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예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여류시인 "노천명"의 시이며, 까까머리 우리들에게 감동어린 목소리로 이 시를 낭송하시던 국어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뚜렷이 기억난다.
이 시를 암송하며 노천명이란 여류 시인은 사슴처럼 고고한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고, 나도 그러한 삶을 살게되면 얼마나 좋을까? 했던 기억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시와 인간의 현실 삶은 그렇게 닮아가지 않는 모양이다. 그것이 시인의 한계란 말인가?
노천명은 왜 일본에 그토록 열광하였을까?
일본의 그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토록 일본을 찬양하게 만들고, 그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 땅의 청년들을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태평양 전쟁의 전쟁터로 내몰아 명분없이 죽게 만들었을까?
참으로 그 때 그녀가 느꼈던 삶의 진실을 알고 싶다.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질문한다.
"당신 같으면 그 시절 그렇게 안했을것 같은가?"
"그 시절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하고 부역을 하고 그렇게, 그렇게들 살아왔지 않은가?"
"누가? 누구의 친일을 나무라는가?"
그렇다면, 같은 시인의 길을 걸었던 "한용운, 이육사, 이상화"의 항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다면, 가족을 팽개치고 목숨까지 내놓으며 저항했던 독립투사들의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들이라고 가족이 귀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라고 해서 목숨이 귀한줄 몰랐을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들은 한마디로 미치광이였단 말인가?
친일 청산을 거부하며, 친일파를 옹호하는 자들이여! 설명해 보라! 듣고 싶구나!
나를 설득하여 나로 하여금 이 저주스런 친일과 친일파 청산이란 지긋 지긋한 문제로부터 자유하게 해다오.
자! 우리가 그토록 연모하고 사랑하였던 "노천명"의 일본열광과 아름다운(?) 일본 사랑을 들여다 보자.
“노천명”(1912~l957)은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찬양한 “기원(祈願)”(조광 1942년 2월호), “싱가폴 함락”(매일신보 1942년 2월 19일), “勝戰의 날”(조광 1942년 3월호), “부인근로대”(每日新報 1942년 3월 4일), 그리고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 등의 시들과 “여인연성”(咸南女子訓練所 參觀記, 國民文學 1943년 6월호, 日文)같은 글 을 발표하여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병과 강제동원을 정당화 시키는데 적극 협조하였다.
하지만“노천명”은 훗날 “한국전쟁”당시,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다가 북한군에 붙잡혀 “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녀의 친일과 친공이 소설 “꺼삐딴 리”에서의 주인공 “이인국 박사”처럼 “단순 기회주의자로서의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노천명--
남아라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英美)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랫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위의 시는 일제 강점기 시절 대표적인 친일신문이었던 「매일신보」 1943년 8월5일자에 실렸던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라는 시로 조선청년들에게 황국신민의 군인이 되길 종용하는 내용이다.
이윤옥 시인은 친일작가 노천명을 이렇게 풍자한다.
황군의 딸 되어
소화 천황 만수무강 빌던
그날
인쇄소 윤전기는
"그 처참하든 대포소리 이제 끝나고 공중엔
일장기의 비행기 햇살에 은빛으로 빛나는 아침
남양의 섬들아 만세를 불러 평화를 받어라"
찍어 내었지
바쁘게
이윤옥 시인에 따르면 노천명은 해방되기 몇 달 전인 1945년 2월25일 시집 《창변》을 펴내고 성대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시집 끝에 친일시 9편이 실려 있었는데 그해 해방이 되자 그녀는 이 시집에서 뒷부분의 친일시를 부분만 뜯어내고 그대로 팔았다고 한다. 독자를, 민족을 우롱해도 유분수지 이런 꼼수로 다시 멀쩡하게 시인 행세를 하다니.
한겨레 신문 2004년 10월3일자에는 '노천명 친일시 또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보다 상세한 내용이 소개돼 있었다.
한겨레에 따르면 노천명은 해방 후 《창변》에서 친일시 부분만 빼고 다시 출간했지만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었다고 한다. 목차에서 친일시 제목만 나열돼 있던 마지막 페이지는 뜯어냈고 다른 시와 함께 친일시 제목이 인쇄된 부분은 친일시의 제목 부분만 창호지로 붙여 보이지 않게하여 출간했다고 한다. 뜯어낸 부분이야 확인할 수 없지만 창호지로 붙인 부분은 친일시의 제목을 희미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는데 총 4편이었다고 한다. 그 4편의 제목은 <흰 비둘기를 날려라>,〈진혼가>, 〈출정하는 동생에게>, 〈승전의 날〉이었다.
노천명이 그렇게 바랬던 증거인멸은 그녀의 바램으로 끝났던 모양이다. 《창변》의 원본이 발굴됨으로써 그녀가 증거인멸을 시도했던 친일시 5편이 추가되었는데 제목만 본다면 <병정>, 〈창공에빛나는>, 〈학병>, 〈천인침>, 〈아들의 편지>였다고 한다.
노천명의 친일시는 그녀의 시집 《창변》에 실린 9편이 모두가 아니란다. 앞서 <사쿠라 불나방>에 소개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라는 시 말고도 1944년 매일신보에 <신익>이라는 제목의 시를 또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조선인 출신으로 가미가제 특공대에 나가 최초로 죽은 마쓰이 오장을 찬양한 노래라고 한다. 마쓰이 오장을 노래했던 서정주보다 더 앞서 발표된 친일시인 셈이다.
노천명의 군신송
자! 위에서 보았던 것이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류시인 "노천명"의 진면목이다.
우리는 살아 오면서, 온통 허상과 헛것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 않는가?
나의 빛나는 젊음 속에 한때 자리를 차고 앉았던 노천명과 그의 시 "사슴"을 이제 나는 놓아 주어야 한다.
노천명의 약력
1912년 황해도 장연 출생,1930년 진명 여고보 졸업,1934년 이화 여자 전문학교 영문과 졸업, 재학시 <밤의 찬미>를 {신동아}에 발표,1934년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1935년 {시원} 동인,1950년 조선 문학가 동맹에 관여한 혐의로 9·28 수복 후 투옥,1951년 출감,1955년 서라벌 예술 대학 출강. 이화 여자 대학교 출판부 근무1957년 사망
시집 : {산호림(珊瑚林)}(1938), {창변(窓邊)}(1945)
첫댓글 얄팍한 글이란 가면 뒤에 숨은 친일 반민족행위자들 철저히 가려내어 전국민의 교훈이 되게 합시다.