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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기도 속 구경꾼효과, 감탄과 응원>의 줄거리: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라고도 하는 이 말은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책임이 분산되어 오히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덜 돕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아무런 책임 의식 없이 그저 바라보게 되는 상태를 말하지요. 올바른 믿음의 기도에는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증상이 바로 구경꾼 효과 입니다. 이미 준비 되어 있지 않았다면, 반드시 기도에는 책임자의 입장이 구경꾼의 입장으로 바뀌는 과정이 먼저 포함 되어야 합니다.
기도 속 구경꾼 효과, 감탄과 응원
(역대상 17:16~27)
16.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17.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작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대하여 먼 장래까지 말씀하셨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존귀한 자들 같이 여기셨나이다
18.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영예에 대하여 이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주께서는 주의 종을 아시나이다
19.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을 위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이 모든 큰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기도 속 구경꾼 효과, 감탄과 응원>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기도 속 구경꾼 효과, 감탄과 응원’
1964년 뉴욕의 퀸스 지역 주택가에서 한 여인이 강도에 의해서 살해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유수의 미디어를 통해서 대서특필이 됩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키티 제노비스인데 강도사건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일은 그렇게 진기한 일은 아니지만 이 사건이 대서특필된 이유는 주택가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키티 제노비스가 강도를 만나 도망가면서 지르는 비명을 주택가에서 많은 사람이 들었을 텐데, 실질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제노비스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창문을 열고 소리라도 질렀더라면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책임이 분산되어서 오히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는 현상을 ‘제노비스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이 제노비스에게서 일어난 이 특별한 일을 일반화시켜서 방관자 효과(傍觀者效果), 구경꾼 효과라고 합니다.
이 방관자 효과, 구경꾼 효과는 눈앞에 위급한 상황이 벌어져도 그 일에 대해서 반응을 보일 책임이 내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될 책임을 서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아무런 책임의식 없이 바라보는 방관자 효과가 올바른 믿음의 기도에서는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증상입니다. 기도를 드릴 때에 이미 방관자 효과가 나타나는 마음 상태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기도 속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과정이 책임자의 입장으로 기도를 시작해서 구경꾼의 입장으로 바뀌는 과정이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이것과 연관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가 오셀로입니다. 오셀로는 베니스에 있는 흑인 장군입니다. 이 장군이 본국의 원로인 브라반시오 귀족의 딸 데스데모나와 사랑에 빠집니다. 아버지가 오셀로 장군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반대를 하지만 끝내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둘의 결혼 사이에 이아고라는 부하가 끼어듭니다.
이아고가 안 그래도 흑인 주제에 귀족의 딸 중에서도 특별히 예쁜 데스데모나를 아내로 맞은 오셀로에 대한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관의 자리에 자기를 승진시키지 않고 캐시오를 임명하자 반감을 갖습니다. 오셀로가 자기 아내 데스데모나에게 손수건을 선물했는데 그 손수건을 몰래 훔쳐서 부관 캐시오의 방에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해서 오셀로로 하여금 자기 아내 데스데모나가 캐시오와 불륜관계임을 의심하게 합니다.
그러나 데스데모나는 순결하게 남편 오셀로만을 사랑했습니다. 결국은 오셀로가 자기 아내 데스데모나를 베개로 얼굴을 눌러서 질식시켜 죽이는 장면이 연극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본 관객 중의 한 사람이 무대로 뛰어올라가면서 오셀로를 향하여 “이 바보 멍청아! 데스데모나는 너만을 사랑한단 말이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아고의 이간질에 놀아나서 순결한 아내를 오해로 죽이는 오셀로의 망동에 분노가 터진 관객이 오셀로의 역을 맡고 있는 배우를 때리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외국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극역사와 공연에 관계된 에피소드를 모아둔 책에서 일제 강점기 때에 오셀로가 연극에 올라갔는데 관객들이 이아고의 역을 맡은 배우를 향하여 돌을 집어던졌다는 것인데 그럴 만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대해서 오셀로 연극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과 같이 부당한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게 아닌지요? 방관자 효과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한다면 바보가 질문하는 것 같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인지상정적인 마음가짐은 책임의식과 그 책임의식에 따른 수고로움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는데 처음부터 가룟 유다가 당신을 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팔아도 그냥 파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지독한 형벌을 당하며 죽게 하는 발단이 가룟 유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삼년의 공생애 동안에 가룟 유다를 그대로 놔두십니다. 예수님 옆에 있는 그 상태를 예수님의 마음은 밖으로 빠져나가서 마치 조감도를 보듯이 가룟 유다와 같이 있는 사건을 방관자로 보고 계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자들을 위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하는 상황도 그 상황으로부터 마음이 빠져나와서 방관자로 보았습니다.
오셀로의 연극을 관람하던 관객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지 않고 그냥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기도가 방관자의 기도입니다. 즉 ‘저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이네. 스데반은 잘못한 게 없는데 전적으로 저 사람들이 잘못했구나. 죄 없는 스데반 집사를 죽인 저 사람들의 죄를 어떻게 감당할까?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뒤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에 대해 창3:17절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합니다.
타락이후에 인간의 삶에 주어진 첫 번째 특징이 수고이고 이 수고에는 반드시 책임의식이 뒤따릅니다. 타락 전의 아담은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은 책임의식이 없는 것이고 수고함도 없습니다. 책임의식이 없으니 하나님의 판단이 임하고 아담이 하나님의 뜻의 장갑이 됩니다. 행동은 하지만 내가 책임의식을 가지지 않고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하는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하는 일대로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지고 거기에 즐거움이 있고 기쁨이 있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다윗의 감사 기도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성경에서 단락별로 구분해서 제목을 붙인 것도 주석을 보아도 다윗의 감사 기도로 제목을 붙였는데 우리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전건축 계획을 말씀드렸다가 하나님께서 불허하셨지만 17:7~15절까지 영원한 다윗의 왕국을 약속해 주시는 다윗 언약을 말씀해 주시는데 메시아의 예언까지 말씀해주셨고 이 언약하심을 나단 선지자로부터 듣고 드린 기도 때문입니다.
16절에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 앞에 들어가’라는 말은 여호와의 궤를 모셔둔 장막이 있는데 그 장막으로 나갔다는 말이고 ‘앉아서’라는 말은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머물렀다’는 뜻을 가진 단어로 오래 머물면서 기도를 드린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기도를 드려보면 제목을 붙일 때 다윗의 감사 기도라고 붙였지만 실지로는 과연 감사 기도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언약을 통해 엄청난 은혜를 약속해 주셨고, 또한 그 언약을 말씀해 주시기 이전에 정말 비참한 목동의 처지에 있던 사람을 왕이 되게 하셨고, 나라의 안정된 기반을 허락하시고 주변나라들에게 다윗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각에는 당연히 감사가 이어 나오는 것이 마땅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인데 먼 장래에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까지 해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불공평함을 느낄 정도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지만 우리에게는 다윗 같은 일이 하나도 일어나질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의 기도 내용을 가만히 보면 이것을 과연 감사의 기도라고 해야 할지 의문이 든단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큰 유익이 되는 일을 해주었다면 도대체 누가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감사를 하겠습니까? 다윗은 지금 자기가 입게 된 혜택을 다만 감탄조로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통 감사는 자기가 입게 된 혜택의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혜택을 준 사람이나 받은 나도 그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진심어린 감사를 표할 뿐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혜택들을 감탄하며 나열합니다.
목동을 왕으로 만드시고 나라의 평안의 기틀을 마련해주신 것도 굉장한 일인데, 그 목동이었던 자신에게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임을 예언해주신 것이 참으로 놀랍다는 것입니다.
마치 과장이었던 사람이 부장으로 승진을 하게 되자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부장으로 승진시키셨습니까? 아! 정말 놀랍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서 겸손하고 감사하게 인사를 고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기도에는 직접적인 감사의 표현은 한 마디도 나오질 않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26~27절에서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주의 종에게 허락하시고 / 이제 주께서 종의 왕조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두시기를 기뻐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승진한 사람이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장님께서는 저를 부장으로 승진시키시고 아주 기뻐하시네요. 저 역시 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겠습니다.”라고 하고 전화를 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지금까지의 신앙과 신학의 언어로는 오늘 다윗의 기도를 정확히 규정할 만한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윗은 자신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묘사하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마치 형편없는 과장을 부장으로 승진시킨 사장님을 제3자의 입장에서 구경하듯이 감탄하고 있을 뿐 감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저 김 과장이 부장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까? 아! 정말 놀랍네, 놀라워!’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목동이 왕이 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목동을 왕으로 만들었네.’라고 방관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삶을 책임지고 행하신 일들에 대해 어마어마한 일이 이루어졌다고 감탄을 하고 마지막에 메시아 예언이 담겨있는 다윗 언약의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응원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다윗이 감사를 드리는 포인트가 어디인지를 이해해야만 하는데 무엇에 감사할 것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께서 사업이 잘 되게 해주시면 감사하고 자식을 형통하게 해주시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은 방관자의 신앙에서라면 내 사업이 잘 되는 것은 그저 감탄할 일이지 감사할 일은 아닙니다. 참 이상하고 이런 말은 처음 듣는데 이처럼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다윗의 신앙을 이해할 언어를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의 지성소에 모셔 들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세상 것을 버림으로서 할례 언약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모델이었다면, 다윗은 마음의 지성소에 그러한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일을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해낸 사람으로 할례 의식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은 마음에서 생기는 전체적 추진력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추구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하늘에서 만족과 기쁨을 얻는데 다윗의 감사의 포인트는 바로 그 하늘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늘에서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기쁘게 된 것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감사한 마음이 되면, 하늘로 올라간 마음이 땅에 있는 자기의 삶의 현장을 구경하는 일이 생기는데 책임의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관자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인데 책임을 질 여러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으로 만족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내 삶의 바깥에 나가서 내 삶을 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의식을 느끼시고 나는 방관자가 되면서 이제부터 하나님의 활동을 지켜봅니다.
목동으로 있던 다윗을 왕이 되게 하시는데 와! 이렇게 대단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다윗은 감사를 하지 않고 감탄을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먹고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감사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삶을 방관하게 되는데 제3자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늘 보게 됩니다.
마치 녹아내린 눈 속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발견한 얘기가 있는 것처럼,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으로 내 기업은 다 이루어졌다고 믿는 마음에는 이 땅에서의 내 삶이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무대 같이 느껴집니다.
오셀로를 보던 관객이 오셀로의 무지함으로 데스데모나가 죽어가는 순간에 분노를 참지 못해서 무대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방식이었습니다. 오셀로의 관객이 무대에 뛰어올라가는 바람에 배우가 연기를 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내 삶의 무대에 뛰어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지 못하시므로 무대로 뛰어 올라가면 안 됩니다.
다윗은 방관자 효과를 가진 마음가짐으로 자기의 삶을 구경하면서 노래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메시아 예언에 대한 얘기는 하나님이 행하시지 않고 계획을 말씀하신 것인데 응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다 이루시기를 응원합니다. 나는 그 하나님을 보며 박수치며 노래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땅의 승리를 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면 감사를 하는데 감사의 포인트를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내 이름으로 행하시는 것은 내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친히 행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을 주시는 것이지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감사하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들을 주셨기 때문에 기쁘고 감사하면 하나님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들 때문에 기뻐하며 감사하는데 이것은 감사하면서 간음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업을 잘되게 해주셔서 기쁘면 사업의 잘되는 상황과 마음이 간음하고 있는 것인데 이건 감사가 아닙니다. 기도 속에는 반드시 방관자 효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오셀로의 관객처럼 내 삶에 내 마음이 몰입돼 있는 상태에서 기도를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에 십자가를 붙잡고 그렇게 몰입되어 있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 죽으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동선을 따라서 우리 마음은 반드시 하늘로 올라가도록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올라가겠다고 해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내 마음을 빼앗고 몰입시키는 이 세상의 문제와 그것을 끌어안고 있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의 죽음을 고백하면 어느덧 나의 마음이 하나님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증상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하나님만이 최고입니다.
여러분은 돈이 셉니까? 하나님이 셉니까? 하나님이 셉니다. 자식의 형통이 셉니까? 하나님이 셉니까? 하나님이 셉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시다고 고백하지 않고 느끼지 못하고 자식의 형통이 세고 돈이 세고 건강이 세다고 느끼면 그건 믿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내가 가질 것을 다 가졌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그 다음엔 문제가 없습니다. 그 이후엔 이루고 싶은 게 없습니다. 그때에 갑자기 눈을 떠서 내 주변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손이 되어서 이 땅에서 활동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필요하다면 내 생각과 내 육체도 하나님이 장갑으로 끼셔서 움직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백합화를 보면서 참 아름답고 향기가 좋다고 하면서 감각의 수준에서 끝나고 마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백합화를 입히시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어서 당신의 삶의 상황을 방관자적 입장에서 바라보므로 백합화를 보실 때에도 입히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시는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실 때에도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십니다.
가룟 유다를 옆에 두셨을 때에도 하나님의 활동을 보십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하나님의 활동을 보십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이 땅의 삶을 끝내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품에 끌어안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처럼 왕이 되더라도 스데반 집사처럼 돌에 맞아 죽더라도 하나님의 활동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감사의 포인트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이득 될 것도 없고 손해 볼 것도 없습니다. 다윗이라고 이득 보는 것도 없고 스데반 집사라고 손해 보는 것도 없는데 하나님을 가진 자에게 왕 됨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그러나 제3자 입장인 세상적인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목동에서 왕이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로 보일까요? 세상에서 놀라운 일로 보이는 일을 지금 하나님이 행하고 계심을 감탄조로 노래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고 이루시라는 응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가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자는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활동에 감탄조의 노래로 찬양을 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응원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다윗의 기도처럼 감탄과 응원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하시고 오직 감사의 포인트가 하늘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