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잡는 특무대장 김창룡 제17회》
17. 김삼룡과 이주하의 최후
☆김삼룡
김삼룡은 1946년 9월 남로당 괴수 박헌영이 월북한 이후 실질적인 남로당 책임자가 되었다.
김창룡 특무대장은 김삼룡의 비서 김형륙의 제보로 50년 3월 27일 01:00시에 종로 6가에 있는 김삼룡의 아지트를 급습하였다.
그러나 김삼룡을 놓치고 말았다.
수사관들이 김삼룡의 아지트를 포위하고 문을 두트리는데 놀라 사다리를 타고 옆집 지붕으로 도망가 숨었다가 수사관들이 철수하자 북아현동 제 2 아지트로 튀다가 쓰레기통에 숨었는데 아침에 출근하던 경찰관에게 9시 30분경 붙들린 것이다.
남로당 거물급 치고는 어이없게 잡힌 것이다.
북아현동에서 출근하던 경찰관이 길가의 쓰레기통 뚜껑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이 이상하여 가까이 가보니 그 안에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얼굴을 보니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로 수갑을 채우고 서울시경 대공과로 끌고갔다. 여기서 수사관들이 신분을 밝히려 했으나 자기는 김삼룡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이자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는데 이미 전향한 서울시당 위원장 출신 홍민표가 들어오다 수갑을 차고 화장실 옆에 묶여 있는 김삼룡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그래서 이자가 김삼룡이라는 정체가 밝혀진 것이다.
김삼룡은 외부에 얼굴이 노출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인상착의를 몰랐는데 홍민표의 제보로 김삼룡임이 밝혀진 것이다.
김삼룡은 특무대로 이첩되고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이 선고 되었다.
#김삼룡은 1910년 충청도 충주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한문을 배우고 서당 선생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고학당(고등공민학교)을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으나, 조직의 명수였다.
그는 1934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이재유, 이관술, 이순금, 이현상등과 함께 경성 트로이카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그 이후 박헌영과 오랫동안 지하활동으로 인연을 맺어 남로당 제2인자가 되고 박헌영의 월북 후 실질적인 남로당 책임자가 되었으며, 대구폭동사건, 제주폭동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등을 주도했다.
☆이주하
이주하는 남로당 고위간부였으며, 김삼룡을 놓치고 김삼룡의 처(세컨드)와 연락책 이세범을 추궁하니, 엉뚱하게 이주하의 거처로 안내해주었다. 그래서 이주하는 쉽게 체포했다. 아마 김삼룡의 도주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쑈인것 같았다.
이주하도 김삼롱과 나란이 사형 언도를 받았다.
# 이주하는 1905년 함경도 북청의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 원산 광성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잡부로 일하며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1929년에는 원산 시당 책임자가 되고 해방 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하였으며, 고위간부가 되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다 50년 3월 27일 8시 30분경 김삼룡 보다 1시간 먼저 체포되었다.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었다는 정보를 들은 북한 김일성은 자신들이 감금하고 있는 조만식 선생과 맞교환하자고 특사를 파견해 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렇게 하자며 동의서를 써주었는데, 이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 둘은 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한강을 건너기 전에 김창룡 특무대장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네놈들이 얼마나 많은 동족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염치도 없구나, 왜 너희들을 살려주어야 하느냐?"며 총살해버렸다.
이것으로 남로당 조직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공산주의자들은 끊임없이 간첩을 침투시키고 고정간첩들이 요소 요소에 박혀 공안당국을 귀찮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