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예수의 선생(耶蘇의 先生)
누가복음 2:52 또 41-끝
홍제원교회. 정동교회
主爲人類之先導者而不爲弟子人皆知之, 然彼亦有先生, 人未知之, 然主亦有先生, 路加明記之. 觀福音所記則彼亦受敎于先生者不難知矣. 然其先生非此世之敎師也. 保羅受業于加馬烈門下, 而主不曾就學于碩學者. 亦不能受學校敎育, 由此觀之則主無先生, 似可證明. 然亦未曾有別人相之而成也. 彼之父約瑟爲主之敎師, 彼母馬利亞亦爲主之敎師, 彼嘗授業者, 非當時人之哲學也, 又非古代人之碩學也. 彼唯一敎科書卽舊約聖書也. 且於舊約人物中最所愛慕者, 古代預言先知等也. 其事業由此預言而行, 其生涯由此預言而定也. 何者? 彼說敎中往往引用舊約書, 喚起注意, 其預言書如左也, 利賽亞, 耶利未亞, 何西亞, 未迦, 但以理 等 彼最所愛讀者也. 神之聖旨由此預言書而知得也. 己之天職由此預言書而發揮也. 故吾等捨舊約預言書而不能知耶蘇也. 且捨耶蘇而亦不能知先知者矣. 今日基督敎人學基督, 不能至完全者, 但由彼之弟子而見之故也. 不由彼之先生而見之故也. 其弟子就其正面而言, 其先生就其裡面而言也. 人但知弟子出自先生而不知先生能出弟子也. 耶蘇拜而爲主, 仰而爲敎會首長, 戴而爲魂靈之監督也. 非以弟子立場而成也, 己自預言者而成也. 故彼非宗敎的崇拜物也, 預言者人故主亦人也. 預言者革命者故主亦革命者也. 自預言者立場而見耶蘇, 則主爲以色烈最大者, 其理想現于宇宙之內矣. 故吾等知主爲預言者之弟子而爲預言者之下也. 弟子大於先生, 氷生於水而寒於水, 此意曾告于門徒, 弟子不能大於先生, 此理甚明也. 主欲以先知爲敎師, 且以父母爲敎師, 涵養德性, 廣其知識, 終爲救主矣. 皆由預言者而成也. 論殺人則必引, 出埃記二十章十三졀. 勿殺人之言, 論姦淫罪則又引 出埃記二十章十四졀. 勿淫之言. 論離婚則又引, 申命記二十四章一節. 付書之言, 論交隣則又引, 利未記十九章十八節. 愛人之言, 言自己之責任則引, 理賽亞五十三章四節. 擔疾病當憂患之語, 又證聖職曰在 理賽亞四十一章八, 又四十二章一節. 之語而明其職分也. 論世人之不欲聞眞理則必引, 理賽亞六章九,十節. 汝等聞而不聞, 見而不見之語. 欲譬喩則引 詩七八章二節. 我施譬喩露其隱密之語. 論外飾則又引 理賽亞二十九章十三節. 民皆以屈舌敬我之語. 欲乘驢則又引 셰가리아(스가랴) 九章九節. 云시온之民乎, 爾王溫柔, 乘驢之子, 其說敎勸引預言者之語. 以證其道也. 今吾等之所安者, 爲主之弟子, 欲作弟子者, 欲如主之作弟子也. 勤讀聖書, 敎理皆在聖書, 則言語勸引聖書而爲之可也.
주님은 인류의 선도자가 되었음에도 남에게 배운 제자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그러나 주님에게도 선생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릅니다. 주님 역시 선생이 있다는 것은 누가복음에 분명히 기록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을 보면 그도 역시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은 이 세상의 교사가 아닙니다.
바울은 가마리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나 주님은 일찍이 훌륭한 석학에게 나아가 배운 일도 없고, 또 학교 교육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볼 것 같으면 주님께는 선생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듯합니다. 곧 일찍이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써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요셉은 주의 교사였습니다. 그 어머니 마리아도 역시 주의 교사였습니다.
주께서 일찍이 배운 것은 그 당시의 철학도 아니고, 또 고대인의 학문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가르친 유일한 교과서는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또한 주가 <구약>의 인물 중에 가장 사랑하고 사모한 자는 고대의 예언자(預言者)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 사업은 이 예언으로 말미암아 행하여지고, 그 생애는 이 예언으로 말미암아 정하여 졌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저 설교 중에는 자주 <구약성경>가 인용되어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 예언서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즉,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미가, 다니엘 등이 주께서 가장 애독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스러운 뜻을 이 예언서에 의하여 알아서 터득하셨습니다. 당신의 천직(天職)을 이 예언서로 말미암아 발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예언서를 그냥 두고는 예수를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그냥 두고는 역시 선지자들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우면서 완전한 경지에 이르지 못 하는 것은 다만 그의 제자들만을 가지고 보기 때문이고, 그의 선생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직접 바로 본 그의 모습을 말하였고, 선생님은 그의 내면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제자들이 선생으로부터 나왔다는 것만 알았지, 선생이 제자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를 주로 모시니, 이는 주를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모신 것이요, 영혼의 감독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언자로부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적인 숭배 대상이 아닙니다. 예언자요 혁명자이기 때문에 주님도 역시 혁명자입니다.
예언자의 입장에서 예수를 본다면 주님은 이스라엘의 가장 최대자(最大者)로서 그 이상(理想)을 우주 안에 실현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가 예언자의 제자가 되어 예언자의 아래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제자는 선생보다 위대합니다. 얼음이 물에서 나왔지마는 물보다 찹니다(氷生於水而寒於水). 이 뜻을 일찍이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제자가 선생보다 위대할 수 없다는 이치가 분명하거늘, 주님은 선지자로 교사를 삼고, 또한 부모를 교사로 삼아 덕성을 함양하고, 그 지식을 넓혀서 마침내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게 모두 예언자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살인을 의논하게 되면 반드시 출애굽기 20:13의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인용하고, 간음죄를 논하게 되면 출애굽기 20:14의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인용하게 되며, 이혼을 의논할 때는 또 신명기 24:1의 ‘증서를 써주라’는 말을 인용하고, 교린(交隣)을 의논할 경우에는 또 레위기 19:18에 있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인용하고, 또 자기의 책임을 말할 경우에는 이사야 53:4의 ‘질병과 우환을 담당하셨다’는 하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또한 성직(聖職)을 증명할 때는 이사야 41:8, 또 42:1에 그 직분을 말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사야 6:9-10에 ‘너희는 들어도 들리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인용하고, 비유를 하려고 하면 시편 78:2에 ‘내가 비유로 그 숨은 뜻을 알려주리라’는 말씀을 인용하고, 외면적인 허식을 의논할 경우에는 이사야 29:13의 ‘백성들은 거짓으로 나를 존경한다고 한다’는 말씀을 인용하고, 또 당나귀를 타려고 하는 경우에는 스가랴 9:9의 ‘시온의 백성들아! 너의 임금이 온유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그 설교는 예언자의 말을 부지런히 인용하여 그 도를 증언합니다. 지금 우리가 편히 여기고 있는 바는 주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의 제자가 되려면 주께서 제자가 되려고 한 것과 같이 하여야 합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교리는 다 <성경> 에 있으니 말을 할 때는 <성경>을 애써 인용하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