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도(悼) 헤누리 아펜셀라 목사
헤누리씨의 아버지 아펜셀라 헨지스티에 박사는 한국에 초대선교사로 미국 북감리교회(北監理敎會)의 파송을 받아 1985년에 시란돈(施蘭敦스크랜톤)선교사와 같이 또는 장로교 선교사 원두우(元杜宇) 박사와 같이 기선에서 하륙(下陸)하였다.
아펜셀라 목사와 원두우 목사는 지금 배재학교 운동장에 있던 민판서(閔判書)의 집을 사가지고 있었다. 그때는 조선정부(朝鮮政府)에서 기독교 전도를 허락이지 않고 다만 교육과 의료 기관만 허락되어 아펜셀라 목사는 배재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종사하고 시란돈 목사는 병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다 1889년에 망명하였던 김옥균(金玉均) 선생이 고종황제(高宗皇帝)에게 상주(上奏)하여 독립국으로서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 미개한 일이라고 상주한 고로 황제는 최초로 기독교선전을 허락하심으로 감리교 장로교는 그때부터 전도를 시작하여 아펜셀라 목사는 정동예배당(貞洞禮拜堂)을 건축하였고 시란돈 목사는 상동예배당(尙洞禮拜堂)을 건축하여 전도에 힘쓰며 그리고 아펜센라 목사는 일반문화에도 전력하여 학생들에게 영어를 교수하여 그때 외교관이 거의 배재의 출신이 많았고 그 외에도 출판, 신문, 연설 등이 다 배재학교에서 시작 되었다.
그러다 아펜셀라 목사는 무슨 용무를 가지고 학생 두 명을 데리고 목포(木浦) 등지에 여행을 떠났다. 인천 가서 기선으로 탑승하고 가게 되었다. 승선에 경험이 없는 학생 두 명은 선판 위에서 놀다가 실족되어 바다에 빠졌다. 그것을 본 아펜셀라 목사는 바다에 뛰어 들어가 두 학생을 건지려하였으나 두 학생은 선생을 붙들고 놓지 않음에 아펜셀라 목사는 헤엄을 칠 수 없는 고로 세 사람은 다 바다에 익사가 되었다.
조선교회(朝鮮敎會) 위하여 아펜셀라 목사는 순교하였고 기독교의 초대순교자임으로 장로교 감리교 할 것 없이 선교사들을 대표한 순교자이다.
아펜셀라 목사는 조선 와서 영적으로 무수(한 믿음의 아들들을 얻었고 육신으로는 딸 1명과 아들 1명을 낳았다. 아펜셀라 목사부인은 딸과 아들을 다 본국으로 보내어 고등교육을 곧 대학을 마치게 하고 그 남편인 아펜셀라를 따라 세상을 떠나신 후에 딸과 아들은 다시 조선에 나와 선교에 종사하였다.
그 남매는 다시 미국에 돌아가 공부하여 남매가 다 박사의 학위를 받고 딸인 아펜셀라 박사는 다시 이화대학을 맡아 노력한 결과 지금 신촌에 있는 백석(白石)으로 지은 집 수십 채가 다 그의 손으로 건축하여 수천명의 여대학생을 교육하여 조선의 여자교육으로는 단 하나인 최고기관이 되었다.
그 대학의 졸업한 김활란(金活蘭)씨로 하여 미국의 우리 교회 대학에 공부시켜 김활란씨도 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그는 우리 조선최초의 부인계의 박사이오 우리 교회의 영광이요 조선의 빛이다. 아펜셀라 박사는 김활란 박사에게 이화대학 총장직을 맡기고 자기는 명예총장으로 있으며 그를 도와 전도 겸 교육을 병진(竝進)케 하였다.
아펜셀라 박사는 어느 날 학생 채플을 인도하다가 별안간 강단에 넘어져 생도 급 직원들 놀라 그를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키고 치료하다가 입원 5일인 1939년에 별세하였다. 그 아버지를 따라 순교하였고 그 동생 헤누리 박사는 그때 미 본국에 있으며 전도하다가 그 누님의 순교의 소식을 듣고 1951년 여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헤누리 박사는 환국 전에 나와 같이 자기 아버지의 설립한 배재학교의 일을 보게 되었다. 그는 교장으로 나는 교목으로 있으며 범 19년 6개월 동안 같이 있으며 일제정부)의 무리한 압박은 말할 수 없이 받았다. 나는 3.1당시 오랫동안 서감 서대문감옥에 유폐(幽閉)되었을 제 옥중생활비를 아펜셀라 교장이 계속 도와주었다. 보석이 되어 집에 있을 때에도 계속하여 도와주었다. 지금까지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 일인(日人)들의 지목하기를 김모는 불온자라 다시 배재에 있기를 허락이지 않음으로 나는 배재에서 나와서 인천교회(仁川敎會, 내리교회)의 담임으로 2년 동안 있을 제 아펜셀라 박사도 배재학교에 나와 인천지방목사로 와 있었다. 서로 만나 이야기할 틈이 있어 애국운동에도 언급한 일 있었으나 그는 조선인보다 근신함으로 실행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아펜셀라 목사는 다시 일인들의 촉구가 있어 배재 교장의 직을 회복하여 배재에 시무하게 됨으로 그는 다시 나를 청하여 학생들에게 같이 전도하기를 요하는 고로 나는 기쁜 마음으로 허락하였다. 그러다 1937년 7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 일어나며 부터 일인(日人)들의 사학(肆虐)이 날로 심하여 특히 미국을 상대함으로 영미(英美)의 선교사는 있을 수 없게 되고 또 미정부에서도 소환을 명하여 아펜셀라 목사는 환국을 결정하고 떠났다.
나는 아펜셀라 목사 환국 전 1935년 3월에 임의 사표를 제출하고 삼청동 궁정동 교회를 담임한 때이다. 나는 교회의 일을 보던 중 나도 알지 못하게 아펜셀라 목사는 환국의 길을 떠나 그 후 몇 십년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나는 청진지방목사로 준 8년 동안 청진에 주재한 고로 더욱이 처량하였다. 그 곳에 가서도 일인(日人)들의 침해를 받으며 선교사들의 연락을 얻을 수 없고 그 후 해방이 되어 38선이 막힌 후로는 일인시대보다 더 엄절한 고로 더욱이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 곳에 있을 수 없어 상경한 후 비로서 그의 누님인 아펜셀라 양을 만나 헤누리 목사의 주소를 알아 편지 왕래가 있어 편지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편지할 적마다 목사님은 다시 한국에 나와서 아버지의 순교하신 사업과 누님의 사업을 계속하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이 늙은 종을 생각하시고 금품도 보내 주시고 의복도 보내 주셔서 감사히 받았다.
그러다 1951년 여름에 아펜셀라 목사가 부산에 도착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으나 나는 그때 피난하여 가덕도(加德島) 목사 수용소에 있으며 또 겸하여 발병 되여 부산에 나아와 아펜셀라 목사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 별안간 아펜셀라 목사는 나를 보려고 가덕도에 온다는 소문을 듣고 준두(準頭)로 환영을 나아간 사이에 아펜셀라 목사는 다른 배를 타고 두문해변(斗文海邊)으로 먼저 왔다. 그리하여 반가이 만나는 때에 감사의 눈물이 쏟아진다. 아펜셀라 목사도 부지중 눈물이 쏟아진다. 일제시대에 같이 고생한 것 생각하고 한편으로 감사도 하지만 한편으로 유감도 하였다. 잠간 만나 담화하고 아펜셀라 목사는 타고 왔던 배편으로 환부(還釜)하여 어찌 섭섭한지 말할 수 없었다. 이 늙은 친구를 일부러 찾아준 것은 진실로 감사하였다.
나는 가덕도를 떠나 진해로 와 있다가 다시 부산으로 오게 되어 비로소 아펜셀라 목사를 직접으로 만나게 되어 자주 통성(通性)을 계속하였다. 나의 부탁은 목사님은 다시 한국을 떠나지 마시고 나의 친구 사월(史越)목사와 같이 오래 조선에 있으며 춘부장 목사님의 일을 계속하라는 것을 권고하였더니 아펜셀라 목사도 그 충고를 달게 받고 그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가 내한 시에 맡은 임무는 직접 교회일이 아니요 미국 각 종교단체의 한국전란민(韓國戰亂民) 구제 사업을 맡아가지고 왔다. 이 구제사업을 마치고 교회 일에 전념하겠다는 것을 수락하였다. 그러다 나는 급매(急邁)히 상경하노라고 그와 고별도 못하고 작년 9월에 올라왔다.
별안간 신문보도를 보니 그는 미국 뉴욕 어느 병원에서 별세하였다고 보았다. 나는 이게 왠일인가 하고 다시 신문 사실을 상고하여 보았다. 씨는 작년 10월에 적혈구 부족병으로 조선에서는 치료할 수 없는 고로 11월 27일 도미(渡美)하여 뉴욕부록소라 병원에 입원 치료 중 12월 1일 새벽에 별세하였는데 그의 임종시 유언은 나는 한국에 일하려고 중심한 것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니 나의 유해는 한국에 매장하여 달라고 그 부인에게 유언 부탁을 주었다.
그가 내게 한 말은 내 나이 금년이 65세라 지금부터 휴식에 당하였고 5년이 지나면 감리교회에서 법으로 그만 두게 한다고 하여 나는 그 간에 일곱 번 할애비 노릇을 하였다 하였으니 자세히 따지지는 못하였으나 내 짐작에 그 아들에게도 손자가 있고 두 딸에게도 손자가 있어 합 7명의 손자가 있다는 것을 추측하였다.
그 아들은 미군에 일을 보는데 지금 인천와서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아버지와 같이 또는 누님과 같이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누님에게 준 글을 다시 기록한다.
1954년 3월 1일 병우 김진호
재 경성 청운동 기
<추가>
東方興敎化 實自亞扁始. 從主招其般播道 養多士. 培材爲愛弟 梨大爲慈娣. 凡我朝鮮族 永年慕亞氏. 一九五四年 三月 一日 病在 金鎭浩 在京城 淸雲洞 記
동방에 교육 사업을 일으킨 것은 실제로 아펜젤러로부터 비롯되었다. 주님을 따르도록 하려고 복음(道)을 널리 전파하며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배재학당은 사랑하는 아우이니 이화대학이 사랑하는 자매가 된다. 무릇 우리 조선민족은 길이길이 아펜젤러 목사를 기리게 될 것이다.
1954년 3월 1일 병중에서 김진호 서울 청운동에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