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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위대한 독일의 정치사
대왕과 독일정치사에 대하여 문답을 나눈 분은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다.
비스마르크(1815~1898)는 독일을 통일하여 독일제국을 건설한 프로이센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제2제국 수립 후 초대 수상이 되었으며, 독일의 통일을 위해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강행하여 승리로 이끄는 철혈재상(鐵血宰相)이라고 부르는 분이다.
하늘나라 세종 대왕이 먼저 묻는다 .
“게르만 족(Germanen)은?”
“고대 유럽의 게르만계 민족들을 통칭입니다. 게르만족의 주된 신체적 특징은 금발벽안(金髮碧眼)입니다. 기원지로 여겨지는 곳은 현재의 독일 북부지방과 덴마크, 그리고 발트 해를 중심으로 한 지방으로 게르만이란 용어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호전용사(好戰勇士)라는 뜻으로 세계역사의 흐름 속에 입이 딱 벌어질 큰일을 자주 벌리곤 했습니다.”
“게르만인의 호전성?”
“게르만인의 시회제도는 무사 공동체입니다. 전쟁터에 나가 적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여 빼앗은 물건을 가득 싣고 집에 돌아와 부인과 자녀들에게 수확물 확인시키고 전쟁담을 자랑하며 상처를 가족들에게 보이면 가족들은 대단한 영광으로 아는 민족입니다.”
“전쟁터에 나가 씨우다가 왜꾸눈이 된 모습, 다리절단 된 절룩발이, 왼팔없는 사나이.....우리는 병신이라 천시하지만 게르만 민족이 보는 관점은?”
“대단한 인물로 묘사되고 무공의 존경가치로 상징되면 자랑스러운 인물이 됩니다."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정착은?”
“1세기 무렵 중국의 한나라 무제(武帝)는 서역의 흉노족을 공격했습니다. 흉노족은 서아시아로 이동하여 흑해에서 게르만 일파인 고트족을 격파합니다. 고트족의 일부는 410년경 로마를 점령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도미노처럼 서아시아와 유럽민족을 흔들어 놓습니다. 오늘날 독일민족은 여러 게르만 민족과 일부 로마인, 슬라브 민족이 융합하면서 이루어 졌다고 봐야합니다.”
“게르만 민족과 카이사르(시저) 전쟁은?”
“게르만이란 단어는 기원전 9년 그리스 역사책에 나옵니다. 최초 게르만 민족과의 전쟁은 율리시즈 카이사르(시저)입니다. 그 뒤 아우구스투스가 몇 차례 전쟁을 하여 독일 지역은 로마의 지배를 받습니다.”
“첫 번째 프랑크 왕국의 황제 카를 대제 (Karl der Grosse)는?”
“카를 대제는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의 모든 그리스도교 지역을 통일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독일과 프랑스는 끊임없이 카를 대제가 서로 자기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아버지를 닮아서 권력에 대한 불굴의 의지와 처세술이 능수능란했다고 합니다. 그는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을 잘 활용했지요. 그리스도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왕의 의무라고 생각하면서도 교회에 대한 왕의 종주권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그는 종교와 전쟁이 결합하면서, ‘살육을 하고 약탈한 물건도 그리스도 이름으로 포장되면 정의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의다’, ‘게르만 민족이 하는 일체의 일은 정의이고 다른 민족이 하는 일은 불의이다'. 라는 논리를 펴면서 50년 동안 50차례의 전쟁을 통하여 초강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게르만 민족이 중앙집권국으로 느린 이유는?”
“게르만 민족은 장자 세습보다 분할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중앙집권보다 자기 영지에서 권익과 이익을 누리면서 봉건영주의 독립성을 강화시켜 독일 민족국가 형성을 매우 느리게 했습니다.”
“중앙정부와 지방 봉건 영주와의 투쟁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방봉건 영주들은 중앙정권, 왕권 국가가 크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황제의 권위가 커지지 않도록 막아야 기득권에 유리하고, 로마 교황 역시 독일 제후들의 분쟁 속에서 이익을 모색하느라 황제가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결과 황제권과 교황권, 중앙정부와 지방영주 사이에서 황제권과 중앙정부는 참패를 면치 못했고, 교황권과 지방영주들은 승승장구하여 독일민족 국가 출현은 1,000년의 세월을 낭비해야 했습니다.”
대왕은 독일이 1,000년 동안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이유는 듣고 보니 우리나라도 개인과 일가친척과 문중, 정당, 종교종파. 지역이기주의, 작은 이익론에 얽매이고 있어 단결과 통합과 통일이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문제는 단결과 통합과 통일의 가치관을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가 한국인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대왕은 생각했다.
“교황권과 황제권 다툼은?”
“오토 1세는 로마에서 카르 대제에 필적할만한 대관식을 갖고 신성로마제국을 시작합니다. 그가 즉위한 이후 한동안은 교황권을 앞서기도 했지요. 독일의 역대 왕들은 로마황제라는 칭호에 목말라 있었는데 그가 바로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4세(Heinrich Ⅳ)였습니다.
하인리히4세는 대주교 서임권(敍任權)을 가지고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충돌하여 로마 교황을 폐위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대봉건 영주들이 로마 교황 편에 들어버렸다.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을 당해야 했지만 결국 그는 반대파를 숙청한 후 로마로 들어가 교황을 파면하고 다른 교황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로마 황제로 인정하는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카노사의 굴욕을 단번에 만회했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대봉건 영주들이 황제권의 약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터(Luther)의 종교개혁?”
“로마 교황은 독일민족을 상대로 세금을 징수했고, 지방봉건 영주들은 여기에 수탈의 앞잡이가 되었으며, 독일 전역이 종교시장으로 형성이 되었습니다. ‘면죄부는 신이 주신 가장 귀중한 선물이다. 내가 그대들에게 도장을 찍어 증서를 주면 그대들이 지은 모든 죄가 용서된다. 이 세상에 면죄부로 사라지 못할 죄는 없다. 그대들은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사는가! 기꺼이 헌금을 내놓는다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면죄부는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에게도 같은 효력이 있다. 돈이 헌금함 안에서 땡그랑 소리를 내면 죽은 영혼이 지옥에서 탈출하여 천국으로 갈 수 있다. 오~ 우리 주여! 주께서 모든 권세를 교황에게 주셨나이다.’
여기에 루터는 1517년에 로마 교황청이 면죄부를 마구 파는 데에 분격하여 항의서 95개조를 발표하였습니다.
그 결과 파문을 당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 종교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1522년 비텐베르크 성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완역하여 신교의 한 파를 창설하여 독일민족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후세 사람들은 평가를 합니다.”
“30년 전쟁(三十年戰爭:Thirty Years' War)이란?”
“이 전쟁은 구교와 신교 간의 종교 전쟁 및 왕조, 영토 및 통상에서의 적대관계 등 다양한 이유로 일어난 전쟁입니다. 핵심은 종교라는 이름 아래 기득권유지를 위한 왕권, 봉건영주권, 종교세, 토지세, 이익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죠.
전쟁의 초기에는 그런 대로 민폐를 주지 않았지만 30년간이나 종교전쟁을 치르는 동안 의식주 해결과 약탈은 도시와 마을 및 농장들을 황폐하게 만들어 가는 곳마다 벌레 한 마리 풀한 포기도 남기지 않는 늑대전쟁이 되었습니다. 전쟁 결과 독일지역에서 인구 1,300만 명 가운데 1/3이 희생당했으며, 12,000개 마을이 파괴되었고, 100년 이상 다른 나라에 비해 뒤떨어졌다고 합니다. 한국도 종교전쟁을 조심해야 합니다.”
대왕은 이 말을 들으니 등골아 오싹했다. 남과 북의 분단시에는 안보라는 리바이던(Leviathan)이 누르고 있어 문제점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통일 이후에는 종교전쟁은 불을 보듯 훤하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을 강력하게 만든 왕은?”
“프로이센은 오늘날 배를린 지역으로 영주 가운데 가장 힘이 있었던 영주입니다. 30년 전쟁 이후 단연코 돋보인 인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Frederick William)입니다. 그는 전쟁 이후 정치 행정기구의 중앙 집중화, 국가재정의 재정비, 도시의 재건설, 강력한 군대의 양성,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확실한 주권회복 등을 통해 훗날 프로이센 군주제의 기반을 확고히 닦았으며, 그의 아들은 물려받은 유산을 적극적으로 통합하고 국가제도와 정비함으로써 많은 영토를 획득했으며, 인구증강 정책과 중상주의 모델을 따른 공장을 건설 및 운영으로 경제 분야에서의 성공으로 계승 발전하여 독일국가 건설에 크게 이바지 하게 됩니다.”
“피히테(Fichte, Johann Gottlieb)는?”
“피히테 당시에는 사실상 나폴레옹 황제의 속국과 다름이 없는 절망적인 시기였습니다. 피히테는 절망적인 독일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을 통해 독일 국민을 패망케 한 근본적 원인을 이기심에서 찾고, 이 이기심을 새로운 국민교육에 의해 각성될 때, 또 독일어를 사용하므로 애국심이 배양되어 위대한 독일이 된다고 호소를 하고, 교육은 투자의 1,000배쯤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대왕은 생각했다. 한국인의 이기심은 하나님도 어떻게 처방할수 없는 이기심 속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아닌면 안된다는 속성, 그곳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남남갈등도, 지역갈등도, 사상갈등도, 남북통일도 이룩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피히태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지 않는가?
“교육을 통한 국력증강은?”
“프로이센 통치자들은 피히테의 의견에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고, 교육이 곧 정치통일을 위한 준비단계라고 주장하면서 병역의무처럼 교육을 국민의 의무로 규정하여 강제적으로 교육을 실시하여 교육수준을 꾸준히 높이고 있었습니다.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은 나폴레옹에게 패한 뒤 4년 뒤에 창설되었으며 설립자는 독일현대 교육의 아버지라 부르는 훔볼트 형제입니다. 같은 해에 세계최초의 고급 군인을 양성하는 참모관 사관학교를 설립되었습니다. 샤른호르스트 장군과 그나이제나우 장군, 클라우제비츠 장군은 강력한 프랑스 군대를 연구하고 대대적인 군 개혁을 단행하여 무력으로 독일을 통일하는 기초를 다졌습니다. 참모장 제도를 창시한 몰트케(Moltke)는 오스트리아 전쟁, 프랑스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 독일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 모두 피히테와 훔볼트, 장군들, 이를 지원해준 프리드리히 벨헬름 3세의 영향으로 눈에 띠게 국력이 성장되고 있었습니다.”
“독일통일의 초석이 된 관세동맹이란?”
“당시의 독일 연방은 단일 국가가 아니라 38개 여러 왕후국으로 구성된 국가 연합이었으나 지배권은 오스트리아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지배권을 가지고 앙숙관계가 되어 있었죠.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에 대항을 하면서 38개 봉건국가를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체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들은 독일국가 나타나면 자기들의 기득권과 상실되므로 반대를 했습니다.
여기에 경제학자 리스크는 사람의 손과 발을 묵고 있는 복잡한 관세를 철패하고 자유통상을 주장하여 독일 관세동맹이 형성시켰습니다.
그 결과 관세가 없어진 이윤은 급격히 상승했으며 이윤이라는 동기는 독일 상인을 바쁘게 만들었고, 이것이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화폐와 도량형 통일, 열차의 물동량 수송에 크게 힘없어 수송, 광산, 제련, 기계 산업 등 중공업은 쑥쑥 늘어나게 되어 1860년대에는 프랑스를 재치고, 1870년도에는 영국을 재칠 수 있었습니다.”
“자유무역의 결과는?”
“리스크는 말합니다. 한 사람이 높은 위치를 점령한 후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사용하였던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다면 다른 사람은 더 이상 그를 따라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산업혁명의 선두주자로써 그 이익을 챙기려는 속셈이죠. 독일은 후자이기 때문에 보호무역을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제1단계에서는 자유무역으로 선발주자의 생산력을 흡수하여 선진국 노하우를 배우고, 2단계에서는 보호무역을 실시하며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제3단계에서는 본격적으로 자유무역의 원칙을 지키면서 국내외 시장에서 무한 경쟁을 벌려야 합니다. 그런대 더 중요한 것은 교육만 있고 경제적 구조가 없으면 다른 나라 시장에 의존해야 하고 결국 그들의 좋은 일만 하는 격이 됩니다.
대한민국은 대학 졸업자 300만 명 실업자 시대가 열렸다고 합니다. 300만 명 실업자 환경이 바른 길로 가지 못하게 만들고, 사기치고 외세 종속적 사고를 가져오지 않을까요?
독일에서는 필요 이상 대학생 정원을 늘리지 않습니다. 너무 가르치면 반엔트로피가 되어 발목 잡는 공격이 나타납니다.”
“철형 재상 비스마르크 출현은?”
“1860년의 비스마르크는 군비 확장 문제로 국왕 빌헬름 1세와 독대를 합니다. '의회의 기능을 무시한 독재의 시대를 한시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하여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되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독일이 착안해야 할 것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군비(軍備)입니다.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철과 피에 의해서만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 ‘철혈정책’ 발언이후 ‘철의 재상’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관료와 군대를 장악하고 예산불승인에도 불구하고 조세 징수를 감행하여 탱크처럼 밀고나갔습니다.”
“나폴레옹 3세와 전쟁은?”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와 전쟁이 시작된 지 2개월도 채 안되어 프랑스 파리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연방국가 제후들에게 추대되는 형태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제국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독일제국이 성립시켰습니다. 물론 비스마르크도 독일제국 총리와 프로이센 수상도 겸임했습니다.”
“북독일연방 결성은?”
“1866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작센, 하노버 등을 포함한 22개 영방으로 구성된 북독일연방을 결성했습니다. 연방의장은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차지했는데, 그에게는 국제법상 연방을 대표하고 전쟁과 평화를 선포하고 체결할 수 있는 권한, 연방군에 대한 최고 지휘권, 법률안 선포권, 연방 수상 임명권 등 여러 권한이 부여되었습니다. 연방 각 정부의 대표로 구성된 연방참의원과 보통, 평등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제국의회는 입법권을 장악했다. 따라서 의사 진행의 주도권은 프로이센이 북독일 연방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권력행사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제국 수립 후 그의 정책?”
“독일 통일 이후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유연한 외교정책을 펼쳐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유럽의 세력균형을 이루어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였으며, 국내 정책으로 전환시켜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산재보험, 노인복지법, 정년제도 등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과 국내시장의 통합구축으로 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업들이 속속 탄생했으며, 독일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습니다. 따라서 수백 년간 지속된 독일권의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강력한 민족국가로서의 독일제국을 탄생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과 강대국 대열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과 석탄으로 독일 제국을 세룬 것입니다.”
“민족주의 광기가 만든 세계 제1차 대전은?”
“독일 정치무대에서 주연을 담당하는 배우들은 모두 프로이센 출신이었습니다. 프로이센 군주제도, 관료경찰 조직, 군국주의 전통은 독일전체로 퍼져 나갔고, 부르주아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권위는 대단했습니다.
사관학교의 학생들은 무력충돌 없이 정치적 임무는 달성할 수 없다고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고대 게르만 전사를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수장의 명령에 의심 없이 무조건 따르듯 더 넓은 국토와 권위, 이윤에 대한 끝없는 추구로 무섭게 더욱 더 광분시키는 채찍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1924년 사라예보에 총성이 울려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제1차전 결과는 ?”
“독일 오스트리아 동맹군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동맹군과의 전투를 4년 동안 벌려 결국 ‘제2독일제국’이라는 환상이 무너지고, 황제 제도 폐지, 200만 사상자와 400만 부상자, 천문학적인 1,420억 금마르크 전쟁 배상금(년 20억 금마르크를 66년 동안 배상해야 함),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군비축소, 징병제 금지, 상상할 수 없는 가혹한 조목에 사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3제국 출현은?”
“가혹한 전쟁 배상금으로 우선 먹고살 빵이 없으므로 프랑스에 대한 긴장상태가 갈수록 첨예화 되었고 프랑스 역시 더욱 더 경제적 압박 가해서 이른바 초인플레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거기다가 1929년 세계대공황이 몰러오자 하루아침 다르게 실업자 수는 3명당 1명꼴인 60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누가 나올까요? 히틀러가 태동하게 됩니다.”
“히틀러의 실업자 해소정책?”
“히틀러는 정권을 잡자마자 반대파를 숙청합니다. 그리고 600만 실업자를 4년 이내 해소하겠다고 약속합니다. 히틀러는 대량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첫째, 공공사업을 실시합니다. 이를 위해 라인하르트 계획을 실시하여 국가사업 자율기금법을 설치하여 기금을 조성합니다.
둘째, 함부르크-프랑크푸르트-바켈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사업을 벌입니다.
셋째, 노동시장에서 노동인력을 줄이기 위해 젊은 여성들의 결혼을 장려하여 약 100만명 정도를 줄였다고 하며 일부 산업부분에서는 인력난을 호소하는 사태가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독일 국민에게 히틀러는 구제주였으며. 정치적 입지도 강화되었습니다.”
“히틀러의 군비확장 정책?”
“문제는 베르사유 조약을 어떻게 극복하고 군비확장을 위한 막대한 재정을 어떻게 조달하느냐 입니다. 히틀러는 소련과 비밀조약을 맺고 새로운 병기와 기술을 소련에서 개발하도록 했습니다.
10만 명 이하 군인을 제한하는 병력수를 늘리기 위해 스포츠클럽과 사격클럽 등을 적극적으로 운용하여 청소년 병영훈련을 통하여 경험을 쌓도록 했습니다.
군비조달을 위해서는 중앙은행 총재는 주요 군수산업체와 공동 출자하는 국가매표(selltickets)라는
유령회사를 만들어 재정을 조달했습니다, 즉, 군으로부터 조달받은 회사는 매표 명의로 어음을 발행하고, 이 어음은 지불수단으로 활용하여 약 51% 비밀군비 확장을 했다고 합니다.
단시간에 가장 시급한 실업문제 해소에 성공한 히틀러는 독일국민이 증오하던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독일국민의 지도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대왕은 매표제도를 통하여 군비확창을 했다는 말을 듣고 관심을 표하면서 나중에 연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히틀러의 주요 정책?”
“히틀러는 일당체제인 나치당을 만들어 일사불란한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군부의 충성을 받아내는 일이었죠.
히믈러가 지휘하는 친위대를 만들어 정적을 체포하여 사형을 처하여 충성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수권법(授權法)을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지 않고 자신이 수상과 대통령 되는 총통이 되었습니다.총통이 되자 비밀리에 군비확장을 하면서 유태인의 시민권 박탈과 결혼금지, 경제활동을 금지, 600만 명 학살은 통하여 실업자를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괴벨스를 통하여 세계평화 유지, 나치체제의 우월성, 풍요로운 경제발전상 등등을 선전동시켰지요.
히틀러의 외교정책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등 뒤에 비수를 꼽는 정책입니다. 서방 국가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반공주의를 내세웠으며,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은 후 폴란드를 치기 위해 폴란드 군으로 위장한 친위대가 국경부근 독일 송신소를 공격한 사건을 조작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독일의 모든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신속하게 보도하게 하였고, 독일군은 폭격기와 전차를 앞세우고 폴란드를 공격하여 순식간에 점령해 버립니다.
이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올리게 되죠. 프랑스의 마지노선은 옆구리인 아르덴 숲을 통과하야 두 달도 거르지 않고 프랑스를 점령하여 파리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또 유태인의 세계주의인 볼셰비즘을 박멸한다는 명분으로 독소불가침 조약을 폐기하고 소련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으로 패전하고 히틀러의 자살로 제3제국은 붕괴되고 세계 제2차 대전은 종결됩니다.”
“전후 독일 재통일”
“황폐한 폐허 위에 누가 꽃을 피울 것인가요?
아테나워 수상은 1949년 서독의 첫 번째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경제관리를 에르하르트 경제부 장관에게 넘겨주고 자기는 정치적인 업무를 처리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아테나워는 민주제, 연방제, 법치국가, 사회국가 원칙을 새로운 국가통치 형태의 기초로 삼으면서 주권제민, 천부인권, 법과 정치의 균형, 새로운 독일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에르하르트는 시장경제 +국가간섭 +사회보장으로 대표되는 경제 모델을 구상했지요. 그는 시장경제는 자유와 질서 원칙의 기초 위에 세워야 한다고 하면서 정부는 축구경기에서 심판과 같다. 심판은 어느 한쪽에서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규칙을 집행하고, 양측이 규칙을 지키며 충실한 경기를 임하도록 진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승패는 참여 팀의 몫입니다.
이를 위해 공정하게 경제 룰을 진행해야 하는 반카르텔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입법은 독과점과 대기업의 합병을 금지하여 경제적 힘의 남용을 하지 못하도록 정정당당히 축구경기를 하는 경제 룰입니다.
또한 화폐계획을 순조롭게 한 결과 평균 13% 경제성장, 부채국에서 채무국으로, 높은 취업률, 물가안정, 대외경제 평형이 이루었으며, 그 후 여러 가지 독일인의 지혜를 발산하여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재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연합(EU : European Union) 란?”
“독일은 1,000년 동안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해왔으나 봉건 영주와 로마 교황의 기득권으로 인하여 빈번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독일국가는 유럽에서 뒤늦게 나타났습니다. 국가는 일종의 봉건영주와 같습니다. 강력한 체제를 위해서는 연합체가 필요합니다. 정치, 군사, 외교, 경제, 사회복지 등 여러 면에서 국가체제보다 유리합니다.
유럽연합은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를 모태로 하여 1967년 유럽철강석탄공동체(ECSC),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와 함께 통합된 EC의 새로운 명칭으로, 1994년 1월부터 사용된 용어입니다.
유럽의 정치와 경제의 통합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본부는 브뤼셀에 위치합니다. 최초 EEC 회원국은 벨기에ㆍ프랑스ㆍ독일ㆍ이탈리아ㆍ룩셈부르크ㆍ네덜란드였고, 이후 현재 회원국은 27개국입니다.
앞으로 한국도 작은 이익에 취해 <아시아연합>을 만들지 않으면 순식간에 뒤져버리는 이치가 있을 겁니다.”
대왕은 독일에 관하여 이야기를 다 듣고 깜짝 놀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 프로이센의 관세철폐정책과 유럽연합은 대왕에게 충격이었다.
38개국의 봉건 영주들을 통합을 관세철폐가 해낸 것이었다. 오늘날과 같으면 FTA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루 빨리 <동북아시아연합>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장 외교적, 군사적, 경제적 압력과 여러 가지 문제점에 봉착되나 언젠가는 터질 것, 하루 빨리 터져야 옳은 것이 아닌가!
대왕은 결론을 맺는다.
“오늘은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도다. 독일의 역사를 들추어보니 바로 우리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아 심취하여 많은 것을 얻었도다!”
하시면서,
“게르만 민족의 본성 연구, 교황권과 황제권, 피히테의 교육철학, 관세동맹, 30년 전쟁, 중앙정부와 지방영주와의 투쟁, 비르스마르크 정책, 히틀러의 나치당과 실업해소, 아테나워와 에르하르트 경제정책, 유럽연합 등등을 심층 깊게 연구하여 차후에 발표될 정도정치 체제에 반영토록 하라!”
라고 교시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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