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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과학의 산책 원문보기 글쓴이: 김광호
왕건에 얽힌 전설의 탐색
팔공산(八 : 여덟 팔, 公 : 신하를 높이는 말 공, 山 : 뫼 산)
<팔공산>
대구시의 북구와 동구, 칠곡군의 동명면과 가산면, 군위군의 부계면과 산성면 그리고 효령면, 영천
시의 신령면과 청통면, 경산시의 와촌면에 걸쳐 동서로 뻗어있는 산이 팔공산(1,193m)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국가에서 제사까지 지내며 숭배하던 산인 오악 중에 동쪽은 경북 경주시에 있는
토함산을 동악, 서쪽은 충남 계룡시에 있는 계룡산을 서악, 남쪽은 경남 산청군에 있는 지리산을 남
악, 북쪽은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태백산을 북악이라하고, 중앙은 대구시에 있는 팔공산을 중악이라
지칭하던것으로 통일신라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산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팔공산은 신라를 지켜주는 오악 중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숭배되
어 온 영산이었다.
<전설 1> 신라시대에는 부악 또는 중악이라 했으며, 고려시대까지는 공산이라고만 하다가 조선시
대에 지금의 팔공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졌다.
<전설 2> 공산전투와 고려를 세울 때에 공이 많은 여덟 장수를 칭한 것이다.
<전설 3> 신령현(영천군), 해안현(대구시), 하양현(경산군), 팔거현(칠곡군), 부계현(군 위군) 적라
현(군위군), 구산현(군위군) 부림현(군위군)의 여덟 현에 걸쳐 넓게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
다.
<전설 4> 산봉우리가 여덟 개이기 때문이다.
<전설 5> 원효의 여덟 제자가 천성산에서 공산으로 들어와 세 분의 스님은 삼성암에서, 다섯 분의
스님은 오도암에서 득도를 했기 때문이다.
<전설 6> 신라 현덕왕의 아들인 심지왕사가 속리산에서 진표율사가 미륵보살로 부터 팔간자를 받
아와서 공산의 동화사에 봉안하였기 때문이다.
<전설 7> 중국 팔공산에서 북조의 전진왕인 부견과 남조의 동진왕인 효무제와 비수 대전에서 부견
왕이 참패당한 전쟁으로,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과의 동수대전이 비슷하여 공산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설 8>동수전투에서 신숭겸과 김낙을 포함하여 8명의 장수를 잃었기 때문이다.
<전설 9>동화사의 창건주인 심지가 법주사의 영심으로 부터 받아온 189간자 중에 미륵보살의 손
가락뼈로 만든 제 8간자인 신훈성불종자가 동화사에 봉안되었기 때문이다.
<추 론>
어느 전설이 맞는지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지만, 신하를 높이는 말인 공(公)자가 들어간 것을 보
면 고려의 장수를 칭하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개국공신을 칭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개성과 거리가 너무 멀고 또 동수전투는 있
었지만, 패배한 전쟁터이므로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동수전투시에 지묘에서 신숭겸이 왕건의 목숨을 구하려고 왕건의 갑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왕건인것 처럼 군사들을 지휘하였다.
이것을 본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착각하며 화살을 쏘아 신숭겸을 죽이고 그의 목을 베었
지만, 왕건은 간신히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고려의 장수인 김락, 전락, 전이갑, 전의갑, 홍유인,
복지겸 등이 죽었으며 군사는 5,000명 중 4,930여명이 전사하고 불과 70여명의 병사들만이 살아돌
아오는 참패를 당했다.
그렇지만 팔공산 부근에는 왕건의 전설과 신숭겸 장군들의 충성심을 칭송하는 전설이 너무 많아
이곳 주민들은 공수전투 중에 지묘에서 전사한 여덟 장군을 칭한다고 믿고 있다.
또 팔공산으로 불리어진 시기가 조선시대라고 하는데 조선을 세우기 위해 이성계가 고려를 멸
망시켰기 때문에 서로 상극관계인 것은 맞지만 조선시대의 선조 때에 충렬사, 표충단, 충렬비를
세웠으며, 현종때는 기금,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 받을 정도였으므로 가능성은 있다.
그렇지만 이미 이곳의 백성들은 조선시대 이전에 팔공산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대왕재 (大 : 큰 대, 王 : 임금 왕)
<대왕재>
송림사에서 지묘로 가는 중간의 언덕 지점인 덕곡동에 있으며, 비교적 평탄한 큰 고개이다.
<전설 1> 왕건이 칠곡의 송림사를 거쳐 신라를 돕기 위해 경주로 가던 중에 이곳에서 일박을 했다
<전설 2> 지묘에서 후백제군과 대치할 때에, 왕건이 부하 장수들과 함께 주위 환경을 알기 위해 야
행을 했던 곳이다.
<전설 3>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격전하다가, 파군재에서 참패한 후에 이 고개에서 잠시 쉬어갔
다.
<추 론>
왕건이 동수전투 중에 승리를 위해 지형을 알아보려고 야행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후백제군이 진
을 치고 있는 이 부근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왕이 직접 야행을 했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리고 왕건이 후백제에게 패한 후에 대왕재에 왔다면, 송림사, 동명을 거쳐 칠곡으로 후퇴할 수
있는 쉬운 길이 있는데, 후백제 군사들이 주둔하는 부근의 백안이나 봉무동으로 피했다는 것은 불가
능한 일이므로 이치가 맞지 않는 전설이다.
그러므로 대왕재는 왕건이 신라 경애왕의 도움을 요청 받고 영천을 거쳐 경주로 진군하려던 전설
이 확실하므로, 이곳에서 지묘로 가거나, 동화사를 지나 백안 부근을 지나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왕재와 동화사 사이에는 지금도 동서로 연결되는 자연부락이 없는 편이며, 산세로 봐
서도 그 시대에는 길이 있을 수 없는 지형이며, 있다고 해도 능선을 몇개나 넘어야하므로 5,000명
의 기병이 움직이기에는 불가능하므로 지묘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경주를 향해 갈 때에, 대왕재를 거치지 않고 군위를 거쳐 영천으로 바로 가다가 태조지에
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군위에서 영천을 거쳐 경주로 가려고 했으면, 기병들이 슆게 갈 수 있는 평지이며, 적군
의 동향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영천시의 화산면, 화남면, 화북면의 넓은 통로를 이용하여 움직였을 터
인데, 경주의 반대길인 서쪽 구석이며 후백제군이 산속에 잠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청통의 은해
사가 있는 태조지 부근으로 가다가, 견훤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큰 모순이다. 또 군
위를 거쳐왔다면 태조지에서 견훤과의 전투에 패했을 때에 오던 길인 군위 쪽으로 후퇴하는 것이 더
쉬운 길이기 때문에 기마병들이 움직이기에 불편한 팔공산 쪽으로는 오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므로 대왕재, 대왕암, 망일봉, 동화사의 전설과 군위에서 영천으로 갈 수 있는 행로를 분석해
보면, 왕건과 고려군은 이곳의 대왕재를 넘어갔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무태와 연경을 통해 퇴조지로 갔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대규모의 기마병이 칠곡에서 관
문동을 통해 무태로 갈 수 있는 길은 대왕재로 가는 길보다 엄청나게 먼거리이며 더구나 금호강변의
북쪽은 통행이 불가능한 언덕이 있어 강을 두 번 건너야하는 어려운 곳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왕암 (大 : 큰 대, 王 : 임금 왕, 巖 : 암벽 암)
<대왕암>
대왕재의 북쪽에 있으며, 큰 바위 하나와 여덟 개의 작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전설 1> 대왕암은 왕건이 머물렀던 자리이므로, 후세에 바위는 왕건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이
곳 주민들이 신성한 자리라는 것을 믿고 숭상의 제를 올렸다.
<전설 2> 견훤에 패퇴한 공훤과 고려의 군사들이 왕건이 오기를 기다린 바위이다.
<추 론>
고려의 장군인 공훤이 경주에서 견훤과의 전투에서 이미 행방불명이되었다고 하는데 만일 살아서
이곳에 왔다면 그런 사실의 기록이나 전설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왕건을 기다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공훤이 기다렸 다는 사실만
으로는 옛날부터 이곳 주민들이 신성한 자리라는 것을 믿고, 숭상의 제를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왕암 뿐아니라 이 부근의 대왕재, 망일봉, 동화사가 모두 왕건의 전설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대왕암은 왕건을 가리키는 바위 이름이 확실하다.
망일봉 (望 ; 기다릴 망 日 : 해 일 峰 : 봉우리 봉)
대왕재에서 남서쪽 부근에 있으며 무태의 북서쪽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전설 1> 왕건이 동수전투 중에 신숭겸과 야행을 하다가, 이곳 아낙네들이 해가 뜰 때까지 길쌈을
하는 것을 보고, 칭찬을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설 2> 고려군이 영천을 가기 위해 이곳에서 야영을 하며 해뜨기를 기다렸다.
<전설 3> 대왕재가 아닌 무태의 아낙네들이 해뜰 때까지 길쌈을 하는 것을 보고 붙여진 이름이다.
<추 론>
동수전투시에 후백제군과 전투 중이었는데, 위험한 이곳을 왕이 직접 야행을 했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고, 또 살내나 지묘에서 벌어진 전투의 소리가 이곳까지 들리는 위험한 곳인데 아낙네들이
태연하게 길쌈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므로, 믿을 수 없는 전설이다.
그리고 영천으로 진군하거나, 일박을 하던 중이었다 해도, 5,000명의 기병이 동네에 들이닥쳤는
데, 아낙네들이 집안에서 길쌈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신라로 진군하던 고려군이 야영을 하며, 아침 해가 뜨는 것을 기다렸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망일봉은 대왕재의 서남쪽에 있고 무태에서는 북서쪽에 있으므로 대왕재나 무태에서 망일
봉에 해가 뜨는 것을 볼 수가 없는 위치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망일봉이 아니라 다른 산을 가리키던
호칭이 후세에 바뀌었거나 전설이 틀린것으로 사료된다.
동화사 (桐 : 오동나무 동, 華 : 꽃 화, 寺 : 절 사)
<동화사>
493년(신라 소지왕 15) 극달이 세우고 유가사라고 했지만, 832년(신라 흥덕왕 7)에 심지왕사가
중건할 때에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여, 동화사라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1732
년에 세워진 대웅전, 극락전을 비롯하여 연경전, 천태각 등 20여 채의 큰 규모의 건물이 있고, 비로
암 당간지주, 동화사 입구 마애불좌상, 비로암 3층석탑,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금당암, 석조부도군 등
보물 6점이 있다. 이밖에도 1992년에는 높이 30m의 석불인 약사대불이 조성되어 있고 말사를 많이
거느리고 있다.
<전설 1> 동화사를 동수라고도 했으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인 진표율사가 개창한 법상종 계열의 절
이기 때문에, 견훤 편에 가담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하고 있었으므로, 왕건이 견훤과의 전
투를 위해 경주로 가던 중에 미리 토벌하였다.
<전설 2> 왕건이 태조지에서 패하고 공산에 왔을 때에, 동화사를 중심으로 한 공산 일대에 후백제
돕던 승려들이 고려군의 깃발을 보고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추 론>
동수전투 전에도 고려군의 정보가 이들에 의해서 후백제군에게 흘러갔다는 전설이 많이 있으며,
또 전라북도 김제 출신인 진표율사가 개창한 법상종 계열이었으므로, 견훤을 받드는 집단이 동화사
에 있었으므로 고려를 적으로 알고, 후백제를 편들고 있었다는 것은 타당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왕건은 등 뒤에 적을 두고 영천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고려군은 영천으로 가기 전에 동화사에 있는 후백제의 잔당을 토벌했을 것이다.
왕건이 퇴조지에서 후퇴할 때 토벌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후백제군에게 쫒기는 형편이었으므
로 시간상 어려운 일이며, 후퇴시에 백안 부근을 지나는 고려군의 깃발을 보고 견훤의 편에 있는 무
리들이 뿔뿔이 흩어졌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왕재, 대왕암, 망일봉, 동화사의 전설들은 왕건이 대왕재를 넘어 영천으로 갔다는 것을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앞산의 은적사, 안일사, 임휴사가 전부 동화사 말사인데, 그곳에도 법상종에 속한 세력이 있었다
면, 왕건을 숨겨 주지 않고 백제군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었을 것인데,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던 것
을 보면 그곳에는 법상종의 세력이 없었을 것이다.
태조지 (太 :클 태, 祖 :조상 조, 旨 : 아름다울 지)
<영천 은해사>
태조지가 경상북도 영천시의 서쪽에 있는 은해사 부근의 산봉우리라고 하지만, 정확한 위치가 어
디인지 밝혀 지지 않고 있다.
<전설 1> 고려의 군사가 견훤에게 패배한 곳으로 태조 왕건을 가리키는 산이다.
<전설 2> 태조지에서 후백제군에게 패하고 와촌을 거쳐 지묘, 영경, 무태, 살내로 후퇴할 때에 후백
제가 뒤쫓았다.
<추 론>
고려군은 신라 경애왕의 구원 요청으로 경주로 진군하고 있었고, 후백제는 이미 영천을 정벌하고
신라를 침범했으므로, 신라의 구원병인 왕건이 올 것을 정탐하고, 군사를 옮겨 영천 태조지에 매복
하였다가 급습하여 고려군을 패하게 했을 것이다.
전투에 패한 왕건은 후백제군의 급습을 피하기 위해 진군하던 길인 와촌, 능성동, 백안, 지묘로 산
길을 따라서 후퇴했다.
그리고 고려군이 후백제군에게 전쟁에 패했는데도, 태조 왕건을 지칭하여 태조지라고 하는 신성시
한 이름을 붙인 것은 이상한 점이 있다. 퇴(退)는 ‘물러나다’라는 뜻으로 왕건이 패하여 물러났다고
해서 퇴조지라고 불렸다가, 후세에 발음하기 쉬운 태조지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경상도
에서는 ‘외’를 ‘애’로 발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투지가 은해사 부근까지는 명확히 들어났는데, 산이 없어지지는 않을 텐데, 그 부근의
산을 모른다는 것은 다소의 의문점이 있다. 또 우리나라 조상들은 산이름을 석자로 표현하지는 않았
으므로 청통 부근은 넓은 들판이지만 큰 강이 없어 저수지가 많은 편이고, ○○지는 산 이름보다는
저수지를 칭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태조지도 산이 아니고, 저수지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후세에 못
을 가리키는 지(池)자 대신그 아름다울 지(旨)바뀌었고, 그 저수지가 없어졌기 때문에 산으로 호칭
되면서 그 위치를 찾을 수 없었을 수도 있다.
복현동(伏 : 엎드릴 복, 賢 : 어질 현, 洞: 골짜기 동)
<지금의 복현동>
대구의 북쪽에 위치하며, 살내의 접경지인 산격동과 검단동의 남쪽에 있는 동네이다.
<전설 1> 영천 태조지에서 승리를 거두고, 복현동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후퇴하는 고려 왕건의
군대를 맞아 금호강을 사이에 둔 살내나 시천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이곳을 ‘견훤
덤’ 또는 ‘복현암’, ‘복현리’라 불리어졌다.
<전설 2> 야산에 보선암 혹은 복현암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선녀가 이 바위에 내려왔다가 보석
을 빠뜨리고 승천했다.
<전설 3> 경주이씨 무실공이 1728년(영조)에 1등 공신에 봉해지면서 영조가 땅을 하사하여 엎드려
절을 했다.
<추 론>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오고 있지만, 살내 혹은 시천 전투의 상황을 보면 후백제군이 잠복했다는 것
이 타당하다.
영천의 태조지에서 일격을 당한 왕건은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산길인 와촌에서 백안, 지묘,
나팔고개, 연경을 거쳐 후퇴하였고, 견훤은 왕건의 퇴로를 추격하면서, 또 다른 군사는 경산군의 와
촌을 지나 안심, 동촌을 거치는 평탄한 길을 달려 왔다면, 고려군사보다 먼저 복현에 도착할 수 있었
으므로, 이곳에 매복하였다가 금호강변이나 서변동을 먼저 차지하여 서쪽으로 후퇴하는 왕건의 퇴
로를 막았을 것이다.
이 귀중한 전설을 활용하지 않아서 고려와 후백제군의 위치와 전투 결과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
된 추리를 많이 하고 있다.
만일 복현동에 후백제군이 매복했다가 금호강이나 무태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고려군은 무태에서
금호강을 건너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여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금호강과 동화천이 만나는 지점인 무태에서 조야와 관문동 사이는 기마병의 이동이 불가
능하므로 서쪽으로 가기 위해 금호강을 건너야 하는데, 전투를 하지 않고 금호강 남쪽을 후백제가
차지하고 있었다해도 지리적으로 왕건에게는 전투에 불리한 위치이므로 지묘로 돌아 올 수 밖에 없
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태, 살내, 가는봉, 나팔고개의 전설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후백제와 고려의 큰 전쟁이 있
었음을 추리할 수 있다.
그리고 대구지방은 견훤에게는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 지역의 정서이므로, 복(伏)은 숨다는 표현이
맞지만, 현은 후백제의 군사를 가리키는 말발굽 현(誸)이나 염탐할 현(俔) 또는 견훤을 가리키는 훤
(萱)등으로 불리어졌지만 , 후세에 주민들이 동리의 이름을 좋게 꾸미려고 어질 현(賢)자로 고쳐서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살내
<동화천>
전설로는 살내의 정확한 위치가 불명확하며 지명 이름도 살내와 시천이 같은 지명이라고 추측하지
만 전설을 종합해 보면 살내는 무태 남쪽의 금호강과 동화천이 합류지점에서 나팔고개 부근까지의
동화천의 어느 지점일 것이며, 시천은 지묘동의 탑들에 있는 동화천이 확실하다.
<전설 1> 동화천을 경계로 견훤과 후백제의 양군은 대치하여 전투를 했으며, 싸울 때 양군이 쏜 화
살이 냇가에 가득했다고 살내라고 한다. 이 살내를 중심으로 양군이 전투를 하고 있을 때,
신숭겸, 김락 장군의 합세로 전세가 유리하게 되자 왕건은 지묘의 왕산에 진을 쳤다.
<전설 2>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물살이 세고 깊다고 해서 저탄이라 하였으나, 읍지
에는 전탄으로 기록되어 있다.
<추 론>
후백제군이 퇴각하는 왕건의 진로를 무태나 금호강과 동화천 합류지점 부근에서 막지 않았다면,
고려군은 금호강을 건너, 복현동을 지나서 서쪽으로 가거나, 관문동을 통해 칠곡으로 쉽게 후퇴할
수 있는 길이 있으므로 전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군사들이 서쪽으로 가던 고려군을 더 이상 가지 못하도록 막았거나 전투를 했을까?
그것은 후백제군이 살내 남쪽인 복현동에 숨었다가 고려군이 오자 금호강 남쪽에 많은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거나, 살내에서 전투를 하였다는 전설이 매우 타당성이 있다.
강 건너에 후백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면 금호강 북쪽을 이용하여 조야, 노곡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산이 막혀 금호강을 건너야하므로 고려군이 강을 건넌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금호강에서 양군이 화살로 싸웠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강의 폭이 320m가 넘어, 우리
나라 활의 유효사거리가 100~200m인 점을 감안하면, 화살로 전투는 불가능하므로, 동화천을 사이
에 두고 전투를 했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물살이 세고 깊다고 했으며, 음력 9월경에는 강수량이 적어 물길이 얕고 좁아서
화살로 전투를 할 지형이 아니지만, 그 동화천 너머의 적군을 공격하기 위해 서로 화살을 쐈을 것이
며 그 위치는 동화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바로 그 곳에서 나팔고개 사이의 동화천일 것이다.
가람봉((柯 : 나뭇가지 가. 覽 : 바라보다 람. 峯 : 봉우리 봉)
<가람봉 표지석>
연경동 앞의 동화천과 금호강 사이에 있으며 서쪽은 끝자락이 살내에서 끝나고, 동쪽으로는 지묘
의 앞산과 열결되어 있으며, 가느봉, 갈봉산, 학봉, 가남봉, 가는봉이라고도 한다.
<전설 1> 이곳에서 왕건이 견훤과의 싸움에 패한 뒤, 달아나다가 다급한 나머지 말채찍을 떨어뜨린
것이 거꾸로 꽂혀 나무가 되어 살았다. 또 왕건이 갔다고 하여 ‘가는봉’ 또는 가느봉이라고
칭하다가 한문 이름으로 바뀌면서 갈봉산이 되었다.
<전설 2> 어떤 장군이 갖고 있던 말채찍을 부러뜨려서, 한 가지는 무태 앞의 들에다 꽂고, 나머지
는 그 곳에서 제일 높은 가남봉 정상에다 꽂았다
<전설 3> 임진왜란 때에 크게 활약한 김덕령 장군이 말을 내달려서, 무태 앞들을 지나 가남봉으
로 올라가 말채찍을 정상에 꽂고는 단숨에 팔공산 쪽을 향해 뛰었다.
<추 론>
김덕령 장군은 전라도와 경상남도에서 활약했고, 대구의 곽제우 장군과는 협조를 하는 관계는 맞
지만, 팔공산 부근에서 왜병과 싸운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왕건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
데, 살내 전투시에 고려군의 합세로 전세가 유리했다고 하는 말이 전해지고 있지만, 가람봉의 전설
과는 상반된 내용이다. 그러므로 고려군은 후백제군의 힘에 밀려서 지묘로 후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전설이다. 그리고 말채찍이 살아서 나무가 되었다는 것은 왕건을 신격화하려는 지역 주민의
정서를 나타내는 전설일 것이다.
그리고 왕건의 전설이 왜 가람봉에도 있을까? 그 이유는 연경에서 무태로 가는 북쪽 길에 절벽으로
이루어진 큰 산등성이 있어 통행이 불편했기 때문에 고려군이 동화천의 남쪽의 들길을 따라 서쪽으
로 후퇴하다가 가는봉 부근인 동변에 진을 치고 서변의 후백제와 동화천에서 전투를 하였거나, 아
니면 금호강에 주둔하는 후백제군을 피하기 위해 연경이나 지묘로 후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남봉의 전설은 무태에서 고려군과 후백제군의 격전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무태 (無 : 없을무. 怠 : 태만할 태)
<무태와 동화천>
팔공산 남쪽에 있으며, 금호강과 서변천이 만나는 곳인 살내의 북쪽에 위치하며, 동변동과 서변동
을 합친 동네 이름이었으나, 지금은 조야동까지 합쳐 무태조야동이라고 한다.
<전설 1> 경주로 진군하면서 이곳 주민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왕건이 무태라고 했다.
<전설 2> 왕건이 군사들에게 ‘적진이 가까이 있으므로 태만하지 말라.’고 명령을 했다.
<전설 3> 왕건이 동수전투에서 견훤에게 대패하여 도주하면서 부하들에게 쉬지 말고 빨리 가자고
무태이족족(無怠以促足)고 독촉하였다.
<전설 4> 왕건과 신숭겸장군이 야행하면서 이 마을 아낙네가 야밤에도 부지런히 길쌈을 하고 있어
칭찬하여 게으름이 없는 동네라고 하였다.
<추 론>
무태에서 고려군이 지묘로 후퇴 중이었거나, 살내에서 패배하고 회군하던 중이었는데 주민들이
들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고려군이 후백제와 싸움을 하기 위해 경주로 진군하
는 중이었다고 해도 5,000여명의 기병이 행군하는 상태에서 주민들이 평상시처럼 부지런히 일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빨리 가자고 한 것도 일리는 있지만, 왕건이 군사에게 ‘적진이 가까이 있으므로 태만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의 근거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1582년) 때에 유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태암 이
주가 무태에 지은 정자의 환성정비문에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살내 전투에 패한 후, 연경으로
후퇴 중이었다면 더욱 이치에 맞는 말이다.
그리고 아낙네 길쌈의 전설은 대왕재의 망일봉 전설과 중복되어 사용된 것 같다.
그런데 지묘에서 바로 대왕재를 넘어 칠곡으로 가는 안전한 길을 두고 왕건의 군사는 무태로 후퇴
한 이유가 무엇일까?
대왕재에 이미 백제군이 길을 막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후퇴가 급했으므로 오르막 산길
을 따라 행군하면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평지인 무태 쪽으로 후퇴했을 것이다.
연경 (硏 : 갈 연, 문지를 연. 經 : 날경)
<연경동 느티나무>
무태와 나팔고개 사이에 있으며, 농암 이현보의 손자인 매암 이숙량이 서원을 건립할 때에 동네 이
름을 따서 연경서원(1563)이라고 했으며, 임금으로부터 서원 편액의 글씨를 하사받을 정도로 유명
한 선비의 고장이었다.
<전설 1> 왕건이 이 동네를 지나 갈 때, 선비들의 경 읽는 소리를 듣고, 연경이라고 했으며, 이곳에
서 고려군이 숙박을 했다.
<전설 2> 퇴계 선생 제자들이 서당을 세워 공부하다가 서원으로 격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추 론>
연경은 살내와 가까워서 살내전투 시에 함성이나 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이며, 영천을 가기
위한 진군의 길이었다 해도, 왕건이 5,000여명의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거나, 숙박하는 상태
인데, 한가하게 선비가 집안에서 경을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연경서원이 있는 선비의
고장이었으므로, 왕건의 전설을 후세에 경을 읽은 것으로 바꾼 것 같다.
연(硏)자는 연구할 연도 되지만 ‘벼루를 갈다’는 뜻으로도 사용되며, 경(經)은 옛 성현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것 또는 불경을 뜻하기도 하지만, 공자가 경계하라는 뜻으로 이 글자를 사용
한 기록도 있다. 또 ‘경계하다’라는 뜻이 담긴 경(警)이 선비 고장이었으므로 유교의 경(經)으로 바뀌
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적진이 가까이에 있으므로 경계를 바르게 하라고 글씨를 써서 전달했거나, 방을 붙인 것
이 아닐까? 이곳에서 일박을 했다면 더욱 타당한 이야기이다.
나팔고개
<나팔고개>
연경과 지묘 사이에 있으며, 도로 확장으로 지금은 평지이지만, 옛날에는 다소 높은 고개와 골짜기
가 있었다.
<전설 1> 고려군이 이 고개 너머에 진을 치고 있는 후백제 군을 향해서, 나팔을 불면서 진군 했다.
<전설 2>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격파하고, 이 고개를 넘으면서 나팔을 불었다.
<전설 3> 왕건은 백제군이 공격하리라는 예상을 하고, 행군하는데 공격이 없자, 군사의 사기 앙양
을 위해 나팔을 불게 하여 고려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추 론>
왕건이 지묘를 통해 연경으로 후퇴할 때에, 후백제의 추격이 없어 나팔을 불었다면, 후백제군은 탑
들에서 양면 공격을 하기 위해 탑들의 서쪽인 파군재 부근에 전투 준비를 하는 시간을 끌려고 나팔
고개에서는 고려군의 뒤를 쫒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왕건이 살내 전투에서 전쟁에 유리한 곳을 택하기 위해 군사를 후퇴시켰거나, 후백제군에
게 밀려 지묘로 본부를 옮기는 상태였다면, 바로 뒤에 적군이 공격해 오는 상태에서 고려군의 사기
앙양을 위하여 나팔을 불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팔고개에서 나팔을 불며 행군하던 길이 무태에서 지묘 쪽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밝
혀진 자료가 없어 정확한 추리를 하기가 어렵지만, 파군재의 전설에 비추어 보면 살내에서 후백제군
이 전투에 이기고, 나팔을 불며 고개를 넘었다는 전설이 가장 타당성이 있다.
무태와 연경의 행로
<동화천>
왕건이 경주로 가기 위해 무태로 갔다고 하는 전설과 대왕재로 갔다는 전설이 있다. 과연 무태나
연경은 왕건의 진격로인가? 후퇴로인가?
<전설 1> 왕건이 경주로 진격할 때에 부지런한 사람들을 보고 무태라고 했고, 경을 읽는 소리듣고
연경이라고 불러서 지금의 동리명이 생겼다.
<전설 2> 살내 전투지가 금호강과 동화사 부근이며 빨리 가자고 독촉하여 무태의 명칭이 생겼고 가
는봉의 채찍등의 전설이 있다.
<전설 3> 왕건은 대왕재를 거쳐서 태조지로 갔다.
<추 론>
대왕재의 전설이 왕건의 행로가 뚜렷하며, 칠곡에서 관문동을 통해 무태로 오는 길은 대왕재로 가
는 것보다 엄청나게 거리가 멀뿐아니라 금호강변 북쪽의 무태와 두문동 사이에는 통행이 불가능하
여 금호강을 두번이나 건너야하기 때문에 대왕재로 갔을 것이며, 또 대왕재에서 무태로는 험란한
산이 막혀 기마병은 갈 수가 없어 지묘로 갔을 것이므로 태조지로 진격시에는 무태를 거치지 않았
고, 태조지에서 패한 후에 무태로 후퇴하다가 후백제에게 막혀 다시 지묘로 왔을 것이므로 후퇴로라
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왕산 (王 : 임금 왕, 山 : 뫼 산)
지묘의 북쪽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이며 이곳에서는 주변의 모든 곳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므로 군사
를 지휘하기에는 최적의 산이다.
<전 설> 왕건이 자리 잡고 고려군을 지휘하다가 견훤에게 패할 확률이 높자 곽제우 자기로 변장시
키고 지묘의 왕산에서 능선 을 타고 세 번 뛰어서, 백안을 거쳐 염불암 부근으로 피신하였다.
<추 론>
무태에서 후백제 군을 피하기 위해 지묘에 왔으며, 전군을 지휘하기에 적당한 이 산에서 지휘를
했지만, 동, 서편으로 후백제군이 공격해오고, 남쪽은 들판이기에 모든 행동이 노출되므로, 고려군이
크게 패하자, 이곳 숲 속에서 왕건과 신숭겸이 옷을 바꿔 입는 등의 작전이 이루어 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패전 후에 왕건의 도주로를 다르게 추리하고 있는데 왕산에서 봉무공원 방향으로
백제군이 고려군을 공격하고 있었으므로 도피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후백제군의 눈을 피하기 쉬운
길인 벽안으로 능선을 세 번 뛰어서 벽안으로 피했을 것이다.
지묘 (智 : 슬기지, 모략지. 妙 : 묘할 묘)
<지묘동>
파군재, 나팔고개 사이에 있는 마을로 뒤에는 왕산이 있고, 그 앞의 넓은 벌판인 탑들과 동화천이
흐르고 있고 사람이 살아 가기에는 최적의 농촌 지형이었다.
<전 설> 지묘는 고려군이 수세에 밀려 전패를 했지만, 신숭겸의 묘한 지략으로 살아남았다는 뜻이
다.
신숭겸이 왕건의 갑옷을 입고, 왕건의 말을 타고, 왕건처럼 꾸며 백제군을 유인하여 자기는
죽으면서도, 왕건을 살려내는 묘한 작전을 성공하였다.
<추 론>
지묘는 서쪽의 나팔재와 동쪽의 파군재에서 공격을 하면, 북쪽과 남쪽은 산이 가로막고 있는 넓은
들판으로 동서만 막으면 후퇴할 길이 없는 지형적 조건이다.
그래서 동서쪽으로 공격한 백제군에게 고려군이 대패하였지만, 신숭겸 장군이 자기의 목숨을 바
쳐가며 왕건을 살려낸 충성심은 후세에 많은 칭송을 받고 있다.
그리고 김락 장군의 죽은 곳과 시기가 불명확하고, 미리사의 위치가 지묘의 지묘사라고도 하고 실
왕리에 있는 대비사의 옛터라고도 하는 등 서로 다른 전설로 인해 전투 장소나 후퇴의 경로를 다르
게 추측을 하고 있다.
탑들(塔 : 탑)
<탑들>
지묘의 왕산 남쪽에 있는 넓은 벌판이며 동화천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앞산이 막혀 다시
서쪽으로 흐른다.
<전설 1> 파군재 전투시에 후백제군의 공격으로 고려군이 이 들판으로 몰렸다.
<전설 2> 신숭겸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인 지묘사의 탑이 남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
다.
<전설 3> 이곳의 동화천을 사이에 두고 양군의 쏜 화살이 내를 이루었다고 해서 그 곳을 시천이라
고 하였다.
<추 론>
공수대전에 전사한 신숭겸을 위한 절이 지묘사이므로 동수대전이 끝난 후에 붙여진 들판 이름이
며, 지묘동 앞의 넓은 들판을 말한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으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서쪽으로 흐르는 동화천에 고려와
후백제군 마주보며 쏜 화살이 내에 가득하였다고 하는 시천이 있으며 이곳에서 서쪽의 나팔재, 동
쪽의 파군재는 다소 낮은 산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군은 시천의 전투에 밀려 파군재를 넘어 갔지만, 그 곳에 잠복한 후백제 군의 공격으로 참패
를 당하였다.
그러므로 고려가 탑들에서 패하지 않았으면 전쟁은 더욱 길어졌을 것이다.
시천 (矢 : 화살시, 川 : 내천)
<지묘의 동화천>
지묘동의 탑들에 있는 동화천이다.
<전설> 화살이 냇가에 가득하여 화살시(矢) 내천(川), 즉 시천이라고 하였으며 위치는 지묘동의
탑들에 있는 동화천이다.
<추 론>
탑들의 동화천에서 전투는 무태를 통해 서쪽으로 가려던 길이 막히자 지형상의 불리한 조건을 피
하기 위해 왕산으로 돌아와 진지를 꾸미고 후백제와 탑들의 시천에서 전쟁을 했지만 패하리라는 것
을 짐작하고, 왕건으로 꾸민 신숭겸이 전투를 했지만 파군재에서 전멸을 했다.
파군재 (破 : 깨트릴 파, 軍 : 군사 군, 재 : 고개의 뜻)
<파군재의 신숭겸 장군 동상>
불로동과 지묘, 동화사로 가는 삼거리의 고갯길이며 신숭겸 동상이 있다.
<전 설> 후백제에게 패해서, 왕건의 군대가 망했다는 뜻의 고개 이름이다.
<추 론>
후백제군이 복현동에서 살내, 무태, 연경, 나팔고개 쪽인 서쪽만을 통해 진격을 했다면, 나팔고개
와 대왕재로 가는 길은 막혔겠지만, 소집단의 병력 밖에 공격할 수 없으므로, 고려군이 쉽게 패하지
는 않았을 것이다. 또 탑들에서 전투를 하다가 후백제군에게 고려군이 파군재로 밀렸다 해도 불로동
방향으로 후퇴하며 버틸 수 있었을 텐데, 파군재에서 패한 이유는 백안이 있는 동쪽은 산이 막혀 전
쟁을 하면서 넘어가기에는 불가능하며 후백제군이 서쪽의 나팔고개를 넘어 파군재의 서쪽을 공격
하고, 태조지에서 추격해오던 후백제군이거나, 아니면 살내전투를 하던 후백제 병력의 일부가 복현
에서 가깝고 평탄한 통로인 불로동을 거쳐 파군재의 남쪽에서 양면 공격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파군재는 공간이 좁아 대군이 격전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므로 탑들의 전투에서 마지막
으로 남은 소수의 고려 병사가 이곳으로 밀려 와서 전멸했을 것이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 (申:아홉째 지지신, 崇:높을 숭, 謙:겸손할 겸, 將:장차 장, 軍:군사군,
遺:끼칠유, 蹟:자취적, 地:땅지)
<신숭겸 장군 유적지>
유적지는 지묘의 왕산 동쪽 아래에 있으며 신숭겸장군의 거룩한 그 정신을 되새기려고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신숭겸을 칭송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유적 1> 충절사 : 신숭겸 장군을 위해 지묘사를 세웠으나 유실되었고, 그 터에 1607년(선조 40년)
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서원인 충렬사, 표충단, 충렬비를 세웠으며, 1627년(현
종 13년)에 왕으로부터 기금, 서적, 토지, 노비 등을 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는 사
액 서원이 되면서 표충사를 이름을 바꾸었고, 1871년(고종8년)에 서원의 철폐로
없어졌다가, 1993년에 충절사로 다시 복원되었다.
<유적 2> 표충단 : 신숭겸이 죽은 자리에 높은 단을 쌓아 그의 충성심을 기리는 장소를 만들었다.
<유적 3> 태조왕건나무 : 표충사 안에 있는 수령이 400년 정도 되는 팽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후
세에 심은 나무임)
<유적 4> 신숭겸장군나무 :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장렬한 충성심을 기리는 수령이 약 400년
정도 되는 배룡나무를 말한다.(후세에 심은 나무임)
<유적 5> 지묘사 : 왕건은 신숭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묘사라는 절을 지었으나, 고려말에 폐
사 되고 그 자리에 충절사가 들어섰다.
<추 론> 고려시대는 물론이지만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시대에도 신숭겸 장군의 충성심을 높히 찬
양하려고 노력하였다.
백안 (白 : 흰 백, 顔 : 얼굴 안)
<백안동의 농촌 풍경>
파군재에서 북동쪽의 고개 넘으면 동화사와 와촌(영천군)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삼거리에 있는
동네이다.
<전 설 1> 후백제군의 왕건을 잡으라는 소리에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전 설 2> 그믐께 새벽 2-3시경 왕건이 팔공산에서 내려다 보니 배의 형상을 한 동네를 보고 배안
과 같다고 해서 배안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추 론>
왕건은 왕산에서 능선을 세 번 뛰어 벽안으로 피할 때에 왕건을 잡으라는 소리에 흰색 얼굴이 되
었다. 이미 신숭겸이 왕건으로 가장하여 죽었기 때문에, 후백제군은 왕건이 죽은 줄로 알고 있는데,
왕건을 잡으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죽은 시체가 왕건이 아닌 신숭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면, 왕건을 잡으라는 소리가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도망가는것이 왕건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후백제군이 끝까지 추격했을 것이므로 왕건을 잡
으라고 한 것은 잘못된 전설일 것이다. 그리고 왕건이 아니라고 해도 후백제군은 패배를 하고 도망
가는 고려군을 뒤쫓았을 것이며, 왕건은 싸움에 패한 뒤에 안전에 위협을 느껴 얼굴이 하얗게 변했
을 것이다. 지금은 백번 편안하다는 뜻이 담긴 백안(百安)으로 바뀐 것은 후세에 지역 주민들이 겁먹
은 흰 얼굴이라 뜻 보다는 편안한 동네라는 좋은 뜻의 이름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왕산에서 왕건이 봉무동으로 피해다고도 하는데 탑들과 파군재를 지나야 갈 수 있는데 이길은 후
백제 군사가 주둔한 곳이므로 불가능하며, 무사히 봉무동에 갔다고해도 거리가 너무 가까와 곧 추격
을 당할 수 있는 곳이다.
또 능선을 세번 뛰었다는 것은 왕건을 신격화하기 위한 것이지만 봉무동 쪽으로는 능선이 없으므
로 벽안으로 피한 것을 추측할 수 있는 전설이다.
일인석(一 : 하나 일, 人 : 사람인, 石 : 돌 석)
<팔공산 속의 염불암>
동화사 북쪽 기슭의 염불암 부근에 있는 돌이다.
<전 설> 왕건이 견훤의 군사들을 피하기 위해 북으로 가다가 이 돌에 앉아서 잠시 쉬었다. 이 때 노
승이 ‘왕이 아니면 앉지 마라’고 했으며, 왕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스님은 ‘북쪽으로 가지 말
고, 안전한 남쪽으로 가라’고 하였다.
<추 론>
왕건은 왜 북쪽으로 도망가다가 백제군에게 패한 파군재의 부근인 남쪽으로 향했을까?
파군재에서 고려군이 전멸했던 장소에 왕건이 군사까지 데리고 왕산에서 봉무공원으로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 견훤이 왕건을 찾기위해 봉무공원 부근을 지나 불로동으로 지나갔는데도
전투가 없었던것을 보면 백안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백안을 거쳐 북쪽으로 갈 수 밖에 없었으나 염불암 부근에서 다시 남쪽으로 진로를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공산천 상류에서 문암산을 거치면, 파군재를 피해 봉무동을 지나 남쪽으로 갈수 있는 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후백제군에게 북으로 도주했다는 거짓 정보를 주기 위한 왕건의 치밀한 계략이
거나 견훤이 불로동 쪽으로 내려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것이 아니면 북쪽은 산세가 너무 험했거나, 이미 후백제군이 왕건의 퇴로를 막기 위해 진을 치
고 있었을 수도 있다.
만일 그 당시에 이곳에서 왕건이 북쪽을 통해 칠곡군으로 도피했다면, 그해 10월에 왕건을 뒤쫓던
견훤의 대목(칠곡군), 벽진(성주군)공격으로 위험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염불암의 전설은 왕건이 북쪽으로 가다가 싸움에 진 파군재 부근인 남쪽으로 진로를 바꾼
것이 신기하여 후세에 이곳 주민들이 스님 전설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독좌암 (獨 : 홀로 독, 座 : 자리 좌, 岩 : 바위 암)
<독좌암>
봉무동의 봉무공원에 있는 바위이며 왕건이 앉았다고해서 왕바위라고도 한다.
<전설 1> 파군재에서 패한 후에 모든 군사를 잃고 봉무동에 와서 왕건이 홀로 독좌암 위에서 쉬었
다.
<전설 2> 파군재에서 백안, 일인암, 공산천, 문암산를 거쳐 봉무동에 와서 왕건이 홀로 독좌암 위에
서 쉬었다.
<추 론>
왕산 뒤에 숨었던 왕건이 산의 앞쪽으로 나와야만 봉무동으로 갈 수 있는데, 탑들이나 파군재에는
후백제군이 대규모로 주둔하고 있어서 탈출이 불가능하므로, 백안으로 피했다는 것이 타당하다.
또 남쪽으로 포위망을 바로 뚫었다 하드라도 봉무동은 거리가 너무 가깝고, 쉬운 길이기 때문에 후
백제군의 계속 공격으로 독좌암에 앉아 쉴 틈이 없었을 것이며 고려군을 격파한 견훤이 바로 왕건을
잡기위해 봉무동을 거쳐 불로동으로 왔는데도 왕건 안전했던 것을 보면 백안으로 도피한 것이 확실
하다.
그러므로 파군재에서 백안, 일인암에 갔다가 다시 백안으로 내려와 공산천, 문암산를 거쳐 봉무동
에 왔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후백제군이 다른 곳을 공격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을 것이므로 봉
무공원의 독좌암에서 쉴 수있는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후백제군은 왕건이 남쪽으로 다시 내려오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북쪽을 통해 칠곡군으로 도
망친 것으로 추측하여 견훤이 한 달 후인 10월에 왕건을 추격하기 위해 대목(칠곡군)을 공격하였으
나, 왕건이 지난 길이 아님을 확인하고 11월에 다시 벽진(성주군)을 공격했다.
만일 미리사에서 전투가 있었다면 그 이후에도 후백제는 공격을 계속하였을 텐데, 초례봉, 안심,
입석과 금호강을 건너 앞산으로 가는 동안에 한 번도 견훤의 공격 받을 일이 없었다.
이와같은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견훤이 왕건의 퇴로를 몰랐기에 미리사 전투는 없었다고 보는 것
이 타당하며 왕산, 백안, 일인암, 독좌암을 거쳤다고 하는 전설들이 너무나도 일관성이 있으므로 퇴
로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불로동 (不 : 아닐 불, 老 : 늙은이 로)
<고분에서 본 불로동>
파군재 남쪽에 있으며, 금호강 동쪽에 있다.
<전설 1> 왕건이 지나다갈 때 늙은 사람은 없고, 젊은 사람들만 있었다.
<전설 2> 노인과 부녀자는 모두 피난 가고 어린 아이와 젊은 사람들만 있었다.
<전설 3> 후백제군이 왕건 추격을 위해 먼저 지나갈 때, 아이들이 방안에 어른들과 함께 숨어 있다
가 그 뒤 왕건이 지나갈 때, 아이들이 구경을 하기 위해 밖에 나와 있었다.
<추 론>
노인과 부녀자가 피난을 갔는데, 어린 아이와 젊은 사람들은 피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말은 타당
성이 없다.
우리 조상들은 어른만 피신을 시키는 행동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며 살아 왔기 때문에 만일
피신을 했다면 어른들과 아이들을 무사히 보호하기 위해 함께 있었을 것이다. 또 후백제군이 불로동
부근을 왕건보다 먼저 추격하고 그 뒤에 왕건이 갔다는 전설도 있는데 왕건은 벽안, 염불암, 봉무공
원을 거치다 보니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에 견훤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로는 왕건이 왕이 타는 수레도 없이 초라하게 걸어가고 있다는 뜻으로 왕으로서의 위
상을 잃었기 때문에 생긴 말일 수도 있다. 불로의 로자는 임금 수레 로(輅)자였으나, 쓰이지 않는 용
어이므로 노인 노(老)자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견훤 군사가 올 때는 숨어있다가 왕건이 지나갈 때는 아이들이 구경했다는 전설로 미루어
봐서 이곳 주민들은 왕건에게는 친근감을 느끼지만 견훤은 증오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전설
이다.
해안(解 : 풀 해, 顔 : 얼굴 안)
<해안>
도동의 동쪽, 방촌동의 북쪽이면서 초례봉의 서쪽에 있는 동네이다.
<전설 1> 왕건이 적의 공격에서 벗어나자 얼굴이 평상을 찾았다.
<전설 2> 왕건이 견훤과 전투할 당시 보다 200여년 전인 신라 경덕왕 때에 해안현이라고 했다
<추 론>
왕건의 전설일 수도 있지만 공산전투에 패배한 왕건이 급히 퇴진하여, 이곳에 도착하면서 안전을
느껴, 긴장이 풀리면서 얼굴이 밝아진 것이 원래 있던 지명인 해안이라는 뜻과 상황이 일치되어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일 수도 있다.
왕건이 불로동에서 개성으로 가려면 서쪽의 입석방향으로 가야하는데 그 길은 들판이나 평지이기
때문에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길을 두고 반대 방향이면서 행군에 불편한 동북쪽의 산기슭을 통해
해안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후백제의 군사가 부근에 있으리라 짐작했거나, 견훤이 왕건을 쫒기 위해 칠곡으로 가면서 다소의
후백제 군사를 대구에 남겨두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비사(大 : 큰 대, 悲 : 슬플 비, 寺 : 절 사)
<실왕리 신숭겸 장군 영각>
능천산과 초래산의 중간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으며,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영모
재와 비석이 있다. 그 비문에 따르면 왕건이 신숭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미리사의 터에 대비사를 세
웠다고 한다.
<전설 1> 왕건이 실왕리에서 신숭겸의 죽음을 알고 크게 슬퍼하며 울었다고 해서 절 이름을 대비사
라 했다.
<전설 2> 김락 장군이 파군재 전투 후, 두 달 뒤에 미리사 부근에서 백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해서
왕건이 슬피 울었다.
<전설 3>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편지에는 두 달 뒤인 12월에 대비사 부근에서 전투를 하다가 김락
의 해골을 던졌다고 했다.
<추 론>
미리사가 지묘에 있었다고도 하고, 실왕리 부근의 대비사의 옛 절이라는 설이 있어, 후세에 해석이
달라지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고려사에는 김락은 927년 음력 9월에 신숭겸과 함께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견훤이 왕
건에게 보낸 편지에는 파군재 전투가 있은 두 달 뒤에 대비사 부근에서 전투를 하다가 김락이 전사
했다는 편지 내용으로 추리하는 것은 시간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왕건과 김락 장군이 파군재에서 아주 가까운 곳인 대비사까지 도착하는데, 두 달이 걸렸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또 견훤과의 전투는 있을 수 없는 시기이다.
그 때가 10~12월이므로 왕건은 앞산에 숨어 있었고, 견훤은 왕건을 잡기 위해 10월부터 대목(칠
곡군), 벽진(성주군)을 공격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대비사 전투는 없었으며, 왕건과 견훤
이 없는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전투를 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만일 왕건이 이곳 미리사에 있는 것을 알고 전투를 했다면 후백제군이 계속해서 추격의 전투를 했
을 것이므로 앞산으로 도피가 불가능하여 왕건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또 파군재 전투에서 김락의 전사가 영모재의 비석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미리사 전투를 주
장하는 것도 잘못된 견해이다.
신숭겸이 싸움을 하던 중에 죽은 것이 아니고 자기를 살리려고 대신해서 죽은 죽음이 너무나도 가
슴 아픈 일이며 그 고마운 마음을 가지다보니 여덟 장군의 비석을 다 만들지 못하고 신숭겸 영모재
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비사 부근의 전투는 독좌암, 백안, 장군바위, 불로동, 해안, 안심, 초례봉의 전설과는 너
무나도 상반된다.
그러므로 왕건이 실왕리 부근에서 전투는 없었지만, 신숭겸의 죽음을 전해 듣고, 크게 슬퍼하며
울었다는 전설이 맞을 것이다.
실왕리(失 : 잃을 실, 王 : 임금 왕, 里 : 마을 리)
<왕건 길>
불로동과 평광동 사이에 있는 도평동에 속하는 동네이다. 조선시대 말엽에 왕을 잃었다는 것은 수
치스러운 지명이라 하여 시량리로 고쳐 부르고 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전설 1> 나무꾼이 왕건을 만나 주먹밥을 주고 나무를 다하고 내려와 보니 그 사람이 사라졌다. 뒤
에 그가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왕을 잃은 곳이라 하여 '실왕리'라 부르게 되었다.
<전설 2> 왕건이 싸움에 지자 피신을 하여, 고려군이 왕을 잃었기 때문이다.
<전설 3> 원래 ‘실안(谷內)’이었는데 왕건이 슬퍼하여 ‘서러워’로 불리다가 시량리로 바뀌었다.
<추 론>
왕건이 혼자 후퇴한 것이라면 이해가 되는 전설이지만, 5,000명의 기마병 중에 30~70여명이 살
아서 함께 후퇴했다는 은적사 전설들로 미루어 봤을 때, 나무꾼이 왕이라는 것을 모를 턱이 없었을
것이다. 고려의 군사들이 나무꾼을 속이기 위해 왕건을 보통 사람의 호칭으로 부르거나 서로 같은
군사인척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왕산에서 피신을 했는데 시량리에서 다시 고려군이 왕을 잃었다는 전설은 백안의 전설과
중복된 듯하다.
그리고 시량리는 신숭겸 영모재가있는 부근이므로 신숭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왕건이 서러
워했을 수는 있지만 서러워라는 말이 시량리로 바뀐다는 것은 불가능한 말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왕의 대접도 받지 못하고, 밥을 얻어먹는 초라한 모습이 왕의 지위와 위엄을 잃었기 때문
에 실왕리로 불리어 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초례봉(醮 : 초례 초, 禮 : 예도 례, 峰 : 봉우리 봉)
<초례봉>
매여동과 안심4동의 경계선이 있는 내곡동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전설 1> 옛날 공산에 어씨라는 나무꾼이 초례봉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선녀를 만나 초례를 올리고
백년가약을 맺었다고 해서 초례봉이라고 하였다.
<전설 2> 왕건이 시량이에서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전열을 재정비해 초례봉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제
사를 지냈다.
<전설 3> 왕건이라는 것을 알고, 호족이 자기 딸을 아내로 바쳐 초례를 치르게 하였다.
<전설 4> 이곳에서 초례를 치르면 반드시 아들을 낳기 때문이며, 또 이곳에 기원하면 아들을 낳는
다고도 한다.
<전설 5> 이곳에 묘를 쓰면 자손들이 복을 받는 명당이라고 하며, 여기에 묘를 쓰면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날이 가물면 동민들이 그 자리를 확인한다고 한다.
<추 론>
후백제군에게 고려군이 참패하였지만, 남은 군사들과 힘을 합쳐 승전을 위한 기원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고려의 패잔병으로는 대규모의 후백제군과 싸우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먼 훗날을 기
원하는 제례를 올렸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백성이 흠모하는 왕에게 딸과 혼인관계를 맺게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상례였으므로 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또 왕건은 자기의 권세를 넓히려고 토호
들과 정책적인 결혼을 많이 하였는데 이곳에서도 자기 안전을 위한 초례가 아니었는지?
그러나 초례를 치른 것이 사실이라면, 그 뒷 날, 왕건이 초례봉 부근에도 큰 자취를 남겼을 터인데,
그런 흔적이 전혀 없으므로, 사실이 아닌 구전일 가능성이 크지만, 왕건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며, 이곳에서 왕건의 전설이 있는 장군바위 쪽으로 하산하여 안심으로 향했을 것이다.
장군바위
<장군 바위>
초례산 동남쪽에 걸쳐 있는 내곡동의명마산에 있는 바위이다. 산 중턱 연담 폭포의 위쪽에 기이하
게 생긴 웅대한 암석을 장군바위라고 한다. 바위 표면에 황성 등 고려 장군을 상징하는 흔적이 아직
도 남아 있다.
<전 설1> 왕건이 이 바위를 지휘 장대로 사용하였다.
<전 설2>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서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수행을 하였다.
<추 론>
김유신 장군의 전설이 있긴 하지만, 바위와 장군이 얽힌 이야기는 없으며, 동수 전투 시에 명마산
부근에는 전쟁이 있었다는 전설은 없고, 왕건이 바위를 지휘봉으로 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
지만, 왕건을 신격화하려는 의도에서 생긴 전설일 것이다. 그러나 왕건이 지나간 길이라는 것을 추
측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그런데 왕건을 칭하는 바위라면 이미 왕으로 즉위한지 10년이 넘었는데, 장군 바위라는 말은 격에
맞지는 않지만, 이미 대왕재에 대왕암이 있으므로 구별을 위해 지은 이름이라고 추측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대는 장군암이라고 불렀을 텐데 장군바위로 바뀐 것이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는 장군 바위는 유명산마다 있는 편이다.
계명동 (鷄 : 닭 계, 鳴 : 울 명, 洞 : 골 동)
<괴전동>
안심동의 동쪽에 있는 괴전동에 속하며 괴동, 괴몬골, 계명동이라는 세 개의 이름으로 불리는 자
연부락이 있다.
<전 설> 왕건이 견훤과의 싸움에 패하여 도망치던 중에 이 마을에서 새벽에 닭의 울음소리를 들었
다.
<추 론>
2~4시경에 울기 시작하는 새벽 닭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왕건이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어
둠을 이용해 안전한 도피를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심 (安 : 편안할 안, 心 : 마음 심)
<안심동>
금호강 북쪽, 율하동과 경산시 하양면 청천리 사이에 있는 넓은 지역이다.
<전 설> 적의 공격을 완전히 벗어나, 이곳에서 왕건이 안심하게 되었다.
<추 론>
실왕리의 미리사 부근에서 후백제군과 전투하여 김락을 잃었다면, 그 이후에도 후백제군의 공격
으로 가까운 안심에서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파군재 전투 이후에는 다른 전투
는 없었을 것이며 계속 동쪽으로 가다가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행로를 바꾸었다.
왕건의 후퇴로를 보면 왕산에서 북쪽인 염불암, 불로동에서 동쪽인 안심으로 간 것을 보면 처음
에 목적지와 반대쪽으로 가다가 방향을 바꾼 것은 적에게 거짓 정보를 주기 위해서이고, 평지보다는
산속 골짜기를 이용하였으며, 밤에 주로 활동을 한 이유는 안전한 도피를 위해 노력하였다.
둔지봉(遁 : 숨을 둔, 地 : 땅 지, 峰 : 봉우리 봉)
<신평동>
현재 신평동 신덕마을 부근의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금은 돈지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설 1> 둔지봉은 ‘숨을 터가 있는 봉우리’란 뜻으로 팔공산에서 도피한 왕건이 잠시 몸을 숨겼기
때문에 '둔지’라고 했다.
<전설 2>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기 위하여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켰을 때에 반달이
떠 있었다.
<전설 3> 돼지를 많이 키우는 곳이라 해서 돈지방이라고 한다.
<전설 4> 조선시대에 군영지가 있어 이곳에 군사가 주둔했기 때문이다.
<추 론>
둔지봉이란 ‘숨을 터가 있는 봉우리’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었으나, 숨었다는 뜻의 둔보다 발음
하 기 쉬운 돈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돈지라고 하여 돼지와 관련된 전설이 생겼을 것이기에, 둔지와
반야월의 전설과 관련 등으로 미루어 왕건을 지키려는 군사들이 주둔했거나, 왕건이 숨었다는 전설
맞을 것이지만 견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주둔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전설이다.
그리고 왕건은 둔지봉 앞에는 가기 쉬운 넓은 벌판이 있는데도 팔공산 끝자락인 산속으로 이동하
였다.
반야월 (半 : 반 반, 夜 : 밤 야, 月 : 달 월)
<반야월의 들판>
옛날에는 용계, 신기, 서호, 동호동을 포함하는 큰 동네였는데, 지금은 행정상으로는 반야월동은
없으나, 이곳 주민들은 그 부근 모두를 반야월이라 칭한다.
<전설 1> 조선시대 숙종이 민정을 살피러 전국을 돌던 중, 이 고장의 이름이 없다고 하여 반야월이
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전설 2> 왕건이 추격에서 벗어나 후퇴하던 중, 이곳에 왔을 때, 반달이 떠 있던 밤중이 이었기 때
문이다.
<전설 3> 왕건이 돈지봉에서 밤에 반달을 보고 반야월(半夜月)이라 했다.
<추 론>
이곳 주변의 모든 마을들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동리명이 있었고, 또 왕건의 전설에 의한 동네 이름
이 참으로 많은데, 반야월은 지금의 용계, 신기, 서호, 동호, 안심을 포함하는 큰 동네인데 1700년대
인 조선시대까지 동네 이름이 없어서 숙종에게 지어 달라고 한 말은 이해가 안 되는 전설이다.
그러므로 돈지봉, 계명, 안심 등의 전설과 연계해 보면 반야월도 왕건의 전설일 것이다.
입석(立 : 설 립, 石 : 돌 석)
<입석동>
금호강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전 설> 왕건의 부하장수들이 말총으로 큰 돌을 굴려서 입석동까지 왔다가 그대로 두고 떠나버려,
그 이후부터 선돌 즉 입석이라 칭하였다.
<추 론>
계명동, 반야월의 전설에서 보듯이 왕건은 후백제 눈을 피하기 위해서 밤을 이용해 산속으로 동쪽
으로 가다가, 안심에서 방향을 바꾸어 서쪽에 있는 성주로 가기 위해 입석에 도착했을 것이다. 혹시
라도 후백제군의 공격을 걱정하여 돌로서 장애물을 만들고 방어 준비를 했지만, 추격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강을 건너려고 했을 것이다.그런데 동수전투시에 파군재에서 대패할 때까지 입석에서는
서로 싸웠거나 공격 준비를 한 적이 없으므로 왕건이 서쪽으로 가기 위해 금호강을 건너려고 한 그
때의 전설이 확실하다.
그러나 금호강 서편에는 너무 심한 절벽과 수심이 깊어 건너가기에는 불가능하여, 강변을 따라 검
사동을 거쳐 남쪽으로 갔을 것이다.
금사(錦 : 비단 금, 沙 : 모래 사)
<금호강변>
금호강변의 넓은 모래밭으로 입석과 팔현마을 사이에 있으며, 금사로 불리어지다가 검사로 바뀌어
지금은 검사동이라 칭한다.
<전 설>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패하여 도주하다가 금호강변 모래가 비
단처럼 빛깔이 좋고 크기가 똑같다고 하여 금사라고 하였다.
<추 론>
경상도 지방에서는 'ㅡ'의 발음을 'ㅓ'로 하기 때문에 금사동이 슆게 검사동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또 입석에서 서쪽에는 심한 절벽이 막혀있어 통행이 불가능하므로 가지 못하고, 금호강을 따라 남
쪽의 고모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입석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촌 유원지로 올라가지 않은 것은
주위가 너무 잘들어나는 평지이기 때문에 피했을 것이다.
고모 (顧 : 마음에 새길 고, 母 : 어머니 모)
<고모령 노래비>
만촌동 동쪽에 있으며 금호강 서쪽이고 방촌동의 맞은편에 있다.
<전설 1> 지형지세가 형제봉을 돌아보는 형상이다.
<전설 2> 왕건이 패하여 도피할 때,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추 론>
고모동에서 형제봉을 돌아본다는 것은 고모동에서 형제봉까지는 평지인 것을 알 수 있고, 왕건의
어머니 생각했다는 전설은 금호강을 건너 팔현마을을 거쳐 고모에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전설이다.
팔현촌: (八 : 여덟 팔, 峴 : 고개 현, 村 : 마을 촌 )
<팔현촌의 과수원>
금호강 서쪽에 있는 고모동에 있는 큰 마을이다. 우리나라의 백로의 최대 서식지 및 번식지이다.
<전설 1> 조선 초기 청백리 문신이었던 문평공 전백영이 태어난 집에 심은 향나무가 팔(八)자 모양
으로 자라 팔현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설 2> 조선조 초 태조가 판서 정숙영의 묘소에 향나무를 심었던바 그 향나무가 기이하게도 팔
(八)자 모양으로 자랐다.
<추 론>
왕건의 전설은 없지만 금호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을 찾으려고 강 주변의 갈대와 억새에 몸을 숨기
고, 입석에서 검사로 율하천을 따라 남진하다가 물이 얕고, 좁은 금호강과 율하천이 만나는 두물머
리 부근에서 강을 건너 팔현마을로 갔을 것이라는 것을 고모의 전설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입석에서 검사동, 고모동까지는 전설로 왕건의 행로를 추리할 수 있지만, 고모동에서 앞산의 은적
사까지의 경로는 전설이 전혀 없어 후퇴로를 짐작도 할 수 없는 형편이지만 지금까지의 행로를 분석
해 보면 산을 통해 움직였으므로 연호산, 두리봉, 무학산 남쪽을 이용해 수성못 부근으로 갔을 가능
성이 많다.
그리고 팔현마을의 팔자가 들어간 것은 팔공산의 전설처럼 동수전투에서 죽은 여덟 신하와 관련
이 있는 지명인것처럼 느껴진다.
신천(新 : 새로울 신, 川 : 내 천)
<신천>
비슬산에서 시작하여 가창, 용계를 지나 침산동에서 금호강과 합류하는 대구도심을 가로지르는 냇
물이다.
<전설 1> 왕건이 신천을 건너면서, 재기를 해서 새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전설 2> 대구 판관 이서가 새롭게 조성한 물줄기라는 의미에서 신천이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
다.
<추 론>
1778년 대구 판관 이서가 신천의 물길을 돌린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흐르던 물길 그대로이며, 신
천이란 이름도 옛날부터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전국지역지리학회, 전영권, 2004년). 그렇다면 왕건
이 동수 전투시에 다짐한 "새로 다시 돌아오겠다." 뜻으로 신천이라고 불렀을 수도 있다.
은적사(隱 : 숨길 은 , 跡 : 자취 적, 寺 : 절 사)
<은적사에 있는 왕건 굴>
대명 3동의 대덕산 자락의 앞산에 있는 926년(신라 경애왕 3년)에 왕건이 목숨을 구한 곳이라하여
창건된 절로서 동화사의 말사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이야기이다.
왕건이 대구에서 동수전투를 할 당시에 이미 경애왕은 927년에 견훤에게 죽음을 당했으며, 왕건이
무사히 개성으로 돌아가 절을 지으라고 했다면 927년인 경애왕이 아니고 927년 이후인 경순왕 이
후에 이 절이 창건되었을 것이다.
<전 설> 은적사의 대웅전의 우측, 대나무 숲 속의 동굴에서 3일 동안 숨어 지냈으며, 견훤의 군사들
이 은신처인 굴까지 접근했으나 거미가 줄을 쳐서 왕건을 보호했으며, 굴 아래에 있는 샘은
왕건이 물을 먹었기 때문에은 장군수라고 하였다.
<추 론>
후백제의 군사가 이시기에 왕건을 추격하기 위해 칠곡이나 성주에서 공격 중이었지만 대구에 잔
류한 고려군을 잡기위해 후백제 군사의 일부분을 남겨두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백제군이 왔을 때에 거미줄로 왕건을 보호했다는 것은 왕건을 신격화시키기 위한 이야기
이고, 그때 이미 왕건은 고려의 왕이 된지 10년이나 되었는데, 샘의 이름을 장군수로 불렀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명칭이다. 아마 안지랑골의 왕정과 구별하기 위해 후세에 장군수라고 불리어진 것
같다. 또 은적사의 전설과 안일사의 전설이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데 은적사에서 3일간이나 운
둔했으므로 숨은 굴이나 샘물은 왕건이 이용한 것이 사실일 것이며 거미줄의 이야기는 은적사와 안
일사에 왕건을 신성시하기 위해 생긴 전설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굴을 왕건 굴이라고 칭한다.
안일사(安 : 편안할 안, 逸 : 숨을 일, 寺: 절 사)
<안일사>
대명6동 앞산의 안지랑골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927년(신라 경순왕 1년)에 창건된 절로서 동화
사의 말사이다.
<전 설> 왕건이 3개월 동안 왕굴에 장군들은 장군굴에서 기거하였고, 삼정곡이 있어 왕은 왕정, 장
군은 장군수, 군졸들이 먹던 세 개의 샘이 있어 안심하고 숨어 지냈던 절이다. 후백제 군사가
왕건을 찾으려고 이곳에 오니, 안개와 구름으로 앞을 안보이게 했으며, 왕거미가 거미줄을 쳐
서 백제군이 올라가지 못하게 하여 왕건을 보호했다.
<추 론>
왕굴, 삼정곡이 안일사의 영향을 받는 가까운 골짜기이기 때문에 안일사의 전설이 곧 안지랑골의
전설일 것이다. 왕굴이나 장군굴, 삼정곡은 왕건을 따르는 고려의 군사도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왕굴, 왕정이 따로 있었다고 하는 것과 운무와 왕거미줄의 이야기는 왕의 신성함을 나타내려
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또 왕건이 처음부터 고려 군사와 함께 도피하고 있었을 것인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고려의 군사들과 함께 도피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설에 나타났다.
그리고 후백제군에게 패하고 개성을 비워 둔 채 3개월이나 여기에 있었던 이유는 견훤이 칠곡, 상
주를 공격하던 때가 10∼11월경이지만, 그 이후에도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후백제군이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을 알았거나 또는 예상하고, 공격을 벗어나기 위해 견훤의 철군을 기다렸을 것이다.
안지랑이
<안지랑골>
앞산에 있는 안일사가 있는 골짜기인 앞산과 산성산 중간에 있으며 왕굴, 삼정곡이 있다.
<전설 1>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앞산 동북쪽으로 뻗어 내린 골짜
기에서 편안하고, 안일하게 지내다가 돌아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설 2> 조선조 양녕대군이 이곳으로 도피해서 편안하고 살기 좋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설 3> 평지에서 쳐다보면, 이 골짜기에 아지랑이가 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설 4> 안지랑골은 지렁이 탄생 설화를 가진 견훤이 안지랑골까지 왔다고 해서 왕지렁이로 불리
다가 안지랑이로 바뀌었다.
<추 론>
왕건이나 양녕대군이 편안하게 지냈다고 하는 것은 말의 속성상 안지랑이로 바뀔 수가 없다. 한문
으로 해석하면 편안할 안(安 : 편안할 안)을 앞에 쓰면 될 것 같지만 뒷말과 붙이면 오히려 편안하게
안지났다는 부정적인 우리말이 된다.
여러 가지 전설을 종합해 보면, 견훤은 왕건의 퇴로를 알지 못해서, 대목군(칠곡군), 벽진군(성주
군)을 공격하는 중이었고, 만일 왕건의 퇴로를 알고 이곳에 견훤이 왔다면 대전투가 있었거나, 끝까
지 왕건을 잡으려고 공격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왕건은 그 이상 도피하지도 못했을 것이며, 앞산에서 4개월이나 숨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에 견훤이 왔다는 전설은 믿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견훤 즉 지렁이가 아닌 왕건이 쉬었다고 해서 안지렁이라고 붙여진 이름이 더 타당하것 같다.
그 이유는 경상도에서는 지렁이를 ‘지래이’라 말하고 있으며, 지금도 이 지방에서는 그곳을 ‘안지래
이’라 통칭하고 있다.
그러나 아지랑이가 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아지래이라는 전설은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이다.
연회골
<대구 앞산>
대명 7동의 앞산에 있는 골짜기이며 지금은 여희골이라고 한다.
<전설 1> 고려의 군사들이 종지골에서 후백제군에게 이기고, 왕건과 재회하여 승리의 축하연을 가
진 곳이라 하여 연회골이라 하였다.
<전설 2> 여우가 많은 골짜기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추 론>
종지골에서 고려가 승리를 거두었다면, 견훤은 칠곡, 성주 공격을 미루고 앞산으로 와서 큰 전투
가 계속되었을 것이므로, 왕건은 앞산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전투는 없었을것이다.
만일 이곳에 도피 중인 왕건이 연회를 했다고 하면, 후백제군의 추격을 완전히 벗어났기에 자축연
은 할 수 있었을 것이며, 또 파군재에서 패한 고려군의 패잔병이 앞산의 왕건과 재회를 하고, 자축연
을 했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전설은 왕건이 홀로 도피한 것이 아니고 고려군사도 함께 있었음을 나타내는 전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여우가 있는 골짜기라 해서 여우골이라는 명칭이 수없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달비골
<달비골>
임휴사 뒷산인 봉덕동에 있으며, 앞산 남쪽에 있는 월배산의 골짜기이다.
<전 설> 팔공산 대전에서 대패한 왕건이 여러 곳을 거쳐 이곳에 와서 잠시 쉬고 있을 때, 크고 둥근
달이 떠올라 앞을 바라보는 자신의 등 뒤에 달이 비쳤던 골짜기라 하여 달배골이라고 하다가
달비골로 바뀌었다.
<추 론>
왕건은 안일사에서 임휴사로 갈 때에 가기 쉬운 낮은 통로를 이용했다고 추리할 수 있으나, 왕굴의
위치와 달비골의 전설으로 미루어 남쪽의 월배산의 산등선을 넘어 임휴사로 왔다는 것이 증명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왕건이 후퇴한 길은 평지나 들판이 아닌 산속으로 다녔으며 주로 야간을 이용해서 이동했다고 추
리 할 수 있으며, 월(月)은 달을 말하며, 배(背)는 등을 말하는 것으로 월배와 달배는 같은 말이다.
그러나 시내의 월배와는 관련이 없는 전설인 것같다.
운둔사
<대구 앞산>
전설은 있지만, 앞산에서는 위치를 찾을 수가 없다.
<전 설> 왕건이 숨어서 지냈다고 해서 붙여진 절 이름이다.
<추 론>
앞산에는 많은 절이 있는데 운둔사가 다른 절 이름으로 바뀌었거나, 소실되어 전설만 남겨 두고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임휴사(臨 : 임할 임, 休 : 쉴 휴, 寺 : 절 사)
<임휴사>
상인동에 있는 절이며 앞산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앞산의 높은 산줄기가 뻗
어 있고 서쪽은 평탄한 벌판이다. 921년(신라 경명왕 5년)에 영조대사가 창건하고 1801년(조선 순
조 1년)에 무주선사가 중창하였으며, 그 후 1930 포산화상이 수리했고, 2008년에 화재로 소실된 대
웅전을 복원하였으며 동화사의 말사이다.
<전 설> 왕건이 앞산에서 쉬어간 곳이다.
<추 론>
안일사, 왕굴, 삼정곡, 달비골과 도원동의 전설이 너무나도 일관성이 있으므로, 왕건이 안지랑이 골
에서 달비산을 넘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쉬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개성을 가기 위해 서쪽으로 가야한다면 안일사에서 성서를 거쳐 강창으로 가면 길도 편안
하고 거리도 엄청나게 가까운데 궂이 은적사의 뒷산인 안지랑골있는 달비산을 넘어 이곳 임휴사로
피신한 것을 보면 왕건은 계속 주위의 있을 수 있는 후백제 군사들을 경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원(桃 : 복숭아나무 도, 園 : 동산 원)
<복숭아 꽃>
대곡동, 상인동, 대명 6동 사이에 있으며, 임휴사와는 접경을 이루고 있고 남쪽에 산이 있는 넓은
벌판으로 지금의 도원동이다.
<전 설> 왕건이 마지막으로 대구의 앞산을 떠날 때,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있는 것을 보고 도원이라
고 했다.
<추 론>
왕건이 신라를 돕기 위해 개성을 출발하여, 동수전투를 시작한 시기가 927년 9월이면, 대구의 복
사꽃은 3월 말경에 피기 때문에 대구에 7개월 동안이나 머물렀다.
그 이유는 동수전투와 후퇴, 도피 및 견훤의 후백제군이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완전히 철군할 때
를 기다렸다가 안전하게 개성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왕선고개(王 : 임금 왕)
<왕선고개>
파호동의 강창에서 금호강을 건너면, 달성군 다사면 서쪽에 있는 고개이며, 옛 이름은 왕쉰재였
다.
<전 설> 왕건이 쉬어간 고개이다.
<추 론>
개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쪽의 낙동강은 건너야 하는데 사방에서 모든 행동이 노출되는 지형이
므로 위험할 수 있으며 또 수심이 깊어서 안전하게 건너기가 어려워 도원동, 대곡동, 구라리를 거
쳐 북쪽으로 오다가 수심이 얕아서 건너기가 쉬운 파호동에 있는 강창 부근의 금호강을 건너 다사의
고갯길인 왕쉰재로 갔을 것이다.
그 뒤 난동강을 건너 성주, 김천을 거쳐 개성으로 돌아갔다.
왕건의 행로 분석
<팔공산>
1. 처음에는 목적지와 반대 쪽으로 갔다.
- 왕산에서 봉무동은 후백제의 포위망을 뚫지 못해 벽안에 갔더라도 그 곳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는데 염불암까지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남쪽인 봉무공원으로 왔다.
- 불로동에서 서쪽인 입석방향으로 오지 않고 동북쪽인 해안, 시량리, 초례봉으로 갔다가 남쪽인
안심을 통해 입석으로 왔다.
- 입석에서 서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인 앞산의 은적사로 갔다.
- 안일사에서 서쪽으로 낮은 계곡을 이용하지 않고 남쪽의 달비산, 대덕산을 넘어 임휴사로 왔다.
2. 벌판이나 평지를 피해 산속으로 다녔다.
- 불로동에서 안심으로 가는 길은 평지인데 북쪽의 산속을 이용하였으며 다시 안심에서 입석으로
올 때에도 둔지봉이 있는 팔공산 주변의 산을 이용했다.
- 입석에서 시내를 거쳐 성주로 가는 길인 다사까지는 평지인데 그 길을 이용하지 않고 앞산으로
갔다.
- 안일사에서 성서를 거쳐 강창으로 가면 길도 편안하고 거리도 엄청나게 가까우며 임휴사로 갈
때도 낮은 산 언덕을 이용하지 않고 남쪽의 높은 산인 월배산, 대덕산을 넘어 임휴사로 왔다.
3. 밤에 주로 활동한 흔적이 많다.
- 계명동, 반야월, 월배(달비골)의 전설이 대표적인 예이다.
<추 론>
- 전북 김제 출신 진표율사의 법상종 계열의 사람들이 있어 이들에게 알려질 경우 견훤에게 정보
를 제공해 줄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 견훤이 대구에 잔당을 남겨두고 칠곡이나 성주를 공격했을 수도 있다. 앞산의 은적사, 안일사의
전설에 후백제군이 등장한다.
- 왕건 스스로가 적군에게 탄로될 것이 두려워서 안전한 도피를 위해 미리 계획된 일일 수도 있
다.
반월당(半 : 반 반, 月 : 달 월, 堂 : 집 당)
<반월당>
대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네거리이며, 성내 1, 2동의 남쪽, 남산동의 북쪽에 있고, 반야월과 같
은 뜻을 지닌 곳이며 왕건이 이곳을 지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 설> 왕건에 대한 전설이나 기록은 없으나 반야월과 같은 뜻이다.
<추 론>
왕건이 퇴군할 때에 만촌동에서 반월당까지 왔다가 앞산으로 갔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
다.
그러나 반월당은 신식 문구를 취급하는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의 문구점 이름이 반월당으로 유
명해서 그 일대가 자연스럽게 반월당이란 지명으로 불리어졌으며, 이것을 이용해서 대구에서 한국
인이 세운 최초의 백화점 이름을 반월당이라고 하였다. 현재 문구점과 백화점은 사라졌지만, 그때
불리어지던 이름을 지금도 반월당이라는 지명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왕건이 왔다는 전설이나 기록은 없고, 단지 반야월과 뜻이 유사한 지명일 뿐이다. 안심에
서 반월당으로 가는 길은 평지이기 때문에 백제군에게 알려지기 쉬운 길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
다.
만일 반월당으로 갔을 경우에 백제군의 공격을 받지 않았으면, 앞산으로 가지 않고 바로 강창으로
갔을 것이고, 만일 이곳에서 백제군과 전투가 있었다면, 은적사 보다는 안일사로 바로 가는 길이 빠
르며, 그 곳에 갔다고 해도 계속 큰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반월당은 왕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반월당 문구점의 주인이 반야월 사람이어서 자기 동네 이름을 활용해 문구사 이름을 지은
것 같기도하다.
그 시대에는 상호를 자기 고향 이름을 많이 활용하던 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