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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정적인 종교(家庭的 宗敎)
마태복음 12:46-끝, 에베소서 2:19
홍제원
1930. 9. 14. 상동
1931. 3. 8. 중곡
◇盖吾人處世, 分家庭與敎會爲二物甚不可也. 在家庭不可忘敎會也, 在敎會不可忘家庭也. 此何故無家庭無敎會也. 無敎會亦無家庭也. 在家庭忘社會者不可也, 在社會忘家庭者亦不可也. ◇我國列聖揭示政廳曰視國如家, 此使登廳者愛國如家庭也. 我國中古思此義故興國, 至近古忘却此義故國隨以亡也. 我朝鮮不知治家之術, 故亦不知治國之術矣. 嗚呼晩矣. ◇然夫爲人者不可不知此義, 夫行于家庭者行于社會, 則一般蒙福矣. ◇擧一例家族中, 一人飮酒雜技, 則他家族可使之傍觀岸視乎? 爲父母者亦必苛責其子使之改悛, 若不改則非但一人陷敗矣, 全族隨以覆沒矣. 可不愼哉? ◇今敎會之內禁酒亦此義也. 今美國之人視國人如家族, 故禁全國之酒, 蒙福不少矣. 今參觀救主與保羅之敎訓, 皆由此而起也. 吾前在尙洞, 有人來視敎會, 欽歎曰敎會如一家矣. 牧師與敎人如家人父子, 和氣融融. 爲家族之道有數四焉, ◇一,有一心而後爲一族也. 人各有法, 無法則不能爲家矣. 不能爲族矣. 야곱與에셔, 其法各異故不能同居, 가인與아별, 不能同居者, 其法各異故也. 故主曰誰爲我母誰爲我妹乎? 惟遵父旨者爲我母爲我妹矣. 遵旨而後爲母爲妹者, ◇其主義與法則同也. 故妻爲夫祈禱, 子爲父祈禱者, 使其父其夫同奉神旨, 而爲子女也. 然後和平在焉, 幸福臨焉. ◇尹路得氏爲夫祈禱十年而後, 其夫李炳琳禮拜焉. ◇主入馬利亞之家, 마르다坐聽主訓, 마리아奔走供主而短其弟, 故主責其不足. 人各有不足者 ◇一, 雖篤信中亦有不足者, 常常自反, 以知神旨之如何可矣. ◇猶大於十二門徒中, 脫退者何故也? 同聽主訓而一南一北, 每每離合故不能爲使徒也.◇吾信徒中亦然, 敎會中有小小紛爭者, 其主旨不同故也. 老少衝突新舊衝突, 皆以此也. ◇惟於神旨之中, 安有老少也, 安有新舊也? ◇ 馬山與大邱等地, 有紛爭起訴者, 其主義不同故也. 故吾等以主爲大將, 吾等爲軍兵, 同敵魔國. ◇不觀中國形便乎? 三分五裂無寧靜之日, 無合心各自圖利故也. ◇二, 各自忍耐可也. 忍耐成家之本也. 無忍耐不能致財, 忍其飢寒, 忍其老苦, 故忍耐成功之母, ◇主曰終忍得救, 今人稍得財, 則敎其子安逸, 美其衣食, 使不知得財於忍後, 必放浪不能成家矣. ◇且家內不平, 常常忍之, 使作和平也. 僉位不聞張公藝之說乎? 九世同居者, 以其百忍故也. 家內老幼衣食不同, 長幼禮節不同, 不平易生而百番忍之, 書進百忍于皇帝之前. 吾等之和平在忍耐也. ◇敎會之內亦然, 以忍爲主如張公藝之忍, 敎會之內和平存焉. 平和成家之本, 平和生於忍, 非生於富. 世人不知平和之在忍耐, 反求平和於物質之中, 物質平均則平和來云, 甚不然也. 非忍物質不能平矣. 各自忍嗜欲, 節其衣食而後, 平和在中矣. ◇非忍非但不能成功矣, 亦不能得救. 黙示錄曰, 吾道忍之道, 三章十節. 主曰以忍耐保靈魂, 눅二十一章十九節. 靈魂如寶器, 不忍耐則器已破矣. 靈破補之甚難, 久後蘇之, 故保靈之道, 莫如忍耐, 故忍耐成家矣. ◇三, 各自自責可也, 某友人曰, 下於人則人格不能保云, 甚非矣. ◇主曰克己, 保羅曰擊身使服從云, 고前九章二七節. 自責之心, 非克己不能得也. 克己如攻玉, 玉有瑕則磨之以去, 故自責如攻玉, 人格之成在自責也. 自責非但成人之工也, ◇亦成家之本也. 昔繆彤閉戶自撾, 諸婦親愛亦自服, 爲千古格言也. ◇敎會之內各自自責可也, 牧師曰余是, 傳道師曰余是, 敎友曰余是, 則誰知烏之雌雄? 不相屈己, 矜高自恃, 故風波起焉. ◇水激磯故不平, 各自是則敎會不能成立也. 我於主前爲不足之人, 則於人亦爲不足, 何暇責人也? ◇緘口不言人過是爲大人, 天道以不言爲主人, 則天行之家道自成, 敎會興旺矣. ◇四,各自盡職可也, 人之一身各有支体, 互相扶助, 고前十二章十二-끝. ◇耳司聽, 目司視, 口司言, 百體各有所司, 一不盡職則身之職虧矣. 벽돌數萬介爲一屋, 若一介漏則不能成屋, 此理甚明. ◇我於此敎會, 最要之人, 不可一日缺席, 若缺席不能成敎會矣. 牧師盡牧師之職, 傳道師盡傳道師之職, 敎友盡敎友之職, 敎會旺盛矣. ◇若一人耕之十人食之, 不能成家, 十人耕之十人食之則家道成矣.
대개 우리들이 처세하는데 있어서 가정과 교회를 분리하여 둘로 보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합니다.
집에 있으면 교회를 잊지 못하고, 교회에 있으면 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집이 없으면 교회가 없고 교회가 없으면 역시 가정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있으며 사회를 잊는 것은 옳지 못하고 사회에 있다고 집을 잊는 것도 불가합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왕들은 정사를 보는 청사인 정청(政廳)에 글을 게시하였는데, 거기에는 ‘나라를 집과 같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 정청에 올라온 자는 나라를 사랑하기를 가정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옛날에는 이런 의리를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라가 흥왕하였는데, 근래에 와서는 이 의리를 망각하였으므로 나라도 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조선은 가정을 다스리는 기술을 몰랐으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기술도 몰랐던 것입니다. 안타깝구나, 너무 늦은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 사람이 된 자는 이 의리를 불가불 알아야 합니다. 대체로 이 의리를 가정에서 행하는 자는 사회에 행하게 되고, 그 복은 일반 사람들이 입게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술을 마시고 놀음 같은 잡기를 일삼는데도 다른 가족들이 곁에서 보고 불구경하듯 하면 되겠습니까? 부모가 된 자는 반드시 그 자식을 가혹하게 나무라고 고치게 해야 합니다. 그래도 고치지 않으면 그 한 사람만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따라서 패가망신하게 되니 신중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교회 안에서 금주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은 뜻입니다.
오늘날 미국 사람은 자기 나라 사람을 볼 때 가족처럼 여기기 때문에 전국에 금주하게 하여서 복 받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구주와 바울의 교훈을 참고해 보건대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나라를 가족처럼 생각한데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전에 상동(尙洞)교회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교회에 와서 보고 찬탄하기를 ‘교회가 한 가족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는 교인과 더불어 한 가족처럼 부자(父子)와 같아 온화한 기운이 무르익었다’고 말 한 적이 있습니다.
가족이 되는 도리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한 마음으로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의 법이 있습니다. 법이 없으면 가정도 이룰 수 없고 겨레도 이룰 수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지켜야할 법이 각각 달랐기 때문에 함께 동거할 수 없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동거할 수 없었던 것도 그 법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르기를 ‘누가 나의 어머니고 나의 누이인가?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자가 나의 어머니고 나의 자매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주의(主義)와 법칙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기도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하여 그 아버지와 남편으로 하여금 함께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화평이 있고 행복이 오는 것입니다.
윤노득(尹路得) 씨는 자기 남편을 위하여 십년을 기도한 뒤에 그 남편 이병림(李炳琳)이 예배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집에 들어갔는데 마리아는 앉아서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마르다는 분주히 오가면서 주님을 위해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아우 마리아의 단점을 비방하였더니 주님이 마르다의 부족함을 꾸짖으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각각 부족한 것이 있으니
하나는 비록 신앙이 돈독하더라도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은 늘 스스로 반성하여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옳습니다. 유다가 열두 제자 중에서 벗어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함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어도 한쪽은 남으로, 한쪽은 북으로 가서 늘 의견이 합치지 않았으므로 사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신도중에도 이와 같은 것이 있으니 교회 내에 일어나는 소소한 분쟁도 모두 주님의 뜻을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소가 충돌하고 신구(新舊)가 충돌하는 것도 다 이것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한다면 어찌 노소가 다름이 있고 신구가 충돌할 리가 있겠습니까?
마산과 대구등지에서 분쟁으로 소송까지 일어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주의(主義)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으로 대장을 삼고 우리는 병사가 되어 함께 마귀의 나라와 맞서야 합니다.
중국의 형편을 보지 않았습니까? 주의가 삼분오열(三分五裂)되니 고요하고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합심하는 일이 없이 각자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각자 인내하여야 됩니다.
인내는 가정을 이루는 근본입니다. 인내가 없으면 재물을 모을 수가 없습니다. 춥고 배고픈 것을 참아야하고 늙는 고통을 참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성공의 어머니입니다.
주께서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재물을 조금만 모으면 그 자식에게 안일한 것을 가르치고, 좋은 옷을 입혀서 인내한 뒤에 재물을 얻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 그 자식들은 반드시 방탕하여 가정을 이루지 못합니다.
또한 집안에 불평이 있으면 항상 인내하여 화평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중국 장공예(張公藝)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습니까? 아홉 세대[九代]가 한 집안에 동거하였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비법을 물었더니, 백번을 참았다는 뜻으로 ‘참을 인(忍)’자 백 개를 써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한 집 안에서도 늙은이나 젊은이의 의식(意識)이 같지 않고, 어른과 아이에게 베풀 예절이 달라 불평이 생기기 쉽지만 백번을 참았다고 황제(皇帝)의 앞에 그렇게 써 올렸다고 합니다. 우리의 화평은 인내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러해야 합니다.
인내를 주장으로 삼기를 장공예의 인내와 같이 하면 교회내의 화평이 있게 됩니다. 평화는 가정을 이루는 근본입니다. 평화는 인내에서 나오는 것이지, 부유한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평화가 인내에서 나오는 것을 모르고 반대로 물질 중에서 평화를 추구하려고 합니다. 물질을 골고루 잘 배분하면 평화가 온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잘 못된 일입니다. 인내가 없으면 물질을 공평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각각 욕심을 스스로 참아서, 먹고 입는 일을 절약한 뒤에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인내가 아니면 성공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고 역시 구원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이르기를 ‘나의 길은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 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3:10).
주님이 이르기를 ‘인내로 너희 영혼을 보전하라’하였습니다(누가복음 21:19). 영혼은 보화를 담는 그릇과 같아서 인내하지 않으면 그릇은 이미 깨어진 것입니다. 영혼이 파괴되면 보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오랜 뒤에 소생하므로 영혼을 보호하는 일은 인내보다 나은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셋째, 각자가 스스로 자기를 책망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느 우인(友人)이 이르기를 ‘자신을 남보다 낮추면 인격을 보전할 수 없다’고 이르나 이는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르기를 ‘극기(克己)하라.’하고, 바울은 이르기를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 9:27).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은 극기가 아니면 얻을 수 없습니다. 극기는 옥을 다듬는 것과 같습니다. 옥에 티가 있으면 갈아내어 없애야 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나무라기를 옥을 다듬듯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책망함은 사람을 성취시키는 방편인 것입니다.
또한 가정을 이루는 근본이 됩니다.
옛날 중국 한(漢) 나라 때 사람 무동(繆彤)은 여러 형제의 맏이로 형제의 아내들이 다투는 것을 보고, 문을 잠그고 방안에 들어가서 스스로 자기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쳐서 자신이 잘못 지도한 책임을 나무라니 모든 제수(弟嫂)들이 잘못을 빌었습니다. 이야기는 천고의 격언으로 내려옵니다.
교회 내에서도 각자가 스스로를 나무라는 것이 옳습니다.
목사님은 ‘내가 옳다’라고 하고, 전도사도 ‘내가 옳다’하고, 교우도 ‘내가 옳다’고 한다면, 까마귀의 암수를 구분하지 못 하듯 누가 그 잘잘못을 알겠습니까? 서로 자신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앞세우기 때문에 풍파가 일어납니다.
물이 강가의 돌에 부딪쳐서 물결이 일어납니다. 각자가 다 자기가 옳다고 하면 교회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서 부족한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의 앞에서도 부족한 사람이 됩니다. 어느 겨를에 남을 나무랄 수가 있습니까?
입을 꿰맨 듯이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대인(大人)이 됩니다. 하늘의 도는 말하지 않는 것으로 주인을 삼으니 하늘의 운행에 의하여 가정의 도가 스스로 이루어지고 교회도 흥왕하게 됩니다.
넷째, 각자 직분을 다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람이 몸은 하나이나 각 팔다리 등의 지체가 있어 서로 붙들어주고 도와줍니다(고린도전서 12:12-끝).
귀는 듣는 것을, 눈은 보는 것을, 입은 말하는 것을 맡은 것처럼 백가지 지체는 각각 맡은 임무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라도 직분을 다하지 못하면 직책이 어긋나게 됩니다. 벽돌 수만 개를 가지고 집을 짓는데 만일 한 개라도 빠지면 집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 이치는 매우 분명합니다.
나는 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써 하루라도 결석해서는 교회를 이룰 수가 없게 됩니다. 목사는 목사의 직책을 다하고, 전도사는 전도사의 직책을 다하고, 교우는 교우의 직책을 다하여야 교회가 왕성해집니다.
만일 한 사람이 농사를 지어 열 사람이 먹는다면 집안을 일으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열 사람이 농사를 지어 열 사람이 먹는다면 집안의 도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애산 목사님께서 설교하신 중곡교회는 지금의 종로 4가 세운상가 자리에 있었던 교회이다. 1910년 어간에 세워진 교회로 처음에는 초가집 예배당이었으나, 교인이 50여명으로 증가하여, 1917년에 한 차례 증축을 하였고, 1922년에는 교우들의 헌금으로 1,000원을 모아, 1925년에 벽돌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삼청교회와 중곡교회의 교세가 비슷했고, 또한 거리가 가까워서 한 구역으로 묶어 관리하였다(영문 연회록, 1917. 51쪽; 1922, 193쪽; 1925, 128쪽). 중곡교회에 관한 1927년의 사정이 ‘기독신보’에 수록되어 있다(기독신보, 1927. 7. 27. ‘삼청동 교당 봉헌식’ 기사)(편집자 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