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 갑자기 동서한테 진료를 받아야된다 해서 보령으로 향했다
새학기가 시작되려니 온 몸이 문제를 일으킨다
30년 가까운 직업병이다
처를 동서 한의원에 내려놓고 난 가까운 보령박물관을 들렀다
과거 대천역 자리에 최근에 마련한 역사관이다
초등학생을 둔 부모들이 도서관 들를 겸 같이 온 일행들이 조금 있었다
진료를 마쳤다 하여 보령 온 길에 그동안 가고자 했던 이지함 묘를 잠깐 찾았다
보령시내에서 화력발전소 방향으로 가다보면 나타난다
먼저 사당인지 기념관인지 재실인지 앞에 비석군들을 둘러보았다
최근 세워진 비석군들인지 깔끔하다 이지무의 유사비이다.
그리고 이지번 묘갈명이 있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佰), 호는 성암(省菴)·사정(思亭)·구옹(龜翁). 아버지는 판관 이치(李穉)이고,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李之菡)의 형이며, 선조 때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아버지이다. 천문지리에 모두 정통하였다.
인종 때 문음으로 추천되어 장례원사평이 되었으나 당시 윤원형(尹元衡)이 국권을 잡아 횡포하므로 벼슬을 버리고 단양의 구담(龜潭)에 집을 짓고 정신을 수양하며 세월을 보냈다.
항상 푸른소[靑牛]를 타고 강가를 오르내리고 또 칡넝쿨로 큰 줄[索]을 만들어 구담의 양쪽 벽에 붙들어매고 날아가는 학을 만들어 매달아 타고 내왕하니 사람들이 보고 신선이라 불렀다. 선조 즉위 후에 청풍군수를 지냈다.
이것은 이경전의 신도비이다 이산해의 아들이다 번암 채제공이 찬했다
한흥부원군 이산보의 신도비이다 바로 이곳에 이지함이 명당터를 마련하여 이지함 형제 후대 이산보, 이산해 등 정승급 인물들이 나왔다 전해진다
토정 이지함의 신도비이다 조선 선조 때 <토정비결>을 저술한 조선 중기의 학자. 기인으로 자는 형백, 형중, 호는 토정, 수산이며 선조 6년 탁행으로 천거돼 포천현감을 지내다가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아산현감으로 부임해서 걸인청을 세웠다. 지리, 음양, 술서 등에 능했으며 괴상한 행동과 기지, 예언, 술수에 대한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복서에 뛰어나다는 소문이 퍼져 1년의 신수를 봐달라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토정비결>을 지었다.
서경덕, 남명 조식, 대곡 성운 등과 어울려 학문을 궁구했다. 그래서그런지 조카이자 제자 아계 이산해는 북인의 수장으로 백성들 편에서 이 나라 정치를 이끌려고 노력했다
다만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하고 그 이후 이산해는 붕당정치의 한 골수 패거리로 전락한 듯 현재 역사는 씌여지고 있지만...
비석군 마지막은 수원판관이었던 이치의 신도비이다. 이곳 묘역의 가장 연장자이다.
이치의 아들 삼형제가 이지번,이지무, 이지함이고 손자대인 이산립, 이산보, 이산두, 이산휘 그리고 증손자대인 이경전의 묘소가 있다.
비석군에서 200여미터 도로를 따라 걸으면 묘역이 나타난다
넓게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오른편으로 안내판과 화장실 등이 있다
당시 바닷가 한 가운데 섬에 묘지를 조성하였다 하여 이지함의 괴이한 행태에 말이 많았다는데 지금은 주변이 모두 육지로 되어 있다
아마도 밀물 등일 때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나 보다
지금은 묘역에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바다 구경 하기 힘든 육지이다
좁은 공간에 오밀조밀 무덤군들이 조성되어 있어 어떤게 누구의 묘인지 상당히 헷깔리게 되어 있다
가장 아래엔 석루 이경전의 묘이다 아계 이산해의 아들로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96년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내고, 1608년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옹립을 꾀하는 소북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다가 강계에 귀양갔다.
이해 광해군이 즉위하자 풀려나와 충홍도(忠洪道)·전라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1618년(광해군 10)한평군(韓平君)을 습봉(襲封)하고 좌참찬에 올랐다.
이어 한평부원군(韓平府院君)에 진봉되고, 1637년에 장유(張維)·이경석(李景奭) 등과 함께 삼전도(三田渡)의 비문 작성의 명을 받았으나 병을 빙자하고 거절하였으며, 1640년 형조판서를 지냈다. 문필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는 『석루유고』가 있다.
이는 이산보의 묘인 것 같다
이산보는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 목은(牧隱) 이색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무(之茂)이다. 숙부인 지함(之菡)에게 배웠다.
동인의 탄핵을 받아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 좌천되었다가 동부승지·대사간을 거쳐 1585년 이이(李珥)·정철(鄭澈)을 논박한 부제학 김우옹(金宇顒)을 반박한 일로 선조의 신임을 얻어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이이·정철·박순(朴淳) 등의 공을 논하다가 경상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로 전직되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대사간으로서 사건을 다스렸고, 이듬해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정철 등 서인이 화를 입자 황해도관찰사로 있다가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한 뒤 이조참판·이조판서를 지냈고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북도와 삼남의 도검찰사로 나갔다. 좌참찬을 지내고 1594년 대기근을 수습하려고 애쓰다 죽었다.
1604년 호종공신(扈從功臣) 2등으로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보령 화암서원, 서천 건암서원(建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이다.
한천부원군 이지번의 묘비이다
토정선생 이지함의 묘이다 묘역의 한 가운데 조성되어 있으나 주변 여유 공간이 거의 없다
공간이 좁은 관계인지 상석 위쪽으로 동자석이 그리고 문인석은 전체적으로 짜임새에 맞게 세워져 있다
맨 위쪽에 수원판관 이치의 묘가 있다
한창부원군 이지무의 묘비, 이산보의 공으로 한창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상으로 묘역을 둘러보고 갈매못 성지로 향하는데 토정 선생이 타고 다녔다는 똘로 된 배가 있어 한컷 찍는다
이러한 토정 선생의 괴이한 행태 및 백성들의 관심이 이러한 설화로 이어짐은 그 당시 그나마 지배층에 대한 백성의 원망을 많이 풀어주었음에 생긴 이야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