 대는 발걸음 돌뿌리에 부딪친다.
빗물 되어 떨어지는 외로움
뺨 위를 흘러도,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강은 삼백리
구비치며 돌아가고
산과 구름도 춤을 추며 함께 흐르는데
길 잃은 나그네의 무거운 발걸음만
산길 홀로 외로워 타박거린다.
-자작시, 靑山 –
신륵사가 강변에 조성되어진 다른 이유로는 산속에 자리한 사찰이나 암자에서 깨우침을 체득하고자 오랜 기간 동안 치열하게 공부하던 수행자들이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개체가 본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내면으로 직관하고 나면 대개의 경우 바다를 찿아가 그 동안의 긴장감을 풀어내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찿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것을 보림保臨이라고 하며 신륵사가 바다가 없는 중부 내륙지역의 보림터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물이란 단순한 물 이상의 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물은 도道라고 일컬어지는 절대적 존재함의 상징성과 색성色性을 그 속에 모두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신륵사를 창건한 고승은 이곳에서 머무르는 수행자들이 여주 강변을 따라 흐르는 남한강물을 바라보며 그러한 도道를 통각하기를 발원했을 것이다.
고려 우왕 2년 (1376)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시기하는 사람들의 모함을 받고 밀양으로 가다가 이곳 신륵사에 들렸던 나옹선사(1320-1376)는 이곳에서 갑작스럽게 생을 마치게 된다. 그 나옹선사가 남겼다는 아름다운 선시禪詩를 읽고 있노라면 물. 바람 강과 산 그리고 구름의 철학적인 의미를 되 새겨 볼 수 있다. 시공時空을 넘나들며 수 맣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가장 뛰어난 선시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 가라 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 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나옹선사-
나옹선사가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 가라 하네 라는 구절과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라는 시의 결구를 통하여 물. 바람. 구름. 그리고 강을 깨우침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나옹선사. 1320년 경북 영덕에서 출생했으며 20세 되던 해 다정했던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고 경북 문경의 공덕산 묘적암에서 출가하여 요연了然스님으로 부터 받은 법명이 혜근惠勤이며 속성은 아牙씨이고 이름은 원혜元惠 이며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출가하고 4년이 지났을 무렵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서 득도하고1347년에 원나라로 건너가 인도인 지공指空스님으로 부터 법을 전해 받았고 1358년에 고려로 돌아와 고려에서 중국 임제종의 법맥을 이어간다. 맨 처음 회암사에서 득도한 후 대중에게 알렸다는 그의 게송을 먼저 읽어보자.
선불장選佛場 안에 고요히 앉아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라.
보고 듣는 것 외에 다른 물건 아니요,
그것이 본래 나의 주인이다.
나옹스님이 8세가 되던 해에 당시 원나라에서 고려를 찿아온 지공指空스님으로 부터 신도에게 주는 보살 계첩을 받았었는데 그 한번의 만남이 니중에 인도의 불법을 전해 주고 전해 받는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까지 다시 이어지고 있으니 인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중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중국에 머물던 인도 스님인 지공스님으로 부터 자신의 뒤를 잇는 인도의 109대 조사로 인가 받았고 임제종의 종통을 이어 일문을 이루고 있었던 중국 평산平山 처림處林선사로 부터는 가사袈裟와 불자拂子를 전법의 신표로 전해받아 임제종의 법통을 인가 받으니 나옹스님은 인도와 중국의 조사선맥祖師禪脈을 한꺼번에 이어가게 된다.
이로서 나옹스님의 이름은 중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원 순제는 나옹스님으로 하여금 대도大都 광제사廣濟寺에서 개당 설법을 하게 하고 금란가사와 페백을 내리고 있다.
산과 물과 대지는
눈 앞에 꽃이다.
자성이 본래 청정한 줄
알고서 보니
보이는 것 모두가
진리요 붓다로구나.
-나옹스님이 처림處林선사에게 내 보인 게송이라 전함-
공민왕은 원나라에서 돌아온 나옹스님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왕사로 임명했으며 왕사의 자격으로 송광사松廣寺에 주석하게 하지만 나옹스님은 스승인 지공指空스님이 열반하면서 정골사리 및 가사를 자신에게 남기자 그 유지를 받들기 위하여 스승과의 인연이 살아 숨쉬는 양주의 회암사로 돌아간다. 나옹스님은 자신의 스승인 지공指空이 고려에 머무를 당시 양주의 회암사 터가 자신의 조국인 인도의 나란다사와 비슷하다고 말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공민왕 21년(1372)년 부터 회암사에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실현시키고 있다.
모르면 산이나 강이
경계가 되고
깨치고 나면 모든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네.
무명과 깨우침이란 누구의 잠꼬대인가?
닭이 아침마다 새벽을 알리는구나.
- 나옹懶翁스님이 지공指空스님에게 올린 게송이라 전함-
1376년에 이 불사가 마무리 되고 그 해 4월 초파일에 열린 낙성회에 한양과 인근의 지방 사람들이 구름처럼 회암사를 찿아 왔고 나옹스님의 위상이 급격하게 상승하자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모함을 하였으며 왕실은 어쩔 수 없이 나옹스님을 경남 밀양의 영원사塋源寺라는 작은 사찰로 보내게 된다. 나옹스님은 영원사로 가는 도중에 제자들이 머무르고 있었던 신륵사에 들렸고 그곳에서 갑작스럽게 입적하시게 된 것이다. 세수 57세이니 지금으로 보면 본격적으로 활동하실 나이이다.
공민왕 사후에 목은 이색이 신륵사에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을 봉안 하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보물 230호인 대장각비가 세워졌고 우왕 5년 (1379)에는 각각 보물 228호,229호,231호로 지정되어 있는 나옹선사의 석종형 부도탑. 석종비. 석등과 함께 지금의 조사당祖師堂에 해당하는 진영당眞影堂이 조성되었다고 하며 현재 남아있는 조사당에는 나옹과 나옹의 제자인 무학無鶴대사 그리고 스승인 지공指空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다. 대장각비의 아래에는 전탑과 남한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강월헌江月軒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찿아가고 있으나 나옹선사의 석종형 부도탑은 조사당 뒷 편 언덕 위에 숨어 있어서 따로 물어 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릴 가능성이 크다.
조사당祖師堂 뒤의 언덕에 자리한 나옹스님의 사리탑은 석종을 엎어놓은 듯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다. 방형의 석단을 쌓고 그 위에 다시 작은 방형의 기단을 또 쌓았다. 석단의 사방에는 돌로 만든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붓다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이나 전북 김제 금산사 방등계단의 축소형처럼 느껴진다.이러한 형식은 나옹스님이 붓다로 부터 출발하여 이어진 법통을 지공指空스님으로부터 이어받아 인도의 109대 조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을 것이다.
신륵사의 주전으로는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며 중생의 극락왕생을 이끌어 주신다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이 있고 샤카모니 붓다가 아닌 아미타불을 주전에 모신 이유는 아마도 신륵사가 세종의 묘소인 영릉英陵을 지키는 원찰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원찰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당시의 사찰은 거의 모두 명부전冥府殿을 갖추고 있었다. 망자의 천도재를 명부전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찰에 명부전이 세워진 근거는 무엇인가. 죽음과 죽음 이후의 문제는 모든 종교의 가장
심중한 주제이다. 그 두렵고도 두려운 죽음과 죽음 이후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무슨 일인 듯 못 하겠는가. 명부전은 죽은 자를 위로하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워진 곳이다. 죽음에 관한 동북아 지역의 사상은 중국의 전통적인 음양오행 사상과 유교의 삼 년 거상제도 그리고 불교의 업 사상과 육도(천상,인간,아귀,아수라,축생,지옥) 윤회사상 등이 혼합되어 이루어 진 것으로서 붓다의 근본적인 가르침과는 차이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지수화풍으로 돌아가고 그 혼백인 중음신中陰神만 남게 되며 사후세계를 관장한다는 명부冥府가 중음신이 생전에 지은 업을 심판하고 육도의 한 곳으로 배속을 명하게 되는데 그 최종 판단이 죽음 후49일 사이에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걱정할 것이 별로 없지만 문제는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이다. 악업을 지은 사람은 반드시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 육도 중 지옥,아귀,축생으로 태어나게 된다고 하니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는가.흥미로운 것은 악업을 많이 지었다 하더라고 명부冥府의 징벌을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을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마련해 두었다는 사실이다.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후손들이 죽은 조상을 위하여 심사가 있는 잿날에 명부전에서 지극정성으로 재를 올려주면 그 공덕으로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다고 하였으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을 다 가졌더라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과 그 이후의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해 버리는 사상이다. 생전에 왕이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피 할 수 죽음에 대한 문제였으니 왕실은 원찰을 지정하여 죽은 왕의 극락왕생을 지속적으로 기도케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신륵사 명부전의 천도재를 바탕으로 윤회를 계속하고 있을 세종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불교의 윤회 사상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를 핵심교리로 삼고 있는 불교가 윤회를 기정 사실화 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교리를 부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윤회가 가능하려면 그 윤회를 따라가는 주체가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불교는 무아無我 없이는 한시도 존립할 수 없는 종교임으로 윤회는 부정되어야 마땅한 것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어느 종파는 무아無我가 어김없는 사실이지만 가아假我가 있다는 구차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불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이지만 사후구원을 약속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종교는 그 존립기반을 상실한다.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성공연기性空緣起 연기성공緣起性空사상이다. 공空과 무아無我, 그리고 연기緣起는 같은 개념임으로 팔만대장경을 네 글자로 줄이면 바로 무아연기無我緣起가 된다. 무아는 우리가 나 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우리의 육신이 연기하는 허상체라는 가르침이고 연기하기 때문에 무아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연기한다는 사상이다.
우리의 육신이 본래 무상한 허상체가 분명하다면 살아서도 무상한 이 허상체가 죽 어서 어디 가기라도 한다는 믿음이 과연 붓다의 근본 가르침에 합당한 것인지 곰곰히 성찰해 보아야 한다. 죽음이란 육신이라는 현상이 의식에게 부여하고 있는 한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고 육신은 완전히 해체되어 본래의 지.수.화.풍으로 돌아가지만 육신을 움직이는 주인공인 의식은 비물질로서 생사를 겪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절대적이고 순수한 본래의 상태로 녹아 들어 간다고 인도 뭄바이의 붓다 마하라지는 말 하고 있다.
따라서 제한적이며 상대적으로만 존재하는 육신 대신 육신으로 하여금 생명력을 가지게 하고
인식과 행위를 일으키는 순수한 의식을 나의 주체로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생사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나타난 모든 물리적 존재는 반드시 멸하는 것이 우주의 정칙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만 자신만은 예외가 되고 싶은 것 인지도 모른다. 육신을 자신의 주체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유일한 창구가 바로 종교이고 그런 연유에서 근본불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종교는 개체의 영원한 구원을 약속해주고 있다. 불교가 인도에서 쇠퇴한 연유가 여러가지 있겠지만 나는 그 주요한 이유가 초기승단에서의 붓다의 근본 가르침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사후구원을 약속해 주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번 돌아보자. 자기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자기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을 어찌 나의 실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영원하게 존재하려면 마땅히 현상적으로 부재해야 한다. 붓다의 가르침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여도 죽어서 반드시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해준다는 종교와 너는 본래 무아이고 육신은 연기하는 허상체임으로 육신은 죽는 것으로 끝이지만 너의 본성은 영원하다 라고 가르치는 알쏭달쏭한 종교를 놓고 평범한 일반인에게 자유로운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거의 대다수가 사후구원을 구체적으로 약속해 주는 종교를 택할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 두렵고도 두려운 죽음이라는 문제를 단번에 그것도 큰 비용이나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해결해 주겠다는데 무슨 주저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인도에서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었던 불교가 힌두교의 윤회론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지 않았나 싶은 것 이다.
극락보전앞에는 조선 성종 3년(1372)경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층석탑이 서 있고, 황해도에서 소량으로 생산되는 연질의 대리석으로 조성했다는 이 석탑의 기단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 새겨져 있는 용의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다.
또한 고려 전기에 조성되었다고 추정되는 전탑 (벽돌로 쌓아 올린 탑)은 아마도 나옹스님이 중국에서 보고 배워온 것을 기초로 세워진 듯 하고 나옹선사의 다비장이 있었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는 강변 커다란 바위 위의 삼층석탑과 강과 달을 바라보기 위하여 세워졌다는 강월헌江月軒은 사진 전문가들이 즐겨찿는 명소가 되어 있으며 드라마에 등장하기도 하고 주변의 강에는 황포 돗배까지 보이고 있어 옛 시절 정취에 잠시 빠져 볼 수 있다는 점은 신륵사에서만 누 려 볼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신륵사에서 보림하던 수행자들이 강월헌江月軒의 난간에 서서 하염없이 흐르는 남한강의 물을 바라보며 체화하려 했던 절대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 하는 나옹선사의 시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려 함 인가? 인도 뭄바이의 붓다 마하리지는 절대적 진리를 꺠우친다는 것은 우주의 생명력이자 모든 존재로 하여금 인식과 행위를 일으키고 동시에 인식과 행위 그 자체이면서 근원적으로는 자신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하는 절대적 존재함 자체가 나의 본래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내면으로 직관으로 통각하는 일이라고 말 하고 있다.
절대적 존재함 자체.Being가 참나이며 유일한 실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현상계는 그 실체가 시공간 안에서 즉 상대세계 속에서 물리적으로 대상화된 사건이나 현상과 같은 개념이라는 것이며 실체와 개념화된 현상계에는 어떠한 이중성도 없다고 한다. 우리의 육신도 그 실체가 대상화 된 무수 무량한 사건이나 현상의 하나일 뿐임으로 개체로서의 우리의 육신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사상이다.
불가에서는 이 절대적 존재 자체를 붓다.진여.불성.여래.참나.여여함.깨우침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사찰에서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한결같이 참구하는 것도 바로 절대적 존재함 자체가 나와 모든 존재의 본성임을 깨우치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 우리의 주체이며 실체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진정한 실체는 우연히 주어진 사건에 불과한 육신이 아니라 절대적 존재함 자체이며 작용하는 관점으로는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수한 의식이자 시간 속에서 인지되고 공간 속에서 확장되는 지각력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옹스님의 초기 오도송悟道頌의 한 구절이다.
보고 듣는 것 외에 다른 물건 아니요,
그것이 본래 나의 주인이다.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절대적 존재자체를 인격화하여 절대신 또는 전지전능한 신이라 부르고 있고 나를 포함한 현상계는 절대 신이 창조한 세계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창조주이면서 만물을 주관하는 절대 신에 귀의하면 영생복락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붓다는 이 절대적 존재를 신神으로 보지 않았고 모든 존재의 본성이자 참나라고 가르치고 있어서 불교란 상대성에서 벗어나 본래의 절대성을 회복하자는 철저한 자력신앙운동 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근원으로써의 내가 바로 신이요 사랑이요 생명이요 존재함이라는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를 상대성을 바탕으로 하는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언어가 아니면 말한다는 것 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에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 진리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 의식에서 의식으로 전할 수 있을 뿐이라고 불가에서는 말하고 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설불見性成佛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본성이며 참나인 절대적 존재함 자체는 상대계의 이원성이 아닌 일원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식의 경계 너머에 있으며 자신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인식을 하려면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의 대상이 되는 객체로 나뉘어지는 상대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눈이 거울이라는 상대적 대상이 없이 자신의 눈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본성인 절대적 존재 자체는 스스로를 인식할 수가 없고 오직 상대성을 가진 현상계에 자신을 비추어내고 순수한 의식의 작용을 통하여 자신의 개념화된 대상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 존재함 자체는 주체와 객체 그 모두를 포함하는 유일성과 전체성 그리고 동시성과 허공성을 가지고 있다고 마하라지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상계는 모든 존재의 근원인 절대적 존재함 자체가 의식을 통하여 세상에 드러나 개념화 되고 대상화 되어진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절대적 존재함 자체와 상대계의 동일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있는 그대로가 실상이요 진리가 아닐 수 없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게 된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드러난 의식의 작용은 물리적 구조물에 의지해야만 가능하고 이런 연유로 육신에 깃들게 된 순수의식이 육신을 자신의 실체로 착각하게 되면서부터 지극히 단순한 개체의식으로 바뀌어 진다는 것이다.
소위 아상我相.ego이라는 것이 발생하게 되는 속 깊은 사연이란 다름아닌 이것을 일컬음이다. 성경말씀에서 에덴동산의 아담이 이브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결코 열지 말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그리스 신화의 의미가 바로 이것에 다름이 아니다.
전체를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世界一花)로 보는 비개체적 순수의식이 육신을 자신의 실체로 착각하게 되면서 자신이 다른 존재와 분리되고 독립되어 있다고 믿는 개체의식으로 전환되면서 결과적으로 끊임없는 시비분별과 생.노.병.사의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 수백년
간 신륵사에서 보림하였을 수행자들이 가슴으로 체득하려고 무진 노력했던 최종 목표가 아상我相 을 일으키는 개체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수의식을 찿아가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신륵사에서 남한강의 도도한 물결 위에 자신의 개체의식 즉 아상을 멀리 흘려 보내고 참나를 찿아내어 대자유인이 된 수행자들은 일체의 경계에 대한 집착심없이 한세상을 물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 갔을 것이다.
나옹선사가 자신의 선시禪詩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편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성을 깨우친 붓다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선시의 향그러움이 시공을 떠나 다시 피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아상을 벗어버리고 순수의식을 회복하여 대자유인이 된 붓다가 바라보는 이 세상은 과연 어떤 곳인가, 깨우침을 얻었지만 우리와 똑 같은 육신과 지각력을 가진 그가 바라보는 이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궁굼해진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마하라지는 이 세상에 깨우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 하고 있다.우주 현상계의 모든 존재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객체로만 존재하고 있어서 진리를 깨우칠 주체가 존재할 수가 없고 오직 바른 것을 바른 것으로 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으로 보는 것만이 수행의 전부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가 깨우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이란 절대적 존재자체인 참나가 상대성 속에서 개념화되고 대상화 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의미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은 자신과 분리되고 독립되어 있는 다른 대상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으로써 같은 의식에게 의식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존재가 각기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는 우리의 기존인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충격적인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열심히 경전을 공부하고 수행을 하더라도 우리가 본래 붓다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다 허상이라고 인식한다 하더라도,그 속에 우리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고 마하라지는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달을 바라보지 못하는 갑갑함을 달래느라 강월헌江月軒 옆 거대한 바위 위의 삼층석탑 곁에 서서 정처없이 흐르는 강물만 하염없이 내려다 본다.
주소: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tel:031) 885-2505
명성황후 생가,기념관
여주 I.C.로 진입하기 전에 위치해 있는 명성황후생가,기념관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목아박물관에서 나와 자동차 전용도로로 진입 -> 이호교를 지나 -> 명성황후생가라는
표지판만을 따라 가니 잠시 후 막다른 길에 명성황후 생가가 보였습니다.
명성황후 생가 전방 약 800m 지점부터 도착지점까지 한국적 멋을 살린
커다란 청사초롱 모양의 멋진 가로등이 도로 양편에 세워져 있어 더욱 의미있었습니다.
이곳은 여주군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어른은 입장료가 500원이고
경로우대가 적용되었습니다.
다만 주차료는 1,000원을 지불하셔야 합니다.
명성황후 기념관에 가시면 유모차와 휠체어(무료)를 빌리실 수 있습니다.
사실 역사적 인물들의 생가를 방문하면 조금 실망스러운 때가 많았는데 명성황후 생가,
기념관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보이는 '명성황후 추모비'도
누구의 작품인지 멋지지요. 태양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길이 잘 닦여 있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답니다.
2층 정자를 사이에 두고 여러개의 초가지붕의 쉼터들이 있었습니다.
명성황후 기념관 앞에 세워 진 명성황후 동상은 너무도 훌륭한 작품으로
명성황후의 기품과 당당함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앞에 서니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안고 일본의 칼날에 의해
운명을 달리해야 했던 그 분의 모습이 연상되어 가슴 뭉클하였답니다.
명성황후는 16세에 친척이었던 흥선대원군 부인의 추천을 받아
조선 26대 고종황제의 왕비로 책봉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대궐안의 수 많은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탁월한 식견을 갖추게 되었고,
마침내 시아버지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자 고종임금을
내조하면서 본격적인 조선왕조의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셨다고 합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개혁을 구실로 우리나라의 왕권과 국권을 침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이 때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명성황후는 뛰어난
인재를 고루 등용했으며, 외교적으로는 외국의 침략 세력끼리 견제하고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외세의 침략은 외세의 힘을 이용해서 막는다)'라는 이론을 펼쳐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셨습니다.
그러나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외교력으로 대 러시아 외교관계가 급진전을 보이자 당황한
일본은 마침내 1895년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내 건청궁(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그 때 명성황후의 나이 45세 였다고 합니다.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르는 'If I leave'와 배우 이미연씨의 연기가 빚어내는 그 때의 비극적
장면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었지요 -.-;;;;;
저 멀리 보이는 한옥이 1851년 명성황후가 태어난 생가로 이 곳에서 8살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한옥은 원래 조선 숙종 13년(1687)에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왕후(숙종의 계비)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소 관리를 위해 지어진 묘막(墓幕)이라고 합니다.
당시 건물로서 남아있는 것은 안채뿐이었으나 1995년에
사랑채, 행랑채, 별당을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저 멀리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비석이 향토유적
제5호인 구부와 옥계를 갖춘 신도비라고 합니다.
명성황후 생가는 높은 턱이 있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어 저희는 먼저 생가의 왼쪽길로 접어들었답니다.
명성황후 생가, 기념관 곳곳에는 다양한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작품 하나 하나가 모두 가슴 뭉클하게 하는 민족의 혼이 담겨져 있는 작품들이었답니다. 어느 야외 조각공원 보다도 훌륭한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선 지도를 내려다 보고 있는 조선인의 자세와 표정도 인상적이었지만
'조선아, 아! 조선아' 라는 제목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답니다.
명성황후 생가 입구는 돌계단으로 되어 있어 휠체어로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갈
수 없어 저도 포기할까 하다가 빠른 속도로 휙 둘러보고 나오기로 하였답니다.
사진으로라도 보실 수 있도록....
명성황후 생가 출입문을 들어서면 자그마한 안 마당이 나옵니다.
중앙 저 뒤로 보이는 곳에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보이는군요...
안채의 뒤로 돌아 왼쪽으로 가니 우물과 만개한 꽃나무가 있었는데
분홍빛 꽃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는 분이 많더군요.
우물 앞 쪽으로는 장독대와 곳간인 듯한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잠겨져 있어 내부 구경은 못했답니다
이 곳[윗 사진의 오른쪽]은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던 방이 있던 자리로
고종황제가 직접 썼다는 '명성황후탄강구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마을'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한옥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아담하면서도 기품있는 가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에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목련이 피어나고 있더군요...
명성황후 생가를 보고 입구쪽으로 향해 왼쪽에 있는 명성황후 기념관을 들렀습니다.
계단 왼쪽으로는 유모차나 휠체어가 오르내릴 수 있도록 길이 닦여져 있었습니다.
특히 이 곳은 화장실까지 원목 창살의 출입문과 고풍스러운 한국적 멋을
살린 인테리어로 지어졌습니다.
세심한 곳까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념관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기념관은 지금까지 일본인에 의해 쓰여진 '조선근대사'를 근거로 명성황후에 대해 사치가 심하고 시아버지인 대원군과의 정쟁만을 일삼는 등 부정적인 시각과 명성황후 반대파세력이나 친일파들로 하여금 중상모략토록 함으로써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비하시켜 전해진 명성황후에 대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워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명성황후 기념관을 들어서자마자 대형 유리 안 쪽에
동강 권오창 화백의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매우 기품있고 우아한데 사실 명성황후의 사진의 진위성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에실제 명성황후의 모습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참고로 명성황후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명성황후를 묘사하고 있다합니다.
[왕비의 눈은 날카롭고 냉정한 빛을 띄고 있어서 기밀한 두뇌 회전이 느껴졌다.
왕비의 생활은 투쟁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왕비는 친절했고
또한 상냥했다. 또한 왕비는 가냘픈 몸매를 지녔으며 태도는 우아했다. 늘 아름다운
의상을 입었고 머리는 칠흙과 같았으며 진주가루를 사용해 화장한 얼굴은
아름다우나 창백해 보였다 그리고 조선 여인치고는 작지 않은 키였다.]
명성황후 기념관 전시실에는 명성황후와 고종의 영정 등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작은 인형들로 재현해 놓은 국장으로 거행된 명성황후의
장례식 장면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한 일본군들 수십명이 무장을 한 채 상복을 입고 상여 뒤를
따르고 있는 조선인들 양옆과 뒤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참고로 기념관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답니다.
그리고 기념관 왼쪽으로는 관람석 161석 규모의 '문예관'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명성황후와 관련된 영상자료의 상영 및 공연등 문화시설로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기념관에서 나오자 마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깃발' 돌조각
연못 위에 세워져 있는 조각상이 멋있죠? 오른쪽은 고기를 낚는
멋진 포즈의 어부 조각상인데 크게 찍지 못해 아쉽네요.
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한복 조형물이 너무도 이 곳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듯 합니다.
명성황후 생가,기념관 가시는 길 :
/ 중부내륙고속도로 여주 Jct.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진입 -> 여주 I.C.에서 나와
-> 여주방향으로 우회전 -> 150m 지점에서 다시 우회전 -. 800m 직진
관람시간 : 하절기 - 3~10월 / 09:00-18:00
동절기 - 11~2월 / 09:00-17:00
관일 - 1월 1일, 설날, 추석
명성황후 추모제 : 매년 10월 8일 (양력)
문의처 : 031) 887-3575~6
capy by - 무 빙 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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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