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9년 04월 14일 주일 메시지 (설교안)
시리즈 주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여덟 번째 설교
제목: 십자가를 기억하는 법
예수님의 고난을 있게 한 원인(原因)인 하나님 나라의 본질
성경 본문: 고린도전서 2:1~2
설교 목적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십자가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새롭게 제안하고자 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과 꿈을 준다.
설교 개요
1.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시작에 즈음하여
2.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논쟁
3.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오늘의 방식을 반성함
4.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역사적인 관점
5.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신약성경의 관점
6. 고난주간에 생각해 보는 십자가
1.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시작에 즈음하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다음 주는 예수님의 부활절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간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고난주간입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에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좀더 깊이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금식을 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합니다. 어떤 교회는 특별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이 고난주간을 의미 있게 보내려고 노력합니다. 교회는 일년 중 이번 한 주간을 가장 경건하고 무겁게 지내기에 이번 주간에는 특별히 유흥을 피하고 진수성찬을 피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경건하게 지냅니다. 기독교회는 매우 일찍부터 이 주간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거룩한 일주일, 즉 성주간(聖週間, The Holy Week)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미 많은 교회들은 부활절 전 40일 간을 사순절(四旬節, The Lent)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사순절 특별기도회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사순절의 마지막인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으로서대부분의 교회들은 특별기도회를 갖습니다. 우리 교회도 작년에 이 한 주간 매일 저녁에 모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금년에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고난주간 기도회를 갖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기념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오늘 메시지의 주제는 예수님의 고난을 어떻게 기억할까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논쟁
예수님의 고난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친 순국선열의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기념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오늘 소개할 분은 안중근 의사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누구입니까? 1909년 매서운 추위로 두툼한 외투를 입어야 하는 동토(凍土)의 하얼빈역에서 일본인총독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伊藤博文)를 총으로 쏘아 죽인 독립운동가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총독을 저격하고 달아나지 않고 자신을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소개하면서 스스로 잡혀 포로가 되고자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죽음이 대한제국의 독립국임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만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일본 군인들은 안의사를 체포하여 회유하기를, 개인적인 원한으로 살인을 했노라고 시인한다면 사형만은 면하게 해주겠다고 설득을 시도했습니다. 일본 당국자들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단지 원한을 가진 일개 테러리스트의 일로 기억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이 사건이 더 커지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끝끝내 자신의 일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서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음을 주장하며 ‘동양평화론’을 옥중에서 집필합니다. 안의사의 어머니도 아들에게 비겁하게 삶을 구하려고 결코 항소해서는 안 된다고 편지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의연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안의사의 행동은 전 세계에 대한제국의 존재를 알렸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규탄하는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님으로써 그의 정신을 기리고 그의 꿈에 동참하고자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죽음이 어떻게 기억되는가는 이처럼 중요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정말 많은 애국자가 일어나려면 단지 안중근 의사의 권총 저격사건만이 아니라 그가 꿈꾸었던 평화로운 세상, 그가 법정에서 제시한 바, 일본인 총독을 죽인 열다섯 가지 이유를 확실히 배움으로 그 정신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한국사를 바르게 배우고 젊은 세대에게 바르게 가르쳐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독립지사들의 죽음을 바르게 기억하고 기념하면 그들의 정신을 받들 인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죽음이 그처럼 숭고할진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얼마나 더 숭고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바르게 이해되고 기념된다면 그의 정신을 따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결과 한 알의 밀알은 많은 열매를 맺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은 전 인류의 양심을 일깨우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는 생수가 되고 등불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고난주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 교회와 인류 전체에게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3.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오늘의 방식을 반성함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합니까? 크게 두 가지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아프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에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그 못, 그리고 가시관이나 로마 군인의 채찍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그때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장면을 너무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가 제작되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비통에 빠지게 하기도 합니다(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2004).
그리고 두 번째는 왜 그렇게 고난을 당하셨는가를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그렇게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즉각적으로 ‘나와 당신의 죄, 즉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고난을 당하셨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주간에 나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나로 말미암아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기립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었다고 우리는 기억합니다.
사실 성경이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한 제사와 같은 것입니다(히 9:28).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5, 12).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요일 4:10). 이 모든 말씀을 정리하면 예수님이 죽으신 까닭은 우리를 위함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빌라도 총독은 그 죄패를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기록해서 붙였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칭하면서 백성들을 선동한 국가반란죄의 대가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죄를 담당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의 죽음으로 여길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당시에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누가복음 24:19~20,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들 중에 한 사람)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말과 일에 능한 하나님의 선자자의 억울한 죽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제자들은 점차 예수님의 죽음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한 까닭은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식이 너무 얇고 피상적이어서 우리의 전 존재를 감동시키지 못하며 우리가 그 길을 따르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죽음 이후에 많은 청년들이 품속에 안의사의 사진을 품고 그 정신과 기백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그 정신과 그 길을 따르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그리스도인이 많지 않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죽음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4.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역사적인 관점
지난 주 토요일 4월 6일에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제가 쓴 글을 소개합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생각해 본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셨더라면
갈보리의 십자가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갈릴리에서만 사역하시고
굳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지 않으셨더라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에서 기도만 하시고
장사꾼들을 몰아내고 짐승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지 않으셨더라면
무슨 권세로 이런 소동을 벌이느냐고 도전하는 대제사장 앞에서
소작농의 비유를 들어 그들의 완악함을 지적하지 않으셨더라면
세금을 내든지 말든지, 부활을 믿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말고
과부의 재산을 삼키려고 거짓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는
지도자들의 외식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지 않으셨더라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하게 무너질 것을 미리 보셨을지라도
내 알 바 아니라고 하면서 흉한 예언을 하지 않으셨더라면
형식주의와 종교적 위선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위선과 허영과 무지에 대해서 일곱 번씩이나 저주하지 않으셨더라면
…(중략)…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의 전문: http://cafe.daum.net/Wellspring/8SB1/331 )
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말합니다:
만일에 “왜 예수가 처형당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 역사적 대답은 그가 사회적 예언자였으며 운동의 창시자였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열정적인 주창자였으며, 지배체제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자로서 추종세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만일에 예수가 단순히 신비주의자, 치유자, 지혜의 스승이기만 했다면, 그는 십중팔구 처형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가 처형당한 것은 그의 정치학 때문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기독교의 심장, 마커스 보그, 150쪽)
한마디로 말하면 단지 예수님의 신앙심이 좋아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도하고 전도하며 기적을 베풀었다고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바에 대한 열정, 정의에 대한 열정이 충만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 열정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성전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향하여 격노하시게 하였고, 그 열정이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독설과 심판을 선언하시게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보고 좋아하며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임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5.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신약성경의 관점
그러면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정도의 해석이 있습니다(마커스 보그의 책 ‘기독교의 심장’ 152~158쪽 참조):
첫째,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당국자들이 거부하고 죽였지만 하나님은 다시 살리셔서 예수님이 옳았음을 입증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행 2:36).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충성을 바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만 충성합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유대 당국자들 앞에서 그들의 불의한 행동을 지적하며 담대하게 서서 예수를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옳다 하셨으므로 예수를 따르는 우리를 또한 하나님이 옳다 하실 것이다. 우리의 옳음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나온다.” 이것이 십자가를 기억하는 성경의 방식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권세자들을 패배시킨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처형시킨 사람들은 단순히 로마의 권력자들과 유다의 귀족들만이 아니라 하늘의 권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고 했습니다. 지배체제가 예수를 살해함으로써 그 체제 자체의 도덕적 파산과 궁극적인 패배를 드러냈다는 말입니다. 악질적인 정치인이 무엇 때문에 패배합니까? 그가 은밀히 행한 부정을 온 천하에 드러낼 증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녹음된 테이프나 종이 또는 영상이 부정한 권력자를 패배시킵니다. 그는 이제 도덕적으로 파산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선으로 악과 싸우는 자입니다. 비록 그가 십자가를 지더라도 악한 자의 부도덕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거짓된 권력자들을 패배시킨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촉구합니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으로 악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암살자의 총탄에 죽임을 당했지만 아직도 그의 정신은 많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이끌어 가는 빛이요 길이 되고 있습니다.
셋째, 십자가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The Way)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며,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우리는 내적인 죽음을 날마다 경험하며 새로운 길을 걸어갑니다. 그것이 신자가 십자가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방식입니다.
넷째, 십자가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기에 아들을 십자가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그러므로 신자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합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기억하는 성도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섯째,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기에 하나님 앞에 서려면 우리를 위한 완전한 형태의 제물이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그렇게 상인들이 많이 모인 까닭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바쳐야 할 짐승이 그렇게 많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이 완전한 화목제물이 됨으로 더 이상 성전이나 희생제사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짐승의 피가 없어도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주는 그림(은유)입니다.
화목제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할 때 우리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실 때 하나님의 진노가 비로소 풀리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이후로 계속 인간에게 화가 난 채로 계셔서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로 비로소 환한 얼굴로 인간을 받아들이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화목제물로 십자가를 이해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내용과 관련하여 그레그 알브레히트의 글 참조.
http://cafe.daum.net/Wellspring/UnEe/23 )
교회는 오랫동안 화목제물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린 것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래부터 사랑과 포옹의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를 나타내는 사랑의 포옹입니다. 화목제물로 드려진 예수님의 희생으로 이제 더 이상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화목제사입니다.
6. 고난주간에 생각해 보는 십자가
우리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음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신약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한 끝에 십자가의 의미를 다섯 가지로 간단하게 정리해줍니다.
1. 십자가는 지배체제의 악을 여실히 폭로한 것이다.
2. 십자가는 권세들의 패배를 노출시킨 것이다.
3. 십자가는 변화된 삶의 길을 걸어가라고 우리에게 보여준다.
4.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준다.
5. 십자가는 그 무엇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는 장식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에게 십자가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입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지식을 다 버린다 하더라도 이것과는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 여깁니다(고전 2:1~2).
왜냐하면…
1.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권세자들의 악에 대항하여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이 그 악을 폭로하셔서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도 권세자들이 더 이상 활개치며 다니지 못하게 그들의 수치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또한 십자가는 날마다 우리에게 세상의 욕심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갈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4. 십자가는 우리의 많은 허물과 실수 그리고 부끄러운 죄를 말없이 품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당당하게 살아갈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5. 끝으로, 십자가라는 화목제물을 통하여 우리를 품어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고 우리의 삶을 아낌없이 주님의 경륜에 드릴 수 있는 자원하는 마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담긴 이 다섯 가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 더 이상 십자가는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다시 이 땅에 세워질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분명하게 이 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오셨고 사셨고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한 주간 우리 모두 십자가를 다시금 새롭게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르게 기억하며 기념하며 살아갑시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십니다.
<끝>.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08 - 십자가를 기억하는 법(설교안) (1).docx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