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生命과 敬虔 彼後一章三節
生命 以道言, 敬虔以學言. 福音生命之道也, 福音 敬虔之學也. 欲知生命之道者 心常敬虔後 覺生命之奧. 易曰太極 生兩儀. 太極 本生命之道 而其理甚奧. 非探務者 不知也. 福音曰 以言造万物 其理尤奧 亦非情欲者 可得.
敬虔以遠罪 爲貴. 雲霧蔽天 不能見眞天. 然微風一過 雲霧盡去 乃見眞天. 眞天乃眞生也. 貪財好色 皆罪也, 障遮心天 故不能見眞生矣. 心之微風 何也? 요한曰, 風吹而不知何來 神之生如是. 聖神爲風 一過心天則 乃見眞天矣. 敬虔而後 神來.
敬虔乃祈禱之事. 不敬者 安得祈禱乎? 祈禱學校 以敬虔 如科目. 習得敬虔而後 祈禱有成功 亦非接援情慾者之所爲也. 아부라함 이삭이 皆以敬虔 成功. 神不離 敬虔者之中, 不在紛叫亂據之中矣. 敬虔不在時間 不在場所. 爾恒在我道則 爲弟子云 是也.
且敬虔爲禮拜事. 不敬者 安得禮拜乎? 主願神灵之禮拜 神灵在敬虔之中. 語曰 沐浴齋戒 可服上帝, 雖非沐浴 心敬虔則 可拜上帝. 見人不敬 猶爲招怒, 況天父乎? 招神之怒者 拜偶也. 拜偶者 不可拜上帝 以是也. 神學 以敬虔爲貴, 敬虔而後 愛生春之來 何嘗敬虔乎? 無聲 無臭 無迹 其發爲萬化方暢, 敬虔之發 如是 和平. 自以爲通制叫亂, 攘且恣行愛憎.
又道多言 搖亂敎會者 豈從与可生命之道乎? 保羅 活유두고之時 命曰 無譁入而靜禱. 何等 敬虔乃 使유두고復活? 是眞生之道矣.
282. 생명과 경건 / 베드로후서 1:3
생명은 진리로 말하고, 경건은 배움으로 말합니다. 복음은 생명의 진리이고, 복음은 경건의 학습입니다. 생명의 진리를 알고자 하면 마음이 항상 경건한 뒤에 생명의 오묘함을 깨닫습니다. 주역(周易)에 태극(太極)은 양의(兩儀)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태극은 근본 생명의 도리인데 그 이치는 대단히 오묘합니다. 찾아서 노력하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복음은 말하기를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셨다고 했는데 그 이치는 더욱이나 깊으니 역시 정욕이 아니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경건은 죄를 멀리하므로 귀합니다. 구름과 안개가 하늘을 가리면 진정한 하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벼운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 구름과 안개는 다 없어져서 참 하늘을 보게 됩니다. 진정한 하늘은 곧 진정한 삶입니다. 재산을 탐하고 음란[色]을 좋아하는 것은 다 죄이니, 마음의 하늘을 막고 가리기 때문에 참 삶을 볼 수 없게 합니다. 마음의 미풍(微風)은 무엇입니까? 요한이 이르기를, 바람이 불지만 어디서 오는지 모르니 성령으로 난 삶도 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성신이 바람이 되어 한 번 마음의 하늘을 지나가면 참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경건이후에 성신이 오십니다.
경건은 곧 기도의 일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자가 어찌 기도하겠습니까? 기도 학교는 경건으로 과목(科目)을 삼습니다. 경건을 학습한 뒤에야 기도에 성공이 있으며 역시 정욕을 따르지 않는 자의 행함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다 경건으로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 가운데서 떠나지 않으시니, 분쟁과 소란스러운 가운데는 계시지 않습니다. 경건은 시간에 있지 않고 장소에도 있지 않습니다. ‘너희가 항상 내 말에 거하면 제자가 된다.’ 고 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또 경건은 예배를 위한 일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가 어찌 예배하겠습니까? 주님은 신령의 예배를 원하시니,신령은 경건한 자 중에 있습니다. 목욕재계하면 하느님도 감복한다는 말이 있는데 목욕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경건하면 하나님[上帝]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경건하지 않음을 보면 도리어 화를 초래하는데, 더구나 하늘아버지께 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신학은 경건으로 귀하게 되고 경건이후에 사랑이 생겨나는 봄이 오니, 경건은 어떠합니까?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자취도 없으나 그 들어남이 온갖 꽃이 피어 만발한 것과 같습니다. 경건의 나타남이 이토록 화평합니다. 저절로 요란함을 다스리고 또 방자한 사랑과 미움을 물리칩니다.
또 말이 많고 요란한 교회가 어떻게 생명의 진리를 가히 따를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유두고를 살릴 때 떠들지 말라고 명하며 고요히 기도하였습니다. 어떠한 경건이 유두고를 부활하게 했습니까? 이것이 참 삶의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