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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1980년대는 서구적인 미의 기준이 여과 없이 청소년들에게 전달된 시기이다. 브룩 쉴즈,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 등 외국 연예인들의 책받침 사진을 누구나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트렌드는 가요계에도 영향이 있어서, 미스코리아 진 출신의 서구적인 외모를 가진 김성희가 큰 인기를 얻었다. 남성가수로는 박혜성이 인기를 얻으면서 꽃미남 스타일 가수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스코리아 출신 스타가수 1호 김성희
1977년 17세의 나이에 제 21회 미스코리아 진으로 선발된 김성희는 미스코리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연예계에 입문하여 연기와 가수, MC 등으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이국적인 마스크에 비음 섞인 목소리, 170cm의 훤칠한 키로 당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요계에 입문하여 앨범도 발표했는데 미스코리아 진 출신의 여가수이기에 음악적으로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그녀는 탁월한 가창력은 없었으나 직접 작사 작곡하는 싱어송라이터의 재능을 보여주며 6집까지 발매를 이어갔다.
섹시한 매력으로 인기를 얻은 미희
미희는 1977년에 제주여고를 졸업한 뒤 미스 제주로 뽑혀 본선에 출전, 미스 한국일보의 영예를 차지했다. 같은 해 미스 영인터내셔널대회에 참가해 의상상과 인기상을 수상했다. 미인 대회에는 본명인 정미희로 출전했다. 미희가 데뷔한 1980년은 본격적인 컬러 TV 시대가 개막된 해이다. 섹시한 동시에 순진한 느낌을 연출했던 미희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못다 이룬 사랑>으로 사랑받았다.
이국적인 외모의 소유자 윤수일
윤수일은 <아파트>, <제2의 고향> 등 도시민의 생활과 고독을 담은 개성적인 노래를 통해 70~8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이다. 미군이었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서구적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큰 체격으로 인해 어린 시절에는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국적인 외모는 오히려 당대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된 요인이기도 하다. 1980년대의 윤수일은 대중적 인기뿐 아니라 창작 능력에서도 조용필과 비교될 만한 스타였다. 검은 선글라스에 가죽옷을 걸치고 다리를 흔들며 노래하는 그의 멋진 모습은 엔터테이너의 전형이었다.
깜찍한 외모의 원조요정 정유경
재미교포 여가수 정유경은 청아하고 여성스러운 음색과 작은 키에 귀여운 외모로 당대 남성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앨범 발매 이후에 TV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 노래들은 단숨에 인기 가수로 급성장할 요인이 충분했다. 하지만 비자 문제로 인해 석 달 활동 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5년 후인 1988년에 귀국해 2집을 발표했지만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기는 어려웠다. 2012년 SBS 「K팝스타」시즌2에 출전한 맥케이 김이 그녀의 아들로 밝혀지면서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섹시 댄싱퀸 김완선
김완선은 매니저이자 이모인 가수 한백희의 주선으로 인순이와 리듬터치에서 백댄서로 활동하다 1986년 17세의 어린나이에 첫 독집을 발표했다. 김완선은 섹시한 분위기와 화려하고 파격적인 댄스 퍼포먼스로 가요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비록 가창력 논란이 있었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화려한 댄스로 ‘댄싱퀸’ 자리에 오르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오디오와 함께 비디오를 내세운 MTV형 가수인 그녀는 기존 여성 가수들과 차원이 다른 무대 매너를 선보이며 ‘한국의 마돈나’로 불렸다. < 오늘밤>, <나 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 <나만의 것>,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등 많은 히트곡을 냈다.
여고생 하이틴 스타 이지연
헤비메탈 밴드 백두산의 리더 유현상은 연습실에 놀러온 여고생 밴드 재뉴어리(January)의 보컬 이지연의 출중한 미모를 보고 가수활동을 제안한다. ‘여고생 가수’ 특유의 발랄함과 청순한 미모를 겸비한 이지연은 <바람아 멈추어다오>로 인기를 얻으며 먼저 데뷔한 김완선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특히 10대와 20대 남성 팬들에게 주목을 받았지만 스캔들과 함께 이상은과의 라이벌 구도에서 안티팬이 형성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결혼과 동시에 활동을 중단하고 도미했다.
배우 출신 발라드 가수 원준희
개그맨 서세원이 감독한 영화 「납짜루떼」에 출연해 배우로 데뷔한 원준희(본명 안도희)는 1986년 <사랑은 유리같은 것>이 히트하면서 미모의 발라드 여가수로 남성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섹시하고 도회적인 매력으로 많은 대중에게 어필했지만 가수 현미의 아들과 결혼하면서 활동을 접었다가 2008년 활동을 재개했다.
여고생들의 우상 박혜성
이름 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한 꽃미남 가수 박혜성은 곱슬머리에 미소년 같은 외모로 여중고생들의 우상으로 군림했다. 당시 김승진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도시의 삐에로>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80년대 대표 꽃미남 가수로 불리며 상당한 팬덤을 형성했다.
탤런트 출신 트로트 가수 안다미
청순하면서도 한국적인 얼굴을 지닌 안다미는 1987년 KBS 일일연속극 「사랑의 기쁨」에 출연하면서 탤런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부터 가수로 전향한 그녀는 <달빛사랑>이 인기를 얻으면서 아담한 체구와는 다르게 풍부한 성량의 가창력으로 주목받았다. 1990년대 이후에는 트로트 가수로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1990년대에는 청순한 매력의 여성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며 인기를 모았다. 대표적인 여가수 강수지, 하수빈은 긴 치마에 모자를 쓴 청순한 모습으로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또한 남성 가수는 90년대 대표 꽃미남 김원준이 등장하여 큰 인기를 얻었고 신성우는 웬만한 외모로는 필적할 수 없는 독보적인 남성 가수로 군림했다.
큰 눈으로 주목받은 나현희
광고 모델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나현희는 큰 눈이 매력이었다. 이국적인 얼굴형과 섹시한 매력을 가진 배우인 그녀는 1993년 방영된 KBS드라마 「사랑을 위하여」의 주제가 <사랑하지 않을 거야>가 히트하면서 연기와 노래 모두 사랑받았지만 결혼과 동시에 활동을 접었다. 이후 후배 가수 손담비가 나현희와 매우 닮은 얼굴로 ‘나담비’라는 별명을 얻으며 다시 주목받았다.
발랄한 외모의 트로트 가수 박진선
발랄하고 귀여운 외모를 가진 가수 박진선은 숙명여중 재학 시절 한국 소년소녀 합창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은광여고 3학년 때 오아시스레코드와 일본 아수레코드가 공동 주최한 신인 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미모를 겸비한 실력 있는 가수로서 인정받으며 트로트 가수로 데뷔해 활동했다.
청순미의 상징 강수지
1990년 가수 윤상이 작곡한 <보라빛 향기>로 등장한 강수지는 청순한 미모와 가냘픈 몸매로 대중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며 인기를 얻었다. 마른 몸매와 긴치마에 모자를 쓴 모습은 마치 소공녀를 연상케 했다. 강수지의 등장은 여가수들의 외모에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청순미의 트렌드로 등장한 하수빈
청순 여가수 트렌드에서 강수지 뒤를 이어 등장한 하수빈도 큰 인기를 얻었다. 댄스곡 <노노노노노>와 발라드 곡 <더 이상 내게 아픔을 남기지마>를 히트시키며 남자 중고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90년대 대표 꽃미남 김원준
박혜성의 대를 이은 90년대 대표 꽃미남 가수인 김원준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도 부드러운 외모를 가진 스타였다. 자신이 작사, 작곡한 <모두 잠든 후에>가 크게 히트하면서 음악성으로도 인정받은 그는 노래, 춤, 작곡 실력 모두를 겸비한 데다 뛰어난 외모를 가진 화려한 스타였다. < 너 없는 동안>, <show> 등 빠른 템포의 노래들로 90년대 중반까지 인기를 이어갔다. 그 후 잠시 활동을 중단했으나 2006년 베일(Veil)을 결성하기도 했다.</show>
우수에 찬 얼굴의 윤상
황치훈의 <추억속의 그대>,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 등의 히트곡을 통해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윤상은 데뷔 시절 고독하고 우수에 찬 분위기로 여심을 자극했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앞머리와 살짝 기른 뒷머리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1집 히트곡 <이별의 그늘>을 비롯하여 세련된 감수성의 마이너한 곡들을 선보였으며 이후 MBC드라마 「파일럿」의 OST를 맡고, 신해철과 노 댄스(NO DANCE)를 결성하여 실험적인 음악을 구사하며 90년대 젊은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검정색 썬글라스와 쌍권총춤의 로커 심신
밴드 외인부대의 보컬리스트 출신인 심신은 영화와 솔로가수 데뷔 이전에 뮤지컬 배우로도 활약했다. 발라드 곡 <그대 슬픔까지 사랑해>와 록 스타일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를 연속해 히트시킨 그는 90년대 오빠부대의 시작을 알렸다. 짙은 선글라스와 ‘쌍권총 춤’으로 개성 넘치는 무대를 선보였으며, 스탠딩 마이크를 소품 삼아 시원한 샤우팅 창법을 구사하여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렸다. 3집까지 <욕심쟁이> <성격차이> <갈망> 등 연속적으로 히트곡을 발표하며 신드롬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기를 누렸으나 스캔들과 대마초 혐의 등으로 고난의 시기를 겪었다.
가요계의 테리우스 이덕진
이덕진은 고교시절 스쿨밴드 ‘야생마’의 리드보컬로 음악활동을 시작, 1992년 발표한 <내가 아는 한 가지>로 여심을 자극했다. 시인 이규호의 장남으로 아역탤런트와 CF모델, 헤비 메탈밴드를 거쳐 솔로 가수로 활동했다. 야성적이면서도 내성적인 이미지로 대중들의 인기를 얻었다. 중저음과 고음의 샤우팅을 두루 소화하는 전형적인 로커로서 비슷한 시기 데뷔한 신성우와 ‘원조 테리우스’ 논쟁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압도적인 조각 외모 신성우
신성우는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과 반항적인 로커 가죽 의상으로 90년대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다. 이전에도 꽃미남이나 남성미로 인기를 끈 남자 가수들이 많았지만, 신성우는 압도적으로 잘생긴 얼굴과 파워풀한 록 창법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 내일을 향해>, <노을에 기댄 이유>, <꿈이라는 건>, <사랑한 후에>, <서시> 등 다수의 히트곡을 냈으며 ‘잘생긴 가수’보다는 싱어송라이터로 자리를 잡아갔다.
팔방미인 더 블루의 김민종
배우, 가수, MC로서 팔방미인의 재능을 발휘했던 김민종은 손지창과 함께 1992년 남성듀엣 더 블루(The Blue)를 결성했다. 김민종의 반항적 이미지와 손지창의 깔끔한 이미지가 결합하면서 당대 여성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솔로가수로도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김민종은 각종 차트를 휩쓸었고 각종 TV예능프로그램의 MC로도 맹활약하며 대중의 인기를 누렸다.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대중 음악계는 매니지먼트 시스템의 시대로 접어들며 HOT, SES, 핑클 등 외모의 비중이 높아진 아이돌 가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연예기획사들은 연습생 시절부터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시키는 한편, 대중들이 좋아하는 외모를 겨냥하여 성형수술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런 시스템의 부작용에 대한 비판도 있으나, 시스템을 통해 노래와 춤, 미모, 예능감을 모두 갖추며 성장한 이들은 한류 바람을 일으키며 일본과 중국, 대만 등 동남아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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