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주자가 취할 것과 버릴 것
히브리서 12:1-2
홍제원교회. 상동(尙洞)교회
1931. 5. 31.
人出世後皆有走路, 但其所走之路, 各自不同, 有自京驛而發者, 有自釜山而發者, 有自義州而發者, 皆有走路. 人無不走者, 人若不走則必顚沛乃已也. 欲不走得乎? 人若陡立南門通則可驗之矣. 個人團體國家民族皆不得不走矣. 年前印度一靑年, 以徒步競走全世界至朝鮮, 言其競走之苦, 印人之欲進步者, 見其靑年而可知也. 今街路之上, 種種見競走之靑年, 朝鮮靑年亦在發程, 千里之行始於跬步豈不信哉? 望諸位靑年拳兩手競走不已, 達其目的焉. 昔夸父望日而走病渴而死, 是無目的而走北行南軒者也. 今競走有取捨兩者, 前有欲取者, 後有當捨者. 此取捨之人卽信者也. 有信而後取之, 有信而後捨之. 今先言捨者何也? 此在後方. 主曰來者勿顧後云, 古人曰甑已破矣, 視之何益? 來者勿顧後, 況信者乎? 吾等之後方有兩種, 一拘忌, 二束縛也. ⇔拘忌者皆不重視而有妨於走者, 吾幼時聞欲京行者, 投去眉毛云, 眉毛不爲拘碍而欲發去云者, 欲輕其身也. 況拘忌於身者乎? 鳥獸不見張網而罹之, 走者不重拘忌而罹之則敗矣. 吾等常輕視微細之過, 酒一杯,煙一株,語一詤, 而積之則大, 故雖少者愼之而去. 主嘗輕視大者而嘗重視小者何也? 大事實包在其中故也. 吾等亦重視小過, 決然捨去然後可快走矣. 古者有殺人强盜, 臨死呼寃曰吾母敎我盜故死矣云. 豈不猛省者乎? 安東有一儒, 吟生日詩, 亂石皆爲母所移, 幼時往塾路中多. 亂石恐子蹴顚故, 其母盡投去路石云. 今吾人欲其善走, 則自幼時使之盡除去小小之過, 使之善走. ⇔束縛之爲害, 人皆易知. 束縛則無自由, 況競走乎? 然人不知束縛由於拘忌之積, 魔欲束人, 初不以大者, 先以小者餌之. 日前見一友, 憂債帳之如山, 愁不展眉, 萬事失敗, 余問何故, 答曰魔鎖我足, 今不可不任魔所爲, 余又見某敎役者喪配而再娶, 語言之間偶爾不合, 余曰忍之, 此友不從吾言, 涵蓄怨怒, 終至離婚, 今休敎役, 存財亦失敗矣. 小不忍則亂大謀, 約拿聞訓生疑漸大, 至入魚腹, 虎雖猛一入網穽, 不能脫出, 可畏哉,束縛也! 以上皆在後者, 決然捨去, 不復顧戀可也. 有在前之可取者, 一榮樂, 二苦難. ⇔榮樂卽希望, 彼在路之乞人有希望, 況信者可無希望而生乎? 信者所行事事皆眞, 不如泡沫, 故保羅曰我不擊空, 吾朝鮮人回顧幾十年所由來, 則皆泡沫風燈而已也. 吾等信後皆屛去虛僞, 種必結實, 營必成功, 如樹立溪, 其枝必茂矣. 希望使人有力, 雖金錢不惜而費之, 雖勞力不惜而用之, 盡其愛而向之, 盡其誠而勤勉. 古者希望虛榮有不力者多矣. 今之望鷄鄭者是也, 古有講經生快誦而有輒忘却者, 講後榮冠唱榜, 如此虛榮亂生心底故耳. 彼競走者之前有榮賞, 費盡心力而走之, 許多看證者拍手喝采, 竟得榮冠也. 今吾朝鮮之人, 徒落望悲歎者何也? 無希望無榮樂故也. 主設席于讐前, 授我以滿酌苦難者, 練吾懷心, 使不落心也. 苦難客也, 主人善待則當齎福而來, 薄待則衛禍而來, 古人曰咬得萊根, 百事可做云, 苦不忍者不能成功也. 彼競走者其苦不可形言也. 胸喘膚汗許多障碍, 排擠而往, 許多拘忌不顧而往, 往哉往哉. 必有成功, 吾等負十架, 其苦何可言也. 然忍之而往忍者主之道也. 不忍則不達也. 如此試鍊之中, 人皆笑之甚益而亦忍之可也. 年前吾自鄕上京, 同伴甚苦, 有一人不能忍苦, 向人問人今去京幾里, 有遠於所經者云, 此人落心欲反往回程云, 人勸其被弄而同往矣. 吾信者亦然.
(昭和7年, 培材校牧으로 계시며 京城府杏村洞 149에 사실 때.)
사람이 세상에 나가게 되면 모두 가야 될 길이 있습니다. 다만 그 가는 길이 제각기 서로 달라서,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자도 있고, 부산에서 출발하는 자도 있으며, 의주에서 출발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은 다 가야할 목적지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만일 사람이 나아가지 않는다면 반드시 넘어지고 자빠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가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본다면, 사람이 저 복잡한 남대문 통에 우뚝 서 있어 본다면 그 증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나 민족들이 다 목적을 향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인도(印度)의 한 청년이 도보로 전 세계를 여행하다가 우리 조선(朝鮮)에 왔습니다. 그는 경주하는 고통을 말하였는데, 인도 사람들이 진보하려는 것을 이 청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경주하는 청년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조선의 청년들도 진보를 위해서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리 길도 한 발자국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여러 청년들은 두 주먹 불끈 쥐고 달리는 일을 그치지 마십시오. 달리고 또 달려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과부(夸父)라는 사람이 해를 따라 잡는다고 계속 해를 따라가다가 목이 말라 죽었다고 합니다. 이는 뚜렷한 목적도 없이 북쪽으로 간다고 하면서 수레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달려가는 사람이 취할 것과 버릴 것이 있습니다. 앞에 것을 취하고 뒤에 있는 것은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
이와 같이 취하고 버리는 이가 바로 신자(信者)입니다. 믿음이 있은 뒤에 취하고 버려야 하는데, 지금 먼저 버릴 것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는 뒤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르기를 ‘오는 자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시루가 이미 깨졌는데 돌아본다고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오는 자도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신자이겠습니까?
우리들의 뒤쪽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기(拘忌)(꺼림)이고, 둘째는 속박(束縛)입니다.
‘꺼리는 것’(拘忌)은 모두가 중시(重視)하지 않지만 길을 가는 자들에게는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릴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멀리 서울에까지 가려는 사람은 눈썹까지도 뽑아버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눈썹이 가는 길에 그리 방해되는 것은 아니지마는 뽑아버리라고 한 것은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몸에 방해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새나 짐승은 그물 쳐놓은 것을 보지 못하고 걸려듭니다. 길가는 자는 꺼리는 것(拘忌)을 중시하지 않다가 걸려들면 실패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들은 늘 미세한 과실을 가볍게 보아 넘깁니다. 술 한 잔, 담배 한 개비, 허튼 수작 한 마디도 그것이 쌓이면 큰 허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허물이라도 신중하게 생각하여 버려야 합니다. 주님은 큰 것은 경시하고 작은 것은 중시하셨는데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큰 일이 실제로 작은 것들의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작은 과실을 중시하고 결연히 그것을 버린 뒤라야 가히 기분 좋게 갈 수가 있습니다.
옛날에 살인강도가 있었는데 그는 사형을 당하기에 앞서 호소하기를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도둑질을 가르쳐주어서 이렇게 죽게 되었다’라고 하였답니다. 이 어찌 단호하게 반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동 지방에 선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의 생일날에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어지러이 흩어진 돌들을 어머니가 치웠는데
(亂石皆爲母所移)
어릴 때 다니던 서당 길에는 돌들이 많기도 많았었지.
(幼時往塾路中多).’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들이 서당에 가다가 돌을 차고 넘어질까 봐 어머니가 그 돌들을 다 주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인생길을 잘 가기 위하여서는 어릴 때부터의 작고 하찮은 허물이라도 제거하여 거침없이 살아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속박(束縛)의 해는 사람들이 다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속박(束縛)을 당하면 자유가 없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과 경주(競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속박이 앞에서 말한 ‘구기’(拘忌)가 쌓여서 되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마귀는 사람을 속박할 때 처음부터 크게 속박하지 않고, 먼저 작은 것을 가지고 미끼를 놓습니다.
며칠 전에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빚을 산더미처럼 져서 그 근심 때문에 눈 가에 주름을 펼 수 없고 만사가 실패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빚을 졌느냐고 하였더니, 그가 답하기를 ‘마귀가 내 발을 묶었으니 이제는 마귀가 하는 대로 맡겨둘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또 어느 교역자(敎役者)가 아내를 잃고 재취(再娶)를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들 내외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의견이 합치되지 않는 것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자네가 참아야 하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내말을 듣지 않았고, 그들 사이에는 원망과 분노가 쌓여서 마침내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지금 교역의 직에서도 물러났을 뿐 아니라 가졌던 재물도 다 없애고 말았으니,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계획도 어지럽히고 맙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교훈을 받았으나, 그것에 대한 의심이 생겨 그것이 점점 커져서 고기의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호랑이가 아무리 사나워도 그물이나 함정에 빠지게 되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두려운 것이 속박입니다. 이상 말한 것은 다 후자(後者)인 속박에 대하여 말한 것으로 속박을 단호히 버리고 다시는 되돌아보거나 그리워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앞에 있어서 가히 취할 만한 것은, 첫째가 영락(榮樂)이고, 둘째가 고난(苦難)입니다. 영락은 바로 희망입니다. 저 길거리에서 빌어먹는 거지도 희망이 있거늘 하물며 신자가 희망이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신자의 행하는 일들은 모두 진실하여 물거품과 같지 않기 때문에 바울이 이르기를 ‘나는 허공을 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몇 십년동안의 유래를 돌이켜 보면 우리 조선 사람들은 모두 물거품이요 바람 앞의 등불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신앙을 가진 뒤에 허위를 모두 떨쳐버려야, 씨를 뿌리면 반드시 열매를 맺고, 일을 경영하면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나무가 개울가에 있으면 가지가 무성하게 되는 것 같아집니다.
희망은 사람을 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아무리 귀한 돈도 아끼지 않고 쓰게 되고 아무리 힘든 노력도 아끼지 않고 일하게 됩니다. 사랑을 다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노력하여야 합니다.옛날의 희망에는 허영으로써 힘이 없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헛된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을 믿고 계룡산에 정씨(鄭氏)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옛날에 과거장에서 <경서經書>를 외던 서생이 잘 외어나가다가 갑자기 글 구절을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이 강(講)(외는 시험)만 끝나면, 영광의 월계관을 쓸 급제자 호명(창방)이 뒤따라 있을 것이라’는 허영이 마음속에 생겨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주를 하는 자의 앞에는 영광스러운 상이 있어서 마음과 힘을 다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주위에 있는 그 많은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고마침내 영광스러운 승리의 관을 얻게 됩니다.
지금 우리 조선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오로지 슬프게 한탄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희망과 영화와 즐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원수의 앞에서 자리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고난의 잔을 넘치게 하심은 마음을 연단하시어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난은 나그네와 같습니다. 주인이 잘 대접하면 나그네는 복을 가지고 옵니다. 손님에게 박대를 하게 되면 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옛사람 [채근담菜根譚]에서 ‘나물 뿌리를 씹어 먹을 수 있다면 모든 일을 다 이룰 수 있다’(咬得菜根 百事可做)라고 했습니다. 괴로움을 참지 못하는 자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저 달리며 경주하는 자의 그 고통은 이루 형용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이 숨이 차고 살갗에는 땀이 흘러내립니다. 이와 같은 온갖 장애를 헤치고 나가야 합니다. 허다한 꺼리낌(拘忌)을 뒤돌아보지 말고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 고통을 어떻게 다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인내하고 가야 합니다. 인내는 주께서 가신 길입니다. 참지 못하면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시련 가운데 우리는 웃어야 합니다. 그 시련이 매우 어렵더라도 역시 참고 가야 합니다.
몇 해 전에 제가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오는데 동반하여 오던 친구가 매우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서울까지 몇 리나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지금 온 거리보다 더 멀다는 소리를 듣고 낙심하여 오던 길을 돌아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농담이라고 하고 함께 올라온 일이 있습니다. 우리 신자도 이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